청중이 듣도록 돕는 설교형태: 귀납적 설교(3)1) 2015-12-17 09:57:40 read : 77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기독교의 설교는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와 그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까”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전자가 말씀의 화자(話者)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기록인 성경에 깊이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준비된 말씀에 대한 청자(靑者)들인 오늘 회중들에 깊은 관심을 둔다.
무엇에 우위를 두어야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까지는 주로 전자에만 설교학의 관심이 쏟아져 왔음이 사실이다. 사실 성경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와 말씀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설교는 열매 없는 쭉정이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만 아무리 잘 준비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전달되지 않은 메시지는 메시지 일 수 없음을 감안할 때 우리는 후자를 도외시하고서는 설교의 바른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 설교를 할 것인가를 깊이 고려하는 것은 설교 사역에 있어서 부수적인 작업이 아니라 본질적인 작업이다.
“누가” 듣는가와 그들이 “어떻게” 듣는가를 설교자가 정확하게 고려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의 선포라는 설교의 내용은 결코 바뀔 수 없으나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계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말씀이 전달되지 않은 곳에서는 어떤 복음의 역사와 응답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잘 전달되는 설교는 통일성(unity)과 조직(organization), 진리의 말씀의 적절한 입증(establishment), 창조성, 그리고 적절한 적용 등이 사려 깊게 고려된 형태이다. 귀납적인 설교는 이와 같이 오늘의 청중들의 관심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 방법이다.
여기에는 주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듣도록 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둔 방법이다. 그러나 귀납적 설교의 목표는 단순히 청중들의 관심을 붙잡아 놓기 위한 방법만은 아니다. 오히려 회중들로 하여금 설교가 전개되는 사고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이며, 설교자와 회중들이 설교의 결론에 함께 도달할 때가지 설교자와 함께 머물도록 하는 방법이다.
귀납적인 설교는 우리의 회중들을 관찰자와 수동적인 수취인(receiver)으로부터 참여자가 되게 하려는 시도이다.2) 지난 호에서 귀납적인 설교에 대한 개괄적인 개관을 하면서 그 필요성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귀납적인 설교의 형식을 따라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귀납적 설교의 기본골격
기본적인 골격을 놓고 볼 때 연역적 전개는 명제적 선언과 함께 출발하여 설교자가 말한 것을 진실 혹은 진리의 구조로 전제하고 그 타당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전개해 나가는 반면 귀납적 전개는 회중이 있는 곳에서 회중의 참여적 요소, 즉 이야기, 대화, 유추, 질문, 비유, 구체적 경험과 함께 시작되어 일반적 결론에 도달하는 형태를 취한다.
즉 증거, 본보기, 예증 등을 제시하며 청중들이 그것들을 스스로 평가하고, 연관된 내용들과 더불어 생각하며, 설교의 마지막에서 설교자와 함께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어떤 선언이나 주장을 연기시킨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보편적인 진리(principle) 특수 상황
특수 상황 보편적인 진리
연역적 모델 귀납적 모델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귀납적인 전개는 언제나 다양한 예와 경험들과 함께 시작하여 보편적인 진리를 지향하여 체계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진행된다. 회중들은 설교자와 함께 이 움직임을 따라 말씀의 여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귀납적인 전개는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체계화 할 것인가와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 어떻게 청중들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게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에 설교 구성에 대한 설교자의 관심이 집중된다.
귀납적 설교 구성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회중들의 “참여”(involvement)와 경험(experience)이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설교의 전 과정에 회중들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설교의 결론을 나 자신의 메시지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 점에서 설교자와 회중과의 관계는 건설적이며 창조적이다. 또한 회중들을 참여하도록 초청하며, 설명하고 인도해 감으로 해서 설교자 혹은 말씀의 권위를 얻게 된다. 연역적인 구조에서는 이미 권위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귀납적인 전개는 인도하고, 이끌어간다면, 연역적인 구조는 몰고 가며, 밀고 나가는 형태를 가진다. 또한 연역적인 전개는 설명하고 권하는 구조라면 귀납적인 전개는 추구하고 찾아가면서 노출시키고, 함께 발견해 가는 구조이다.
다른 설교 형태에서도 그렇지만 이러한 특성 때문에 특히 귀납적 설교에서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설교자는 회중들의 주의력과 동의를 끌어 낼 수 있는 설교의 섬세한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 그럼 어떤 디자인을 가져야 하는가?
