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2002-09-04 16:14:47

요한일서4:7-21절
우리의 옛 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긔 어떻더냐 둥그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짜르더냐 밝고 남아 자일러라
하 그리 긴 줄은 모르되 끝 간데를 몰라라.
하였으니 옛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정체가 분명치 않고 걷잡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옛날 아라비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가 운명하실 때 자기가 기르던 말 17마리로 세 아들에게 재산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에게는 2분의1을, 차남에게는 3분의1을 ,막내에게는 9분의1을 나누어 가지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다 치른 후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분배하는데. 장남이 2분의 1을 차지하니까 8마리였습니다. 차남은 3분의1을 차지 하니까 5마리, 막내는 9분의1을 차지하니까 1마리 였습니다.
나머지 9분의 1을 나누지 못하여 고민하여 형제들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시던 어느 목사님이 이 광경을 보시고 타고 가시던 말을 주시면서 부스러기가 남으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싸우던 형제들은 목사님이 주신 말을 보고 자기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양보하지 못하고 싸운 것을 뉘우치며. 장남은9마리, 차남은 6마리, 막내는 2마리로 사이좋게 나누어 갖고 받았던 말을 목사님께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사랑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흙속에 사는 구더기도/사랑만 있으면/온 천하를 다스리는/사랑없는 신 보다는/신다움이 났다고/나는 감히 말한다.

사랑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입니다. 사랑은 율법완성입니다(롬13;8). 사랑은 천하의 신보다 났다는 시가 밉지 않게 여겨집니다. 사랑은 도덕 중의 도덕이요, 생명중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성서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일4;8).

인간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그 뜻과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만은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에 순종하면 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율법 앞에서 순종하는 것만이 최상의 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잘하는 자를 들어 한 시대에 귀한 일꾼을 들어 쓰셨습니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시대가 오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강조하신 믿음입니다.

"이 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도다"(마8:10).
"믿음대로 될지어다"(마8:13).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막9:13). "믿으면 영생이요"(요3:16). 이와 같이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셨고,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모든 축복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성령이 오시면서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고전12:31).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이 사랑이라 하셨지만 성령이 오신 후에야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의 크신 은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어야 현실을 꿈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 가면 믿음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어도 됩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세상에도 있어야 하고 하늘나라에도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은사입니다.
사랑은 고상한 인간 행위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이나, 건강, 또는 소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행복하고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고상한 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의 행복도 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박사가 말하기를.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사상수훈에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 그것은 사랑의 선포다. 기적을 믿는 다든지, 안 믿는다든지, 삼위일체 신이냐, 아니냐 이런 것은 중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내가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은 복음의 중심이며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 세상에 사랑을 거두신다면 역사는 종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땅 위에서의 실패 없는 사업은 사랑의 사업이요,
땅 위에서의 변치 않는 사상이 있다면 이는 사랑입니다.
누가 돈이 있어야 산다고 합니까?
사랑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죄인이 사는 것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개인의 영적 생활의 열쇠입니다.
사랑은 가정 생활의 열쇠입니다.
사랑은 교회 생활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부부간의 행복도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가정의 행복도 사랑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제일 좋은 길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1. 사랑의 정의
성 어거슨틴(St, Augustinus)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랑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자신이도록 만든다"

한 사람의 인물 평가는 그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랑을 떠날 때는 비인간화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과제는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 비로서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그 세 단계는 이렇습니다.

1)"에로스"(Eros)의 사랑."스톨케"(Storge)의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성간의 열렬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은 향락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나를 기쁘게 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스톨케의 사랑은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헬라어에서는 가족간에서 이루어지는 혈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즉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2) "필리아"(Phillia)의 사랑입니다.
가장 온후하고 좋은 낱말입니다.이것은 정신적, 인격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좋아 하기 때문에 누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기 때문에 누구를 사랑함요한복음21:15.-17에서 베드로는"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 사랑과 같은 사랑을 말합니다.

3)"아가페"(Agape)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은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요한복음3장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에로스의 사랑은 인격적인 필리아의 사랑을 통해서 정화되어집니다. 인격적인 필리아의 사랑은 영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될 때 비로서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크기만큼 위대하거나 작은 사람이 됩니다. 마태복음25:31-4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나옵니다. 그 기준은 작은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시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어야 합니다.
병든 이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한 의인은 영생을 얻고, 악인은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사랑을 배우자
1) 죄인들을 위한 사랑
주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강도만난 사람과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이제 그 영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구하시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친히 찾아와 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신비를 통해서 사랑과 겸손과 고난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셨기에 바울은 로마서5:8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섬기는 사랑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10:45)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것처럼(요13:4-11). 주님께서는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면 그 어디서든지 그대로 실천하는 사랑이였습니다.

