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포의 집" 소장 김해성 목사 2002-06-07 15:49:59 ![]() "중국 동포들에게도 햇볕 정책을..." ■취재 / 류 재 복(길림신문 서울특파원) 프 로 필 성 명 : 김 해 성(金 海 性) 생년월일 : 1961년생 출 생 지 : 전북 익산 학력사항 한국신학대 신학과 졸업 주요 경력사항 1986년 산자교회 설립 노동상담소 '희망의 전화' 개설 1994년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설립 1995년 한국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 인권상 수상 2000년 서울외국인노동자의 집 설립. 서울변호사협회 제8회 시민인권상 수상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서 살자" 동포들에게 격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2002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두 가지의 커다란 결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올 한해를 꼭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분의 집인 우리 중국 동포의 집 발전을 위해 굳은 결심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곳 한국에는 수 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교회, 개미와 같은 교회, 꿀벌 같은 교회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이끌고 있는 성남과 이곳 중국 동포의 집에 믿음의 활동을 넓혀나가 바로 이곳을 살아있는 교회, 믿음이 있는 교회, 사랑과 소망이 있는 교회로 발전 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2002년 1월 8일 오전 11시, 서울 금천구 가산동 146-1에 위치한 중국동포교회에서 담임 목사인 김해성 목사가 500여명의 동포들 앞에서 "새해의 결심" 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 김해성(41세) 소장. 그는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 우리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해왔고 또 하고 있는 사람으로 국내 언론을 비롯 외국인들을 통해 알려진 유명인사다. 그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중국 동포의 집, 그리고 서울 금천구에 있는 중국 동포의 집 소장을 맡고 있는 현직 목사이기도 하다. 김해성 소장은 자신의 강연을 진지하게 열심히 듣고 있는 동포들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계속해 말을 했다. "우리 중국동포의집은 지난해에도 역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월급을 받지 못한 동포들을 위해 기업주와 싸우면서 월급을 받아주었고, 손과 발, 다리가 부러진 동포들을 위해 보상을 받아 냈습니다. 또, 사기피해보상, 산재로 죽어간 동포의 장례를 치루어 주고 국적 취득의 보장을 위한 뜻 깊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는 절망입니다. 산재 피해로 인해 3천만원의 보상을 받아주었더니 그 돈으로 중국에 있는 본 부인을 버리고 이곳에서 젊은 여자를 얻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수년간을 고생, 목돈을 받은 후 한국을 떠나 중국에 돌아가서 술이나 마약 등으로 방탕한 생활 후 다시 한국으로 가게 해달라는 편지를 받을때는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제발 여러분들이 좀 더 새로운 생각을 갖고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에 스스로 고민 취재를 하고 있는 본 기자가 들어도 국내에 체류 중인 동포 모두가 절실한 삶의 각오를 가져야 할 구구절절한 내용이었다.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노동운동가로 활약해온 김해성 목사. 그는 현실에서 분명 자신의 노력과는 달리 결과는 완전한 실패라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정이 다르고 민족 문화의 정서의 차이에서 오는 민족간의 괴리감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해성 소장이 동포들에게 새로운 활력의 정신적인 양식을 주는 순간에 본 기자는 잠시 강연장을 나와 아래층 사무국에 들려 인간 김해성의 과거를 알아보았다. 전북 익산 출신인 김해성 소장은 1961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을 지낼 만큼 개화된 집안이었기에 초등학교 때 형과 함께 서울로 유학했다. 고교시절에는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하며 신앙생활에 정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목사를 꿈꿔 1979년 한국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깡다구는 데모와 함께 키워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허약체질이었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한신대 2학년 때인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데모대의 행렬에 가담했다.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던 중 최루탄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 전사로 돌변했다. 다음날 학교 기숙사에 모여 화염병을 만들며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했으나 불발로 그쳤다.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수배령이 내리자 그는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친구 집에서 바둑을 두며 숨어 지내는 동안 같은 반 친구 류동운이 광주에 내려가 시위에 가담하다 사살되었다. 친구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자신은 비겁하게 숨어 지냈다는 자책감은 그에게 두고두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가 다녔던 성결교회는 기독교 교리에는 철저하지만 사회와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그에 비해 한신대는 일찍부터 역사 인식에 눈떠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언제나 데모에 앞장서는 한신대생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뒤 최초로 집단 시위을 벌인 것도 그들이었다. 성결교회에 다니면서 깊은 신앙심을 가진 종교인이 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던 그는 한신대에서 역사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눈뜨면서 현실 참여에 적극적인 인간으로 변모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 인권운동 시작 그 무렵 그를 극도의 혼란으로 빠뜨린 것이 소위 조찬기도회였다. 기독교계에서 내노라하는 목사들이 조찬기도회라는 명목으로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TV방송국은 그것을 생중계한 다음 몇 번이고 재방송을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친구, 류동운을 죽인 책임자를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교계의 지도급 목사라는 사실이 한없이 슬펐다. 