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언제나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언제나 잘 산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상과 다른 세상입니다. 쉽게 말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변질된 세상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상엔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과 아픔과 괴로움과 가난함과 병듦 같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하게 되고 왜곡되게 된 이 세상을 바꾸시어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세상과 같은 세상을 다시 만드시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하여 사망과 애통함과 곡함과 아픔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원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부하게, 형통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적인 형통함과 부요함만이 마치 최고이고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형통함과 부요함을 죄악시하거나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건강한 사고방식과 철학이 아닙니다.
틀림없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언제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우리는 그냥 복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 복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복과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복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은 시편 16편 2절에서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복을 받으려면 그러므로 하나님께만 의존하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만 구해야 합니다. 복을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통하여 받겠다고 생각하는 것,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받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사야 31장 1절과 4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 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 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아멘.
우리의 삶에 넘어짐과 형통치 못함이 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복과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만 받겠다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하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7장 7절에 있는 것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참으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우리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참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시편 1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과 식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십니다. 저는 열쇠에 관심이 많습니다. 천국의 열쇠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전에 살던 저희 집은 옛날 나무 대문이었습니다. 열쇠로 잠그는 것이 아니라 나무 빗장으로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려면 문을 두르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안에서 어머니가 나와 열어 주곤 했습니다. 밤 늦게 들어가려고 할 때는 문을 두드려 식구들을 깨우는 것이 미안하여 아예 담을 타고 넘어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식으로 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요즘은 대개 다 열쇠로 문을 열고 다닙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로 마태복음 7장을 선호하였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겁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로 시편 1편의 말씀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쓸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저는 현재 열매나눔재단의 대표이고 이사장입니다. 열매나눔재단을 세우고 그 재단을 통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는 모든 일이 거의 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무모한 도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것이 아니라 그냥 무모한 도전 그 자체입니다.
힘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합니다. 정말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가 재단의 성공과 형통함을 위하여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재단을 하나님의 식과 법대로 운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믿음으로 경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재단을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재단이 하는 모든 일위에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재단과 재단이 하는 일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세 번 째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복의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이야기하라면 복의 형태가 그릇일까 파이프일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복의 모양과 형태가 파이프였으면 좋겠습니까? 그릇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복을 담는 그릇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큰 그릇을 준비하여야 큰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의 형태가 그릇이 아니라 파이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3절)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냥 우리에게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축복이 우리로 말미암아 세상으로, 많은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얼핏 생각하면 별로 매력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축복의 파이프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축복의 그릇이 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에게로 흘러 들어오게 하고 싶으십니까?
우리는 대개 축복의 그릇이 되고 싶어 합니다. 복은 내게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지 나를 통하여 남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식과 생각은 다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계산을 해 보면 우리의 계산과 생각이 틀렸고 하나님의 생각과 계산이 옳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물은 그릇에 많을까요 아니면 파이프에 많을까요? 여러분 물은 그릇보다 파이프에 많습니다. 그것은 사실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제 자식이 축복의 그릇이 되지 않고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릇에 담긴 축복의 양과 질은 파이프에 담겨 있는 축복의 양과 질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바보 같은 퀴즈 하나를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70302950>. 무슨 숫자일까요? 제가 올 1월부터 7월까지 밖으로 지출한 헌금과 구제와 선교비 총액입니다. 제가 교회로부터 받은 생활비는 세금과 연금을 제하고 받는 실수령 액만 생각하면 제가 올해 지출한 돈에 절반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늘 이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보통 제가 지출하는 수준보다 올해는 좀 높아졌습니다. 막내 아들 결혼 부조금으로 들어 온 돈을 선교비로 대부분 지출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나름 절약하고 절제하였습니다. 저는 결혼한 막내 아들 집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너무 좁고 구차하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70302950>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전체 수입에서 밖으로 지출한 돈의 퍼센테이지가 퍽 높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산해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에 비해 2.28% 밖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작년보다 꽤 많은 돈이 지출되었지만 때문에 단순히 지출된 돈만 비교하면 퍼센테이지가 제법 높아졌지만 정작 중요한 제 수입과 지출의 퍼센테이지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절약하여서 그 숫자가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물은 파이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원지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파이프를 통하여 물이 나갔다고 파이프의 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파이프를 통하여 많은 물이 나가도 파이프는 언제나 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제 돈이 나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제 돈이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이 제 파이프를 통해서 나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저를 세워 주시고 저를 높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절약하여 통과 시킨 돈은 고스란히 제 돈이 되고 만 셈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욕심 부려 채운 그릇의 복보다 많은 하나님의 복이 제 삶에 넘칩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면만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제 삶을 형통함으로 충만케 해 주셨습니다.