3) 생명을 희생한 사랑입니다.
시간이나 돈을 희생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목숨 자체를 희생하신 사랑이었기에 그의 사랑은 이 세상 아무도 흉내낼 수도 없고 아무도"내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도 주님의 구속하신 십자가의 사랑만 생각하면 감격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는 서로 물고 뜯으며 살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살인의 종류를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상사는 문장으로 사람을 죽이고, 중사는 언어로 사람을 죽이고, 하사는 흉기로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어느 학자가 부부간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최대의 길로
첫째로-부부간의 긍정적인 자세로 대하는 것이요.
둘째는-서로 용납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요.
셋째는-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오르고 또 오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길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길도 그 사랑을 받는 길도 그 사랑을 행하는 길도 매일 꾸준하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의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말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습니다.

3.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1)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어머님들이 애초에 자녀를 잘못 가르침.
딸 보고는 하는 말이 "애야, 남자들은 도둑놈이라고 생각해라" "그건 다 늑대다!" 이렇게 가르쳐 놓았습니다. 그러니 시집인들 올바로 가겠습니까?

시집간들 남자들을 도둑놈으로 가르쳐놓았으니 한 평생 어떻게 마음놓고 살겠습니까? 아주 시작부터 잘못됐습니다. .남자보고는"애냐, 여자조심해라, 여자는 여우다"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가르쳤으니 여우하고 늑대하고 산다고 얼마나 힘이들겠습니까?

사랑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신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남자는 참 좋은 것이란다' '여자는 혼자서는 못산단다' '여자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야지 뭔가 믿고 행복하게살 것 아닙니까? 주님의 사랑은 믿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2)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진수는 버리는데 있습니다.
사랑의 진수는 없어지는데 있습니다.
참 사랑은 바로 희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버려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3) 에릭 프롬(Erich From)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① 사랑은 관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심이란 실제로 수고하고 땀흘리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니까 20년 넘게 공을 들여 양육하고 어머니는 10개월 동안의 임신의 수고를 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1년 동안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청년이 되기까지 뒷바라지 하는데 인생의3분의1을 자녀를 키우는데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땀과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은 짜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② 사랑은 책임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인데 이는 두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Respond(응답)와 Ability(능력)라는 말이 합해졌는데 즉,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그를 가리켜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고 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을 깨달아야 참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③ 사랑은 존경입니다.
자기에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을 가진 상대자에게 표현하는 심정입니다. 즉 상대방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개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④ 사랑은 이해입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위장된 사랑, 거짓된 사랑은 얼마 못가서 밝혀집니다.
겉만 보고 사랑하지 말고 상대를 이해하십시요.

4. 인내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루는 하늘의 천사장이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벌레와 같은 인간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악을 먹고 마시는 저 벌레 같은 인간들을 그 옛날 노아 때와 같이 다 쓸어버리시지요.
그리고 왜 새로 시작하지 아니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저들을 위해서 흘리신 피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흘린 주님의 그 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하신 진노를 참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끝까지 우리를 위하여 인내하시고 견디신 그 사랑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용기를 얻고 마침내 사도 바울 자신도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칼라일은-"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기 희생이다, 그 속에 모든 인생의 진리는 요약된다"고 했습니다.
톨스토이-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길은 오직 자기 자신 을 버리는 희생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각박한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그런대로 유지되어가는 이유는 그 누구인가가 자기희생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희생을 본받아 참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사랑을 받으려 하기 이전에 먼저 찾아가서 사랑의 손길을 펼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사랑에 이르는 길"에서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용서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용서하는 힘이 없는 자에게는 사랑하는 힘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끼치고 해를 끼친 사람을 몇번이고 용서한다는 것을 전제로 받아들이지 않고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악행을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위는 이미 인간관계를 가로막는 장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시초를 위해 필요한 분위기를 낳습니다. 용서는 화해의 촉매제입니다.

사랑 성도 여러분!
용서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입었으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 이웃의 악행이 그 인간됨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 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선한 측면이 있고,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악의 일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이중인격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서 부단히 분열과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두 필의 말에 끌리는 전차와 같습니다. 사람은 훌륭한 성군의 자질을 가지면서 죄를 범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만을 들여다 보지 말고, 그 밑에 있는 다른 착한 점을 볼 수 있을 때,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3) 원수를 굴복시키려고 하지 말고 우정과 이해를 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옆구리에 창을 넣지 말고 우정과 이해를 사도록 힘써야 합니다.

미움은 미움을 쫓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쌓고, 폭력은 폭력을 증진시키고, 횡포는 파멸의 길을 재촉할 뿐입니다. 미움은 사랑으로만 쫓을 수 있습니다. 어두움은 어둠으로서 쫓을 수 없고, 빛으로만 쫓듯이 미움과 폭력과 횡포는 사랑으로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성 헤레나' 섬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으면서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시-저, 샤르마뉴, 그리고 나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설한 제국은 어떤 기초 위에 섰습니까? 힘의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국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어려 세기 전에 예수는 사랑에 기초를 둔 제국을 이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백만의 사람이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가 곧 패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위대한 사랑의 승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패배감을 뛰어넘어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합시다.
일치의 뜻을 이룩합시다. 성도 여러분! 서로 용서합시다. 사랑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했듯이 용서합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치를 무릅쓰고 자기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했듯이 자기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직장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합시다.

여기서부터 우리 교회의 새 역사가 찬란하게 시작될 것입니다. 늦기 전에 주님의 사랑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귀한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복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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