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의 설교자들 /박윤선의 설교 2015-12-16 13:56:53 read : 70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주도홍 교수(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수많은 설교자를 보여 주는 교회사 2천년 교회사는 수많은 설교자를 보여 주는 현장이다.
2천년 동안 교회는 설교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 설교를 통해 오늘의 교회는 살아 있다.
2천년의 설교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오늘 저 오지의 무명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양에 있어 엄청나고 질에 있어 다양하다.
그 설교가 어떠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해 설교자의 다양성만큼 그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설교자와 회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회중의 현장이 상당 부분 설교를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쨌든 역사는 가능한 한 사실 그대로를 보여 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사에서 수많은 설교자들을 오늘의 현장에서 만나게 된다.
신적 권위의 높은 강단에 서서 매 주일 혼자(?)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절대 침묵의 다수의 청중들 앞에 선 자신을 유일한 최고의 설교자로 착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그 무엇도 해 아래 새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게 이미 다 지나갔고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강단과 유사한 아니 동일한 경우가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어떠한 설교가 선포되었으며, 그 설교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준비했는지, 설교를 통해 무엇을 기대했는지, 설교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그들에게 주어진 회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시대마다 교회는 어떤 종류의 설교를 하였고, 어떤 헌신된 설교자들이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총명하고 헌신적인 위대한 설교자 바울, 열정적인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오순절 설교, 자신을 내어놓은 참회를 피해가지 않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그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밀라노의 목회자 암부로스, 예수님의 사랑을 뜨거운 가슴으로 체험적으로 외친 중세의 수도사 버나드(Bernard Gui),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외친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성령의 역사를 통한 강해설교를 내세운 츠빙글리(Ulrich Zwingli),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설교만이 진정한 설교라 인정하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 칼빈의 신학적 멘토로서 전 세계의 기독교화를 꿈꾸었던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부처(Martin Bucer), 영적 부흥을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설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영국 청교도 설교자 오웬(John Owen),
카트라이트(Thomas Catwright), 스코틀랜드의 낙스(John Knox), 종교개혁 교리에 입각하여 복음적 실천으로 새로워지기를 추구했던 독일 경건주의 설교자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와 운데어아익(Theodor Undereyck), 새로운 각성을 통한 심령의 부흥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러일으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웨슬리(John Wesley), 휫필드(George Whitefield),
20세기 영국 강해설교의 대가 스토트(John R. W. Stott), 로이드 존스(Martin Lloyd Jones),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그리고 한국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일사각오의 설교자였던 주기철 목사, 최초로 한국교회 강단에 강해설교를 소개한 박윤선 목사를 교회사는 생생한 사료(史料)를 통해 소개한다.
교회사는 이렇게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지난 세월 수많은 설교자들을 만나 인격적으로 대화하도록 장을 열어 주고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후 오늘의 설교자가 영적으로 준비된 설교자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설교가 무엇이며, 설교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루터(1483~1546)의 설교
종교개혁자 루터의 설교를 로마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는 설교자의 의무에 대해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죄의 본질을 기술하는 것이다. 영으로부터 나오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경험되지 않은 모든 것은 죄악된 것이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모습과 통탄스러운 상태를 보여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겸손히 도움을 간청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확실히 말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채택한 본문은 대충 25개이다.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도서 16장에서 유독 제4장에 대한 설교는 보이지 않고 있다.
전장을 다룬 본문은 4곳으로, 제5장은 2회로, 제8장은 5회로, 제12장은 2회로, 제13장은 3회로 나누어 설교하였다.
제1장은 종교개혁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 1장 16~17절을 내포한 1장 14~17절까지의 적은 양만을 설교 본문으로 채택했을 뿐, 그 외의 부분은 채택되지 않았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일명 ‘구원받은 자의 환희의 송가’라고 불리는 제8장인데, 전장을 5회로 나누어 그 어떤 로마서의 본문보다도 꼼꼼하게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교를 했다.
그 이유를 조금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현재의 고난과 나타날 영광을 대조시키면서 영광의 자유를 갈망하는 8장 18~23절의 본문에 보다 많은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종교개혁자의 인간적 고뇌와 간절한 기도를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여기서 거룩한 바울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그리고 그의 다른 말씀보다 하나의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참으로 놀랍고 희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더더욱 열심을 품고 연구하여 깨닫고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제6장에서 총 7회의 설교, 제12장에서 총 10회의 설교가 다른 장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홍수를 이룬다.