막내 아들 집에 잠깐 들렀을 때 부엌에 아이들이 붙여 놓은 메모지를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수입을 계산하여 거기서 뗀 십일조와 구제비와 선교비에 대한 액수였습니다. 다 써도 모자랄 돈에서 저렇게 떼고 나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었습니다.
큰 아이는 미국에서 유학 중입니다. 유학 생활은 정말 빠듯합니다. 거기서 100불이면 정말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그렇게 빠듯한 생활 중에서 십일조와 이삭줍기와 선교비를 떼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애비가 열심히 낼 터이니까 너희들은 좀 잠시라도 대충대충 살아라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생살을 떼어 내는 것과 같을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축복의 파이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제 아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온 땅이 제 아이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좀 힘들고 어려워도 주를 위하여 쓰는 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애비로서 아이들이 불편하게 살고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지만 모른 척 하고 내 버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모든 교회가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저의 하나님이시고, 저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만 끈을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세상 식으로 복을 얻으리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천국의 열쇠를 지니시고 사는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과 식 우리가 늘 말하는 높은 뜻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같은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축복의 그릇만 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려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위하여서는 절제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서는 낭비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십일조 생활도 하시고 좀 힘들고 어렵지만 남을 돕고 섬길 일이 교회를 통하여 제시되거든 양보하지 말고, 빠지지 말고 무조건 덤벼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높은 뜻 모든 교회와 높은 뜻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다 복의 근원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2절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답답해서 탄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절과 21절은 제자들 때문에 답답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답답함을 느끼신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더 이상 어떤 말씀도 나누지 않으시고 그들을 떠나 가셨습니다(13절). 의사소통 불가 판정을 내리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들에 대해서는 18절과 같이 말씀하신 후에 22절~26절에 나타나는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가 트여 들리게 하므로 참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택하신 제자들, 책임지고 끝까지 교육시켜 제대로 된 일꾼으로 키우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볼 수 있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주께서 왜, 무엇 때문에 답답해하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주께서 답답해하시는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시원시원한 믿음, 주님이 칭찬하실 만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큰 믿음을 갖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1. 기적에 참여하지는 않고 눈으로 기적을 보기만 하려는 ‘믿음 없는 행태’를 답답해하시면서 탄식하십니다
11절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이란 유대교내 지도급 평신도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유대교 및 율법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대교를 이끈 평신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서 대율법학자나 유대인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율법을 생활화하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 모두 다 이 바리새인들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와 같은 율법을 향한 지극한 사랑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들의 율법사랑은 유대교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주님을 힐난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행사해 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나타나는 주님의 활동을 보면 이들은 항상 주님과 대립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날 선 검을 치켜세우고 상대방을 노려보면서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형국이었습니다. 그 만큼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율법이나 장로의 유전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그들이 지키는 율법을 사수하기 위하여 맹공을 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행사해 보라’고 주님께 요구하였습니다(11절).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적에 참여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같이 나누며 누리기 위해서 그런 요청을 했던 것이 아니라 신비하고도 희한한 현상을 눈으로 보면서 마술쇼 구경하듯 하려고 원했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굳어버린 그런 태도에 대해 주님이 실망하시고 답답해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이지요.
주님이 행사하시는 기적은 생명을 살리는 치유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행하신 기적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희한한 일을 나타내는 마술사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을 나누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려고 하기 보다는 눈요기나 하고 희한한 일을 한 번 좀 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그와 같이 ‘표적을 행하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주님은 그와 같은 그들의 굳어버린 태도와 기적을 눈으로 보기만 하려는 ‘믿음 없는 행태’에 크게 실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의 그런 믿음 없는 태도에 답답해하시고 탄식하시면서 ‘어떤 표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들을 떠나가시고 말았습니다.