교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교회도, 학교도 떠나자고 다짐했다. 그때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외삼촌이 성남에 있는 이해학 목사를 만나도록 권했다. 성남 주민교회 목사 이해학은 그가 바라는 두 가지 요소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이해학 목사는 신앙심이 깊으면서도 가난한 이웃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성남은 서울 재개발지역의 철거민들이 모여 이룩한 도시였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은 가난하고 힘없는 철거민들이었다. 이 목사가 성남에 교회를 세운 것도 철거민을 위한 선교 활동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학 목사를 찾아가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민 교회로 옮기기로 작심했다. 그해 그는 아예 성남으로 이사 후 극기 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첫 번째 훈련으로 성남에서 광주 망월동 묘지까지 걷기로 했다. 주민 교회에서 교인들의 박수를 받으며 친구 한명과 함께 출발했다. 물집이 잡히고 피가 터져 엉망이 된 발을 이끌고 7일 만에 망월동에 도착했다. 친구 류동운의 무덤 앞에 서자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되돌아섰다. 1986년 5월 1일 김해성은 8시간 노동제가 실시된 날을 기념해 성남공단 부근에 산자교회를 세웠다. '산자교회'의 '산자'는 살아있는 자라는 뜻으로 부활한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교회의 설립과 함께 맨 처음 시작한 사업이 '희망의 전화'라는 이름의 노동 상담소 개설이였다. 산자교회의 설립 자체가 노동자 선교에 주목적이 있는 만큼 성남지역 노동자가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는 불이익을 해소하는 일에 주력했다. 구체적으로 임금체불, 산업재해, 해고, 폭행 등의 문제를 상담하고,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었다. 노동조합 설립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한편 그는 성남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 자리를 맡아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권이나 노동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던 중 외국인 근로자와 중국동포들이 찾아와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했고, 피부색이나 국적이 다를 뿐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 역시 노동이나 인권 문제였기에 관심을 갖고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처럼 관심의 대상이 외국인으로 바꾸고 그쪽 업무가 폭주하면서 그는 뜻하지 않게 외국인 근로자들의 대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 김해성 소장을 도우면서 중국동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외국인 박용 목사 「희망의 전화」로 외국인노동자들 상담 시작 사회 활동의 폭이 넓어지면서, 근로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했다. 그는 성남지역에서 시국 관련 시위가 전개되면 빠지지 않고 앞장섰다. 6·10 항쟁 등 큰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러다 보니 수없이 곤봉세례를 받고 병원 신세를 졌다. 시위 도중에 부러진 갈비뼈를 퇴원 다음날 다시 부러뜨린 일도 있었다. 1983년 민정당 중앙당사 앞 시위 때는 종로 경찰서로 끌려가 무수히 구타당하고 고막이 터지고 뇌진탕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마이크 목사' '매맞는 목사'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이렇듯 김해성 소장은 현재까지의 삶을 영위해오면서 보통사람들 보다는 확연히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또 그런 남다른 삶의 길이 현재의 김해성 소장을 중국 동포를 비롯 한국에 체류 중인 타 외국의 노동자들도 모두가 존경하는 대부로 변화시킨 것이다. 새해 첫날, 이 날 김해성 소장은 동포들을 위해 강연을 했지만, 마이크 성능이 좋지 않아 가끔 말소리가 끊기기도 했었다. 그만큼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서 김해성 소장은 동포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김해성 소장을 정점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 동포의 집에서 하는 주 업무는 월급문제 해결, 다쳤을 때의 보상, 사기·폭행으로 인한 피해보상, 교통사고 보상, 무료 숙식 및 쉼터 제공, 양약과 한약의 일요일 무료 진료, 사망시 무료로 가족 초청, 보상 장례, 의료보험 카드발급 송금, 직장 무료소개, 한국어교육, 컴퓨터교육, 무료 미용·이발, 국적취득 지원 및 무료 재정보증 그리고 억울한 일, 고민되는 일 등의 상담을 해주고 있다. 특히 다른 단체에서는 회원증(외환 비자신용카드 겸용) 발급 시 수수료를 받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무료로 회원증을 발급해주고 있으며 회원증 역시 많은 혜택을 회원들에게 주고 있다. 또한 이곳 중국동포의 집에 회원으로 가입해도 가입비 및 월 회비는 전혀 없다. ▲ 동포들을 위한 <중국동포의 집> 김해성 소장은 노동부 산하단체인 <사단법인 지구촌사랑나눔>을 설립하여 또 다른 봉사 활동도 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 히띠엘록교회, 漢城중국인교회(한족교회)등도 세워서 우리 동포가 아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한 강연에도 힘쓰고 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부근의 가산 우체국에서 특별히 동포들을 위한 국제우편, 소포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우체국 측에서 김해성 소장의 동포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감동, 봉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예는 참으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본 기자는 다시 김해성 목사가 동포들을 위해 새해 새로운 뜻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자고 격려사를 할 때 몇몇 동포들을 취재, 김해성 소장에 대한 생각과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들어 보았다. 체류동포 모두가 김소장을 대부로 존경 (1)지춘옥(여, 요령성 심양 서탑 45세) 한국에 온지 4년이 되었고, 김해성 목사가 있는 중국동포의집(교회)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동포들을 위해 교회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김목사를 알게 된 동기는 남편이 한국에서 차사고를 당해 어려움이 있을 때 김목사가 산재보험처리로 해결, 도움을 받게 돼 감동되었으며 두 부부가 한국에는 친척도 없고 갈데도 없어 김목사를 의지하면서 현재까지 지내오고 있다. 