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을 받았습니까?
2002-07-29 19:03:53

본문 : 행19:1-7 성령강림주일 2001.6.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요구하면서도 가
장 많이 모르는 부분 중의 하나가 성령
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
까? 불, 뜨거움, 능력, 은사, 방언 등을
연상합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춘 것도 아
닙니다. 그리고 성령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문이 바로 성령은 곧 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받았다
고 하면 무슨 병고치는 은사나 방언을
받거나 병을 고침받거나, 아니면 무슨 이상한 징조가 일어나는 것으
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
면 감정이 고조되는 정도에 따라 성령받은 강도를 측정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 성령님이 인격자이시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더라도
그것을 평소에 제대로 인격자로 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과 예수님이 인격자이듯이 성령님도 인
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아 그것을 이용해
보려고 하는 태도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
는 이제 성령님께서 나를 붙잡아 사용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격자로 알지 못하고 무슨 특
별한 능력정도로만 알다보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
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격자로 믿는다면 성령충
만을 위하여 애쓸 때, 성령을 사로잡으려
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님께 잡힌바 되려고, 성령께서 사로잡으시
도록 나를 그분께 드리려고 애쓸 것입니
다.

아마도 오늘 우리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만큼이나 초대교회에
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1절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
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
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8장 20-21절에 보면 "여러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그런데
19장 1절에서는 윗지방으로 한바퀴 돌
아서 다시 에베소를 찾았다는 것은 바울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
라 에베소에 다시 찾아온 것은 바울의 뜻
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에베소에 들렀을 때
는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두 번째로 와서
첫 번째로 하는 말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이때 대답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
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
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대화중에 바
울이 그들에게 다시 묻기를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
냐?"고 했습니다. 이때 다시 이들은 "요한의
세례입니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알았다면 성령이 있음도 듣
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들이 바울 이전에 받았던 가르침이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알면 쉽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마태복음3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곳으로 바리새인들과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
고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
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
고' 하시면서 11절에 가서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시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
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
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
요'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베푸는 세례의 한계성을 이미 선포하고 있으며, 그
의 사역이 아닌 다른 예수 그리스도 사역
을 통하여 주어질 더 완전한 세례에 대한 확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분명하
게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성령에 대한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리고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삶이 성령 받은 자의 삶이 아니
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살았더라면 사도
바울이 그런 질문을 던지겠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요? 성령 받은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모습들이 성령 받은 자
의 모습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누구를
만났는데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 배
부르다' 아, 배부르다'라는 작은 소리를
내거나 이쑤시게를 가지고 이빨을 쑤시고 있다면 '식사 했습니까?'라
고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마 묻는다
면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마찬가
지로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이 가르쳐 준
대로 아니면 성도다운 삶의 모습이 보였으면 '잘했습니다'하고 칭찬하
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성
도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실망 서럽습니다. 옛날 생활을 전혀 버리지
못했습니다. 말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
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똑같고,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구분 지
을만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전혀 보이
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저희들은 묻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
까?' '교회 다닙니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
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 '우리는 위대한 예언자 세
례 요한이 성령을 약속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주어졌는가에 대하여, 그가 오셨는가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
는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은 처음에 만났을 때 그들이 신자였다고 생
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
니까? 처음에 에베소 성도들을 만나 후 두 번째로 만났는데 그들이 예
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다 알 것입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믿을 때에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
었을 때는 에베소 교인들의 행동이 성령
께서 내주하시는 것에 입증해 주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삶
을 보니 그들이 신실하거나 정직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그들에게 예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열정과 뜨거움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세례요
한의 세례였습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 성
도들은 아직도 세례요한에 머물고 있는 구약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도
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
들은 새 시대의 독특한 복인 내주하시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온전한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세례
요한이 앞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했던 그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더욱더 알 수 없었던 것
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 비
로소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야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
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바울이 그들에
게 손을 얹었을 때에 성령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들이 부족하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성령을 받고나니 곧바로 나
타났습니다. 즉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의 표준은 우선은 회개가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음으
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런 확실한 믿음을 가진
다음에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때에 성령
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
를 받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
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에 주어진 성령임재 사건이 이 본문에만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만 보면 오늘
본문속의 성령 임재는 네 번째 사건이 됩니다. 1.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으로 유대인들과 관련이 있습니
다. 2. 8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죽고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일
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방으
로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특히 빌립
은 사마리성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전
파했습니다. 무리들이 아주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아주 잘 듣고 믿음
이 생기니 귀신도 쫓겨나가고 많은 병자
들이 고침받기도 하고 심지어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소문을 통해서 듣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확인을 했습
니다. 행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
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
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
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갔을 때 이들에게 성령이 내리
신 일이 없었고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세
례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이 강림했습
니다.
3.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 고넬료 가족이 성령을 받았습니
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서 설교를 했고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네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할 때는 초대교회에서만은 반드시
표징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들은 많지만, 성령
이 강림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임하거나 예언을 하거나 어떤 표징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으로 성령 받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
었습니다.

