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확인 하셨나요 2002-09-16 14:21:08 2002년 09월 15일 // 누가복음 23: 39-43 죽음의 현상을,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Raymond Moody는 [삶 이후의 삶](Life After Life)에서, Near-Death Experience(죽었다가 소생한 경험, 유사경험이라고 함) 이 경험을 한 사람들과 면담하고,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유사경험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둘로 설명할 수 있다. (1) 환자 자신이 죽었다는 선고를 듣는다. 그는 몸에서 빠져 나와, 의사들이 그의 시체를 검사하는 것을 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국을 살짝 보여주셨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사도 바울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후12:4)고 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쳐진 경험이 있다(행14:19-20). 이것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됨을 말하고, 분명한 의식이 있음을 말한다. 부자는 음부에서, 너무도 심한 고통을 느꼈다. (2) 이런 상태에서, 어두컴컴한 곳을 지나 어떤 '빛의 존재'를 만난다. 그 빛의 세계를 잠깐 발을 디뎌 놓는 순간, 그를 감싼 사랑과 평안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못해 돌아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불 못이나, 깊은 어둠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거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너무 어둡고 불길한 악몽이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물론 성경이 아니라, 믿을 수는 없지만, 참고할만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천국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다. 확률은 반반이다. 그런데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얘기를 했다. 천국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만일 천국이 있다면, 영원한 삶이지만, 천국이 없다면 현세로 끝나기에,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은, 별로 손해볼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천국이 있다면,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하는 질문이다. 본문은 죽기 직전에, '천국'에 대한 보장을 받고,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예수님 좌우에 같이 매달린, 2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함께 강도질하다가 체포되어, 함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강도는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고,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처음에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을 욕했지만(마27:44, 막15:32),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고, 욕설을 퍼붓는 다른 강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람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40-41). 그리고 자기 곁에서, 똑같이 몸부림치며 고통 당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이 고백을 한 사람을 향해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살인 강도도, 천국 갈 수 있다. 창녀도, 천국 갈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는 직분도 받지 못했고 헌신도 못했으며, 안식일을 못 지키고, 침례도 받지 못했지만, 구원받았다. 믿음에는 크게 2가지가 있다. 구원받는 믿음과 생활의 믿음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강하고 약한 것이 없다. 있느냐 없느냐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면 구원이요, 받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생활의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매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말한다. 강하고 약한 믿음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다보니, 낙심되고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강도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천국을 보장받고 눈감을 수 있었든 이유는 어디 있나? 그는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나? 1. 심판하시는 하나님(40).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이 강도의 마음 속에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므로, 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도로를 달리다보면, 갑자기 속도가 줄어드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때는 틀림없이 속도 카메라가 있기에, 속도를 내지 않는다. 경찰이 없어도, 조심한다. 왜 조심하는가? 걸리면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이야기와 행동이, 몰래 카메라에 다 찍힌다면, 어떻게 함부로 행동하겠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낱낱이 살피신다면,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나?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하기에, 죄를 범하지 않는가! 불꽃같은 눈으로, 뚫어지게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나? 그래서 '존 칼빈'은 삶의 좌우명이 '하나님 앞에서'였기에, 평생을 하나님 앞에 산다고 생각했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다. 시139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 내가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고 심판하신다는 두려움 느껴야,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범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인데, 성경은 그것을 경외라고 말한다.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을 느껴야, 진지한 회개를 할 수 있다. 2.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믿음(41). "우리는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강도로서 다른 사람을 해쳤으니, 이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래서 롬3:10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성품,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잘못 태어났다.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죄지으며 살아가다가,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 사람들은 다 죄인인데, 이 땅에는 오직 2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면서,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전자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이 있는 죄인이다. 왜? 자기의 죄를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해야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해보면, 장롱 위와 밑이 먼지투성이다. 겉으로 볼 때는 먼지도 없고 깨끗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쌓이면서, 먼저 덩어리가 된다. 우리는 나름대로 양심 것 살아왔으나, 세월이 흐르며, 작은 죄들이 쌓여 큰 죄인을 만든다. 우리는 그게 죄인 줄 모르고, 죄가 쌓여 가는 줄도 모르고, 인간이 세워놓은 법을 지켰다고 하여 '의인'이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일전에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성철'스님이 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한 마디로 대단한 고행을 한 사람이다. 결혼 직후에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십 년 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십 육 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살았다. 또한 팔 년 동안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잤다고 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1993년), 마지막을 남긴 열반송이 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있다" 그는 사탄이 부처요, 부처가 사탄이라고도 하였다. 죄가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높으니, 산채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솔직한 고백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세상은 어차피 의인은 없으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느니라. 병자가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자기의 병을 인정해야 한다. 의사 앞에 나와서, 선생님 제가 여기가 아파요. 막 쑤시고요, 결리고요, 괴로워요. 이것이 정확한 진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고, 치료의 시작이 된다. 구원받기 원한다면, 이 강도처럼 '나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한다. 자기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가장 안타까운 죄는, 죄를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다. 비록 한때 죄를 범했지만,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진실로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다. 그런데 또 다른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욕보이고 저주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외쳤지만 못했다(39). 그는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죄가 더 큰데도, 죄가 없는 척, 남을 비판하고 죄인 취급했기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한다. "내가 무슨 죄가 있소?, 나는 양심 것 살았소, 내가 알고 있는 예수쟁이들은, 나보다 훨씬 행동이 못했소.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나는 못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엉터리요"하면서 자신 있게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만하면, 구원 얻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말만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지 못하면 잘못된 믿음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2) 주님 뜻대로 사는 자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주님을 저주할 자라고 할 수 없다(고전12:3). 3.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믿음(42) 하나님의 심판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매달려, 자기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마27:44절에 의하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했다. 함께 예수님을 욕했지만, 한 편의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하소서"(42)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이 강도는,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이 회개한 한 강도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오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자기들은 언덕을 올라오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불평하고 있을 때,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오시는 주님의 얼굴에서, 그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그를 따르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눅23:28). 또한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군중들과 함께 조롱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기도하셨다. 이때 그 얘기를 들은 강도는, 자신을 못박는 자를 용서하는 모습에서 메시아를 생각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하고, 오직 아프다는 생각밖에 못하는데, 예수님은 이 고통 속에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자, 이 강도에게 충격이 되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강도 짓을 한 나를 용서할 수 있고, 메시아의 나라로 나를 이끌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세요, 구원해주세요'하며, 주님께 매달렸다. 자신을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는 분으로, 믿고 간구 했다. 자신을 주님께 맡겼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있으면, 생명이 끝나지만, 강도의 마음은,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나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을까요? 믿는 자에게 죽음은, 결코 마침표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후, 더 큰 영광을 누릴 쉼표다. 한 순간의 죽음의 문을 넘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새 삶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결론입니다. 이번 추석에 많은 분들이, 고향에 가시리라고 생각한다. 고향에 가시나요? 눈앞의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성도의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돌아갈 내 고향은 하늘나라'♬ 성경은 또한 우리들은, 나그네 인생이라고 한다. 이 땅에서 오래 머물 수 없고,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거나, 결혼을 할 때에도, 미리 계획을 세운다. 결혼 기념일이나 생일 잔치와 같이 특별한 파티도, 미리 계획을 세운다. 우리가 여행길을 떠나기 전, 먼저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 보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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