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설교를 위한 방법론(8) 2015-12-17 09:27:07 read : 67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1)1)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설교자가 다양한 설교 형태를 활용하여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가 그날의 메뉴와 식사할 사람을 고려하여 다양한 형태의 용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다.
10년이건 20년이건 어떤 음식이든 동일한 그릇에 담아 식사를 내놓지 않듯이 설교자는 다양한 설교의 형태를 연구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가 주장한 것처럼, 복음이 다양하게 선포되었듯이 설교도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설교의 형태에 대한 깊은 관심을 요구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설교의 형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명확한 전달과 효과에 있어서 설교의 형태는 실질적이며 절대적인 요소이다.2) 이것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어떤 구조를 통해 작성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게 하고,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설교 형태는 설교 작성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며, 말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내용이다.
이러한 점에서 “창조적인 설교의 방법론”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본 연재에서는 1970년대 이후 태동되어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되고 있는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에 의해 제시된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 따라 제시된 설교 형태들을 먼저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그 세 번째 형태로서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방법론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해를 위한 고찰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는 밴더빌드 대학교 신학부의 설교학 교수로 수년동안 봉직하다가 최근에 은퇴한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 주창한 설교 방법론이다.
그의 설교 이론이 국내에는 널리 소개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아직 생소한 방법이고, 그의 설교학은 상당히 광범위하고 난해한 이론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그의 기본적인 주장을 이해하고,
그 구조와 형식을 이해한다면 한국 교회 강단에서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교 방법론들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방법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 고찰을 필요로 한다.
버트릭의 관심은 설교의 능력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설교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청중들에게 듣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청중들로 하여금 듣도록 돕는다는 것이 그의 설교 방법론이 추구하는 중심 내용이다. 그의 설교 이론은 전통적인 설교 이론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너무 논리적인 틀에 의해서 지배받기 때문에 설교는 너무 정적이라고 비판한다. 계몽주의 이후 논리적인 덫에 걸려 벗어날 줄 모르는 전통적인 설교 형태는 그 구조에 있어서 생명력 있고 생동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어버린 화석이나 고목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버트릭의 주장은 단순한 설교 방법론의 갱신일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의 본래적인 힘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하면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설교(transformative power of preaching)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심하는데, 그는 설교학의 목적을 다름과 같이 정리한다.
이 세상 속에 천지창조 때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선포하며(naming), 믿음의 차원을 형성하며(forming), 인간의 삶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강력한 종말론적인 비전을 수립하며,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 호칭하셨던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기 위해서이다.3)
버트릭에게 있어서 설교는 사람들의 의식(consciousness) 속에 하나님의 세계를 다시 형성케 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주어 그들의 의식 속에 믿음의 세계를 세워줄 수 있는,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transforming power)이다.4) 이것은 설교가 구속하시고 해방하시려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함을 의미한다.
설교의 변화시키는 힘은 이 세상에 새롭게 이름을 부여하고 해방시킴으로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언제나 구속하시고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며,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5)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는 복음의 복된 소식의 선포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통해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얽매임으로부터 해방하는 말씀이 된다. 또한 설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설교는 우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의 거대한 이야기 안에 그것을 세움으로서 사람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아침으로 되돌아가도록 돕는 작업이다.6) 그러므로 세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재창조의 작업이며, 오늘의 청중들에게 믿음의 세계를 새롭게 세우는 작업이다.
설교에 있어서 현상학적 특성
현상학은 “현상들에 대해 묘사하고 분류하는 것을 다루는 과학의 한 분야”인데, 삶 속에서 현상으로 나타난 것과 지각이 가능한 것을 분석하고 지각하는 주체의 내적인 경험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러한 경험을 고찰하고 그 고찰들을 통해 결론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서 의미를 끌어내는 방법”이며, 그 과정은 마치 “우물 속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메리 E. 멀리노 무어는 현상학은 “연구되어야 할 이론이라기 보다는 실천되어야 할 예술에 더 가깝다”고 했다. 설교의 현상학적인 특성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7) 설교에 있어서 삶의 자리를 보게 하며, 그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을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도록 방법으로 자리잡는다.
근본적으로 설교는 현상학적인 특징을 가진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 이 세상 속에 임재 하신다. 성육신 하심과 임마누엘 하심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데, 그로 인해서 인간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계시하심 앞에 서있는 인간들에게 하늘의 사건이 이입되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이렇게 설교는 본래적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로 인한 임재 하심을 확인시켜 주며,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설교는 성육신적이며 현상학적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설교는 ‘개방성’과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8)이라는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개방성’이라 함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세계가 드러나며, 하나님의 자기 노출이 구체화되는 것을 말한다.