지여인은 현재 성남에 있는 노인 요양원에서 치매 및 중풍에 걸린 노인들의 간병 일을 보고 있는데. 매월 80만원씩 받고 있다. 이일을 하게 된 영향도 김목사 때문이라고 했다. 지여인은 또 이런 일을 자신이 응당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 계속해서 동포들을 위하는 일에도 앞장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2)홍호림(남 요령성 철령 40세) 홍씨가 한국에 온 때는 지난 해 7월 5일이다. 김해성 목사를 안 것은 한국에 온지 1년이 된 친 누님의 소개로 알게 되었을 때 누님에 따르면 "한국에는 조선족 동포들을 돕는 단체와 개인이 많지만 가장 존경받는 일을 하는 분은 당연 김목사고 김목사가 동포들을 위해 한 일은 수 없이 많다"고 해서 홍씨도 김목사를 만나보니 역시 하느님의 제자로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감탄, 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그는 현재 야식식당에서 일을 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3)김해철(남, 길림성 매하구 35세) 한국에 온지 4년이 되는 김씨가 김목사를 알게 된 것은 함께 온 친구가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는데 회사측에서 오히려 김씨 친구의 실수로 사고를 당했다면서 내쫓으려 하자 이런 사실을 김목사가 알고서 적극적으로 나서 병원 치료도 받게 하고, 보상까지 받게 해 준 현실을 보고, 감탄, 그때부터 김목사를 존경, 지금까지 이곳 교회에 나오고 있으며 타국에서의 외롭고 쓸쓸함을 김목사의 설교와 지도를 받으면서 보람 있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건설현장에서 뛰면서 매월 200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4)장미화(여 흑룡강성 상지 54세) 이곳 중국 동포의 집에서 지난 해 6월부터 동포들을 위해 역시 일을 보고 있는 장여인이 한국에 온 지는 5년이 된다. 그동안 다른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다가 돈 버는 직업을 포기, 자원봉사의 길로 나선 것은 자신의 제부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연인 즉은 제부되는 사람의 친한 친구가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이 일을 김목사가 해결해주자 감명 받고 "처형도 꼭 김목사님을 만나보라"고 수차례 권하여 만나본 후 결국은 장여인도 김목사의 인격을 보고 이곳 봉사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며 이 또한 하느님의 지시로 알고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 원래 한국인으로 1940년 중국에 갔다가 동포로 다시 한국에 귀국, 동포들을 돕고 있는 성애자씨 (5)성애자(여, 길림성 해룡 67세) 성여인의 고향은 원래 한국 경상남도 창령이다. 7살 때 부모를 따라 중국을 가게 되었고 60년만인 지난해 10월 17일, 고향 주민들의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는데 성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곧바로 물어물어 김목사가 있는 이곳을 찾아왔다. 이미 성씨는 중국에 있으면서 너무도 유명한 김목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데 실제 와서 김목사를 만나보니 고생을 하면서 동포들을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죽는 날까지 김목사를 돕겠다면서 지난해 11월 23일 이곳에 숙식하는 한족 및 동포들 120여명의 세끼 식사를 성여인이 손수 지어주고 있다. "내 조국에 왔기에 나는 응당 이 일을 하고 있다"면서 하루 하루가 기쁘다고 했다. 김목사는 현재 성여인의 국적 취득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 다른 곳에서 150만원을 준다고 오라고 해도 "나는 월급 없이 일해도 이곳이 좋다"는 그이지만 김목사도 성여인의 그런 아름다운 마음에 50만원씩 주고 있다. 이날, 본 기자는 상기 동포들 몇 분을 취재하는 것을 끝으로 다음 기회를 택해 다시 김소장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강연이 끝난 후 김소장을 단독으로 만나려 했지만 그와의 면담을 위해 밀려드는 수십 명의 동포들을 위해 본 기자가 양보한 것이다. 그 후 김소장이 본 기자에게 연락을 한 것이 2월 28일, 3월 1일에 시간이 난다고 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33인의 선열들이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했던 3월 1일 뜻깊은 기념일에 김소장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역시 뜻 깊었다. 3월 1일, 본 기자는 다시 김소장과 자리를 함께 하여 문답식의 취재를 했다. 1994년에 성남서 "외국인노동자의 집"으로 출발 ▲ 현재의 사업에 대해서 출발과정을 알고 싶습니다. ▼ '성남 외국인 노당자의 집'은 1994년에 상담소로 출발해 만남의 장소이자 쉼터로 발전했습니다. 평일에 그곳을 찾는 사람은 주로 상담을 목적으로 오갈 데가 없어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그곳 쉼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왔습니다. 산업재해를 입어 반신불수가 된 사람, 치료와 보상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 사망자 유가족, 직장을 잃어 오갈 데 없는 사람 등 매일 100여명이 그곳에 왔습니다. 하루에 소비되는 쌀은 반 가마. 쌀이 떨어지면 수제비를 쑤어 주었습니다. 외국인이 무더기로 찾아오는 날은 주로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면 말 그대로 장날이 됩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시외버스와 기차, 다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남까지 찾아오는 것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고 정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노동 상담과 쉼터로서의 역할 외에도 무료 진료와 한국어 교육을 했습니다. 무료 진료는 30여 명으로 구성된 의사, 한의사, 약사가 맡고, 일반의사는 일요일에, 한의사는 목요일에 무료 진료를 실시하였습니다. 한국어 교육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원 봉사자가 맡았고, 컴퓨터 교육도 했습니다. 우리 자원봉사자들이 하는 일은 또 있었습니다. 근로자에게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하는 것도 자원봉사자들이 할 일입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돌보는 것도 그들의 임무입니다.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요원이 10여명 있지만 그들은 활동비를 지급 받는 정도의 저렴한 보수로 봉사했고 지금도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후 2000년 1월 1일 '뉴 밀레니엄'이라 불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은 첫날, 우리는 이곳 서울 구로공단에 제2의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이름하여 '서울외국인노동자의 집'. '중국동포의 집' 이라는 간판도 같이 내걸었습니다. '벌집'이 밀집해 있는 속칭 '가오리'라는 동네였습니다. 한때 구로공단의 산업 전사인 여공의 숙소였던 '벌집'을 중국 동포의 보금자리로 탈바꿈 시킨 것입니다.