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하다(탕자의 비유3)
2002-07-02 11:26:22

2002. 06. 30 // 눅 15 :11-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장 25~32절)
<목회기도>

좋으신 하나님!
6월의 마지막 날 기둥교회에 모이게 하시고
감사와 찬양을 부르며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6월 한달 동안 축구 때문에 기쁨과 감격을 느끼게 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신앙을 축구장과 그들의 생활속에서 드러냄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주고 감동을 준 선수들이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들 마음을 다시 고쳐잡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중국에서 선교하며 탈북자들을 돕던 목회자들이 붙잡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에게 바울과 실라가 가졌던 평안을 주시고
옥문이 열리는 은혜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서해에서 남북한 해군이 교전하여 여러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했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의 분단된 상황을 긍휼히 여기시어
통일의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어려운 때 군에 나가 있는 기둥교회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 저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상함이 없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병상에 누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석치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된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좋은 일도 많았지만 우울한 소식도 많은 주일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그동안의 수고와 땀의 결과로 4등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4등밖에 못했다"고 하지만, 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4등씩이나" 했습니다.
선수들이 어제 터키와의 경기에서 이겼다면 축구선수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을텐데.... 저는 그정도에서 그쳤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한 두 사람이 실수한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한 것만 말하시기 바랍니다. "4등씩"이나 한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입니까.

서해의 교전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죽었고 다쳤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겠지만 저는 그런 일이 있으면 가슴이 철렁해져서
뉴스에 보도되는 사상자 명단 가운데
우리 기둥교회에 관계된 사람은 없는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 가운데 군대에 자녀를 보낸 가정이 50가정쯤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염려가 안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다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명단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칠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는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혔습니다.
탈북자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강경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중국에서 탈북자 문제로 골치아픈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자국법을 유일한 기준으로 외국인을 처벌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부에서 외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태만하게 대하는지
다른 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사람이 사형을 당해도 아무런 대처를 못하였습니다.
정부는 자국민 보호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햇볕정책도 좋고, 이웃나라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중국에서 인도적 활동을 하다 체포된 한국 사람들을
데려오느냐 못데려오느냐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얼마나 인도주의 원칙에 충실한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잘 지켜볼 것이고, 정말 무능한 정부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은 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위정자들을 위해
한번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고를 당한 많은 가족들, 군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
외국에 나가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 나라 정부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게 해 달라고
모두 오른 손 높이 들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우리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참으로 우울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서해 교전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몸을 다쳤습니다.
해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려서 이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갈 수 있게 하시고 필요한 조치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연약하지만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시며
우리들이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을 통하여 응답하여 주시고
선한 결과가 있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하는 가족들에게 평안함과 위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께서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모두 자리에 앉으셔서 함께 찬송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오늘이 주의 은혜 가운데 기쁜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 찬송가 209장 1절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나의 죄 다 씻은 날 /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찬송처럼 천국의 소망을 가졌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눅 15:25~32)은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이 [탕자의 비유] 중에서 집에 있던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

부자집의 둘째 아들은 독립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 보고 싶은 욕망으로
아버지를 졸라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와 형의 그늘을 벗어나 먼 곳으로 간 둘째 아들은
• 13절에 ―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 14절에 ― "궁핍"해졌고,
• 15절에 ― "돼지를 치며" 다른 사람 집에 "붙어" 살았습니다.
• 16절에 ―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 했으나
그것도 없었습니다.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참해졌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장 비참해진 그 순간에', '가장 낮은 곳에 처한 자리에서'
• "스스로 돌이켜~"(17절) 아버지께 돌아 갈 생각을 했습니다.
히브리적 사고를 통해서 볼 때 "스스로 돌이켜"라는 관용구는
<회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18절에 ― "…아버지여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15:18)
("~: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 NIV)
"하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려워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하고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대명사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지은 죄는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관계를 깨고 떠난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으로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죄인으로서
"종"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아버지의 집에 살게만 해 달라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15:20).
비난도 없고 지난날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용서했다는 말도 없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20절).
그저, 불쌍히 / 측은히 여겼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은혜로…, 용서함으로…, 덮어줌으로… 아들을 아들로 받아주었습니다.


어김이 없었던 맏아들

그런데 큰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는 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름 아닌 큰아들이 그 기쁜 잔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데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풍류"라는 말은 '음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What was going on?) 물었습니다.