• 목사님이 기도하시면 우리 조카 살아납니다
어느 교회의 원로 권사님이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찾아가서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좀 황당한 심방요청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조카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시 건강하게 살아날 줄 믿으니 그리 아시고 주님의 권세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런 심방을 요청받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그 권사님에게 ‘권사님이 직접 기도하지 왜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은 목사님을 통해서 역사하시지 권사를 통해서 역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만 담임목사님이 성질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성질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두 가지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그 조카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저 먼 친척뻘 되는 조카였는데 평소에는 교분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권사님 자신도 별로 사랑하지 않는 조카를 살리기 위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목사가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권사님이 그 조카를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셨더라면 권사님의 사랑이 오히려 큰 능력을 나타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면서 화기(화난 기운)가 돌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 질문 때문에 그 권사님이 그만 담임목사님을 비난하는 말이 퍼져서 교회가 좀 시끄러워졌었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별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시큰둥했었지요. 그 목사님이 두 번째로 그 권사님에게 ‘그 조카가 다시 살아나면 뭐 할 건데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죽어가는 사람 살아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 아닙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님이 바로 받아쳤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사람의 운명에 따라 하나님이 데려 가시는데 목사가 기도해서 그 영혼을 잠시 더 붙잡아 두려면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해야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권사님 자신도 별로 사랑하지 않은 조카,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지도 않은 조카를 살려서 뭐에 쓸려고 그러시는 것이냐’고 물었던 겁니다. 결국, 말문이 막혀버린 그 권사님은 자기와 친분이 있는 교인들에게 ‘능력없는 목사, 믿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목사’라고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교인들의 비웃음만 사고 말았던 결과가 되었지요.
이런 태도가 바로 기적에 참여하지는 않고 기적을 눈으로 보려고만 하는 믿음 없는 행태, 곧 믿음을 빙자한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서 말씀에 따라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 병이 나으리라고 믿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기도할 뿐이지 기도하는 우리들이 살려내거나 고쳐내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역할만 감당하면 되는 겁니다.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할 뿐인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하시면 살아날 것을 믿다니요... 목사가 하나님입니까?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도구의 역할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이 기도해서 지던 태양이 멈추고, 당신이 기도해서 지금도 녹아내리고 있다는 저 북극의 빙하가 다시 꽁꽁 얼어붙는다고 칩시다. 당신이 기도해서 저... 공동묘지가 갈라져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당신이 기도해서 병원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한다고 칩시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이 기도해서 죽은 자를 살리며 병든 자를 낫게 하며 시각장애자를 보게 하고 청각장애자를 듣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저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당신의 치졸한 영웅심리에서 나오는, 믿음을 빙자한 영적인 질병상태의 발산일 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믿음 좋은 척하면서 기적이나 보려고 하는 자들에 대해 주님은 매우 답답해하시면서 한숨을 지으셨다는 것을 잘 알아서 주님이 답답해하시는 믿음 없는 불신앙의 행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은총의 선물은 아무 때나 사람들이 보기를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행사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 서로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영적인 일을 통해 기적이 나타나도록,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서로 중보하므로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 참여하시는 기쁨이 있게 되길 바랍니다.
2. 영적인 질병에 걸릴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육신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믿음 없음’을 답답해하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먹을 것을 별로 준비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알아보니 사람은 여럿인데 먹을 것이라곤 떡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상황을 직파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시면서 엄히 경계하셨습니다(15절). 그 때 제자들이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떡을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자들의 기우였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질병에 걸릴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시느라고 떡과 연결시켜 말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시면서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절)’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18절)고 하시면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일,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셨던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둔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도무지 뭘 몰랐습니다(21절). 깨달음이 없기는 여전했습니다.