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너무 비좁아 그 많은 근로자를 수용할 수 없는 데다 외진 성남까지 찾아오게 하는 것이 너무 미안해 외국인 근로자들이 밀집해 있는 '가오리'현장에 제2의 쉼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일요일만 되면 400여명이나 되는 외국인 노동자가 몰려와 성남 예배당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찹니다. 한달에 한두 번 쉬는 날 차를 몇 번 갈아타고 몇 시간이나 걸려 찾아오는 데, 편히 앉지도 못하고 빼곡이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들을 돕는다고 하면서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외국인이 밀집한 곳이 어디냐, 우리가 그들을 찾아 나서자고 해서 이곳 구로공단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이 곳에는 중국 동포들이 5만 여명이나 밀집해 있어 범죄 소굴이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고 의식을 변화시키자고 해서 이곳에 교회도 세우고 쉼터도 마련했습니다." 이 곳 쉼터는 2층과 3층을 합쳐 120평쯤 되는 건물로 개설할 당시에는 제법 넓다고 생각했으나 그후 어림도 없어 다시 1층을 임대했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동포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어 금년 1월 1일 더 넓은 장소인 이곳으로 또 옮기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필리핀人, 중국동포 보상금 받아줘 ▲ 중국동포 및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그간 너무도 훌륭하신 업적이 많은데 그 동 기가 무엇인지요? ▼성남에서 산자교회를 설립, <희망의 전화>라는 이름으로 노동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공장 근로자의 고충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성남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남지역의 인권변호사 이재명 변호사가 외국인 근로자 두 명을 보내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사람은 필리핀인으로 작업 중에 팔이 잘려 보상금을 받으려는 것이었고, 또 한사람은 16층 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추락, 사망한 중국 동포의 유족이었습니다. 필리핀인 보상 문제는 마침 문제회사의 사장과 잘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하루만에 해결, 보상금도 피해자가 요구했던 금액의 4배나 되었습니다. 중국동포의 사망 사건도 건설회사의 비 협조로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결국 행정당국과 지역 기관장을 동원한 결과 어렵지 않게 해결, 보상금도 이례적으로 후하게 지급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여 "성남 김해성 목사에게 가면 해결 된다더라"하는 말로 포장돼 전국 각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퍼졌고 나를 찾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체불 임금이나 산업 재해 따위로 고통 받는 사람들로 그들은 대부분 불법 체류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법에 호소 할 수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가 행여나 하는 기대를 안고 나를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있던 산자교회는 한적한 아파트단지 내에 자리 잡고 있어 외지인이 찾아오기에는 교통이 불편했고 교회가 비좁아 떼를 지어 찾아오는 근로자들을 수용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래서 노동 상담소와 성남지역 인권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어 그 일만으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외국인 근로자 문제까지 겹치자 일거리가 폭증했습니다. 체불임금이나 산재 보상금 같은 문제는 돈이 얽혀 있어 한 건을 해결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격무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나는 간염으로 쓰러져 장기 입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산자교회의 모체라 할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님이 사태 수습에 나섰습니다. 이목사님도 성남 지역에서 건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지역 사회 인사들을 소집해 '외국인 노동자의 집'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그 길만이 나를 살리는 길이라 역설, 외국인 근로자 문제는 김해성 목사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다같이 힘을 모아 그를 돕자며 앞장섰고 그렇게 하여 지역 유지들의 합의를 이끌어내 주민 교회 지하실 방 한 칸을 내주며 저로 하여금 ' 외국인노동자의 집' 운영을 전담케 했습니다. 1994년 4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은 주민 교회 지하실에서 출범했습니다. 조선족 동포도 수용해야 하지만 그들을 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중국 동포의 집'이라는 간판도 같이 내걸었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이 문을 열자 중국동포는 물론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미얀마, 몽골 등 각 나라 근로자들이 골고루 모여들었습니다. 성남과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습니다. 우리를 찾는 사람은 체불 임금이나 산재 보상 등 어떤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사람만이 아니었고, 일자리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사람도 끼여 있었습니다. 산업 재해나 질병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우리를 찾아왔는데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우리 집에 드러 누워 버렸습니다. 우리 '외국인 노동자의 집'은 처음 상담소로 출발, 찾아오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그곳은 만남의 장소를 거쳐 휴게실로 변했고 다시 숙소로 바뀌면서 이윽고 식당으로 발전했습니다. 지하실의 방 한 칸으로 출발한 '노동자의 집'은 찾아오는 손님이 늘어남에 따라 옆방을 야금야금 잠식했습니다. 