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의 희망 2002-06-06 13:40:16 요한계시록 5:1-7 2001. 12. 2.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망적인 문제가 생길 때라도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종말의 때까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소망 가운데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쓴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소아시아 즉 오늘날의 터키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제국의 박해을 받고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큰 고통과 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던 자가 왜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도 요한은 절망의 늪에 그냥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지는 본분이 있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새로운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서 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진 소망의 보상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들도 이러한 보상을 바라며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환상 가운데 보니 우선 하늘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보좌에는 하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천사들이 호위하고 그 다음에는 스물네 명의 장로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스무네 명의 장로들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열두 지파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숫자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상 가운데서도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절망감을 맛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당하는 두 번째 절망입니다. 보아하니 하늘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행하는 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심판의 책을 들고 계시는데 어느 누구도 일할 분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는 소리가 들릴 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사도 요한은 자기라도 나아가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땅에 있었고 환상 가운데 보는 일은 하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이에는 그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큰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절망을 느끼면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때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사도 요한에게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절망 가운데 그 장로는 소망과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말이 떨어지자 누군가 나섰는데, 그는 ‘어린 양’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분이었습니다. 바로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였으나 다시 사셨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도장으로 봉한 책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해결점이 있습니다. 그 책 안에는 온갖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그가 그 책을 펴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게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소망을 가져다 줄 심판입니다. 반면에 믿지 아니 하는 자들에게는 절망을 가져다줄 심판입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이 세상의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날 것을 전합니다. 위의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만이 이 세상 끝날까지 유일하게 문제의 해결자가 되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키시며 우리가 절망에 빠질 때에도 소망과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베다니에 살던 친구 나사로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달려가 위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시질 않았습니다. 일부러 이틀이나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를 만났을 때 섭섭한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기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정말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해 앞이 캄캄한 절망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는 여자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 벅찬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시대요, 보호자 없이 살아가는 여자들은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의지하고 살았던 유일한 남자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으니 마르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정말 절망의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두 여자에게 나타나셔서 진정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그 무덤 문을 열도록 하셨습니다. 그 문이 열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 후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아주 간단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소생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마르다에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절망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문제를 해결하시며 소망과 희망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나 하늘에 계실 때에나, 또한 과거에나 현재나 미래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행함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십니다. 사람의 기대와 생각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면서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이 해를 되돌아 볼 때 우리도 이러한 절망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사도 요한이 하늘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절망의 소리를 질러대고 싶은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를 기다리시다가 가장 합당한 때에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저도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이 도우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본문은 정해졌는데, 도저히 합당한 예화가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부교역자 한 분에게 오늘의 본문과 설교내용에 합당한 예화 하나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도 여러 가지로 애썼습니다만 찾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시한 대안은 잘 맞지를 않았습니다. 정말로 저에게 작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저는 컴퓨터의 전자우편함을 열었는데, 예화 하나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에 선교사로 가 있는 목사님인데 아마 동기들에게 설교에 도움이 되라고 예화 하나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 예화는 오늘 설교 내용에 꼭 어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진실로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건을 대하면서 하나님이 작은 부분까지 간섭하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예화는 얼마 전 서울 기독교 어린이 글짓기대회에서 1등한 작품입니다. 오늘 설교 시간에 전부 읽기에는 좀 길기에 약간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예요. 구로 초등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잘 아시지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살 정도로 작은 방인데요, 우리 집은 32호예요. 변소도 없어서 동네 공중변소를 사용하지요. 우리 식구는 외할머니와 엄마, 여동생 용숙이랑 4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상자만 해서 4식구가 다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구로2동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고는 거기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운이 좋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 취로사업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있어요.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말해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 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 마냥 엉엉 우시길 잘하고 우리를 보고 "이 애물단지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버리자!"고 말씀하실 때가 많아요. (정말로 우리가 읽을 때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됩니다.) 지난 4월달 부활절 제가 엄마 때문에 회개하면서 운 것 예수님은 보셨죠. 저는 예수님이 제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정말로 이해 못했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이 죄가 없는 사람인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날은 제가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저는 매일 술 먹고 주정하면서 다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시죠. 그래서 저는 지난 부활절날 '엄마 미워했던 거 용서해주세요'라고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모습으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만 와락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그 날 교회에서 찐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시길래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구요. 그랬더니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는 화를 내셨어요. "흥, 구원만 받아서 어떻게 사냐?"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만원만 주시면 네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 하시지 않겠어요? 그래도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이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몰래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잖아요. 근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서초동 꽃가게에서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그리워하면서 불행한 지금의 상황을 썼거든요. 청송교도소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때를 분명히 그리워하시고 계실테니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 날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 오셨어요.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이 물어 물어 저희 집에 오신 거예요.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셨어요.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을 놓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책갈피에서 흰 봉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수표가 아니겠어요? 엄마에게 보여 드렸더니 엄마도 깜짝 놀라시며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마음속으로 '할아버지께서 가져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거예요' 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 라고 우시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머니도 우시고 저도 감사의 눈물이 나왔어요.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선 것 이예요. 대예배에 가신 엄마가 얼마나 우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 해 가지고 집에 오셨더라구요. 그리고는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을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엄마가 저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제가 커서 꼭 갚을께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사시도록 예수님이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꼭 약속해 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순수한 믿음을 가진 한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니! 그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은 그 아이의 가정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가정을 희망과 소망의 상황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어린 한 아이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정말 어린아이가 가지는 신앙과 같은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암담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도우심을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과 같이 믿음의 눈을 가질 때 우리는 바로 그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도 절망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소망을 바라봅시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간섭하실 것입니다. 놀랍고도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뛰어넘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러한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이는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이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는 절망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시는 그 분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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