주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게 있어서 먹거리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심각하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육신이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질병에 걸리느냐, 건강한 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보실 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인 건강의 여부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저 육신적인 것에만 치중하다보니까 도무지 영적인 교훈을 듣고 깨달아 알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영적으로 바리새인의 질병에 감염되어서는 안되며 헤롯의 질병에 감염되어서는 안될 일이니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질병에 전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15절)는 말씀을 제자들은 그저 먹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알아듣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복을 잘 받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영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은 모두 생명을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나는 새도 먹이십니다. 들에 피는 꽃들도 입히십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자도 풍성히 먹게 하시고 옷을 만들지 않는 자들도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적인 것에 집착하므로서 유혹을 받아 영적인 질병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답답한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경제적으로 심히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선물받는 참다운 복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3. 주의 일을 위하여 부름받았건만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지 못하는 ‘분별없는 믿음’을 답답해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표적이나 구하고 있고 제자들은 영적인 질병에 감염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그저 육신적인 일에나 집중하고 있고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놀라운 기적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믿음에 발전이 없으니 주님의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미어져 터질 것 같은 그 답답함...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그 부르심의 상급에 합당한 부름받은 주의 사람들로서 주께서 원하시는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 두 기적 이야기가 6장과 8장에서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이유는 유대인을 먹이시고 이방인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중요한 것은 부름받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6:35~44). 이 기적은 유대인들의 지역인 갈릴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섯 개의 떡으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것에서 나타나는 “오(5)”라는 숫자는 모세오경의 숫자인 “오(5)”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곧 유대인의 숫자임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열두 바구니에 모았습니다. 이때의 열둘이라는 수는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숫자이며 바구니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유대인들의 용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을 증거하는 기적이야기입니다.
한편, 주님은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또 충분히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나는 “사(4)”라는 수는 동서남북인 사방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사(4)”라는 수는 전세계를 나타내지요. 그러므로 “사(4)”는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이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이방인 땅에서 행해졌습니다. 데가볼리(데카폴리스)는 열 개의(데카) 도시(폴리스)라는 뜻을 가진 도시연합 지역입니다. 이 데가볼리는 이방인 지역의 도시들이므로 데가볼리 지역에서 사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곧 이방인들을 먹이셨다는 뜻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곱 개의 떡으로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칠(7)”이라는 수도 역시 이방인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이방언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칠십인 역이라고 불리는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칠(7)”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숫자가 되며 광주리는 유대인들이 어깨에 메고 다니는 바구니와는 달리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용기입니다. 우리말로는 바구니와 광주리라는 말로 구분해서 번역했는데 헬라어 원전도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용기를 ‘코피노스’라고 했고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용기를 ‘스푸리스’라고 하여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이방인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에 제자들이 한 일
그런데 문제는 이 때 주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주께서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을 베푸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들은 앉아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막6:38; 막8:5). 그리고 그들이 몇 개가 있노라고 보고하자 주님께서는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풍성하게 먹고도 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때 부름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기적을 일어나게 하는 부름받은 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시키는 일만 잘 하기를 바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름받은 제자들이 주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통로가 되길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도록 기적이 행사되기 위한 통로, 도구 역할을 잘 해내길 바라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부르신 것인데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분별력 없는 믿음을 갖고 있으니 주님께서 답답해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주께서 시각장애인을 치료하신 사건과 9장에 나타나는 귀신들린 아이 치유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각 장애자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신 후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그는 사람들이 보인다면서 나무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23절~24절). 그러자 주님은 다시 한 번 더 그의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 그 때 그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25절). 그러면서 기적을 보기만 하려는 눈들을 피해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면서 기적을 확인하려고만 대들는 자들을 피해 집으로 간 후에 천천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치유사건 이후에 주님은 자기의 정체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잘 몰랐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제대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시 후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면서 주님께로부터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8:33). 알기는 어떻게 알았으나 주님에 대해 제대로 파악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시각장애인을 단 번에 고치지 못하시고 두 번에 걸쳐서 고치신 것처럼 제자들도 단 번에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반복해서 가르친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치유한 사건을 통해 좀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귀신들린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을 보고 주님께로 달려와 사정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더라면서 아이를 치료해 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바로 그 때 주께서 심히 답답해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책망하시는 분위기가 다시 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19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 제대로 감당 못하고 변론이나 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9:14) 통탄스러울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신 주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냐, 대체 언제까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냐” 는 주님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를 돌아 볼 때 그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통해 수많은 생명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갖게 하였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통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기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바로 부름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의 경우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감사하면서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도록 통로의 구실을 했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변론은 무슨 변론입니까? 자신들이 기적을 행사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데, 변론은 무슨 변론입니까? 자신들이 기적 행사자입니까? 부름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제 구실만 하면 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도구의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은 제자들이 도구가 아닌, 주인노릇을 하려고 했으니 기적은 무슨 기적입니까? 변론만 하고 있다가 주님의 심경만 복잡하게 만들고 말았던 겁니다.