‘상호 주관성’은 서로 다른 곳에,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설교를 통해 서로, 혹은 자기 자신과의 교류가 일어나게 된다. 설교를 통해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과의 교류가 일어나며, 설교자와, 그리고 청중들 상호간에 교류가 일어나게 된다.
설교의 이 두 가지 요소는 함께 상호 연관성을 가지는데, 서로 개방되어 있을 때 교류가 일어나게 되며 진정한 교류 자체는 개방성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설교의 현상학적 특징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사람들 한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9)
많은 학자들은 현대 설교학에 있어서 설교의 현상학적인 특성을 잘 정리한 사람으로 버트릭을 꼽는다. 사실 버트릭은 설교의 현상(phenomenon of preaching)에 대해 그의 온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별히 그는 설교가 어떻게 들려지며, 설교의 사건(event)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현상학적인 고찰을 계속했으며,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설교의 방법론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교의 현상에 대해 깊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버트릭의 설교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특색으로 평가받고 있다.
10) 그래서 70년대 이후 형성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을 통해 제시된 대표적인 설교 이론들과 방법론을 정리해준 리차드 에슬링거(Richard Eslinger)는 버트릭의 설교 방법론을 소개하며 “현상학적 방법론”(a phenomenological method)라고 명명한다.11) 비록 그의 방법론이 “현상학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서 버트릭은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현상학자도 아니고 현상학에 근거해서 그의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도 말한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 설교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설교를 통해 청중들의 마음의 건반을 누를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되기 때문에 어쩌면 에슬링거의 평가는 적절한 것이다.
설교가 선포되고 들려지는 과정과 결과는 현상학적인 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현상학의 방법론을 추구하거나 그것이 그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설교학 이론에는 이러한 주장들이 강하게 배어있고, 어렵지 않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버트릭은 설교 형태와 청취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학적인 관계성을 염두에 두고 설교 과정 속에서 청중들의 의식 속에 무엇이 일어나는가와 관련하여 설교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설교의 구성과 언어가 인간의 의식 속에 말씀을 형성하는 방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방법이다.
“설교자의 의식 속에,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의식 속에 설교는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은 “의식”과 “언어”이다. 버트릭의 설교방법론을 진수(進水)시키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 속에 있는 어떤 실체를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도적인 행동(intentional act)을 통해서 우리들이 갖게 되는 인식은 단일의 경험, 살아있는 경험, 형성된 의식으로 이끌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버트릭에게 있어서 의식이라 함은 생생한 경험(lived experience)과 관계된 말인데, 단순한 생각이나 아이디어의 착상이 아니라 다양한 세상으로부터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몇 가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제시하시는 분에 의해서 형성되는 종합적인 통일성(synthetic unity)”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단순하게 지나가는 마음의 생각이나 일시적인 기분(fanc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 경험하는 세계를 세우는 “계획된 행동”(the act of intentionality)이다.13)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설교의 언어이다. 설교자는 본질적으로 언어를 활용한다. 그 언어를 통해 설교자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변형시킨다. 언어는 설교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움직임”(moves)의 모듈을 형성하며, 설교의 가장 기본 요소가 된다.
설교의 언어는 궁극적으로 존재의 언어이며,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노출의 언어이다. 이처럼 설교의 언어는 상징과 메타포를 통해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의식의 장(場)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적절한 언어를 통해 말씀이 전달될 때 기억을 환기시키는 언어(evocation)이며,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언어(invocation)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언어는 교묘한 특성을 지닌다.
때로는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메타포, 이미지, 유비 그리고 역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의 언어는 수사학적인 전략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서 행해진다. 이런 점에서 버트릭은 설교의 언어를 신학적인 명확성과 함께 사용되는 “함축적인 언어”(connotative language)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언어는 하나의 “예술”(art)이라기 보다는 “기교”(craft)이며, “깊은 숙고를 통해 이룩되는 기교”(considered craft)라고 할 수 있다.14)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방법론
이러한 전이해를 가지고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고찰해 보자. 먼저 “현상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앞서 설명한대로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것을 고려하려 작성하는 설교 방법이라는 의미이며, “전개식”이라는 함은 움직임을 통해 발전되어가면서 아하 포인트에 이르게 하는 특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버트릭은 지난 300여 년 가까이 서구의 설교학계를 지배해왔던 논리중심의 설교학(rational homiletics)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의 설교학의 논의를 출발한다. 오늘의 시대를 사는 설교자들의 임무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태동되고 있는 새로운 인간 의식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는 오늘의 시대적인 특징들과 신학적인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설교는 정적인 장으로서가 아니라 가상과 사건의 움직임이 있는 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설교는 정물 사진으로가 아니라 활동사진(motion-picture)과 같이 되어야 한다.
