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구도자(求道者)의 득도(得道)/요1:43-52 2003-02-17 21:30:58 사람은 자기의 고정관념을 깨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문화적인 배경과 삶의 정황 지적 수준 및 경험에 의해서 사고와 성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생각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톰 해리슨이 쓴 책 가운데『I am OK, You are OK』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바꾸기가 참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꾼다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톰 해리슨은 세 가지 연유가 있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아주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모든 지식과 의지를 다 버릴 정도의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물고기를 큰 물통에 담아 운반하는데, 수산 기사가 옆에 따르고 물고기가 서식하는 모든 생활 환경을 다 갖추어서 2주일간 기차에 싣고 운반했지만 물고기가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항상 생존 경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물통 속의 물고기들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그 생존 경쟁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너무 과잉 보호를 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이 나서 그 안에 조류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 다음엔 큰 낙지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이 낙지가 배가 고프자 긴 다리를 내밀면 물고기들은 나는 죽었구나 하며 피해 다니면서도 2주일 동안 죽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세계적으로 오래 사는 사람들은 "사람은 일하고 도전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 고통을 주었습니까? 왜 이런 시련을 주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하고 까뮈는 고발했습니다. 두 번째는,소망이 끊어질 때라고 했습니다. 내 지식이나 내 생각으로 볼 때에 '이제는 다 끝났다' 싶을 때, 인간 능력과 그 의지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야말로 그 절망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생의 새로운 궤도 수정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백만장자 데일 카네기는 경제 불황이 미국을 덮었을 때 뉴욕, 맨해튼에서 살았습니다. 미국 전역에 덮친 불황이 카네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깊은 절망감에 빠진 카네기는 인생을 이대로 끝내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어느 날 그는 강물에 뛰어 들려고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강 쪽으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한 남자가 불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카네기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연필 몇 자루만 사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때 카네기는 주머니에서 일 달러 짜리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주고는 돌아서서 강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남자가 카네기에게 널 판지를 굴려 따라 오면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연필을 가져 가셔야지요" 카네기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냥 두시오 난 이제 연필이 필요 없는 사람이요"하고는 강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 오면서 하는 말이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카네기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죽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다리가 없으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저렇게 열심히 연필을 팔고 있지 않은가! 카네기는 자기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던 그 남자를 보고 죽지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때 죽지 않고 살아 미국경제를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유레카 스테이지'(eureka stage)에서 사람이 바꾸어진다고 했습니다. '유레카'(Eureka)라는 말은 헬라어로 '찾았다'는 말입니다. 옛날 시라큐스의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공중 목욕탕에서 깊은 사색을 하다가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서 옷도 입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가면서'유레카'(Eureka), '유레카'(Eureka) 를 외쳤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 내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내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 '아, 이것이다' 하고 감격할 때에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열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에서 쓰는 말 가운데 구도자의 득도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버림받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계심을 깨닫게 된 순간에 사람의 기질과 삶은 바꾸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생각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신앙의 지평을 열어간 한 구도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아집과 불 신앙의 장벽을 어떻게 뚫고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것인가? 무화과나무 아래의 구도자 (요1: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구도자는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이 땅을 회복할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찾고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우리의 정자나무 같은 나무로 많은 순례자들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기도하며 묵상하는 장소로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 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빌립과 한 동네 사는 젊은이로 빌립과 함께 율법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장차 오실 메시아를 대망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나다나엘은 매일 무화과나무 밑에서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생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 처럼 주님을 갈망하는 주린 마음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어야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나를 찾고 찾으면 내가 너를 만나리라 약속하십니다. 전라남도 해남 산정리라는 시골에 개구쟁이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구슬치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했습니다.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이었습니다. 학교에 갈 형편이 안됐던 겁니다. 그러나 소년은 공부를 너무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40일 동안 꼬박 쉬지 않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제목은 ‘하나님 전상서’였습니다.소년은 ‘하나님, 저는 공부하고 싶습니다. 길을 열어주세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도 좋고, 굶어도 좋으니 공부만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우표도 못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편지 받을 사람도 ‘하나님 전상서’라고 쓴 그대로였습니다. 우체부 아저씨가 이 편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해남읍 교회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감동 받으신 목사님은 그 소년을 부르셔서 아들로 삼고 학교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뒤 독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대학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한신 대학의 오영석 총장입니다. 