• 시원시원한 믿음이 되려면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때에 주님께서 답답해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통로,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도구의 역할을 잘 하길 원하셔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천 명을 먹이실 때와 사천 명을 먹이실 때 하셨던 그대로 우리 역시 따라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일입니다. 그 때 주님은 별 것도 아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를 갖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 후에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을 찾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사한 그것을 서로 나누면 그것으로 되는 겁니다. 우리 속담에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을 모르던 우리네 조상들도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콩 한 쪽도 나누어야 한다는 말을 돌렸는데 하물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감사하고 서로 나눌 때 오천 명 이적, 사천 명 이적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이지요. 우리들이 부름받은 것은 바로 이런 일을 하라고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부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적 행사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뛰어난 실력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남들이 존경하는 위치에 있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합니다. 우리는 남들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찾아보면 있습니다. 건강이 있고, 가족이 있고, 믿음의 식구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서로 중보기도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있는 이런 것들이 남들에게도 다 있는 흔하디흔한 것일지라도 그 흔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라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별 것도 아닌 흔하디흔한 바로 이것을 통해 놀랍고도 위대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별 것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눌 때 열두 바구니가 남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ㅇ 주님은 믿음이 있다는 자들이 기적에 참여하지 않고 기적을 보려고만 할 때 그 믿음 없는 행태를 대단히 답답해하십니다.
ㅇ 뿐만 아니라 주님은 영적인 질병에 감염되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바 본문을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것에만 몰두하고 육신적인 일에만 집착하는 믿음 없는 삶에 못비 답답해하십니다.
ㅇ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름받은 믿음의 사람들답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시는 도구가 되어 주님과 함께 서로 기적에 참여하는 기쁨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주님의 칭찬과 아울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미 있는 것, 비록 남들에게도 다 있고, 남들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별 것도 아닌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서로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건강이 배가되고, 우리의 삶의 기쁨이 더욱 충천하고,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들의 삶의 어려움이 즐겁게 해결되는 간증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렇게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선물의 복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차고 넘쳐서 만날 때마다 복받은 삶을 간증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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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정신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신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 즉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만큼 십자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그 당시 주인의 학대 속에서 고통당하던 종들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들여다보며 십자가 정신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고난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가기만 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몇 그룹의 사람들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 그룹이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가룟 유다 그룹에 속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못 박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룹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때에는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롬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사도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룹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은 회피하고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 같으나 헌신의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 그룹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도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분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 토마스 아켐퍼스입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을 받고 「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결식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고 했던 열정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정도 직장도 재산도 버리고 걸식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저는 가장행렬 정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합니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당할 사람을 선택해서 십자가에 실제로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흠이 없는 청년으로 몸에 상처도 없어야 하고, 빚진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필리핀 천주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청년의 생활을 평생 다 책임져줍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자취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씨본을 따라서 그대로 글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취를 따라 간다는 말은 전자가 아닌 후자 즉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16: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처럼 나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지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변함없는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양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양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그분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저주가 벗겨졌고 자유 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방법만을 고집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건강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종탑 밑에 어린양을 쌔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을 만들게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을 하던 한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종탑 아래에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밑을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든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 대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상 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양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 이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양의 교회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 103:3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2가지 은택이 나옵니다.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에 대한 믿음과 신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병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9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음대로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이스라엘 선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일행은 나사렛 교회에 가서 기도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사렛 교회 목사님께서 우리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C형 간염환자가 고쳐졌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셋째,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계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뜻입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광명한 새벽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시 23:1 에 보면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믿는 것 같은데도 인생의 방황이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방황이 끝났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주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의 방황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숨어있습니다. 빌 2:5-11을 보면 십자가 희생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시고 모든 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유명한 워너메이커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평생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분이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지어준 분입니다. 그가 남을 위한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젊을 때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복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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