전하려고 하는 진리에 대한 서술들이 에피소드들로 연결되어 이야기와 같이 움직임이 있고,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움직여 가면서 생생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따라 메시지를 전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도 그러한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도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대화하고, 정보를 나누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설교는 성경본문을 대할 때, 정적인 장으로 보았으며, 설교자가 정한 명제를 보증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어지는 방식을 사용한다. 전통적인 설교 형태가 갖는 이러한 해석학적 특성을 버트릭은 추출식 해석학(hermeneutics of distillation)15)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방식은 진리를 정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광활하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단순한 명제를 위한 진술이나 어떤 명제를 설명해주는 보조 자료 정도로 전락시킨다.
또한 본문을 유기체로 보다는 정지된 정물화(still-life picture) 정도로 전락시키는 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물화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있는 역동적인 말씀이기에 설교자는 성경을 설교 자료나 어떤 주제를 설명하고 유추하는 보조자료 정도로 여기는 잘못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는 움직임 속에서 전달된다. 그러므로 설교가 어떤 말씀이나 이미지, 사건들을 동적인 방식으로 전개해 간다면 우리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진리 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해 가는 언어의 움직임이다. 계몽주의이래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틀에 사로잡혀 온 전통적인 설교 방법론(captive voice)은 이제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야만 오늘의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버트릭의 설교학은 “설교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전개된다.
버트릭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카메라와 같이 작동하는데, 좋은 설교의 형태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한다. 어떤 장면이 전개될 때마다 그것을 카메라가 필름에 그것을 형상으로 담듯이 청중들은 장면으로 전개되는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의식 속에 말씀의 상을 담는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사진 작가와 같이 되어야 한다. 흔히 사진 작가는 어떤 물체를 필름에 담으려고 할 때, 배경을 고려하고, 보다 넓은 정경을 담을 것인지, 근거리에서 찍을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즉 구조를 결정하고, 보는 각도를 선택하여, 셔터를 눌러 그 정경을 필름에 담게된다.
그리고 그것이 담아졌다면 또 다른 정경을 담기 위해 비슷한 작업을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자들도 일련의 장면을 만들어 청중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해하게 함으로서 그것을 청중들의 의식(consciousness)속에 인식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설교가 이루어야 할 목표는 청중들이 그들의 마음의 필름(의식) 속에 말씀의 이미지가 심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는 필연적으로 언어의 모듈을 고려하게 된다. 마치 피아노의 D코드 건반을 누르면 D화음이 나오듯이 청중의 “생생한 경험”을 위해 각 장면 혹은 움직임에서 어떤 언어의 코드(모듈)를 사용할 것인가가 깊이 숙고되어야 하는 기교이다.
첫 움직임에서 D코드를, 두 번째에서 A코드를, 그 다음에서는 G코드를 생성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한 곡의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가듯이, 설교도 각 움직임을 통해서 말씀의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이 설교 방법론에 있어서 움직임은 ‘관광 가이드’의 메타포를 통해서 보다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600년 역사가 깃든 신비의 동산으로 알려진 비원(秘苑)을 관광한다고 하자. 비원 관광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팀을 이루어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관광에 나선다.
청양문을 지나 비원에 들어서면서 그 입구에 서서 가이드는 설명해 가기 시작한다. “비원(秘苑)은 1405년 창덕궁 창건 당시에 조성된 곳으로 600년 동안의 긴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입니다.
변화무쌍한 지형을 그대로 살려둔 채 최소한의 인공미만을 가미한 자연주의 정원이지요. 아늑한 골짜기마다 조영된 수많은 연못과 한가롭게 흩어져 있는 정자는 이름 그대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동산임을 말해줍니다. 역대 임금들이 번거로운 정치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여가를 즐겼고 때로는 사냥을 하거나 심신을 단련하기도 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축하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입니다....”
이제 관광객들은 가이드가 설명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신비한 정원을 보고, 만지고, 느낀다. 그리고 그들은 두 번째 장소로 나아간다. “이곳은 비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은 부용정과 주합루 지역입니다.” 담장길을 올라와 다시 나지막한 언덕길을 내려가니 그곳에 펼쳐진 장면은 방형의 연못, 부용지(芙蓉池)와 연못가에 있는 부용정(芙蓉亭)과 영화당이 서있다.
