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 이것이 교회다! 2013-10-17 22:02:24 read : 627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월 13일 중국동포교회 주일 오후예배 설교(시 119:67, 71) 이 글은 본지 편집고문인 김명혁 목사님(강변교회 원로)이 2013년 10월 13일 오후 중국동포교회에서 전한 설교문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구해 이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제가 이틀 전인 금요일 오후 김해성 목사님의 전화를 통해 지난 8일 화요일 밤 11시 경 이곳 중국동포교회 1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1층이 거의 다 불에 탔고 4층에서 자던 100여명의 중국동포들이 화재를 피하려고 갑자기 내려오다가, 팔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간 사람들이 10명이 되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었습니다. 1억원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부상을 입은 환자들의 치료비도 수천만원이 들 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지난주 이곳에 새로 들어온 중국동포 한 사람이 정신 이상으로 불을 질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김해성 목사님께서 오늘 제가 여기 와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도 했습니다.
오늘 오전 예배 설교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오후 예배에 와서 설교를 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들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여러 가지 고난들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난들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의 고난과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저들을 권념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기억하시면서 알아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3-25). 결국 저들은 출애굽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수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던 욥도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소유물과 재산이 모두 약탈을 당하는 극심한 재난을 당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갑자기 죽는 극심한 재난을 당했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을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을 바라보시면서 권념하셨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면서 회개하게 되었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고 사랑하시고 복 주신, 귀중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2-17). 신약성경도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인내하며 감사와 회개와 긍휼의 신앙을 지닌 욥을 예찬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저는 욥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평생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도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서 유리 방황하는 고난도 당했고, 적군의 공격을 받아 성이 불타고 사람들이 잡혀가는 재난도 당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굴에 숨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사울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를 품는 대신 하나님을 향해서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1,4).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시 59:1-3).
다윗은 적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저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를 품는 대신 하나님을 향해서 울면서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대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삼상 30:3, 4, 8).
결국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울고 회개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다윗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무척 좋아하며 매일 암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성자 예수님께서야말로 고난의 극치를 온 몸에 친히 지니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성경이 기록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결국 주님을 믿는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건지시는 구원의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슬픔을 예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매우 좋아하며 자주 읽곤 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3-5).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도 바울도 결국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힘과 매 맞음과 불치의 병까지 몸에 짊어지는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면서 불평 불만 대신 감사와 기쁨을 지녔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되었다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성도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5, 6).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고, 그리고 피차 위로를 받게 됩니다.
고난과 위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시 119:5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분이시고 메시야를 보내사 고난 중에서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1-3).
사도 바울은 환난 가운데서 위로와 기쁨이 넘쳤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그와 같은 위로와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성도들로부터도 온다고 지적했습니다.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6, 7).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유익과 귀중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함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고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넉넉하고 편안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면, 자만해지고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떨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율례를 최고로 귀중하게 받들지도 않게 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울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온유 겸손 하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나그네들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무시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도 무시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는 말씀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함으로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고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고백은 모세의 고백이었고 욥의 고백이었고 다윗의 고백이었고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울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낮아져서 온유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나그네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원수를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마음을 품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도 품게 됩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울면서 십자가를 사랑하게도 되고 울면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도 됩니다. 고난은 무척 귀중한 것입니다.
사실 조선교회가 일본 통치하에서 고난을 당함으로 조금씩 조금씩 교회다운 교회로 탈바꿈했고, 6.25 전쟁의 고난을 당함으로 교회다운 교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게도 되었습니다. 편안하면 교만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면 겸손해져서 울면서 회개하게 되고 모두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도 조그만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경험들을 주셨습니다. 어릴 때, 즉 11살 때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하고 38선을 넘어 남한에 와서 평생 고아와 같은 삶을 사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경험을 주셨습니다.
후에는 태어나서 4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살던 저의 어린 아들 철원이를 먼저 하늘로 떠나 보내는,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경험을 주셨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 생활을 하는 고난의 경험도 주셨고, 아무 사람들의 도움도 받지 않고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는 고난의 경험도 주셨습니다.
