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2002-09-04 16:30:43

2002. 8. 4.
시편8:1-9절
미국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심각한 출산장애로서 수술을 받으면 20년간 고통스러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2년간 더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아기의 부모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뉴욕의 한 변호사가 의사와 부모의 처사에 격분하여“한 생명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국회에 상정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법률상의 문제로서 참으로 풀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National Review 지는 세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미국 국민에게 선택을 요구했습니다.
1) 생명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지 켜야 한다. 2) 부모와 의사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
3) 해당 정부 부처(대법원)에 맡겨야 한다.

인생은 미완성이란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만 편지 그래도 써야해 우리는 써 야해, 인생은 미완성 못다한 사랑 그래도 사랑해 우리 는 사랑해야해’.

시편8편은 교독문 가운데 있는 대단히 유명한 시입니다. 여기 짧은 시는 고대 헬라의 철인 이전의 아름다운 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는 성서의 입장에서 본“인간이란 무엇이냐”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시인은 옛날 아브라함과 같이 밤에 장막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3절에 보면“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내”라는 것은 자신을 말합니다. 그리고“주”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크고 무궁한 하늘과 일월성신을“손가락”의 솜씨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연의 모든 것을 비교해 보니 자기의 존재는 너무나도 작고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시로 알려진 시편144: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나이까?”.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엄마의 품을 빌려서 이땅에 태어난 어린 생명이고, 고고지성을 지르며 울움을 터뜨릴 때, 괴롭게 답답할 때 비로서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자매가 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에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뒤로 두고, 철모르는 어린것들을 뒤에 두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에도 인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름의 계절이라 밖에 나가면 보이는 것은 차량들이요, 휴가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입니다. 시장이나, 기차역, 버스터미널에서, 길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허둥대며 어디론가 오고가는 것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들 그토록 분주하게 살아가야 하며 무엇 때문에 애타며 아우성치며 때로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핏대를 세워가면서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가고 다시금 인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인간입니까? 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인간입니까? 그렇다면 왜 먹습니까? 무엇 때문에 먹습니까? 일할 힘을 얻기 위해 먹는 것입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 것입니까? 아니면 남과 싸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먹습니까?. 남을 괴롭히기 위해서 먹습니까?.

우리는 매일 아침 각자 서둘러 직장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면 집으로 돌아와서 쉬다가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이면 또 다시 일터로 나갑니다. 어찌보면 다람쥐 채바퀴 돌 듯이 똑 같은 일을 되풀이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무엇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까? 우리는 왜 아담의 죄를 짊어져야만 합니까?.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며, 과연 부활은 있는 것일까?.
주님의 재림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데 과연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도대체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 괴테는“인간은 속아 사는 동물”이라고 하였습니다.
* 휠타아린은“꿈을 꿀때는 천사이고, 빵을 생각할때에는 거지가 된다”
* 아에스킬루는“넘어진 자를 발길로 차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 프래드리크 대왕은“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에 야수(野 獸)를 가지고 있다”
* 부라우닝은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격언에 보면
“고운 사람 미운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데 없다”-한국
“사람은 능력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영국.
“인간은 포(泡)와 같다”-그리스
“사람들 중에는 자갈 같은 인간도 있고 보석같은 인간도
있다-인도.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는 배반당할 따름이 다”-프랑스.

그러면 인간은 과연 무엇입니까?.
확실히 인간은 어쩌면 역설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한없이 기쁘면 웃어야 되는 데 울어버리기도 하고, 한 없이 슬프면 울어야 되는 데 웃어대기도 합니다.