계속 손님이 늘면서 110평이나 되는 지하실 전체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동포들 서로간의 질투와 이기심 꼭 고쳐야 ▲ 지금까지 활동을 해 오면서 때로는 좌절감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저는 이 사업에 손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 가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정부에서 1999년에 제정한 재외동포법은 사실 모순이 많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동포들에게는 혜택을 주고 러시아나 중국에 있는 동포들에게는 혜택을 주지 않는 차별화된 법률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개정을 위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10여일간 농성에 돌입,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았지만 진전이 없어 제가 대표로 하여 우리 중국 동포의 집에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던 것입니다. 그 후 지난해 11월 29일 헌법재판소에서는 이 법을 다시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결정을 받았는데 마치 이것을 자신들이 노력해 이룬 것인 양 타 단체에서 언론을 동원해 떠들다 보니 중국정부에서 민감하게 생각. 우리정부를 향해 '조선족은 중국 국민이며 간섭하지 마라.'고 하여 향후 이 법에 대한 개정 작업에 어려움을 느낄 것 같아 고민됩니다. 그러나 계속 노력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한국에서 일을 하다 뜻밖의 사고로 사망한 동포가 생겨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유가족을 초청하게 되는데 제가 모든 수속을 다해 초청장을 보내면 그 초청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행위, 또는 실제 유족이 한국에 도착해서도 사망자는 찾지도 않고 그대로 도주하는 행위, 또는 사망자 가족 및 우리 사무국 직원을 사칭하면서 동포가 동포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행위들을 볼 때는 정말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쓴웃음을 지은 후 또 말을 이었다. 지난 춘절(설날)에는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만두도 빚어먹고 놀고 싶다 하기에 이곳에 넓은 장소를 마련해 놓고 추위를 염려해서 새 이불과 담요 수 십장을 주었는데 다음 날 아침 가보니 담요, 이불 등을 모두 가져간 것입니다. 동포들은 정말 이런 습관을 고쳐야 되는데 그들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신 혼자만 아는 이기주의 정신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보람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면? ▼2000년에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제정하는 제8회 시민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이유는 1994년도에 성남에다 중국 동포의 집과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설립, 고통 받는 외국인들과 중국 동포들을 위한 쉼터로 운영해 왔다는 것과 외국인 노동자 대책협의회를 창립해서 역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제도개선 관련의 법 제정에 공로가 있다 해서 제가 선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 가산동에는 우리가 2000년 1월 1일날 왔습니다. 물론 성남에도 현재 외국인 노동자의 집과 중국 동포의 집이 운영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서울의 지역에 다시 동포들을 위한 둥지를 튼 계기는 1999년 7월에 보도된 신문기사였습니다. 5,000건의 강력범죄 중 3,000건이 동포들 개입 이곳 구로구 가산동 일대는 가리봉동을 비롯 서울 남부 경찰서가 관할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강력범죄가 발생하는 지역으로 보도되었으며 그 건수가 1년에 5,000건을 넘었고 3,000건은 중국 동포들이 개입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중에 2000건은 강도, 절도, 살인 등 강력범죄였습니다. 그런 기사를 보고 "우리가 가자, 우리가 가서 동포들을 도와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가리봉동에 와서 입주할 장소를 찾았는데 마침 3층 건물이 마땅해서 임대비용을 알아보니 1억 5천만원이라고 하여 엄두를 못 낼 때 묘하게도 기적이 발생, 협조자들이 나와서 돈을 마련 입주를 하였습니다. 그 후 2000년 7월, 당시 김종명 남부경찰서장이 사무실을 방문, 중국 동포의 집이 생긴 이후 7개월간 범죄가 감소가 되었다면서 에어컨을 사라고 금일봉을 주고 간 일이 있었는데 범죄감소 이유는 누구든지 3일을 굶으면 도둑질을 하게 되는데 굶는 자들에게 우리가 숙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고 불법체류자 및 밀입국자들이 일을 하고도 노임을 받지 못한것을 우리가 받아주고 해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실을 접할 때는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이곳 인근에 있는 동인의원(병원)에서도 우리가 오기 전에는 관내에서 칼로 찌르는 사건들이 많아 그런 환자들을 수없이 치료했는데 요즈음은 그런 환자들이 없어져 수입에도 지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보람을 느낀 것은 진기홍씨라는 동포인데 이분은 작업장에서의 실수로 한쪽 눈을 잃게 되는 불운을 겪었는데 이에 대한 보상금을 40만원 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단체가 처리해 준 것인데 너무도 작다보니까 다시 나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정밀하게 사건에 대한 분석과 조사를 하고 작업을 해서 65배가 넘는 거금 2600만원을 받아내어 그에게 돌려 줄 때는 정말 뿌듯한 승리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한국의 우수기업인 벽산엔지니어링 사장의 부인이 전화를 걸어와 우리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그 이유는 그 부인께서 네팔에 여행을 갔는데 한국에서 노무를 마치고 돌아간 네팔사람(여행 가이드)이 저를 소개해서 잘 들었고 그 순간 눈물까지 흘렸다면서 꼭 돕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하는 일이 진정 헛된 일은 아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또 2000년 5월 10일에 있었던 일인데 목단강에서 온 이혜숙(67세)씨는 96년에 한국에 왔는데 여권을 뺏기고, 300만원도 사기를 당하고 또 불법체류로 신고 돼 출입국관리소에 대기 중 뇌출혈로 쓰러져 동부서울병원에 이송, 병원비가 모자라 돈, 말(언어), 몸 모두를 잃었을 때 나에게 이 소식이 전해져 제가 이혜숙씨를 보호, 회복시켰을 때 아주 기뻤습니다. ▲동포들로 인한 일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면? ▼중국 동포 임호라는 분은 브로커에게 400만원이라는 거금을 바치고 나서야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아 시흥에 있는 한 주물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근 1년 동안 뼈빠지게 일했으나 월급 한 푼 받지 못했습니다. 월급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사장이라는 사람이 불법 체류자 운운하며 협박하는 바람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구로동에 있는 조그만 플라스틱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월급은 박했으나 제때에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는데 1년 반쯤 지나 월급을 더 준다는 말에 다시 이웃 공장으로 옮기자 바로 다음날 불법 체류자로 체포돼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졌습니다. 