제6장에서 4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채택한 본문은 6장 1~11절인데, 특히 6장 3절이 요절로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가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더불어 다시 산다는 중심 교리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설교가 뒤따르는데,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세례의 능력과 의미를 알지 못한다.”
로마서 가운데서 가장 많은 설교를 제시하고 있는 제12장에서는 만인제사장설에 대하여 루터가 많은 애착을 갖고 강조하고 설교한다: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모든 세상을 제사장으로 축복하셨다.
이 은혜를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자이며, 제사장의 신분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루터의 설교는 특히 로마서 12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5쪽 분량을 전후로 하는데, 시간적으로 볼 때 대충 30분 안팎의 설교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보다 길거나 짧은 설교도 보인다.
설교의 구성을 보면, 먼저 자신이 설교하려는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10줄 안팎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대충 2~3분 정도를 할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후 첫째, 둘째, 셋째 등의 형식으로 전개해 나간다.
루터는 결론을 간결하게 내린다.
루터의 설교 문장은 대부분 구어체로 쉬운 단어를 가져 오고 있으며, 길지 않은 단문을 선호하고 있다. 본문 자체의 이해에 치중하나, 단어 단어의 원어 이해에는 얽매이지 않은 것 같다. 이와 함께 많은 신구약 성경을 인용한다.
그는 매우 실질적인 설교, 평신도들을 염두에 둔 개혁자의 어렵지 않은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역사적 현장이었던 중세교회의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목전에 두며 무엇이 잘못인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늘 잊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루터의 설교는 종교개혁에 대한 확신으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동참하고 새로워질 것을 강권한다.
루터는 변증(Apology)과 확신(Confidence)이라는 양면을 기억하면서, ‘이중 음성(duplex vox)’, 곧 스테레오 방식의 설교를 잊지 않았다 평가할 수 있겠다.
츠빙글리(1484~1531)의 설교
츠빙글리는 복음을 그리스도의 선포로 이해하였으며,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 역시 동일선상에서 이해했다.
1522년의 글들을 보면 츠빙글리는 한결같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강해설교를 추구했던 츠빙글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보편적으로 건전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데, 외적 말씀(verbum externum)과 내적 말씀(verbum internum)의 구별은 그 나름대로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복음은 복된 그리스도의 소식으로서 교회적 선포를 통해서 현존한다.
성경보다는 그 성경 안에 증거되는 그리스도가 우선적이다.
선포의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의 명료성은 그리스도 자신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는 내적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츠빙글리의 내적 말씀에 대한 이해는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해석을 통해 1524년 8월부터 나타나고 있다.
외적 말씀과 내적 말씀은 요한복음 6장 44절 그리고 로마서 10장 17절을 근거로 서로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예를 들어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표식으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는 일단 구별된다. 믿음에 의해 입으로 먹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인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praesentia corporalis Christi)과는 구별이 된다. 육과 영, 입으로 먹는 것과 신앙으로 먹는 것은 서로 대적하는 관계가 아니며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물론 엄격하게 볼 때 외적 말씀은 내적 말씀에 시간적으로 앞선다. 신앙에 앞서, 듣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말씀과 성령은 동시적이 아니며 성령이 우선권을 갖는다.
이 점에 있어서 츠빙글리는 말씀에 앞선 성령의 제약 없는 우선권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에게 있어 외적 말씀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구원의 수단이었다: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우리의 마음에 동일한 신앙을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을 들을 때이다”,
“분명하게 말해, 성령은 먼저 설교, 입으로 전파되는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함께하지 아니할 때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과 은사를 주지 않고, 입으로 선포되는 말씀과 함께 뜻대로 역사하시고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신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 행해지는 그 어떠한 외적인 구원의 수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례와 설교 행위도 예외가 아니다“
“믿음은 사람에게 역사하는 성령을 통해서이지, 설교자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성례 그 자체를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가톨릭교회와 츠빙글리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외적 말씀은 말씀과 사건의 복사(imago verbi et rei)이고, 내적 말씀은 그 사건의 원형이다(idea rei). 분명한 것은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경과 설교는 ‘인식의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가 결정적이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선포되는 말씀은 언제나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설교는 구원을 선포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실존적으로 역사하게 하는 일은 성령 자신의 사역이다.