인간은 천재적인 소질로 최고의 과학문명을 만들어 가면서도 자신들이 만든 무기나 기구에 의하여 죽기도 합니다. 인간은 고상한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림으로 인간의 마음을 아릅답게 하면서도 술에 만취가 되어 진흙속에서 딩굴기도 합니다. 때로는 짐승같은 야성과 함께 천사같은 고상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만물의 찌꺼기같은 존재이며, 또한 한 없이 선하면서도 한 없이 악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겉으로는 선한체 하면서 속으로는 크나큰 악심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인간은 미련한 벌레에 불과하면서도 또한 영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삽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양면성 때문에 잘못된 인간관을 갖기가 쉬운 것입니다. 어느 것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까?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되고 있을 때 한 석공이 채석장에서 성천 건축에 필요한 돌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건축자들은“이 돌들은 사용할 수 없네” 라고 말하면서 석공이 가져온 돌을 성전 밑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절벽 밑으로 굴려 버렸다.
그리고 7년이 지나 성전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주춧돌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하찮게 여겨 내다버린 돌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기드론 골짜기 밑으로 내려가 그 돌을 찾아다가 성전 중앙에 놓자 비로서 성전이 완성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달면 입에 넣었다가 쓰면 버리는 것입니까? 필요할 때는 온갖 아양을 떨다가도 때가 지나면 발길로 차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까?. 어떤이들은 낮은 차원의 인간관을 주장합니다. 인간을 완전히 물질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인간을 고상한 존재로 보는 사람들도 없지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한 속성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성장시켜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도 도덕적인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 기독교는 육적인 요소와 영적인 요소를 인정합니다.인간은 한 없이 추하고 더러우면서도, 또한 한 없이 고상한 신의 성품인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마도 그가 왕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니라 양을 치던 목동시절에 지은 것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아침, 저녁으로 양에게 풀과 물을 먹이며 보았던 자연과 우주의 장엄함을 마음에 두고, 한편으로는 그 우주와 비교할 때 보잘것 없는 존재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이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는 하늘의 장대함과 그 신비함, 그리고 그 영광앞에 설 때에 인간인 자신의 무력함과 초라함을 돌아보면서 이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이 시에는 광대한 우주와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과 광대한 우주에 있어서 한 점과 같고,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간의 모습(약4:14)이 잘 대조되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거대한 우주안에 있는 한 인간은 정말로 보잘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주속에 있는 인간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사람이 무엇이 관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한스토마’는 인간에 대해 모른다고 말합니다.
“나 여기 왔으나 어디로부터 인가를 모르노라.
나 여기 있으나 무엇때문이지를 모르노라.
나 여기 살았으나 그 수명을 모르노라.
나 가노라지만 어디로 인가를 모르노라”.

사실 우리 인간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또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기도 하고, 모른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이 인간입니다. 다시 전부를 알 수는 없지만 전부를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사람이 무엇이 관대”라고 말한 것은 인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생으로 태어나서 인생으로 살면서도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하여 의심의 벌판을 그토록 방황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인관대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그림자 같으니이다”(시144:3-4)하였는데, 오늘날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쉽게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쇼오펜 하우어’는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인생은 의가 없다”고 염세주의 철학을 말함으로 그의 저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0페이지만 읽으면 자살의 길을 택하는 자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인생의 생로병사에서 오는 의문을 풀지 못하고 결국 속세를 등지고 입산수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으로 태어나서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하다가 결국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과거 현재 미래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천태만상의 견해를 말합니다.
* 황산덕씨는“인생은 미꾸라지다”하였고.
* 파스칼은“인생은 생각하는 갈대다”하였으며,
* 뉴톤은“인생은 기계다”하였습니다.
* 니체는“인생은 배우다”
* 세익스피어는“인생은 불확실한 항해다”라고 말했습니 다.

1966년11월에 성심여자 대학에 다니던 양 모양은 염세주의 자들의 책을 읽고 학교 기숙사 굴뚝에 올라가 투신 자살을 하였는데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죽어야지요” 이 얼마나 무지한 결과이며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면 인간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이렇게 봅니다.
1. 인간의 무가치성
1) 인간은 무력하고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기에 강할 수가 없습니다.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잘 깨집니다. 견고한 것이 못됩니다. 인간은 흙을 취하여 만들어 졌기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다는 것입니다.

2) 우주공간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보다 129만7000배나 더 크다고 합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시속200키로미터로 질주한다면 169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큰 태양도 우주속에서는 조그마한 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구는 우주속의 먼지만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먼지속에 붙어 사는 50억이 넘는 인간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큰 소리칠 자격도 없고 목에 힘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추우면 춥다고 소리치고, 가뭄만 계속되어도 못살겠다고 아우성만 치고, 훙수만 쏟아져도 속수무책입니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말만 할 뿐입니다. 태풍 앞에 강한 바람 앞에 무력한 것이 인간입니다.

3) 보잘것 없는 인간이면서도 얼마나 잔인합니까?
개는 형제의 귀를 물지 않다고 하는데, 인간은 형제끼리 물고 얼퀴고 싸움니다. 옛날에는 밤길을 걸을 때 두려운 것이 맹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일 무서운 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낮에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범행 장소가 따로 없고, 범행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범행 수법 또한 다향하고 잔인합니다. 때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배반하기 잘 하고, 거짓말 잘하고, 이렇다 저렇다 때에 따라 청개구리가 되었다가, 갑자기 자태를 뽑내는 공작새가 되었다가, 어느 때는 비둘기처럼 순하게 보였다가 어느 한 순간에는 독수리가 되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낙아채기도 하고 하여튼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4) 기껏해야 100년도 못사는 것이 인간인데.
죽이고 빼앗고 돈 모아 얼마나 잘 삽니까?
오래 못삽니다. 금방 죽습니다. 그 짧은 인생도 어린아이 시절, 잠자는 시간, 학교다니는 시간, 쉬는 시간 빼고나면 얼마 안됩니다, 철들어 일하려고 하며 어느새 죽을 시간이 눈 앞에 다가 옵니다.