귀국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남산 지하실에서 심문을 당하는 고난의 경험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경험이 저에게는 보석과 같은 귀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경험을 보석으로 바꾸어주신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의 이기적이고 비판적이고 강퍅한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조금은 좋게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전 7:3)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의 마음을 조금은 부드럽게, 조금은 좋게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슬퍼서 울고 아파서 울 때, 사람은 조금은 낮아지고 조금은 겸손해지고 조금은 따뜻해지고 조금은 부드러워집니다. 울면서 화해하고 또 울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저는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그리고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회개와 참회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로 하여금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극치로 나타난 십자가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십자가와 나”라는 주제로 15번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엄격히 말해서 고귀한 가르침도 아니고, 사랑의 윤리도 아니고, 사회정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목으로, 이기적 삶이 헌신의 삶으로 바뀝니다. 나는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비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이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며, 동과 서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십자가 그늘 아래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뒤에 숨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십자가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로 하여금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하신 말씀을 조금씩 조금씩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암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불교 신자였던 조춘국 씨를 비롯한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와 복음의 손길을 폈습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를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며 우물 10여개 이상을 파 주기도 했습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며 안과병원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학교를 하나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오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지난 14년 동안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중국에 있는 우리 조선족 고아 학생들과 사랑과 격려를 주고받고 있는데, 그것이 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저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저로 하여금 천국을 사모하며 바라보게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어린 아들 철원이를 생각할 때마다, 순교하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사랑하며 존경하던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할 때마다 천국이 그리워지고 천국이 사모됩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정진경 목사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천국이 그리워지고 천국이 사모됩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인지 모릅니다. 현대교회가 현세적인 축복에 사로잡혀 있는데 부족한 저로 하여금 천국을 사모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끝으로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보석과 같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만들어진 놀라운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찬송가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패니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맹인이 되어서 95년 평생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패니 크로스비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찬송가를 쓴 찬송가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저는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패니 크로스비의 가슴과 찬송가에는 주님 사랑과 천국 사모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천국에 이르러 자신의 눈으로 제일 먼저 보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까지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이런 찬송가를 지은 것 같습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231장).
조니 에릭슨은 예쁘고 장래가 촉망되던 소녀였는데,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를 부딪혀서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지닌 소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도 자신도 모두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보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영혼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노래와 간증과,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린 그림 등은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님과 간증도 했습니다. 저는 조니 에릭슨의 간증을 직접 두 번 들으면서, 마치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송명희 시인도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보석이 된 사람입니다. 제 사무실 근처에 사는데, 저를 자주 찾아와서 만납니다. 최근에는 순교적인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수수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주님의 음성이 별로 좋지가 않다고 말을 합니다. 송명희 시인은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모습을 지닐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노래는 모두를 감동시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걸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레나 마리아는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불행한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지닌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그녀를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자신의 불행을 탓하지도 않았고 동정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자신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삶의 풍요로움은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진솔하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진취적이고 의욕적입니다. 수영도 하고 운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음식도 만듭니다.
그녀는 결혼을 했는데 때가 되면 아이까지 낳고 싶다고 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극심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통해서 보석과 같은 귀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는데, 그녀의 삶은 귀중하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첫째로 우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울면서 회개하게 만듭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둘째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짊어지신 주님의 마음에, 그리고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가게 만듭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셋째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듭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게 만들고 슬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슬퍼하게 만듭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넷째로 천국을 사모하며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특별한 복입니다. 저는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북한 사람이건 중국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러시아 사람이건 아프리카 사람이건 아프가니스탄 사람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의 몸과 마음에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가득히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보석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화재의 고난을 당하신 중국동포교회와 중국동포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권념하심과 기억하심과 알아주심과 위로하심이 함께하시고, 은혜와 사랑과 복된 손길을 펴시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100만원 이상씩 위로와 격려의 헌금을 보냄으로, 피차 위로와 기쁨을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 당한 화재의 고난을 통해서 중국동포교회가 회개와 눈물과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과 긍휼과 사랑을 지닌, 보다 귀중하고 보다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주님의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과 가슴에 지니고, 울면서 회개하면서 사랑하면서 십자가적인 보배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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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회다! 2013년 10월 6일
본문: 요한계시록 1:9~20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요한계시록 1:9-20]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 . .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지나온 길이 있다!
어떤 사람이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난파를 당해 황량한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멀리 지나가는 배를 보게 되었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그를 발견한 배가 섬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질문을 했습니다.
“저기 오두막이 왜 세 채나 됩니까?”
“저쪽에 있는 건, 저의 집이지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그건 제가 다니는 교회랍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아, 그건 전에 다니던 교회죠.”
