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름 이후의 신앙 2002-06-07 19:14:22 ■ 설교자:박 종 화 목사 ■ 설교일:2001년 7월 29일 010729.ram(LOAD:92) 구약의 말씀 : 출애굽기 16: 8 또 모세가 말하였다. "주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먹을 고기를 笭챨?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당신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너희가 원망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16: 23~26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다. 내일은 쉬는 날로서, 주의 거룩한 안식일이니,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라.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너희가 다음날 먹을 수 있도록 아침까지 간수하여라." 그들은 모세가 명령한 대로 그것을 다음날 아침까지 간수하였지만 그것에서는 악취가 나지 않고, 구더기도 생기지 않았다. 모세가 말하였다. "오늘은 이것을 먹도록 하㈅? 오늘은 주의 안식일이니, 오늘만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엿새 동안은 그것을 거둘 것이나, 이렛날은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 것이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였는데도, 백성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렛날에도 그것을 거두러 나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서신서의 말씀 : 빌립보서 2: 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 마태복음 14:13 ~ 21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아뢰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 보내서,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물러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밖에,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 속에 주님의 은총이 항상 크게 임하시길 빕니다. 사실 찬송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그 기적처럼 우리 사회에 찬양, 기도, 말씀이 넘쳐나기를 충심으로 기대합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배부름 이후의 신앙"이라고 정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신앙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배고플 때의 신앙"이 있고 "배부를 때의 신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육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제가 서양 교회에 갈 때면 언제나 받는 질문, 또 서양 사람이 우리 나라에 와서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경동교회를 보면 전부 배부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이렇게 꽉 차느냐는 질문입니다! 서양 교회는 어떻습니까? 서양에서는 요즘 교회가 차지 않습니다. 교회 자리가 하도 많이 비어서 그 아름다운 교회들을 팔려고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이라는 게 상가로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디스코장 같은 것으로 쓸 수도 없습니다. 결국 허무는 길밖에 없는데 허무는 데에도 돈이 듭니다. 허물자니 돈이 들고 유지하자니 유지비 드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배가 불러서 교회가 안 되는 겁니다. 우리 솔직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이 배고플 때에는 절실해집니다. 정말 배고플 때에는 어디든 먹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몰려듭니다. 사람이 모입니다. 모여서도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그래서 서양의 역사를 보면 전쟁으로 사회가 피폐할 때, 사회가 너무 불안하고 정신적인 안정이 없을 때 교회가 가득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을 그렇게 크게 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배도 부르고 복지사회도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다 적당해졌다고 생각되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의 질문은, 한국 사람들은 배가 부른 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자리가 꽉꽉 차니 무슨 연유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에 한국교회의 저력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질문에 한국교회의 저력은 "배부름 이후의 신앙"이 두터운 데서 나온다고 대답했습니다. 제 말이 틀림 없지요? 경동교회 교인들도 다 배부른데 배고픈 얘기는 제가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남들의 이야기일 겁니다. 다 배부르신 여러분, 그래도 신앙이 필요하십니까? 제가 그 얘기를 오천 명 먹인 기사를 통하여 하려고 합니다. 오천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성서 말씀에 보면 남자만 오천 명이므로 여자와 어린아이를 합하면 훨씬 더 많았을 겁니다. 최소한 세 배는 되었을 것입니다. 오천 명이 모여서 마지막날 저녁때를 맞게 되었는데, 제자들에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해도 졌고 이제는 집으로 보내야 되겠는데, 장소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갈 길도 멀고 배도 고프니 빨리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군중 가운데서 먹을 것을 모아 봤더니, 먹을 거라고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뿐이었습니다. 성서에 쓰여 있는 모든 숫자와 기록들이 있는 문자 그대로만의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신구약 성서 66권에 쓰인 글자로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가 다 밝혀질 수 없습니다. 성서에 쓰여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섭리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 뒤에 있는 엄청난 진리는 해석해 가면서 터득해야 합니다. 문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합니다. 대개 숫자는 종교적 상징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천 명 급식 이야기에서는 다섯과 둘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섯과 둘을 합한 일곱이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기독교에서, 성서 세계에서 중요한 숫자입니다. 하늘의 섭리를 말하는 숫자입니다.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습니다. 칠일 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칠년이 되는 해를 안식년이라 합니다. 칠년이 일곱 번 되어서 사십 구년이 지난 그 다음해를 희년이라고 합니다. 이 "칠"이라는 숫자가 가진 종교적 상징은 "하늘의 존재," "하늘의 뜻"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신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셨습니다. 