귀납적 설교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중들의 주의력과 동의를 이끌어내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은 어떤 결론에 해당하는 교령(敎令, decree)에 의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치밀한 디자인에 의해 만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를 귀납적이게 만드는 구조인 디자인을 이해함이 없이는 귀납적인 설교를 전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귀납적인 설교의 목표는 회중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그들이 설교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말씀의 경험을 갖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 섬세한 디자인을 통해 회중들을 설교의 결론을 향하여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골격을 따라 전개되는 귀납적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물줄기의 흐름과 같으며, 지향하는 목표를 향하여 부단히 전개해 나가는 선적인 여정을 가진다. 이렇게 전개의 형태를 따라 진행되는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루이스는 “소용돌이”(whirlpool) 이미지와 “거미줄(web),”
그리고 “물줄기의 흐름”(flow)의 이미지를 사용한다.3) 즉 “특수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리로”(specifics-to-the-general), “다양하게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서 결론으로 나아가는”(evidence-leading-to-conclusion) 움직임을 갖는 것은 귀납적 설교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이룬다.
이러한 귀납적 설교의 움직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귀납적 설교는 언제나 회중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동기반(common ground)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삶과 관련된 경험들이 제시되고, 이어서 설교자가 경험한 자서전적인 사례들이 제시된 후, 네러티브 형태나 유비나 비유 등이 제시되고, 대표적인 사례 제시, 질문, 대화, 그리고 성경적인 예, 그리고 본문의 내용 등으로 엮어질 수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기본적인 연역적인 구조를 부분적으로 귀납적인 구조로 바꾸어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4):
서론
본론:
I.
A.
1.
2.
II.
....
결론
1.
2.
A
1.
2.
B.
I.
연역적 설교 구조 귀납적 설교 구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연역적 설교 구조는 설교의 명제가 제시되고 그에 대한 하부구조, 즉 대지(point)로 나누고,
또 필요할 경우에는 소대지(sub-point)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덩어리식 설교 구조이지만5) 귀납적인 설교는 먼저 하부 구조를 언급하면서 그 중심명제가 드러나도록 하는 구조를 가진다. 그러므로 설교는 마지막에 제시될 설교의 결론을 향하여 집약적인 움직임을 갖게 된다.
귀납적 설교 방법론
이러한 귀납적 설교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해하면서 여기에서는 귀납적 설교의 전개형태를 따라 활용할 수 있는 귀납적 설교 방법론에 대해서 알아보자. 귀납적 설교를 제창하면서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구체적인 방법론의 제시보다는 그 원리적인 측면에 더 강조를 두었다.
그래서 크래독에게서 우리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찾기가 쉽지 않고, 설교 작성을 위해서 “어떻게”(how)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선명한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의 관심은 어떤 기계적인 방법론의 제시보다는 원리적인 측면,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귀납적 설교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원리를 따라 그 다음의 주자들은 다양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크래독의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방법론적인 예들을 제시한 랄프 루이스는 이러한 점에서 크래독을 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루이스의 방법론 역시 바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설교 방법론의 틀을 제시하고 설교자의 독창성과 창조성에 맡긴 크래독에 비해 다소 기계적인 제시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성을 잡아가는데는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서 여기에서는 몇 가지 방법론적인 예를 찾아보고자 한다.6)
첫째로는 나열식 방법(Enumeration)이 있다. 이 방법은 가장 단순한 귀납적 방법으로 여러 종류의 실례, 일화, 사례, 성서적 사건, 그리고 경험 등을 나열해 가면서 제시하려는 설교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빠르게 휘감으면서 돌아가는 소용돌이를 따라 가듯, 설교는 움직임에 따라 여러 요소들이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형식이다.
제시되는 요소들 중간에 부분적이거나 임시적인 결론이 주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무작위로 배치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오늘의 회중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내용부터 언급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고, 여기에서 제시되는 내용들은 결론을 향한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발전해 가는 한 파트들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참고적으로 루이스는 마 6:13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예를 제시해 주는데, 설교의 전체적인 개요는 “우리를 구하소서?(Deliver us?)”이며, 설교문 가운데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함축된 핵심 질문은,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도 관련이 있는가?”로 잡았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누구든 구출은 필요한가?”를 다루는 어떤 사실들과 일화, 참된 삶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제시된다. 임시적 결론으로는 “그 필요는 누구나에게 해당한다”는 것이 제시된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오늘날 이러한 구출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현대적 경험에 대한 다양한 일화들이 제시된다. 여기에서 임시적인 결론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구출되고 있다”는 점이 제시된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과거에 사람들은 구출되었는가?”가 제시되는데, 여기에서 사용되는 자료들로는 역사와 성경으로부터 실례들이 언급된다. 임시적 결론으로는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로 설정한다.