전 회사 사장이 밀고했던 것입니다. 불법 체류의 대가는 바로 강제 추방이었고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그의 호주머니를 뒤지자 현찰 200만원이 나왔습니다. 18개월 동안 불법 체류한 벌금으로 180만원을 제하고 나머지 20만원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비행기표를 사기에는 부족해 배표를 사고나자 만원짜리 몇 장 남았습니다. 그는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빠져 나와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설사 머물도록 허락해 준다해도 돈을 버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귀국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자기 한사람에게 온갖 기대를 걸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고, 조국이랍시고 가기만하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 한국에 가지 못해 안달했던 지난날이 한없이 후회스러웠습니다. 한국인들의 학대로 인한 동포들 자살은 슬픈 사건 그는 목동에서 구로동을 향해 무작정 걸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구로동에 다다르자 고가차도 쪽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고가차도 중간지점에서 신발을 벗어 놓고 몸을 날렸고 신발 곁에는 배표와 함께 유서가 접혀져 있었습니다. "한국이 슬프다. 조국이라고 믿은 것이 내 잘못이다. 조선족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 유서는 그의 아픔을 그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또 정관욱(사망 당시 25세)씨의 유골은 지난 97년 10월 이래 성남 중국 동포의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선원연수생으로 입국한 직후 인천 앞바다에서 배에 페인트칠을 하다 추락해 숨졌습니다. 외아들인 정씨를 잃은 부모는 한 달여 만에 한국을 찾아 유해를 수습했습니다. 그러나 연수생에게는 산업재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회사 쪽의 대답에 가슴만 쳐야했습니다. ▲김해성 소장을 도우면서 중국동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외국인 박용 목사 그리고 부천의 한 기계제작회사에서 일하던 김인성(사망 당시 48세)씨는 푼푼이 모은 2000여만 원을 회사 사장에게 빌려줬다가 결국 떼였습니다. 그는 절망 끝에 98년 3월 회사 현관 앞에서 분신자살했습니다. 죽기 전 그는 회사 복도에 스프레이로 "한국이 너무 슬프다"고 썼습니다. 김씨의 부인은 지금 남편이 한국에 오기 위해 진 빚을 갚으려 식당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성남 중국동포의 집으로 모셔진 이는 최영희(53·여)씨인데 최씨는 한국에 온지 엿새 만인 6일 갑자기 숨졌습니다. 두 아들이 놀라 달려왔지만 주검만 간신히 수습해 화장했고 고향땅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에 오느라 진 800만원을 갚을 길이 막막해서라고 합니다. 돈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산업재해나 사고로 숨졌고, 죽어서도 돈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한줌의 재가 되어서도 만리타향의 창고 한구석을 유택으로 삼아야 할 신세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들입니다. 대부분 산재로 숨졌고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간혹 유족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고용업체와 싸우고는 있지만 대개 고인들이 한국에 입국할 때 진 빚을 갚기 위해 돈벌이에 나선 터라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불법 체류자, 죽게 되면 국제 떠돌이가 되는 것입니다. 장례비는 1인당 400만원이고 1일 영안실비는 5만원 이상입니다. 성남 중국동포의 집 지하창고에 안치되는 유골이 한해 100여기에 이를 것으로 보이지만, 외국 국적자여서 납골당에 안치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서는 불법 체류자로 쫓기고 죽어서조차 어두운 지하창고에 머물러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런 일이 가장 슬픈 사건입니다. 임금체불, 폭행등이 동포들에게 가장 큰 불이익 ▲현재까지 일을 해오면서 무엇이 가장 동포들에게 주는 불이익이라고 보십니까? ▼ 외국인 근로자가 당하는, 가장 흔한 형태는 임금 체불입니다. 약속한 월급이 몇 달이 지나도 지급되지 않습니다. 저임금도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으나 체불 임금에 비하면 제때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외 수당이나 퇴직금은 생각 할 수도 없으며 그처럼 임금이 싼 데다 근무시간을 초과해 장시간 일을 시킬 수 있어 한국인 업주는 외국인을 선호합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에게는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부려먹으면서도 월급을 떼먹는 업주가 한둘이 아니며 월급을 달라고 하면 상투적으로 써먹는 수법이 불법 체류사실을 고발한다는 협박이었습니다. 60대인 중국 동포 김희택씨 부부는 월 40만원씩 받기로 하고 안양의 한 화훼단지에서 일했지만 5개월이 지나도 월급을 주지 않자 나를 찾아와 안양 지방 노동사무소에 진정서를 냈더니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며 양자를 불러들였습니다. 그들 부부가 노동사무소에서 진술을 시작하는데 뒤늦게 들어온 사업주가 핸드폰을 꺼내 112에 신고, 불법 체류자가 있으니 체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들 부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면서 월급을 받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한 후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외국인 근로자가 자주 당하는 또 하나의 불이익은 산업재해입니다. 각종 기계 작동에 미숙한 외국인은 공장 일을 시작하자마자 손가락이나 손목을 잘리지만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인은 배가 불러 3D업종을 기피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3D업종일수록 사업주가 영세했습니다. 2000년 7월 이전까지만 해도 5인 이하 사업장에서 작업을 하다 산업재해를 입으면 산재 보상을 받지 못했고 또 그런 사업장일수록 사업주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공장을 남의 명의로 이전하거나 재산을 빼돌려 놓아 보상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내막을 알기 때문에 한국인이 3D업종을 기피했던 것이며, 그 내막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그 자리를 메웠던 것입니다. 또 하나 외국인 근로자들을 분노케 하는 것이 폭행입니다. 그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은 사업주 아니면 한국인 근로자들입니다. 