맏아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는 데 집에서는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인 이유가 재산을 나누어 집을 나간 동생이
금의환향(錦衣還鄕) 한 것도 아니고 재산을 다 날려 거지꼴로 돌아왔는데
단지 "건강한 몸(safe and sound)" 으로(27절) 돌아왔다는 것이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의 판단으로 보면;
화를 낸 큰아들의 말과(29~30절), 행동(28절)은
논리 정연하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잘 살펴 보면 맏아들은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인이 많은 부잣집인 아들인데도(17절) 불구하고
장남이 밭을 돌보고(24절), "여러 해… 어김없이" 아버지를 섬겼고,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한 적이 없었습니다(29절).
한 두해 잘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변함없이 잘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부모공경하는 것도 잠시 잠깐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변함없이 잘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번 잡아준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30절)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소를 잡으셨으니… 기막혔을 것입니다.
이 맏아들의 얘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땅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맏아들은 변함없이 아버지를 섬기고, 재산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나…
정말 중요한 일에 관심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집나간 동생이 어떻게 사는 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염려하며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은 분명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를 섬기며 사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아버지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없었습니다.
동생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자비의 마음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큰 아들은 <자기는 성실했고, 최선을 다했고, 결점도 없고…
하느라고 했는데…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집을 나갔던 동생, 잃었다 다시 찾은 동생,
죽었다 다시 살아온 것 같은 동생으로 인해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큰아들'의 태도는 누가복음 15장 1~2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와 흡사합니다.

왜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있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도대체 왜 우리들이 미워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고 예수님을 마땅치 않게 여겼고 원망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고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는 사람인데 우리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죄인들과 세리와 함께 음식을 나눌 수 있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본문의 첫째 아들도 그에 대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은 깨닫지 못하고
하인이 주인을 섬기듯 아버지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자신은 방탕한 동생과는 다른 효성스러운 아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바르게 잘 했는데 어떻게 저 방탕한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일 수 있다는 말인가"하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어울렸던 예수님을 향해 비난했던 것처럼
큰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향해 비난했습니다.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도,
그로 인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해력도 없었고 포용력도 없었습니다.
늘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감사도 없었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생활에 충실했고 자기 재산을 지키며
의무를 다하며 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잔치하던 자리에서 나와 큰아들을 권합니다(28절).
동생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라고 권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절) 하는
아버지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음으로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네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하는데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 혹시 감추어진 자신의 허물과 죄는 모른 채… 모르는 척 하며, 없는 척 하며…
탕자 같은 사람, 돌아온 사람, 이제 힘없고 말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난하며 손가락질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저런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 "나는 주일을 잘 지킵니다. 십일조도 드립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잘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는 아무 것도 없고 저런 사람이 잘 될 수 있습니까?"
혹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은 없으십니까?
- 혹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교회에서 봉사 많이 했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서
교회 나온 지 얼마 안되는 사람,
봉사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사람들,
성경대로 살지 못해 고개를 숙인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지는 않습니까?
"지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지가 교회 나와서 그동안 한 게 뭐 있어…"
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투덜대지 않습니까?
혹시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음에 감사하지 못하고…
신앙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왜 나만 이런 힘든 일이 반복되느냐고… 불평한 적은 없으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정말 감사할 일이 없으십니까?


다음 주일이면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처음 익은 열매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지금까지 지키신 은혜와 돌보심에 감사하는 특별한 기회이고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물질에 담아 드리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감사할 일이 없습니까?
우리 기둥교회에 큰 수술을 한 후 깨어나지 못하고
혼수 상태로 있는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은 여러 차례 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도 깨닫고 감사헌금 봉투에
"하나님, 이제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평안함을 주시옵소서.
내가 천국에 소망을 갖고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제목을 적어 내신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살아 있는 것, 건강하게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수술 받은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목이 뻣뻣하고 힘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이렇게 말씀을 전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 나를 일으켜 주셔서
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여러분의 가족 관계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받을 하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히11:6).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수고에
대해 갚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계22:12).
그것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 같고 복 많이 받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약속하신
하늘나라의 상급은 없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이 받는 영화와
잠시 받는 복에 대해 질투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 받는 복에 대해
박수를 치고 축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고와 땀흘림에 대해… 박수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탕자의 형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 처음 교회 나와 믿음을 가진 사람들…
- 새롭게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지 아십니까?
<여러 해 동안, 어김이 없이 명을 지키며 순종 잘 하는 사람,
천국에 가면 아랫목에 앉을 것 같은 사람,
예수님 곁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새신자 때문이 아닙니다. 처음 신앙생활 시작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낙심했다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하며 돌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어렵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변함 없이 일 잘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큰아들 같아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해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명을 지키며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생을 용서하며 받아들이고… 기뻐해 줄 줄 아는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특별히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서 봉사하며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도 친절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형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 당연합니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왔으니 멸시 받아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이, 잃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로 기뻐한다면
큰아들도 마땅히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각 가정마다 한 두 사람씩 속 썩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 있고,
형제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저런게 우리 집안에 있어. 어휴 골치야."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속을 썩이고 어렵게 하는 그 자식에게 부모의 마음은 더 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형제를 향해서, 그런 자식을 향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땅히 기뻐하며 그 일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범사에 기도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고 사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직접 받는 것이 내 눈으로 보기에, 내 판단으로 보기에
작은 것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와 평강의 복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는 복의 선언을 받았음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땅히 기뻐하며
마땅히 최선을 다하고, 범사에 기도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로 믿고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도록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이 시간 세상에서 땀흘려 애써 모은 것들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물질 뿐 아니라 저들의 몸과 마음까지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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