네 번째 섹션에서는 “지금 구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내용이 제시되는데, 우리 모두는 “우리를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존중하실 것임이 다루어진다.
여기에서 오늘의 회중들은 이러한 간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오늘날, 개인적으로 필요하며, 성경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음이 언급된다. 설교의 결론으로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오늘의 삶 속에도 계속해서 드려져야 하며, 반드시 드려져야 할 필수적인 기도임이 제시된다.
두 번째는 탐색의 방법(Exploration)이다. 이것은 보다 복잡한 전개를 가지는데, 그 열거하는 내용들이 보다 광범위하고 정교한 나열을 요구하는 형식이다. 정해진 주제에 대해 다양한 부분에서 사례들이 폭넓게 받아들여지는데 마치 잘 손질된 그림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정렬된 것과 같은 형태를 가진다.
여기에서 설교자의 기본적인 자세는 신대륙을 탐험해 가는 사람이 그곳이 독립된 섬인지 아니면 육지와 연결된 반도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 정밀하게 탐사하는 탐험대가 가진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운 땅에 내린 탐험대는 그 땅을 이곳 저곳을 살펴보면서 그곳의 환경과 여건을 통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사례들(examples)은 주제가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이점이 될 수 있는데, 주제에 따라서 다양한 장르에서 택할 수 있겠다. 나열식에서와 같이 그러나 사례들이 제시된 다음에는 선택적인 임시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설교의 주제가 한꺼번에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러한 자료들에 의해서 탐구되고 새롭게 배우게 되면서 회중이 설교 끝 부분에서 얻게될 결론과 발견에 대해 더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료들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신문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할 때 기본적으로 묻는 원칙들--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언제? 왜? 어떻게?--에 의거하여 정해진 자료가 다루어질 수도 있다.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주제를 중심 하여 전개해 가는 설교는 이야기, 예화, 인용, 성경 등의 자료들과 함께 진행되면서 그러한 구도를 따라 가면서 설교의 행해갈 수 있다.
가령 사순절을 맞아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설교의 전체적인 주제와 관련한 착상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서 귀납적 설교가 가지는 기본적인 소용돌이 구조를 따라 설교문을 작성하려고 한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주제를 정했으며, 설교는 먼저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생생한 예가 제시된다. 개인적인 영역에서나 회중들의 영역, 혹은 우리의 가족이나 주변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가까운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 찾는 중에 일전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생각이 난다.
일본의 한 전철역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죽은 한 의로운 청년의 스토리와 구로 전철역 선로에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설교자는 주제와의 연결성 때문에 후자를 선택한다.
얼마 전 아침 출근시간 분주한 시간에 구로 전철역에서 한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밀려서 선로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때 마침 멀리에서 전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이 여인은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 그런 다급한 상황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용감한 청년이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전하게 플랫폼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 청년의 도움으로 그 아침 비극적인 사건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실례들이 주변의 삶 속에서, 혹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이나, 혹은 스포츠 게임에서 선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예를 제시함으로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교 자료들의 배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제 2의 생을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셨는지를 탐색해 가는 방법이다.
세 번째는 성경에 나오는 어느 특정 인물의 전기(Biography) 형태를 따라 전개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생애의 어느 특정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설교의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다.
이것은 반드시 성경의 인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례나 성경 밖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인물로 들어가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성경구절로부터 이 설교는 한 사람의 부르심과 신뢰, 하나님과 체결한 언약, 그리고 신앙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부각하고,
만족함과 신뢰, 더불어 살아감, 타협, 혼동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삭이, 그리고 속이고, 주어지지 않는 삶의 여건에 도전하고, 속여가며 움켜쥐고, 그 자신도 속임을 당하고, 그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았던 야곱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렇게 구성되는 설교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맞아들이셨다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든지 간에 용납하시는 분이심이 제시된다.
네 번째로는 이야기(Narrative)의 구조를 따른 방법이 있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장면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기본적으로 귀납적인 특성을 가진다.
또한 성경은 풍성한 이야기들의 보고(寶庫)임을 감안할 때 이야기의 특성을 따라 설교를 작성하는 것은 그 만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비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현대적인 스토리와 역사적인 스토리, 또한 성경의 스토리를 함께 엮어가면서 설교를 진행할 수도 있겠다.
다섯 번째로는 문제제시와 해결, 혹은 질문과 대답의 구조를 통해 전개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의 문제와 함께 시작하고 성경으로부터 어떤 해결책이 제시되기 전에 수사학적인 기교를 동원하여 임시방편이 되거나 잘못된 해결책을 하나씩 배제시켜 나가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는 부정이 제시되면서 그것을 일단 제외시키고, 또 다른 사항에 대하여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이 제시되고 역시 그것을 배제시키고, 그 다음에는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도록 전개해 나가는 형태이다.