편견의 벽앞에서선 구도자 구도의 길목에 언제나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이 편견과 선입관이란 것입니다. 제가 만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교회에 대한 편견과 목회자에 대한 편견 성도들에게 대한 편견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편견이 믿음생활에 크나큰 걸림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한 사탄의 무리들은 편견이란 걸림돌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사 혹은 장로의 비리는 신문에서나 TV에서 빼놓지 않고 목격하여 교회 못 나가는 구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나오던 어떤 분도 남편이 정명석 집단 이재록 목사 사건 등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교회를 못나가게 하는 겁니다. 어떤 분은 교회 나왔더니 그날따라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자 교회에 갔더니 맨 돈 이야기만 하더라고 교회를 안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들과 물질관계로 시험에 들어서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편견에 가리워서 진짜 진리를 못보고 있습니다. 이 편견과 선입관을 넘어서야 진리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과 빌립은 한 마을에서 함께 율법을 연구하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 한마을 사람으로 예수님의 제자의 반수가 한 동네 출신들입니다.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전도한 것처럼 빌립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율법에서 약속한 그분, 선지자들이 예고한 그분,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요 나사렛에서 자라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편견과 선입관이 복음의 걸림돌이 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느냐?" 고 따졌습니다. 나사렛 유대나라 촌동네 그야말로 후진 땅,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는 낙후된 땅, 무식한 사투리에 보통수준 이하로 살아가는 나사렛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건질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여러 번 거짓 메시아가 출현하여 신뢰할 수 없는 곳에서 메시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 대망사상, 그건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믿음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장소와 시간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소, 베들레헴에 나실 거라고 다 알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살았다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다가도 진작 메시아가 왔다 하니까 안 믿어요. 이게 인간의 결정적인 허물입니다. 예수가 와서 역사 할 때 모두가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있는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이런 사람들은 결국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그들의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요. 왜요? 현재에 안주하려고 기득권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고치고 싶질 않아요. 메시아는 기다리면서도 오신 메시아는 영접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이 모순이요. 이런 장애 중에 한가지가 편견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 베들레헴이냐 왜 하필이면 나사렛이냐 하는 것이지요. 나다나엘 이 장애물 앞에 서있습니다. 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대로 안주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편견을 깨기 위하여는 만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자기 혼자서는 꽤 그럴 듯한 생각을 하고 진실한 생각을 합니다만 하나님을 찾는데 막상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때는 선뜻 주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인 생각을 극복하십시오. 편견을 극복하십시오. 자기 중심의 생각을 극복하십시오. 인간적인 생각들을 극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고정관념이 있고 자기의 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더 뜨겁게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것들을 깨뜨려 버려야 할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회의와 갈등이 남아있다면 살아 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해서 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 나아와 내모습 이대로 주님을 만나면 해답을 얻는 것입니다. 자격 필요 없습니다. 공로 필요 없습니다. 노력 필요 없습니다. 믿음만 들고나오면 해결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이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러분, 모든 장애물들을 지나서 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응답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나는 구도자 빌립은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습니다. "와보라" 나도 편견을 가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거지요. 편견과 의심의 안개는 경험을 통하여 완전히 걷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빌립이 말하기를 "내가 직접 만났다"그럽니다. 내가 공부한 게 아니고 내가 발견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만나 보았다 할 때에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성경적 지식, 자기가 생각하는 편견, 자기의 전이해 이런 생각을 다 버리고 논리적인 생각과 지식적 방법을 버리고 그는 이 시간에 만남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진리추구 방법을 바꿉니다. 만남이란 종합적인 시기입니다. 만나지 않는데 문제가 많아요. 일 대 일로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이론을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만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만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일 대 일로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남은 모든 이론을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만나는 것입니다. 김정일을 자꾸 테이블로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불러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남한에 답방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만나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온다고 하는 액션, 행동이 중요한 거예요. 의심도 많아요, 생각도 많아요, 일단 믿음이 가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행동, 이 행동적 신앙 적극적 신앙입니다. 무화과나무 밑에서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의심과 회의는 그대로 남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편견을 가지고 세상에 남았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됩니다. 교회를 와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와보라"가 빌립의 전도 표제입니다. 전도 간단합니다. 생명의 공동체 주님의 교회에 주님의 몸안에 와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나다나엘이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다나엘을 찾아오십니다. (요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 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주님은 빌립이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그를 말하여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그를 가리켜 그 속에 간사가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거룩한 회의 거룩한 편견을 주님은 정직하게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 앞에 솔직하고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도 안 받은 나다나엘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진실하며 믿음을 가진 사람 나다나엘을 보고 계십니다. 