그렇다며 성도 여러분은 만약에 오늘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질문
을 던지실 때에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
까? 아니 다른 교회 성도들이 여러분을 만났을 때 무슨 질문을 던질까
요? '성도님, 언제 성령 받았습니까?'
라고 물을까요. 아니면 '성도님, 성령을 받기는 받았습니까?'라고 물
을까요.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령이 있는 줄은 알지만 성령을 제대
로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있고 요한의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은 못 받았습니까?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조차
도 모릅니까?
어디에 해당됩니까? 아니면 성령을 받은 줄 알았는데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성령
은 받지 못했다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요한의
세례, 즉 죄사함의 세례는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에베소 교회
에 도착한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교인들
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성령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
가 성령을 받았다고 할 때에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는가? 쉽게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 받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성령받은 것을 잘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
도 안에 들어와 있으면 이미 나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것
은 이미 변화가 시작된 것이요,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성령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할 때
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
까? "예" 입니까? "아니요" 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예수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성령도 받아야 합니
다. 아니 성령을 받은 체험을 해야 합니
다. 즉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령받은 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변화
입니다. 성령받고 안 변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변하는
가? 우선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
러므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면 거기에 아
름다운 신앙의 모습, 영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요한의 세례로서 단순히
세례받은 것으로만 생각했지 성령에 대
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세례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에 이들에게서 변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
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7절에 보면 "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성령의 역사는 바로 회개를 가져왔습니다.
1903년 8월 24일 함경남도 원산의 미 남
감리교 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하디 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의 죄
를 고백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 기도회
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 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
다. 기독인들이 거짓과 불신, 구박과 폭행,
술과 담배, 노름 등의 행동을 회개하면서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갱신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1906년 구정을 기해 서울에서는 정동감리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부
흥회가 열렸고, 평양에서는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남문교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평양에서는 1906년 여름
하디를 초청, 일주일 동안 기도회를 개최
하고 다시 외국의 부흥사들을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평양 기도회는 1906년 12월까지 계속되
었으며, 드디어 1907년 구정 기도회에서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숭덕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대성통곡하며 죄
를 고백했습니다. 통회 자복하는 현상은 길선주 장로가 인도하던 반으
로 옮겨가 저녁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마루를 치면서 괴로워
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일어난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많은 한국인
들이 그리스도교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교회의 회개운동
을 본받아 물질만능주의와 물량주의, 그리
고 성장제일주의와 값싼 은혜의 남발로 사회적 비판을 받는 오늘 한국
교회가 그 모습을 쇄신할 때가 왔습니
다. 이제 다시 한 번 한반도에 회개의 영으로 오신 성령의 강한 바람
이 불 때입니다. 오늘의 문제가 산업사회
나 도시화가 아닙니다.
하버드대학의 역사와 사회신학 교수인 하비콕스(Harvey Cox) 교
수가 있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The Secular City"라고 하는 책입니다. 세속
도시, 우리말로도 번역이 됐습니다. 그 당
시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잘못된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 신학의 주제
는 '신의 죽음'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아니, 이미 죽었고 또 죽을 것 같다 그런 얘기예요. 그게 왜
그러냐? 이 과학세상, 점점 과학이 발달하
니까 이 과학주의가 우상으로 올라서면서 일반적인 신의 잘못된 개
념, 신을 의지하는 마음 이런 것은 다 사라
진다. 또 곧 사라질 거다. 이렇게들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우
상 앞에 가서 빌고, 뭐 복을 달라고 빌고
하는 이런 건 다, 이제는 갔다. 이러한 종교 심성이라는 것은 앞으로
는 다 사라질 것이다. 이제 그래서 신의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마는 이에 반대해서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세
속 도시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
명합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촌은 하
나님이 만드셨고,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
다. 갖가지 죄악이 여기에 다 있고, 여기서 움트고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 도시 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또
뿐만 아니라 점점 세계가 도시화 되어가니깐 하나님의 신비를 느낄만
한 그러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합니다마는 하비 콕스는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 한가운데 그 세속도시 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
가 있다. 이렇게 역설을 해서 많은 사람
에게 감명을 주웠는데, 30년 후 오늘에 와서는 또 다시 문제의 글을
썼는데 "Fire from Heaven, 하늘로부터
오는 불길"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씁니다. 이것은 오늘 21세기를 향
한 많은 과학 문명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전자공학, 이런 것이 발전을 하면서 또 많은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어려
워집니다. 우리도 뭐 5일 근무제를 한다고 하는데 토요일 날까지 놀게
되면 또 교인들이 아예 금요일 날 저녁
에 놀러갔다가 주일날 교회에 못나오는 일이 생긴단 말이지요. 이렇
게 가다보면 이 교회가 점점 침체될 거 아
니냐? 이거 이 교회의 종말이 될 것 같다, 이런 걱정들을 하지요. 그
러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애당초 교회
는 성령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이고,
무슨 세계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게 아
니다."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혜, 이로 인
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또 교회는 부흥하
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신앙생활이나 교회에 관한 역사
나 세상의 역사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
집니다. 성령의 역사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거나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서 성령 받은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
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실 때에 성령이 있음
도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맏은 것 같
기도 하고 못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말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
가 성령을 받았거나 못 받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을 믿으라는 것은 성령을 소유하라는 뜻이 아닙니
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
아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고 우리 가정의 가장이 되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종이 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거역하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성령이 떠납
니다. 성령에 순종하세요. 성령님이 시키
는대로 그대로 순종해 들어가면은 충만함에 이릅니다. 마침내 그리스
도의 영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고 그의 기
쁨과 그의 능력 그의 용기로 충만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
다.
우리는 음식이 없어도 얼마 동안은 살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해도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습니
다. 그러나 숨을 쉬지 않고는 단 한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숨을 쉬
며 사는 것은 우리 육신의 삶에 있어서 이
처럼 중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호흡이며, 숨결이신 성령
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
한 생명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힘있게 하고, 생명을 약
동하게 하고, 성장과 변화를 주는 것은 하
나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수록
우리의 영적인 삶은 더욱 활기있게 됩니
다. 성령님을 여러분의 삶에 환영하십시오. 날마다 그분께 귀를 기울
이십시오. 성령께 붙잡힌 바 된 삶을 사십
시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예, 받았습니다. 라는 대답
과 함께 여러분이 받은 성령님이 여러분
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래
서 세상을 변화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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