이해관계를 맺는 개인도 더러 있지만 그들은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과 폭행이라는 무기를 적절히 활용해 외국인 근로자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한 조선족 여인이 당한 폭행은 악랄함의 극치로 한국에 밀입국해 식당에서 일하던 그녀는 한 남자의 꾐에 빠져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술을 마시는 날이면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녀의 손발을 묶고 담뱃불로 그녀의 복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중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그 여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여 한국에서 살다가 남편이 죽자 남편의 재산을 아내에게 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하는 불이익이 있었는데 이후 시정을 위해서도 제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에 가장 집중하실 일이 있다면? ▼1999년도 12월에 발효된 재외동포법은 중국 동포를 동포의 범주와 혜택에서 제외시킴으로서 국내 중국 동포들이 "강제 징용도 서러운데 동포차별 웬 말이냐", "부잣집에 시집간 딸은 딸이고, 가난한 집에 시집간 딸은 딸이 아니냐"는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었습니다. 재외동포법이란 재외동포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법으로 재외동포들의 출입국 및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말하는 것인데, 과연 누가 1948년 이전에 이 나라를 떠나 중국에 갔습니까? 일제 침략과 수탈 속에서 착취와 수탈을 피해 굶주림을 면해보고자, 더 나아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려 열혈지사들이 떠나간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독립투사들과 이들을 지원한 사람들의 자손들을 동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애국심을 말살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99년 8월 31일에 있었던 국무회의에서 "중국과 구소련 지역 거주 동포들도 우리 동포임이 분명하므로 실질적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하며 국내 불법 체류동포들에게도 생활안정과 귀국을 보장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법무부는 벌금면제 기간을 두고 그 이후에는 강력 단속해 추방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재외동포법은 민족성을 무시한 악법 이는 중국 동포들의 한 줄기 희망을 앗아가는 검은 구름과 같은 불길한 조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550만의 재외 동포들이 있는데 그 중 중국 동포가 200만, 구소련 고려인이 70만 일본의 무국적자가 20만 등 전체 재외 동포의 과반수가 넘는 것인데 이들 절반이상을 배제한 동포들에게만 적용된 법이 과연 재외 동포들을 위한 법입니까? 제가 생각할 때 정부에서 재외동포법과 관련해 차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은 경제적 이유가 포함돼 있다고 봅니다. 정부는 경제위기가 닥쳐 어려워진 살림을 잘사는 재일·재미 동포들의 달러를 유치함으로써 경제를 만회해 보기 위한 방안으로 삼고 중국과 구소련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은 우리나라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라는 이유로 배제시킨 것인데 이는 한민족인 같은 동포를 경제적 이익을 따져 동포로 규정하고 또 배제시키는 것은 바로 민족성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이 법의 문제점과 개선을 위한 활동에 주력할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에서도 저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정부에게 새로운 조치를 취하도록 했습니다만 동포는 같은 핏줄을 말합니다. 어느 나라에 있건 잘 살든 못 살든 동포라는 단어로 불려지는 사람들이면 한민족이며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해서 이를 무시한 채 눈앞에 이익만을 따져 이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시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식에 반할 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더군다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적 세력에 의해서 낯선 땅에 삶의 터전을 꾸린 우리 민족에게 또 다시 상처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 동포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때까지 투쟁할 것이며 앞장서 나갈 것입니다. 일제시대 일가족과 중국으로 피신했거나 독립운동을 하던 그 후손을 불법 체류자로 내몰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저는 재외동포법의 통과를 위해 99년 8월에 10여 일간의 농성도 했지만 그 법에 중국동포들의 지위가 빠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반드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겠습니다. 현재 서울에는 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소가 6~7 곳이 있다. 그러나 단연 김해성 소장이 운영하고 있는 중국 동포의집이 원조다. 김소장을 돕고 있는 참모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사무국장인 이선희(여, 47세)씨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당회장인 조용기 목사와 한 연단에 서서 선교활동을 해온 유명인사로 지금은 김소장의 사랑과 희생봉사의 정신에 자신 스스로를 내던져 3년째 김소장을 돕고 있다. 독일인 목사인 요르그바루트씨도 5년째 김소장을 돕고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박용목사로 통한다. 그 외 최태송 목사(산재 담당), 조묘식 전도사(의료담당), 임종환 전도사(체불상담), 허두표 전도사(체불, 국적 상담) 등이 중국동포의 집을 찾는 동포들과 외국인들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중국동포의 집에서는 지난 춘절(설날)때 3일간 잔치를 벌였다. 설날 전날인 2월 11일에는 서울 88체육관에서 3000명, 설날 당일인 12일에는 이곳 가산동 동포의 집에서 1000명, 설날 다음날인 13일에는 성남외국인의 집에서 각국 외국인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푸짐한 잔치를 벌렸다. 3일간 이들을 위해 쓴 식대만 해도 3000만원이 되었고, 참석자 모두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 외에도 이 행사에서는 TV 10대, 컴퓨터 2대의 상품이 나갔는데 이 모두는 각 계로부터 협조와 도움을 받은 것이다. 3일 간의 행사에서 참석자들에게는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 새로운 일자리의 공고를 살피고 있는 동포들 1년에 5,000건 상담해결, 수수료 일체 없어 이곳 중국동포의 집에서는 동포들의 상담을 받아 각종 사건을 1년에 5000건 해결해 주고 있다. 