교회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 대표적인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메시지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세요.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오늘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특징을 다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교회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었든지 간에 칭찬을 받는 교회든, 책망을 받는 교회든, 목회를 잘하고 있었든지 잘 못하고 있었든지,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며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사실 만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교회와 지금의 만나 교회가 어떻게 다르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또 여러분의 삶에서 다른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립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많이 묵상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가느냐?’를 심각하게 묻도록 하셨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
예수님 손에 들고 있었던 일곱별의 비밀, 일곱 금 촛대가 무엇인지? 모르기는 해도 교회는 새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야 하고, 금 촛대처럼 존귀한 존재여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린 그 가치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워드 슐츠가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가 있습니다.
[Onward] 173~174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비틀스 해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폴 매카트니가 답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해당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965년 여름, 비틀스는 처음으로 뉴욕의 시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했다. 5만 5,000명의 팬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틀스 라이브 공연 사상 최대 규모의 관중이었다. 그러나 비틀스는 팬들의 아우성과 혼돈 때문에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예술이 그들의 인기에 묻혀버린 것이다.
우리가 더는 우리의 음악을 못 듣게 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매장 수가 4,000개를 돌파하면서부터였을까? 우리가 커피에 대한 사랑 및 열정 그리고 고객을 향한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잊은 것일까?
관료주의와 분기별 동일매장 비교매출 증가에 연연하면서부터였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더는 사업 운영에 있어 커피를 만들 때처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정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스타벅스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스타벅스가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새로이 전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나는 일주일 전에 미국 내 7,100개 매장의 문을 일제히 닫고 에스프레소 엘설런스 트레이닝을 실시한 사실을 언급했다."
오늘 우리가 답해야 하는, 아니 한국 교회와 만나 교회가 이 자리에 세워져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입니다.”
요즘 저에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느냐?”가 아니라 “이 교회가 왜 이 시대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요즘 제가 탐독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평신도를 깨운다] 개정판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초대교회가 가졌던 역동성이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 되었는가?
다른 하나는, 왜 교회에서 평신도와 목회자를 구분하여 평신도 사역을 스스로 소극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초대교회는 선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체요, 전도와 선교는 교회의 생명력에 관한 문제였던 반면, 개혁시대에는 전도대상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더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박해받던 시대에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냐?’라는 본질의 문제는 시대적으로 다른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시대마다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나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며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셨던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게 됩니다.
만나 교회가 광야와 같은 벌판에 천막을 치고 개척을 하던 때가 1981년입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과 고통을 경험하던 시기에, 광야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로 ‘만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그때 상징적인 성구가 두 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붙어 있지요.
마태복음 11장 28절,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은 28장 19~20절
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당시 만나 교회는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의 만나를 제공해 주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살아갈 힘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당시 김우영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가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나 교회가 분당시대를 맞이하던 때, 한국사회 현상과 맞물려 경제발전과 더불어 대형교회의 건물이 지어 졌습니다. 당시에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물이 지어지면서 우리 삶의 부흥을 꿈꾸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당시 교회를 지으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 헌신 때문에 많은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표어가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이제 이 큰 건물에 교인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 했고, 모여진 사람들이 흩어져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김우영 목사님은 교회에 장례식장을 만들려고 시도했고, 의대생들을 공부시키며 종합병원을 꿈꿨고, 호스피스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 시대로 표현하는데, 그 꿈을 바라보면서 그다음 사역을 남겨 놓고 김우영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다음 세대에서 만나 교회는 ‘교회 중심적 교회와 하나님 중심적 교회’를 구별하며 사역에 중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교회 건물이 중심이었다면, 이제 이 건물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에 투자하고, 아직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예배 공동체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경험하도록 예배 사역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5번의 다른 예배, 그리고 변화산을 통한 새벽기도 운동은 만나 교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지요.
비전 선언문, 7개의 핵심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섬긴다.
그리고 지난해 하나님께서는 만나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 교회인지,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가지고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과 연관이 있는 풍성한 열매가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걸어온 만나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신 비전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창립 30주년에 선포했듯이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셨고, 정말 기적적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것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걷는 것이 되어야겠지요.
WHB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운동이, 많은 교회의 연합운동이 되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름을 내려놓고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는 단체가 되어, 정부와 지자체와도, 그리고 많은 기업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1% 나눔 운동에 230여 개의 자영업자들이 참여했습니다.
많은 성도가 회원이 되어서 충무로에 있는 사무실이 잘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과 기부자들이 낸 돈이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는 단체가 된 것이죠.
미혼모를 돕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미혼모를 돕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한 물음도 던졌고요.