서편 언덕에서 주합루가 우람한 모습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된다. “부용정은 아(亞)자형에다 정(丁)자형을 합친 독특한 모습에 기하학적 문양의 난간을 두르고 있어 건축이라기보다 하나의 공예작품과 같습니다. 북쪽 돌기둥은 아예 부용지 물 속에 드리우고 있어 이 정자에 오르면 마치 물위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부용지에는 원형의 작은 섬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신선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또 네모난 연못 속의 둥근 섬이니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사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주합루는 정조 때 세운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규장각의 서고로 사용했고 위층은 연회장이었습니다.
주합이란 뜻은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 것이니 동서고금의 장서를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향기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조선후기 정조 때 개혁정치의 산실이 되었던 곳으로 박제가, 정약용 등이 정조의 총애를 받고 실사구시의 학문을 일으켜 18세기 문예부흥기를 열었던 뜻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이드를 따라 관광을 계속해 가는 관광객들의 의식 속에는 보고 듣고 느끼는 오감을 통해 분명한 영상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되는 옥류천 지역, 애련정과 연경당 지역을 돌아본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려줄 때, 관광객들의 의식 속에는 그에 대한 영상이 맺히게 된다.
그렇게 관광을 마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지나온 장면들이 분명한 영상으로 맺히게 되고, 비원 관광을 마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비원이라는 중심 메시지가 선명한 영상으로 남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는 여타 설교 형태와 마찬가지로 청중들의 참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물론 이것은 ‘움직임’(move)이 구성되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같이 인간의 의식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관광 가이드 메타포를 통해 설명해 본 것이다.
이것을 설교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으며, 설교의 구성(plot)의 관점에서는 여러 장면을 되는대로 펼쳐 놓는 것이 아니라 아하 포인트를 향해 여러 에피소드가 결합되면서 집약적으로 발전되고 전개되어 나간다.
이렇게 설교의 전개를 지배하는 것을 버트릭은 “움직임”(move)이라고 명명한다. 설교는 개별적인 개념이나 요소들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요소들을 순서에 따라 설명해 가기 위해서 배열된 언어의 모듈을 ‘움직임’이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설교가 대지를 만들어서 어떤 명제에 대한 논증의 형태로 설교가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전개식 설교는 언어의 움직임 속에서 만들어지는 장면의 “전개”(moves)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청중들이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련의 언어의 모듈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메시지의 결론을 향하여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진행해 간다.
그러므로 청중들 앞에 장면들이 펼쳐지고 그것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구조를 따라서 전개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버트릭의 설교 방법론을 “전개식”이라고 부른다.
전개식 설교 방법은 청중들이 어떻게 듣느냐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4-6개 정도의 “움직임”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움직임은 청중들이 무엇에 집중하는 시간을 고려하여 각 움직임들을 4-5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할 것을 요청한다. 버트릭에 의하면 각 “움직임”은 “여는 말”(opening statement), “전개”(development), “닫는 말”(closure) 등으로 구성된다.
“여는 말”은 지금 무엇에 관한 것인지 움직임의 중심개념을 언급해 주는 섹션이며 여기에서는 그 움직임이 가지는 관점(point-of-concern)이 선명히 제시되어야 한다. “전개” 부분은 그 움직임의 중심 개념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으로 가장 중심 부분이다. 명료화나 예증, 혹은 반대 개념을 제시하면서 진행될 수도 있다.
“닫는 말”은 마지막 문장에서 중심 개념에 대한 움직임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면서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이때 청중들의 의식의 카메라는 셔터가 닫혀지고, 필름은 다음의 움직임을 위해서 준비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버트릭이 움직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소개하기 위해 다소 기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설교의 실제에서는 융통성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 좋겠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움직임(Move)'을 어떻게 구상하고 설계할 것인가는 설교자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모든 움직임들은 정교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교의 언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와 어떻게 적절한 움직임을 만들며, 어떻게 설교를 구성하느냐(structure)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16)
이와 같이 버트릭의 방법은 우리가 설교할 때, 청중들의 의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 또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해주는 특성을 가진다. 설교자로 하여금 언어가 가지는 힘과 무엇인가가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설교의 형태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갖도록 해준다.
다소 기계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다만 그 원리를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융통성을 찾아 설교를 구성해 간다면 한국교회 강단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설교자가 설교를 구성함에 있어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은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호에서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의 실제에 대해서 알아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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