츠빙글리가 말하는 내적 말씀은 결코 주관적인 인간의 말이 아니며, 성경 스스로가 성령의 역사로 자신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타락 전부터 인간은 성령에 의존하여 살도록 되어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일, 진리를 깨닫는 일, 인간이 자신을 아는 일, 죄로부터의 회개도 모두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죄 용서, 믿음, 위로, 확신,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살도록 하신다.
성령의 특성은 성령에 의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갖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고, 죄로부터 회개하게 하고 인간을 겸손하게 한다. 츠빙글리의 성령 이해는 그가 늘 가까이 했던 요한복음 6장 44절의 말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의 해석에서 두드러진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현존(die gnaedige praesentia Dei)이 믿음의 전제이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현존의 전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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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1905~1988)의 설교
설교자 박윤선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교회 강단에 최초로 강해설교를 소개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제목 설교에 익숙해 있었다. 또한 그를 기억함에 있어 교수로서의 설교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가 설교에 보다 큰 무게를 두는 목회자보다는 평생을 교수로서 일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설교자 박윤선만 강조하다 보면 균형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박윤선은 훌륭한 설교자였다.
22세 때부터 약 60년간 설교하기를 기뻐했던 박윤선은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는지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는 설교 부탁을 받았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박 목사의 설교가 늘 은혜로운 설교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박윤선은 “나의 강단 생활에 있어서 승리의 설교는 간간이 있었을 뿐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나의 탄식거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를 위한 준비 기도를 더 많이 하려고 애쓴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인 설교를 기뻐하던 강해설교자 박윤선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설교자였다.
그의 불과 같았던 뜨거운 설교가 기도와 어떤 긴밀한 상관이 있었는지는 그의 설교론을 들으면 절실히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도 설교의 지적 준비에 철저함을 기했던 박윤선 목사였지만, 그는 설교자의 힘든 기도 또한 잊지 않았다: “설교를 지적(知的)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기도로 불붙이는 일을 해 온다.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설교는 감화력이 없다.
이 기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노력이 요구되며, 때로는 나의 심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나 자신이 제물이 될 정도로 심각해지기도 한다.
이 같은 헌신의 노력이 아니고는 기도의 진상(眞相)에 이르기 어렵다.”
그렇다고 설교자 박윤선에게 기도가 한낱 노동으로 이해되는 짐스럽거나 고통스런 일은 결코 아니었다. 기쁜 기도였는데, 그 기도는 박윤선에게 말씀에로의 깨달음, 간증과 신앙의 체험이 늘 새롭게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생명 넘치는 현장이었다.
박윤선의 성경 이해와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체험하는 바와 같이 나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하는 때에 성경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같은 체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더욱 분명히 믿게 되었다.
생명 있는 믿음은 그 근거를 말씀 체험에 둔다.” 그는 설교를 위한 기도와 지적 준비 중에서 무엇이 먼저인지를 나누지 않는다.
두 가지가 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박윤선은 어느 때는 기도를 먼저 하고, 어느 때는 말씀 준비를 먼저 하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작업이 설교를 위해 언제나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깊이 있는 성경 연구와 뜨거운 기도가 늘 함께한 설교자 박윤선에게 더욱 절실히 기도가 요구되는 또 다른 이유는, 설교자 ‘자아(自我)에 대한 관심과 청중에 대한 위축감’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의 육적 자아에 대적하는 ‘진정한 투쟁적 기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설교자 박윤선에게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청교도들과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에게서 강조되었던 계시 의존 사색이었다: “나는 늘 성경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계시 의존 사색을 기도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구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점에서 그가 말한 계시 의존 사색이란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었다.
설교가 이루어지기 전에,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기도하면서 이 묵상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한 설교자의 깊이 있는 묵상은 중세교회의 버나드(1090~1153)와 청교도들 그리고 17세기 화란 경건 운동의 푸치우스(G. Voetius)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모든 삶 가운데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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