하지만 누군가 돌봐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양유업과 시작한 모아 사랑 운동은 이제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행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사랑을 전하는 운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교회가 세상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단체로서 누군가 걷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새기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지난해 시작한 MMP 사역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가장 큰 특권이자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 교회가 외형을 키우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149개의 교회 중에 10여 개를 선발해 시작한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이 150개의 나무가 동참하는 거대한 숲의 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멀게는 안동에서 가깝게는 성남에 있는 교회까지 우리 교인들이 주일에 함께 예배드리고, 주중에 찾아가서 전도하고, 여름에 찾아가 여름성경학교와 여러 가지 사역을 함께하며 열매가 생겼습니다.
총각 목사였던 한 분이 우리 교회 청년과 결혼하게 되는 일도 일어났고요.
올해 다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교회와 사역의 도움이 필요한 교회 12개를 새로 선발하여 함께 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해외 선교에서도 좋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역 중의 하나로 선정된 볼리비아의 IT 학교 건립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운동이 너무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먹지 못해 잘 자라지 못한 한 아이가 남양에서 후원한 분유를 먹고 건강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우유와 요구르트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워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창립기념감사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이 일은 우리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만나 교회, 사회의 기업, 그리고 정부 단체가 함께하는 프로젝트로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참 가슴 뛰는 일이 많지만,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신 그 물음에 대답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이 함께 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이 길을 다음 세대가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길을 제시해 주고 믿음의 후배에게 하나의 role model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자녀’만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신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 단지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 이후의 본래 교회는 성령을 받은 평신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평신도를 보면서 교회를 알게 됩니다.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옥한흠 목사는 로렌스 경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신도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답게 보이는 건물과 그들 보기에 성직자답게 성장한 목사와 평소 몸에 익은 스타일대로 드리는 예배를 원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그들 혼자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어 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여기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의 위기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모임을 하고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만족을 추구해 왔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교회, 원하는 예배, 원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며 단 하루의 위안처로 삼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50년 전 영국에 가득 찼던 교인이 사라져 버리고, 미국 주류교단의 교회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단지 수십 명의 사람이 텅 빈 교회를 지킬 뿐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빈자리만이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보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평신도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동성입니다.
70년대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교회가 수천 개가 세워졌던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교인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93~97년까지 우리나라의 장 차관으로 임명된 인사 중의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67.8%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당시 한국 사회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심지어 시민 질서에 이르기까지 점점 악화 일로를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그 교회의 특징에 맞게, 그 교회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때로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고, 때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지막 절에 있는,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 보냈던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교회에 모두 하나님의 사자가 갔다는 것이며, 아직은 살아 있는 교회에 대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같은 메시지는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일곱 교회가 당하는 고난과 박해는 처음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박해를 받던 예루살렘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계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고, 여전히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며,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만나 교회의 비전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 더는 자라지 않는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근심거리가 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 말씀을 보세요.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한심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김동호 목사님이 저에게 편지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은행 같은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한국은행이 다른 은행을 위해 있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많은 재산을 자랑할 때,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다른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소유를 나눠주고,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재산을 가지려고 싸우는데 우리는 안 가지겠다는 데 싸움이 되겠습니까? 세상은 권력과 명예를 가지겠다고 아등바등하는데 우리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상대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능한 펩시의 회장 존 스컬스를 영입할 때의 일화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컬스가 애플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묻죠.
“남은 생애를 설탕물을 파는 데 허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시겠습니까?”
[기도의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책에서 ‘서툰 사람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박광수 씨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사랑, 그 미친 짓’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좋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나쁜 것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기가 힘들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가게도 가기 힘들고, 일요일에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쉬는 날 늘어지게 낮잠 자기도 눈치가 보입니다. 오랜 친구들과 마주 앉아 밤늦게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일도 손에 잘 안 잡히고, 생활 리듬도 깨지기 일쑤이지요. 어디 그것뿐입니까? 늘 조바심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전에 없던 의심병도 생깁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지출도 많아지고, 훌쩍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은 더더군다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사랑이 끝날 땐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 미친 짓을 또 해?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진짜 미쳤나 봅니다. 그런 굳은 다짐을 잊은 채 또 사랑에 빠져드니 말입니다."
아마도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 미친 짓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미친 것 같은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이해가 가지 않을까요? 결코, 편한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꿈꾸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비전을 꿈꾸는 교회가 교회입니다.
저에게 꿈이 있다면 강단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보다 교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겠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없다면 따라오십시오!”
혹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를 생각하십시오.
그는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중요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기도할 때, 100% 하나님을 신뢰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을 100% 하나님께 일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명을 놓고 고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명을 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쉽게 포기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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