주를 찾고 찾으면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나오는 자를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숨기지 않는 자를 즐거워하십니다. 함정을 파지 않는 자를 칭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함정을 가지고 살면서도 모든 핑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직한 회의를 가진 나다나엘을 칭찬하십니다. 신앙과 진리에 대하여 회의가 많은 도마는 확실한 고백을 합니다. 더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주님은 그의 정직함, 거룩함,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습, 기도, 그의 자라온 과거를 한 장의 사진에 담으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시고 그의 믿음과 소망,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 경건함, 간절함을 한 장의 사진에 담으셨습니다 "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겠다"고 하십니다. 어린 이삭을 번제단위에 묶어 놓고 칼을 쳐든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보디발의 집 안방에서 덤비는 여인을 뿌리치고 도망 나오며 "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리요"하는 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주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 때 주님은 무리 앞에 몇 장의 사진을 내어놓으실 것입니다. " 나는 네가 골방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할 때 너를 보았노라" "네가 춥고 진눈깨비 내리는 날 구역예배 갈 때 너를 보았노라" "네가 그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힘에 겹도록 물질로 헌신 할 때 너를 보았노라" "네가 정직하게 살려할 때 나만을 사랑하려 할 때 너를 보았노라" "주여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는 네가 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을 때 그때 너를 눈여겨보았노라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갓난 아이 시절에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눈, 어린 시절에는 형제들과 친구들의 눈, 성인이 되어서는 주변 여러 사람들의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노년이 되어서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됩니다. 유현례 성도 님은 6남매 자녀들이 지켜 부는 가운데 천국을 가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인생을 영원히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불꽃같은 눈(계1:4)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해 "내가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술집에 앉아 노닥거리는 것을 보았노라" 그러면 문제는 우습게 되고 맙니다. 그에게도 삶의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잠 잘 때도 있지요, 먹을 때도 있고요, 죄 지을 때도 있고요, 시장 갈 때도 있을 수 있고, 잘못 된 길로 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생애 전부를 묻지 아니하시고 경건의 절정이요, 거룩의 최고조에 예수님이 보시고 그 모습을 인정해 주시니까 얼마나 황송합니까? 사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인정하심 사랑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는 즉각적인 반응, 이것이 믿음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바돌로매>가 바로 이 나다나엘 이라고 합니다. 이 바돌로매 라고 하는 나다나엘은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산 채로 사람을 묶어 놓고 껍질을 벗겨 죽이는 처참한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나다나엘 이었음을 알 수 가 있는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미리 보셨습니다. 가장 신령한 시간, 경건한 시간, 영적으로 절정의 시간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 기도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노라""네가 봉사할 때, 네가 고통받은 자를 위로할 때, 구제할 때, 선교할 때 너를 보았노라"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는 감격하면서 감사와 헌신으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도자의 신앙고백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다나엘은 이제 고백합니다. "당신은 왕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완벽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의심과 회의와 편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는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 신앙을 고백하고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영국의 래클경이라고 하는 분이 음악을 하시는 분으로서 일년에 한 번씩 메시아 곡을 늘 교회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곡을 지금 연습하고 있을 때 그 연습 중에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 할렐루야 합창곡이 아주 웅장하게 나오죠. 이걸 연습하고 나서 바로 이어서 거기에 소프라노 아리아가 나옵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소프라노 가수가 유창하게 아주 잘 불렀습니다. 박자도 음정도 훌륭했습니다. 모든 합창대원들은 잠깐 쉬면서 이 아리아에 귀를 기울이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로 부르는 도중에 지휘봉을 딱 멈추고 래클경은 말했습니다. 당신, 내 주는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가수는 깜짝 놀라서 다시 생각하며 "예, 주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다시 불러, 다시 부르게 될 때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든 사람이 눈물로 감격하며 그 아리아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가 나의 왕인 것을 믿습니까?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인 것을 믿습니까? 당신의 신앙 고백은 무엇입니까? 나다나엘의 득도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요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 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은 구약성경 창28장에 야곱이 환상 중에 사닥다릴 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留宿)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 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나다나엘은 그 사닥다리가 무엇인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사이를 잇는 사닥다리이며 이 사닥다리는 좌인 된 인간과 하나님을 화목케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하늘에 닿으려고 무수히 시도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는 탑을 쌓기 위하여 벽돌을 날랐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의 기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구원의 사닥다리를 세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야곱의 사가다리를 읽다가 그리스도의 사닥다리 깨달아졌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다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다리를 놓아 보려고 선한 일을 행하고 철학을 연구하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려고 하면서 사다리를 놓다가 죽을 때면 다 닿은 줄 알지만 그 사라다리는 머리를 음부로 꽂히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구원의 사닥다리였습니다. 구도자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왕이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천국의 길을 찾았습니다. 바로 오늘 당신은 천국의 사닥다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계십니까? 구도자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오직 생명의 사다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득도하는 것입니다. 만나면 의심도 회의도 편견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와보라" 이 귀한 초청에 응답한 자들은 예수는 나의 왕이시며 구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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