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자를 찾아오신 예수님
2003-04-28 16:39:37

(요21:15-23)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님은 끌려서 법정에 서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쳤다.
다음날 숨어서 소문을 들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이,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용기 백배하여, 평소에 모이던 다락방에 모였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전과는 달랐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다.
전에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해 주셨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급선무가 이 먹는 문제다. 이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다.
예수님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 하셨을 때, 제일 먼저 온 시험이 먹는 시험이 왔다.

겁어디 가서 무엇을 해서 먹고살까?겂 생각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갔다.
다른 제자들도 여기에 동조하여서, 결국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다시 어부로 돌아갔다.
옛날의 경험을 되살려, 출렁이는 파도를 넘어 갈릴리 바다 가운데로 가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하였다(3). 베드로의 인생은 실패뿐이었다.
믿음에 실패하자, 사업도 실패했다. 믿음의 실패자는, 사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패의 원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겁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겂 하셨는데, 기도하지 않았더니 시험에 빠져서, 결국 예수님을, 3번씩이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쳤다.
그 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확신이 없어서, 결국 베드로는 옛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베드로와 6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1).
3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에게 겁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겂고 말씀해서, 기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었는데,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너무도 안타깝지만,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성도들은 힘들고 어렵다고,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큰 해를 끼쳤거나, 맡겨준 일을 망친 자에게는, 같은 일을 다시 맡기지 않는다.
바울은 선교여행 중에, 힘들다고 도망친 마가를, 2차 선교여행 도중에, 동행함을 허락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1. 고향에 돌아가서 물고기 잡는 제자들을, 다시 만나주셨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난 제자들이었지만, 한번 더 만나주셨기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다.
만일 단 한번의 기회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찾아오셔서,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제2의 기회와 사명을 맡기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씩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받아주셨다.
그리고 양떼를 그에게 맡기셨다. 이렇게 한번 더 용서하시고 받아들였기에, 능력 있는 제자가 되었다.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다시 불러서 사명을 주셨다.
탕자는 아버지의 분깃을 받아, 먼 타국으로 떠났지만,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을 때,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주셨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사용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던 베드로만, 실패자가 아니다.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버린, 가룟 유다만 실패자가 아니다. 여러분도 저도 실패자 였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자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주님을 너무도 많이 배반했지만, 주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주신다.
이 것다시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우리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잃었다가 다시 찾을 수 있다.

성도는 것다시겄의 신학을 가지고, 실패한 자들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주변에 실패한 자들이 있을 때, 찾아가서 한번 더 증거하면, 주님께 돌아올 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도 한번 더, 실패한 자들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등을 발명할 때, 그는 실험에 거듭 실패했다. 1,267번을 실패했다고 한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낙심해 있는 그에게,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겁한 번만 더해봐라. 기왕이면 1,300번 채워봐라겂
이 말에 힘을 얻어서 다시 시작한 1,268번째 실험에서, 이 백열등 발명에 성공했다고 한다.
겁한 번 더겂의 원리는, 영혼을 살릴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성공의 비결이 될 수 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겁한번 더겂 만나기만 하면,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고,
겁한번 더겂 만나기만 하면, 잃었던 사명을 회복할 상한 영혼들이 있다.
그들을 찾아가서 일으켜 세워주는 성도가 되자. 어떻게 해야 세워줄 수 있는가?

2. 실패를 논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먹이셨다. 실패한 제자들에게, 왜 실패했느냐고 따지지 않고, 조반을 준비해서, 피곤함과 배고픔에 시달린 제자들을 먹이셨다.

주님은 이 방법을 제자들에게만 쓰지 않으셨다. 병자들에게도 이 방법을 쓰셨다.
병자들을 앉혀놓고, 겁너희들이 먼저 회개해야, 내가 병을 고쳐주지 않겠느냐?겂며 접근하지 않았다.
먼저 병을 고쳐주시고, 연약한 마음과 상처 난 마음부터 고쳐주시고, 그 다음 복음을 증거 하셨다.

왕상19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승리한 후,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니까 낙담하여 도망친다. 그때 하나님께서 낙담한 엘리야를 치유하시는데, 낙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회개하라고도 하지 않으셨다.

먼저 재워주시고 천사를 통해 만져주셨다. 그리고 또 먹여주시고, 재워주시고, 만져주셨다(19:5-7).
그 다음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을 의지하여 40주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고(8), 기도로 주님을 만나 회복하게 하셨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기도와 말씀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육체적 필요도 채워져야 한다.
겁…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겂(마4:4).
마귀는 육체를 경시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도 귀하게 여긴다.