상담 건 접수 후 20%정도는 해결을 본다고 한다. 그렇지만 해결에 따른 수수료 역시 없다. 모든 것이 무료이고 봉사다. 과연 이런 곳이 또 있을까? 현재 한국에 있는 동포들은 범죄행위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법 체류하나라는 이유만으로는 경찰에 연행되지 않는다. 이러한 장치도 역시 김소장이 법무부와 경찰청을 찾아가 법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권상을 탔는지도 모른다. 김소장은 96년 6월에는 불법체류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연행을 막다가 구속돼, 8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2개월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는 지금도 "정부는 조선족 동포들을 더 이상 불법 체류자로 내몰 것이 아니라 이들의 보호를 위한 법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소장은 현재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 동포들을 위한 "외중신학대학"을 지난해 3월 25일에 개교했다. 3년 과정으로 성경, 신학전반, 컴퓨터교육, 피아노, 영어 등의 과목이 있고 강사로는 미국의 잭워터월드 목사, 독일의 요르그바루트 목사, 중국의 주지호 목사, 필리핀의 제씨알베스터 목사, 인도네시아의 요하네스 목사, 그 외 김영선 선교사(중국어), 제임스킴 목사(영어), 김선옥 선교사(영어), 이선희 전도사, 최태송 목사 등이 있다. 학과로는 한국어학과, 영어학과, 중국어학과로 각과에 40명의 정원이 있으며 특전으로는 각종 장학금 및 필요시 기숙사와 식사제공 등이 있다. 매월 400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있는 현재건물의 건너편(구로동에 최초로 정한 곳)의 3층 건물에는 120명의 동포들(한족 포함)이 숙식을 하고 있고 성남에도 80여명이 있다. 이들 두 곳에서 하루에 쌀 1가마씩이 소비되고 성남은 김소장의 부인인 김현희 목사가 운영하고 있다. 3층 옥상에를 가보니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 보내왔다는 채소와 생선이 들어 있는 BOX가 가득했다. 모두가 김소장의 행동에 감탄, 그를 돕고있는 상징이었다. 그리고 또 각종 자재와 집기들이 가득했다. 이것 역시 모두가 김소장이 수집해서 모아둔 것이었다. 재활용품으로 다시 사용될 귀한 재료들이었다. 취재도중 또 한사람의 동포가 김해성 소장을 찾아왔다. 연길에서 왔다는 최광훈씨(46세). 그는 현재 연길 조선족 상업무역공사의 부경리로 있는데 지난 2월 15일 입국, 4월 16일에 귀국 할 예정이란다. 그러나 최씨는 돈을 벌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고 김소장을 볼려고 왔는데 그 기간이 무려 7년이 걸렸다고 했다. 최씨는 95년 5월에 한국인 김삼식으로 부터 노무 송출 사기(피해액 인민비 105만원)를 당한 200명의 피해자 대표로 찾아 온 것이다. 최씨는 여행비자로 인민비 10만원의 보증금을 넣고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직접 해결을 보려고 왔단다. 최씨의 사연을 들은 김해성 소장은 "꼭 도와 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씨를 위로하고 있었다. 1주일에 2∼3건 장례식, 현재 40여 유골 안치·보관 인간 김해성-그는 자기 인생을 산다기보다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니, 휩쓸려 사는 인생을 살고 있다. 그가 매일 하는 일은 찾아오는 동포들을 비롯 외국인 근로자들로부터 고충 사항을 들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산업재해에 얽힌 보상 문제를 해결하고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장례를 치르는 일도 생각보다 만만찮다. 우선 횟수가 많다. 1주일에 평균 두세건 씩 치러야 한다. 어떤 날은 하루에 4~5건의 장례를 치르기도 한다. 영구차를 부를 수 없을 때는 트럭에 관을 싣고 공항으로 운반하기도 한다. 산업재해, 질병, 교통사고 자살 등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한다. 나라에 따라 화장을 용납하지 않아 시신을 알루미늄 관에 넣어 공항까지 운반한 다음 비행기에 태워 보낸다. 운반비만 해도 만만찮은 비용이다. 지금도 성남 '노동자의 집' 창고에는 죽어서도 오갈 데 없는 사람의 유골 40여 상자가 보관돼 있다. 특히 동포들의 시신은 중국국적이라 까다로움이 많다. 각 지역에서의 시신을 성남으로 밤에만 집결시켜 화장을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집'을 운영하는데는 이래저래 많은 돈이 든다. 그런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후원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매스컴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돕겠다는 독지가들도 더러 있다. 그래도 자금은 턱없이 모자라 매일 허덕이며 끌어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거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중국동포의 집'을 운영해 왔다. 직원도 있고, 자원봉사자도 있지만 큰일을 맡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가 매일 만나는 사람은 20~30명. 하루 200여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또 현재 외국노동자대책협의회 상임대표로 뛰고 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훌쩍 넘어가 버린다. 밤에도 밀린 공문이나 상담 자료를 처리하다 보니 평균 2~3시간만 잔다. 장시간 그와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지기 직전 그에게 정부에게 바라고 싶은 희망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북한 동포들에게 향하는 햇볕정책을 중국 동포들에게도 썼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우리의 한 핏줄을 나눈 동포들인데 왜 차별을 합니까? 북한 동포가 한국에 오면 국적을 주고, 집을 주고, 직장을 주고, 돈을 주는 데 중국 동포에게도 하루빨리 그와 똑같은 혜택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역시 인간 김해성다운 바램이었다. 【 후원안내 】 ♣ 후원자가 되시면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하는 여름수련회, 각종 문화행사, 연말행사등에 초대되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나라를 방문하는 경우 실질적 여행정보를 드리며 현지인 친구와의 만남을 주선해 드립니다. 농협 169-01-293391 (예금주 김해성) 외환은행 102-18-33033-4 (예금주 김해성) 국민은행 213-21-1007-518 (예금주 김해성) 서울은행 52304-1842405 (예금주 김해성) 우체국 103481-0159450 (예금주 김해성) ♣ 외국인 노동자의집 쉼터에는 80여명이 넘는 산재 환자나 질병을 치료하는 이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감자, 양파등의 부식과 전기장판, 비누 등의 생활용품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중국 동포의집 전화 (02) 863-6622 http://www.migrantworker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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