일곱을 들고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떡과 물고기에 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하늘이 이 속에 임하셨다. 나누어주어라." 나눠주었더니 오천 명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여서 떡을 배불리 먹는 기쁨의 신앙입니다. 오천 명이 먹었던 엄청난 기적을 제자들도 보았고 거기 모인 사람들도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적을 위해서 모여듭니다. 설령 육신이 배고프지 않으면 영적으로 배고파서 모여듭니다. 모여야 그 속에서 기적이 생깁니다. 모여야 하늘 향한 기도가 생깁니다. 하늘 아래 기도가 생겨나면 그 속에 반드시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경동교회가 주일날마다 모입니다만, 일곱째 날마다 모입니다만, 왜 모입니까? 우리도 모여서 하늘을 향하여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간구 속에 임하셔서 우리가 배불리 먹고 마시게 되기를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교회를 가리켜서 영어로 congregation 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여서 간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주는 은혜를 나누는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먼 유대 땅, 오래 전에 일어났던 한 교회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걱정했습니다. "오천 명을 어떻게 먹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하늘이 내려오는 것을 기적이라 이름합니다. 그런 기적은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이 경동교회 모임 속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교회 올 때 무얼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빈 손으로 오셨습니까? 빈 손으로 오지 마십시오. 예수의 말씀입니다. "나한테 올 때는 수고스러운 것 가지고 오너라. 무거운 짐 다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그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을 내가 다 받고서, 대신 가벼운 쉼을 줄 것이다." 점잖거나 체통을 생각하는 분들은 그냥 오시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초대를 받고 그냥 오시면, 그냥 가셔야 합니다. 무언가 들고 오는 분에게는 그걸 주님께서 받으시고 대신 하늘의 기적과 은혜를 채워서 돌려보내십니다. 여러분 자신의 결단입니다. 꼭 들고 오십시오. 굶주림도 들고 오시고 괴로움도 들고 오시고 걱정거리도 가져오십시오. 교회는 넓습니다. 십자가는 큽니다. 여기에 무거운 것 다 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는 쉼과 가벼움을 주십니다. 이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와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 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를 먹는 이야기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고생하는 동안, 매일 같이 또는 일이 있을 때마다 굶주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합니다. "먹을 걸 주시오. 굶어 죽겠소." 그때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야웨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배고픈 온 이스라엘이 다 먹게끔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기록은 이렇습니다. "만나를 모으되 하루 먹을 만큼만 모아라. 하루 먹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모아 보관한 것, 곧 잉여분은 다음날 반드시 썩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안식일이므로 안식일 먹을 것까지 보관하여도 썩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만나의 이야기입니다. 만나 이야기에서 주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심과 노력은, 어떻게 하면 이방 신의 유혹 가운데서 백성이 함께 성전을 중심으로 야웨 신앙을 지키고, 주변 국가들의 도전과 침략 속에서 자신들을 지키느냐 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읽어보아도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의 한계를 넘어서, 유대 민족을 넘어서 다른 백성에게 전도했다는 사실은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시는 책무 역시 그렇습니다. "너희들이나 똑똑한 신앙인이 되어라. 야웨 하나님만 섬기고 이방신은 섬기지 말아라. 너희는 선민이니라." 그것이 몇 천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만나의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만 받아먹어라." 그 기적이 오늘 오천 명 먹인 기적에서도 똑같이 드러났습니다. 걱정하던 제자들도 만나의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오천 명 먹인 기적에서 전혀 다른 또 하나의 기적이 생겨났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만나의 기적과 같습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것은 다른 기적입니다. 구약의 만나 기적 속에 잉여는 없습니다. 신약의 예수의 기적 속에는 잉여물이 있습니다. 그것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이것이 "배부름 이후의 신앙"의 근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열 둘은 당연히 열 두 제자를 상징합니다.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끝이라면 차라리 유물론적 신앙이 훨씬 낫습니다. 뭐하러 교회만 가야 합니까? 뭐하러 신앙만 찾아야 합니까?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십시오. 충분히 배부르십시오. 그리고 그것에서 끝나십시오. 율법종교에서 끝나십시오. 그러나 예수의 종교는 다른 것 같습니다. 먹고 반드시 남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은총은 충만히 누리고도 반드시 남아야 합니다. 열 두 광주리는 남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드리는 기적, 제2의 기적, 잉여의 기적 이것이 오늘 주시는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먹을 것이 넘쳐서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에 차기까지 모든 인간은 신을 찾아서 모입니다. 그러나 열 두 광주리가 남은 뒤부터는 이제 신이 인간을 찾아 나섭니다. 열 둘을 전세계로 보냅니다. 문화의 접경도 넘고 인종의 차이도 넘고 모든 장벽을 넘어서 세상의 끝까지 열 둘을 보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열 두 광주리에 실어서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열 두 제자가 받은 기적의 복입니다. 우리가 모인 이 경동교회에 남아있는 잉여의 광주리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이 광주리는 반드시 예배 마치고 돌아가실 때 끌어안고 가셔야 합니다. 교회에 모여서 복받는 기적도 크지만, 남은 광주리를 끌어안고 나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전하는 기적은 더 큰 기적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교회의 복을 모이는 교회(congregation)의 복이라고 한다면, 열 두 광주리를 들고 나가는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교회는, 제가 또 한번 서양말을 쓰겠습니다. church inside out 의 복입니다. 