여섯 번째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혼합한 방법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한 설교 안에서 이 두 가지 형태를 통합하여 사용하는 방법으로 설교자는 설교의 전반부를 귀납적으로 전개하였다가 설교의 후반부에서는 설교의 중심 개념을 연역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며,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형태로 설교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먼저 회중들을 말씀 속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귀납적인 구조로 전개한 후 보다 선명하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연역적으로 설교의 주제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것은 귀납적인 역삼각형과 귀납법의 정삼각형을 함께 결합하는 것과 같이 되는데 마치 모래시계의 모형과 같이 된다:
특수한 성경본문 청중들의
삶의 자리 오늘의 삶에
에서 시작 적용
공통된 결론
이때 설교는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시작하여 본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귀납적인 구조와 연역적인 구조는 50대 5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좋다.
이 두 부분이 만나는 지점에는 성경의 본문이 위치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통적인 결론이 자리잡기도 한다. 이것은 두 전개 형태의 이점을 함께 엮은 방법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구성될 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귀납적 설교 작성을 위한 실제
이상에서 제시된 방법은 귀납적 설교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론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것은 설교자가 얼마든지 응용하여 사용할 수 있겠다. 이것은 설교자가 설교를 전개해 가는데 활용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지침과 실제를 보려주려는 시도이다. 귀납적 설교문의 실제 작성을 위해 대략적인 구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그려볼 수 있다.7)
여기에서 귀납적 전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실례”(example)들로 표현한 것은 성경의 본문을 포함하여 그 요소들을 다양한 장르에서 취할 수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용어이다. 본문을 중심으로 엮어 가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면 본문의 전후 상황, 본문에로의 접근 혹은 본문 분석,
그리고 세 번째 실례에서는 설교자나 회중들이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의 스토리를 사용할 수 있겠다. 즉 B와 C에서는 성경의 스토리를 사용하였고, D에서는 공동체의 스토리를 함께 엮어 가면서 E에서는 그것들이 함께 엮어지고 만나면서 결론이 도출되고 그것을 오늘의 삶 속에 적용하는 형태로 취하게 된다.
물론 앞선 글에서 언급된 대로 기본적으로 귀납적 설교는 결론의 개방성(open-endedness)과 결론의 간접성(indirection)의 형태를 취함을 언급하였지만 이것은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응용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창 22:1-14의 본문을 가지고 이러한 구조를 따라 설교를 작성한다면 어떻게 설교의 요소들을 배치할 수 있을까?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면서 이번 설교에서 전체적으로 전하려는 주제를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 A섹션에서는 오늘의 삶 속에서 설교자가 경험했던 내용으로 배치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설교자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때 있었던 사건을 제시하였다.
몇 년 동안 머물렀던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그 동안 살았던 학교 아파트를 비어주고 나와야 했습니다. 한국으로 짐을 다 보내고 귀국하기 전 며칠의 시간이 나서 여행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쫓겨 나오듯 집에서 나와 여행하는 동안 해만 떨어지면 아이들이 걱정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빠, 오늘은 어디서 잘 거예요?”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어디에서 잘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거할 집이 없어졌으니 걱정이 많이 되었나 봅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것은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해결해줄 거니까.” 그렇게 말해 주어도 저녁때가 되면 아이들은 여지없이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아빠, 오늘 저녁은 어디에서 잘 꺼야?”
여기에서 임시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였다:
아무리 힘이 없다할지라도, 먹는 것, 입는 것, 살아갈 모든 것을 준비해주는 부모가 있는 아이는 행복합니다. 그런 아이를 우리는 고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가 이렇게 책임져 주실 분이 계시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든든하겠습니까? 특별히 어려움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와 같이 책임져주고 준비해줄 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B섹션에서는 본문으로 나가기 위한 교두보와 같은 예비적인 단계로서 본문의 배경을 상상력을 통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에로 나아가는 단계로서 뿐만 아니라 한 신앙인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부분에 대한 전개도 연역적인 구조로 보다는 귀납적인 전개를 위해서 상상력을 통해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을 통해 한 미지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하여 아브라함에게로 나아가는 형태를 따랐다. 고딕부분은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임시 결론 부분이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정처 없는 이민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꽤나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평온하고 윤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그 사람은 어느 날, 모든 것을 정리하여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던 그 사람은 자신이 이룩한 평온하고 윤택한 삶 속에 안주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삶을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정처 없는 이민길에 오릅니다. 부족국가 시대였던 당시에는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다른 부족에 대한 침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전쟁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러한 삶을 명령하고 계셨습니다. 집도 없고, 땅도 없고, 안전도 전혀 보장되지 않는 위험가운데서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방으로 열려있는 삶, 언제 공격당할지 모르는 위험 많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문제도 있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하고, 가족들과 가속(家屬)들이 붙잡혀 가지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고 많은 은혜들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위험 많은 세상에서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얼마나 희열이 넘치는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C섹션에서는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아브라함이 경험하는 고민과 어려움을 서술하려고 했다. 20년이 넘게 기도하여 얻어서 감사함으로 20년 가까이 키운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다루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과도 위배되는 명령이었음이 부각되고, 인간적인 고민을 통해 도무지 불가능한 명령이었음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음이 해석되고 설명된다. 물론 이것은 이 섹션에서 얻게 되는 임시적인 결론으로 그는 거룩한 동네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였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의 성숙한 신앙이 구체적으로 조명된다. 즉 성실한 신앙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 대해 신뢰의 주변으로 끌어 모으는 특성을 가진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다.