스위스의 80세가 된 노인이 있었다. 그는 80년 간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며 80년을 어디에 다 썼나하고 계산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록의 내용을 보면.
15년까지는 철없이 살았으므로 계산에서 빼고 그 이후를 계산하니. 26년 간 침상에 누워 잠자고. 21년 간 생업을 위해서 일하고. 6년 간 성내는 데 보내고, 6년간 식사시간으로. 5년 간 사람 기다리는 시간, 28일 간 이말하고 수염깎는 시간, 26일은 아이들 욕하는데,
18일은 넥타이 매는데, 12일은 담배 피우는 시간으로 46일 간 기쁜 날이었다.

성경은 인생은 피었다가 지는 꽃이라 하였고, 돋았다가 곧 시들어 버리는 풀과 같다 하였고, 생겼다가 없어져 버리는 그림자 같고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스핑크스가 있는데 하루는 그 앞을 지나는 인간에게 이렇게 물엇다고 합니다“아침에 네 발로 다니고 낮에는 두 발로 다니다가 저녁에는 세발로 다니는 것이 무엇이냐?” 만일 이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침 낮 밤에 비교되는 짧은 하루 해와 같은 것인데 그것을 모르면 살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인간은 어찌보면 참으로 보잘것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귀한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은 우주와 광대무변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깨어지기 잘 하고 토라지기도 잘하며, 불평과 원망 속에서 보잘것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이 무척 사랑해 주시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하나님이 지극히 위해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5) 인생은 거지 같은 존재입니다.
고전4:7에“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 모태로부터 재산을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요 빈손들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후부터는 어머니에게 젖을 얻어 먹고 살아야 되고, 그 어머니는 하나님께 얻어 먹어야 되니 결국 인생은 얻어 먹고 사는 거지 인생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생명도, 건강도, 물질도, 자녀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거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거지같은 존재일까? 그 이유는
(1) 빈손들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딤전6:7)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난 것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에도 빈손으로 태어났고, 죽을 때에도 빈손 들고 가기 때문입니다.

(2) 얻어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눅11:9-10)
거지가 굶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체면을 불구하고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길이 없 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생 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 하시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리라”(시127:1-2).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어 먹고 사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거지와 같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받고 감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시116:12-13)
은혜를 받은 자는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감사치 아니한다(롬1:21)하였는데 이는 거지와 같은 인생으로서는 무례한 행위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은 것이 적든지 많든지간에 받으면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도리이며 예의입니다.

명심보감 성심편에는“몸에 한 가닥의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니의 밥을 먹거든 매양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라”하였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은혜를 베푼 자에게 은혜를 보답하는 것이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배은망덕한 무례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창조주 하나님게 감사해야 합니다(살전5:18. 골3:15-17). 그래서 인생을 가리켜 거지와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인간을 말한다면 그것은 아름답고 축복스러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인간은 성삼위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 향상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1:26). 산천초목들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동물들도 하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릅니다. 생각하는 존재요. 말할 줄 압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줄도 압니다. 비록 땅위에 살면서도 그 마음만은 저 천국을 소망하면서 삽니다. 그곳이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저 광대무변한 우주도 인간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을 내실 때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귀한 인간이 왜 오늘처럼 천해졌습니까?
가치없는 인간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불행해 졌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생겼습니다. 눈물이 생기고 불행이 왔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입니까?.
사망과 비극이 인간의 종말은 아닙니다.

2) 멸망 받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장점이요 축복입니다. 죄로 죽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 헬라철학은“인간이여 너 자신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 로마 사람들은“인간이여 너 자신을 잘 다스리라”고 합니다.
* 유교는“인간이여 너 자신을 개선하라”고 합니다.
* 불교는“인간이여 허무한 것이 인간이다, 불타가 되어 라”고 합니다.
* 브라만 교는“인간이여 너 자신을 우주속으로 몰입시켜 라”고 합니다.
* 모슬렘교는“인간이여 너 자신을 굴복시켜라”고 합니 다.
그런데 하나님은“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범죄한 인간을 찾았습니다. 기독교는“내가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인 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시인이 말한 것은 초라한 인간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다는 간증입니다.

그렇다면 한 주간도 도대체 나같은 인간을 왜 불러주시고 사명맡겨 주셨는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이 엄청난 축복 받은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면서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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