흩어지는 교회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열 두 광주리에 담긴 하늘의 보화를, 배부름을 배고픈 자들에게 줍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열 두 광주리 중에 하나가 되도록 하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광주리에 든 빵과 물고기 속에는 하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헤맸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배부르고 복받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하러 지금 모여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에 감사하는 사람은 열 두 광주리가 낳은 두 번째 기적에 다시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전할 수 있습니까? 빵 속에 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주의 날,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주일의 기적은 주일 이후의 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실제 가능합니까? 열 두 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런 기적을 행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여, 술 취한 사람처럼 성령에 취해서 말씀을 선포했더니 하루에 삼천 명이 나눠먹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오천 명 먹이신 기적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삼천 명을 먹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도 삼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나가 보십시오. 가서 하늘의 음성을 전하면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배불리 먹는 신앙을 계속해서 전하십시오. 교회는 어떤 곳이냐 하면 바로 열 두 광주리를 마련하려고 오는 곳입니다. 수고한 것 가져오면 쉼을 줍니다. 고난을 가져오면 기쁨을 담아 드립니다. 외로움을 담아 오시면 충만한 하늘의 사귐을 바구니에 담아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우리 속에 주의 성령이 늘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던 우리 심령만큼,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갈급하게 부르십니다. "갈급하게 찾으시고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너희가 부르는 찬양소리 속에 내가 함께하고 싶다. 그 음성으로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소리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리는 그림 속에 함께하고 싶다. 그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영혼의 감명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호소하는 기도 속에 내가 함께하고 싶다. 그 기도가 응답되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치료하는 그 의료의 손길 속에 내가 함께하고 싶다. 나도 병자를 고치고 싶다. 너희의 신음하는 고통 속에 나도 함께하고 싶다. 그 고통을 나도 나누고 싶다. 죽어 가는 사람의 신음 가운데 나도 함께 하고 싶다. 그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환호하는 축제 속에 나도 함께하고 싶다. 하늘의 복을 나도 함께 축하하고 싶기 때문이다. 선포되는 말씀 속에 함께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그 말씀으로 배부른 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실 때, 하나님이 부르실 때 자신을 열어 놓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2의 기적을 이루어 주십니다. 기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함께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데, 하나님은 뭐 하십니까?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그렇게 안타까운 사람이 먼저 죽어야 됩니까? 왜 선한 사람이 복을 못 받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소리쳤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데…. 제1의 기적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문자 그대로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열 두 광주리가 남은 제2의 기적 속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되 전혀 다른 의미로 전능하십니다. 전세계로 흩어지는 열 두 광주리 그 속에 하나님의 전능이 담깁니다. 그 열 두 광주리가 땅에 묻히면 하나님의 전능은 땅에 묻히고 맙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까? 죽이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죽입니까?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애통하게 소리치게 합니까? 인생이 왜 이렇게 유한하고 곤고합니까? 전능한 하나님이 모든 유한과 약함을 다 해결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2의 기적을 만드신 하나님의 전능은 우리가 협조하는 한 드러나는 전능입니다. 내가 "예" 하고 움직이는 한 그 속에 하나님의 전능이 임합니다. 제2의 기적은 인간을 조건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응답하는 곳에, 진실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인간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그곳을 빈곳으로 두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의 동역을 통하여 전능을 행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역자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동역자로! 예수 재림의 그날까지.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의 역사에는 미완성의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그분에게 여러분 인생의 자그마한 공간만 주십시오. 예배에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떡을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소화하십시오. 친교실에 가셔서 음식을 드실 때는 눈으로 음식이 뭔가 보고 입으로 먹고 위로 소화하십시오. 말씀은 가슴으로 소화하고 음식은 위로 소화하며 그 속에 전능한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이미 이루어진 그 기적, 배부름의 기적의 신앙은 그대로 간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의 협력과 함께 이루어질 전능하신 하나님의 새 기적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 기적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기적을 일으키십시오. 주님의 복된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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