반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나쁜 일들까지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 신앙인데,8)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신앙의 특성을 가졌음이 조명된다.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에 올랐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삶의 순간에도 그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아간다.
그리고 축복의 자리, 모리아 산정(山頂)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이 묘사된다. 여기에서 임시적인 결론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섹션 D에서는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고 갔던 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그 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서 갖게 된 개인적인 스토리와 함께 진행해 나간다. 이 부분은 개인적인 삶으로서 적용과 함께 임시적인 결론이 내려진다.
...하루하루 생활하는 것이 암담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손길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한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도와주셨던 도우심과 예비하신 은혜들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믿음을 가지고 걸어갔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부모가 있어도 고아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도 영적 고아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험한 세상, 수많은 문제 속에서 살아가면서 “나의 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귀하신 분입니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삶의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예비하시는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섹션 D에서는 설교의 결론이 제시되는 지점이요, 전략적으로 연기되었던 “아하 포인트”(Ah-point)가 제시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어떻게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었는가, 어떻게 어렵고 답답한 삶의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는가를 제시하려고 했다.
전에 살던 집 주변에 있던 공원에는 참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습니다. 푸른 호숫가를 가족들과 종종 산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착륙하려는 비행기에서 그 호수를 보니 푸른색이 아니라 흙빛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똑같이 푸른 호수인데, 왜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렇게 색깔이 달라지는가?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나중에야 깨달은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깊은 호수는 그 색깔이 푸르게 보이지만 그러나 얕은 호수는 바닥 색깔이 다 드러나서 위에서 보면 흙빛 색깔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의 삶을 내려다보실 때, 눈이 부시도록 파란 색깔이었을 것입니다. 아들까지라도 내놓을 만큼 철저하게 순종했던 사람, 그 아프고 고통스럽던 순간에도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했던 사람, 그는 푸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파란” 믿음으로 삽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요? 고통이 밀려오고 답답한 일들이 덮쳐올 때면 믿음을 따라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던가요?
엔드류 머레이는 “믿음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믿음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심령 속에서 솟구쳐 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문제를 바라보고, 아들 이삭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 상황을 바라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울 때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어려움이 있습니까? 무엇이 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한숨을 쉬게 만들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까?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이 어렵고 답답한 때를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나가는 말
귀납적 설교는 회중들로 하여금 듣도록 돕는 설교의 형태이다. 설교자가 귀납적인 방법론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 회중들을 귀납적인 탐구의 과정으로 초대하는 것이며, 설교에서 전하려는 메시지를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검증하는 단계로 나아가도록 돕게 된다.
귀납적인 움직임은 설교의 청취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피동적인 존재로 서있게 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주고, 그들 자신의 느낌을 갖게 하며, 그들 자신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들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스스로 탐구하고 확인하게 함으로서의 설교가 그들 자신들의 말씀이 되게 해준다.9)
오늘날 문화 사회적 변화는 회중들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의 구렁텅이에 빠진 마음”(endangered mind) 밭이 되게 한다. 설교가 붕괴될 때마다 설교의 재건을 위해서 노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행렬은 계속되어 왔다. 또한 앞으로도 그 행렬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귀납적 설교도 변화하는 시대에 설교의 재건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청중들로 듣도록 돕기 위해 설교자들이 정교한 노력을 경주하도록 재촉한다. 예화 몇 편으로 채우는 설교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의 기교와 과학을 요구한다.
설교의 과학은 우리 시대에 외면하고 무시할 인간적인 기교가 아니라 영감 있는 설교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설교자는 단순히 기교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열정에 가슴이 불타고 있는 사람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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