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감격과 기쁨 2003-04-28 17:10:56 주준태 목사 설교 본문 : 고린도전서 11:17-34 오늘 본문 11:29절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리거나 곡해하면 성찬에 참여하기가 두려워집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피고 거리낌이 없는 자만 성찬을 먹으시오" 그렇게 하면 성찬을 거절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뿐입니까? 성찬을 거절하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삐딱한 생각을 가집니다. "당신은 잘난 사람이구나" 그러나 이런 편견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만날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성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성만찬을 자주 하다가 보니까 예사롭게 되기도 하고 불경스런 일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성찬을 위하여 저녁에 모였습니다. 오후 6시쯤 되어서 먼저 친교를 위한 식사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교포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만 교인들이 식사를 만들어 와서 먹습니다. 그룹식으로 간단히 뷔페식으로 하면 좋을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나 봅니다. 서로 나눠먹기도 하고 서로의 음식을 칭찬해 주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공동 Table에 풀어 놓고 먹지 않고 자기가 가져온 것은 자기가 풀어 놓고 먹습니다. 먹을 때도 자기와 친한 사람, 수준이 비슷한 사람끼리 편하게 앉아 먹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잘 만들어 온 것을 배부르게 먹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은 어렵게 만들어 와서는 배고프게 먹습니다. 이렇게 될 때 어떤 분위기가 되겠습니까? 사랑과는 관계없는 빗나가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8시쯤 되면 소화제로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십니다. 식사를 다 마친 9시쯤 되면 성경을 읽고 찬송도 부르다가 10시쯤 되어서야 성별한 포도주를 가지고 주님의 성만찬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때쯤 되면 한쪽에서는 배불러 잠이 오는가 하면, 한편에는 배고파서 속이 뒤집어 질려고 합니다. 한편 사람들은 벌써 얼굴이 벌겋게 되고 술기운이 돕니다. 곤드레한 이 사람들이 주의 잔을 받아서 돌립니다. 그럴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받아 먹겠습니까? 또 한잔하는 기분으로 마시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이점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0-22).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그렇게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성찬은 사랑으로 함께 나누는 식사와 구분됩니다. 배불리 먹고 꾸벅꾸벅 조는 것도 아니고 곤드레 만드레 취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성찬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 죽음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나의 옛 자아를 거부하고, 그의 살으심과 합하여 내 속에 새 사람이 살아나는 은혜를 새롭게 하는 순간입니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상황과 배경을 놓고 사도 바울이 편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7-29). 이렇게 성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성찬이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감격스런 경험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당신의 귀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식으로 말하면, 몸 찢고 피 쏟아 속죄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죄 많고 연약하여 죽고 죽는 제사장이 드려주는 제사가 아니고, 변덕 많은 인간의 제사도 아니고, 무죄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드린 제사가 어찌 우리 죄를 씻지 못하며 영원히 온전히 하지 못하겠습니까?(히 9:14). 세상 끝에 드린 예수님의 죽음 그것은 단번에 영원히 우리를 온전케 하신 완벽한 제사입니다. 그 죽으심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우리들에게 미쳐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히브리식으로 말하면, 오늘 주의 백성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평화의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생명을 주시고 우리는 감사와 충성을 드리는 이 교제는 얼마나 소망스럽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 거룩한 생명과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기쁘게 찬미하며 헌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찬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정죄를 위한 예식이 아닙니다. 먼저, 성찬이란 그 자체가 용서입니다. 죄인을 위한 것이지 성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면 예수의 피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속죄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은 절대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죽으심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다시 성케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찬 184장을 부릅시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눈으로 보는 듯이 믿습니다. 주의 잔을 마시고 주의 떡을 먹음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내 몸의 행위로써 주의 죽으심에 동참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지난 날의 죄들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다시금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고 붙잡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감사와 감격, 경건한 회개로 성찬에 참여할 때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넘쳐납니다. 우리 위해 몸과 피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세상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본 재산을 아낌없이 드리며 헌신합니다. 진실로 성별되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이 성찬의 감격과 감사에서 연유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찬에는 건강과 치료, 축복과 형통의 부가적 은혜가 있습니다. 시 105:3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첫번 유월절을 지키고 난 다음 출애굽할 때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이 말씀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장정만 60만, 200만의 군중이 움직이는데 그 가운데 가난한 자와 병자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첫번 유월절 어린양 고기를 먹고 난 다음 가난과 질병의 원수들이 물러갔습니다. 저주와 고통의 태풍이 유월절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켜갔습니다. Pass over,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희생되신 곳에서, 그 사실을 믿고 기념하는 공동체에서 마귀의 시험이 떠나갑니다. 질병도 가난도 피해갑니다. 형통과 기적의 빛이 비추입니다. 신앙의 순수한 힘이 나타나는 때 기적이 따릅니다. 마귀는 대항할 수 없는 자로 되고, 뱀도 해가 없는 것으로 됩니다. 신앙의 능력이 닿는 곳에 치유의 샘이 흘러나옵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더하여 부활의 승리를 기념하는 성찬을 행하는 곳에 당연히 유월절 언약, 곧 성찬의 언약이 성취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할렐루야! 그런데 믿음도 없이 조심성도 없이 성찬을 더럽히기 때문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사도 바울은 본문 30절에서 지적했습니다. 오늘 빛의 절기 봄 성찬상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죽음과 질병의 저주의 강이 끊어지고 속죄와 의, 건강과 치료, 축복과 형통의 생명수 강이 흘러 넘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한 믿음과 한 세례로 성찬상에 둘러 앉은 우리는 사랑가운데 연합하고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증거합니다. 고전 11,12,13장은 원래 분리된 장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편지입니다. 고전 12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몸의 지체는 서로 비교하여 더 낫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한 생명이고 한 몸으로 연락되어있기 때문에 하나가 아프면 다같이 아프고 하나가 영화로우면 함께 영화롭습니다. 우리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입니다. 그런데 "한쪽은 갈비먹고 한쪽은 콩나물을 먹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전 11장에서 먹는 문제에 대해서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정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또한 고전 12장에서 몸의 지체에 대해서 우리가 한 공동체로 함께산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다른 사람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낳아주어야 하고 투표해 주어야 합니다. 사업은 또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동인의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동일시 할 때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어 우리의 머리가 되시사 친히 몸의 구주가 되어 주셨는데 우리끼리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얼마나 못난 일입니까? 시기와 다툼은 늘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몇가지는 내가 당신들 보다 낫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몇가지는 내가 당신보다 나은 것 같아도 다른 모든 것은 당신이 나보다 낫다" 누가 더 넓은 마음입니까? 이 세상에 제일 곤란하고 어려운 사람, 기분 나쁜 사람은 남의 약점을 캘려하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입니다. 다음에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서로 헐뜯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헐뜯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은사와 직분, 권세와 능력도 마찬가집니다. 사랑만이 연합과 일치를 가능하게 합니다. 성찬상에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우리를 연합시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교회 안에서부터 우리를 하나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입교인 여러분, 이 시간 주의 만찬에 참여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깁시다. 헌당의 삼복을 받읍시다. 지체들끼리 마음 깊이 연합합시다.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가 됩시다. 그런 다음에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개조합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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