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는 사람들 2002-11-21 10:27:59 2002/10/21 // 마가복음 6:1-6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는 축복을 선언하셨을 때 그곳에 있었 던 제자들의 감격과 기쁨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과 축복의 자리에 도마는 함께 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도마가 거기에 함께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축복된 자 리에 있어야 할 때 여러분도 함께 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자리에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제자들이 도마를 만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했을 때 역 시 축복된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을 도마가 하게 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그리고 여드레가 지난 날 도마도 함께 있을 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전의 축복을 다시 선언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늘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 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 다. 주님은 곧바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 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당황하여 주님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오늘 아침에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마음에 담아 믿 음 있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1절은 믿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란 헬라어 ‘휘포스타시' (uJpovstasi")는 ‘아래에'라는 뜻인 ‘휘포’(uJpov)와 ‘서게 하다’, 또는 ‘확립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히스테미’(ἵστημι)의 합성어입니다.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 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의 ‘실상’이란 그 자체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 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실체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행하는 확신입니다.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의 ‘것들’의 헬라어 ‘프라그마톤’ (pragmavtwn)은 ‘되어진 것, 사실, 행위, 사건, 업무 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인 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능력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증거’의 헬라어 ‘엘렝코스’(e[legco")는 법률 용어로 사용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 다. 구약에서의 이 믿음은 요약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 기의 실존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의 이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결합되어 있는 데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믿음이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이 믿음이 없는 경우의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함께 의식주를 같이 했던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했던 것 처럼 오늘도 관념적인 신앙에 머물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 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고향에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게 되었는데 고향 사람들은 그 지혜와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배 척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 없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담겨 있습니다. 영적 무지함의 불신 2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 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 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권능에 나사렛 사람들은 호기심도 가졌고 놀라기 도 했지만 그 이상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 안에 살아가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은 자기 한계 안에 살아가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 의 한계 안에 살아갑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신이 보는 한계 안에 살아가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 이 보시는 한계 안에 살아갑니다. 인간이 보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 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4:6절에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 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할 것도 없이 여기의 지식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영적 무지는 불신의 근간이 되며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그 삶을 황폐하 게 합니다. 류시화 시인이 엮은 법정 스님의 저서 ‘산에는 꽃이 피네’를 몇 년 전에 읽 었습니다. 그 때 마음에 와 닿은 말씀들이 많았지만 특히 삶에 관해 일깨운 말씀은 아직 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삶이란 단순히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듣 고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목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 삶에 경험 되는 것이 없으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믿고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시기와 편견의 불신 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 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 라.” 이 말씀 안에는 아주 무서운 인간의 편견과 시기심이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 냐?” 그것은 출신 배경의 선입관, 가족 상황의 선입관, 성장 배경의 왜곡된 선입관 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불신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장 무섭고 불행한 것이 편견과 시기심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선입 관에서 오는 무지요 수치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남편 없이 잉태되어 출생한 예수님에 대한 나사렛 사람들의 영적 무지와 편견 은 그 때까지도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멸시하며 자신 들의 오늘보다 예수님의 오늘이 훌륭한 것에 대해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가르침과 손에서 일어나는 능력을 보면서 분명 나사렛 사람들은 놀랐 지만 곧바로 시기심으로 인하여 그 옛날 예수님의 성장 과정의 직업을 들추어내 면서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는 나사렛 사람들의 편견은 스스로의 오늘이 얼 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혹한 표현이지만 이와 같은 잘못된 선입관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와 편견 은 무지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앎에서 나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 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안다는 편견으로 믿음 없는 사람 들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와 같은 안다는 것 때문에 알아야 할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화장실에서 보는 책’ 15페이지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등 장학사가 중학교에 장학 지도를 나갔습니다. 교실에 수업을 하는 한 학 생 앞에 지구본이 놓여 있었습니다. “얘야 지구본은 왜 기울었지?” “아이가 깜짝 놀라면서 제가 안 그랬는데요.” 기가 막힌 장학사는 담임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옆에 있던 교감선생님이 한몫 거들었습니다. “그거 사올 때부터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합니다. “장학사님, 국산품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육현장을 꼬집는 대학가의 은어를 편 집한 이야기책의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 까?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까? 구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까? 생각해 보았 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오래 믿어 직분을 가지게 되면서 사실은 너무도 모르면서 잘 안다고 하는 편견으로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모태 신앙이라 하면서 신앙의 감동이 없습니다.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렘과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의 고백도 간증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주보만 보면 벌써 목사님 설교 다 안다고 합니다. 그것이 유식의 편견입니다. 유식의 편견은 무식의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 다. 바울은 세상적으로 따를 자 없을 정도로 유식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 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 니다. 고린도전서 8: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 는 것이요” 빌립보서 3: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며 예수님에게 자신이 발견되는 것이 최고의 삶의 가치라는 바울의 고백은 진실로 바로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막말로 무식한 사람일수록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 오는 모든 것은 믿음 없는 자의 모습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못하던 사람이 잘되면 시기하고, 자기보다 못 배운 사람이 뛰어나도 시기하고, 자기보다 모든 면에 모자란 사람이 자기보다 능하면 시기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편견이며 믿음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역사 함이 없는 불신 5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 실 뿐이었고” ‘거기서’ 가 어디입니까? 편견과 시기와 선입관으로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 팽 배한 나사렛 고향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고 인간적인 눈으로 예수님 을 보았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어떻게 홍해가 갈라집니까?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감옥에서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저절로 열립니까? 어떻게 쓴 물이 나뭇가지 하나로 달게 됩니까? 어떻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까? 그러나 이런 모든 사건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믿어집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면 모든 것이 믿어집니다. 믿음으로 십일조를 하면 믿음대로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물질로 인한 고난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종을 섬기고 사랑하면 후손이 잘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그 역사를 믿는 성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 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에게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도 소설 한 권을 읽고도 감동하고 결단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도 감동하지 않고 결단 하지 못하고 점점 더 악해지고 추해진다면 어찌 믿음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도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습 니다. 믿음으로 사라가 늙어 잉태하여 출산했고, 믿음으로 모세는 세상부귀영화 버리 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 받기를 좋아했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믿음으 로 여리고를 함락했고, 믿음으로 기생 라합이 구원의 반열에 섰고, 믿음으로 나 라를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세력을 멸하기 도 하고, 돌로 치는 것과 톱에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하 지 않고 기뻐한 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을 확신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믿음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음을 파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과 믿음 있는 사람의 삶의 내용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 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서는 오늘도 예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지만 믿음 있는 백부장 같은 사람에게는 말씀 한 마디로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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