먹고 쉬는 일이, 얼마나 좋은가?
하나님의 교회는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부흥은, 교회가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지만, 복음 이전에 인정해주어야 할, 특별한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다.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사랑의 체험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절대 빈곤에 빠진 사람에게는, 복음이 들려오지 않는다. 이들은 먼저 먹여주어야 한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가 깨졌을 때에도,
먼저 그들을 먹이고 품어주는 일이, 회복을 위해서는 절대 필요하다.
그렇기에 십자가로 나가기 전에, 먼저 그들과 만날 수 있는 문화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미국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겁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 관계였다.겂고 했다.

우리주위의 성공한 사람을 보면, 하찮다고 생각할 만한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챙겨서,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었음을 본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것3가지 방문겄을 잘 하면 된다.

것입의 방문겄과 것손의 방문겄, 것발의 방문겄이, 그 3가지다.
입의 방문은, 전화나 말로써 사람을 부드럽게 하며, 칭찬하며 용기를 주는 방문이다.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는 방문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감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고, 큰 일을 할 수 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
칭찬은 할수록 늘고, 편지는 쓸수록 감동을 주며, 어려운 이는 찾아갈수록 친근해진다.
인간 관계에 감동을 주는 사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공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잘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겁요한의 아들 시몬아!겂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겁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겂(요1:42)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항상 것베드로겄라고 부르셨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붙여주신 이름으로 것반석겄이라는 뜻이다.
겁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겂(마16:18)

그런데 부활 이후에, 유독 이 자리에서 것요한의 아들 시몬겄이라고 부르셨다.
그는 반석은커녕,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그런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시몬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다.

요한을 강조하셨다. 요한은 자비와 용서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너는 자비와 용서를 받은 사람이고, 너도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것시몬아!겄하고 부르셨지만, 그의 과거를 더 이상 캐묻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앉혀놓고, 겁시몬아!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꼴이 뭐냐?
죽을지언정 나를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더니만, 꼴 좋다.
기도하라고, 깨어 있으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졸고 있을 때 내가 알아봤다.

내가 자세히 들어보니, 나를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더구나,
그러고도 어떻게 얼굴을 내밀고, 내 앞에 올 수 있느냐?
총칼 앞에서도 아니고, 한낱 어린 계집종 앞에서 나를 부인할 수 있느냐?겂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신 다음, 다른 말씀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사랑은 남의 아픈 점을 찌르지 않는다. 잘못을 알고 있지만, 다시 들먹이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물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직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는, 확인 사살할 필요가 없다.
것충고겄라는 미명 아래, 자꾸 남의 아픈 상처를 들춰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도 고치고 싶고, 변화 받고 싶은데, 쉽게 안 되는 부분을 자꾸만 걸고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잘못을 알고 있어도, 사랑한다면 침묵해야 한다. 떠벌리면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것로마인 이야기겄를 보면, 로마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첫째가, 싸움에 패한 장수를 절대 처벌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명예를 제일 큰 덕목으로 삼았다.
공동체에서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함을, 최대의 수치로 여겼다.

그런데 가뜩이나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더 이상 처벌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한번 패했던 사람은 더욱 분발해서, 두 번 다시 패하지 않는 강한 군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스는 일벌백계의 원칙이 있었는데, 로마는 패배나 실수에 대해 관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재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았기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이 로마의 강점이었다.

우리는 실패해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또 한번 못질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면목 없어 하는 사람에게는, 과거를 묻지 말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 안하고, 아들을 받아들였다.

만일 아버지가 겁너 그 돈 가져다가 뭐했느냐?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했어?겂하면서, 시종 꼬치꼬치 캐물었다면, 탕자는 다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녀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아픈 사람은 본인이기에, 다시 못질해서는 안 된다.
그 자신이 아픔을 느끼면, 사랑으로 품어주면 된다.
그러면 본인이 거기서, 어떻게 일어서야 할지 깨닫게 된다. 이런 은혜가 있기 바란다.

3. 사랑을 물어라.
예수님께서는 겁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겂(15-17)고, 사랑을 3번씩 물으셨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 있으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을, 능력 부족이라 하지 않고, 사랑 부족이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쳤다.
이것은 사랑의 자세가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훨씬 더 사랑했다.
사랑의 특징은, 둘이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쁘다. 사랑하는 사람이 울면 나도 울게 된다. 사랑하게 되면, 항상 하나가 된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신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일을, 나도 좋아하게 된다. 헌신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어린양들을 찾기 원하신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사랑하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땅 끝까지 가게 되어 있다.

사랑하게 되면, 가장 귀한 것을 주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주었다(18).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를, 하와를 위해 내어 주었다.
갈비뼈를 주었다는 말은, 자신의 가장 귀한 부분을 주었다는 말이다.
주님을 사랑한 마리아는, 300데나리온도 더 되는, 향유 옥합을 깨뜨렸다.

사랑은 자기 고집대로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에서 이해하게 된다.
나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편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는, 타인 중심의 사랑을 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많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헌신과 봉사 이전에, 사랑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지 말고, 헌신을 구하지 말고, 사랑을 구하자.

hohyun

이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