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으로인가? 은혜로인가?
2002-05-31 19:02:27





사도행전 15:1-5




1975년 4월에 첫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해 가을학기부터 대학원 시험을 준비해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지금은 대학원학생이 많지만 그때는 4학기생 모두를 합쳐서 20명이었고 제가 입학할 때 세사람이 같이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입학금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 겨우 준비해 놓고 내일 목요일 학교에 가서 등록하려고 준비 다 해 놓고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방에 와 보니 등록금이 깜쪽같이 없어졌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지금 대학원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일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저는 누님의 도움으로 등록했습니다.

무엇인가 잘 해 보려고 마음 먹으면 꼭 방해거리가 나타납니다. 예수 잘 믿어보려고 큰 마음 먹고 교회에 다니려고 하면 꼭 방해하는 일이 생깁니다. 직장에 일이 생긴다든지, 친구에게 일이 생긴다든지, 신앙생활 잘 해 보려고 성경공부반에 등록하고 나면 꼭 일이 생깁니다. 애가 아프다든지 집에 무슨 일이 생기지요. 시집일이든, 친정의 일이든. 이런 시험거리들은 특별히 신앙이 깊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여기에서 잡혀 헤어나지를 못하면 신앙생활은 주변이나 멤돌게 됩니다. 몇십년 다녀도 신앙이 자라지 않아요. 개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부흥하려고 하면 반드시 마귀의 세력들이 반대합니다.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들은 '아, 마귀역사구나, 기도하며 이겨야지'하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시험도 이기고 신앙도 한단계 더 성숙하게 됩니다. 혹 신앙생활에 방해거리가 생기면 "하나님 뜻이 아닌가?" 생각하기보다 "이겨서 복받고 성장하자" 생각하며 열심히 기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에서 몹시 힘든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디옥교회에서 간증도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에 대하여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시기하고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울이 취한 행동을 보면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참 호감이 갑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이라서 율법이나 교리문제에 대해서는 전문성도 있고 고집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기자 자신들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대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교회 어른들, 선배들과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려 했습니다. 바울의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여유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문제를 지혜롭게 헤쳐나갔습니다.



1.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割禮)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대개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다가 예수 믿게 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안디옥은 이방인 지역이었으므로 짐작키에는 유대인들에 비해 이방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없이 우상을 섬기며 살다가 교회에 들어왔기에 처음부터 교회생활이 익숙치가 못했을 것입니다. 옛날 생활이 하루아침에 청산 되었겠습니까? 반면에 한평생 유대인들의 관습과 전통에도 익숙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던 유대인 성도들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태생의 차이가 있는 이방인 성도들과 유대인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 중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고 안디옥교회로 귀환하여 지내고 있을 때 유대주의자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느냐? 오직 예수만 믿으면 되느냐? 아니면 예수를 믿으면서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후자의 주장대로라면 다시 말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면 먼저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지금 생각하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간단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 유대인들은 같이 사는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에는 할례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할례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는데 문제는 유대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 유대인 편에서 보면 이방인-이 예수 믿게 되었을 때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받지 않아도 되는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예수를 믿더라도 저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문화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문제되는 것이 유대인들의 문화와 기독교가 어떻게 만나서 어떤 모양으로 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으면서 그들의 문화를 어디까지 지키고 어디부터 버려야 할지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사람들이 윗사람에 대하여 사랑하고 존경하며 인사하는 것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윗사람에 대하여 사랑하고 존경하며 인사하는 분위기는 다릅니다. 미국사람들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지만 우리나라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엄숙하고 좀 무겁습니다. 이런 문화는 예배분위기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예배는 일반적으로 엄숙하고 경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교회의 예배는 밝습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의 관점에서 얘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분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이방인과의 교제하는 문제도 심각합니다. 엄격한 유대인은 결코 이방인과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을 객으로 받을 수도 없고 이방인의 객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방인이 교회에 용납되어질 때 - 쉽게 말하면 이방인이 예수믿고 교회에 들어올 때 교회안에서 구별해야 하느냐? 아니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전혀 차이가 없이 동등해야 하느냐? 문제였습니다. 이런 처지에, 만나기조차 꺼려하고, 인사조차 나누지 않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서로 마주 앉게 되고 때로는 음식도 나누게 되었으니 문제가 생기게 되지요. 음식 다른 것은 그만두고, 먹는 방법도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반드시 손을씻고 먹어야 하는데 이방인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서 음식을 들고 기도한 다음에 나누어 주는데 이방인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이런 상황이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가 많았습니다. 초기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때에 우리문화에 갈등을 일으켰던 문제들, 지금까지 갈등이 되고 있는 문제들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제사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제사드려야 하느냐, 추도예배 드려야 하느냐 그런 문제를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 문화에 대해 너무 피상적인 이해로 신학적 해석을 했기 때문에 "제사는 우상숭배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렸습니다. 제사에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화속에 흐르는 조상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나 - 현대에서 그렇게 봅니다.



어떻든 안디옥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내려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더라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라는 가르침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초대교회는 밖에서는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핍박하고 안에서는 예수를 믿되 유대주의의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를 받는 난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2. 할례의 의미

문제는 유대인들이 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문자적으로 보면 '칼자국을 낸다' '둘레를 자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할례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제도입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 백성이다, 내가 너를 보호하여 너와 함께 해 주겠다' 하는 언약의 표시로 이방인과 구별하여 주셨습니다. 무슨 언약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결하게 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믿고 의지하고 살아라. 만일 언약을 어기면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할례가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또 하나 할례는 몸에 새기므로 잊지 말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couple ring이라는 것 하더라구요. 똑같은 반지를 만들어 끼고서는 볼때마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하는 공개적인 표시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couple ring하다가도 빼버리면 그만이기는 하더라구요)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그 이상입니다. 한번 받으면 지울 수 없습니다. 원 상태로 회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배었던 양피를 다시 붙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할례를 볼때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내의지, 내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간다' 라는 고백과 다짐을 하고는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으로 가는 도중에 아주 중요한 여리고 전투를 앞두고 그동안 제대로 행하지 못햇던 할례예식을 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잘못하면 전투력에도 커다란 차질이 올텐데.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확신이 필요했고 하나님으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신앙으로 성결해지고 언약을 다짐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할례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의미상으로 본다면 할례는 지금의 무엇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까? 형태는 다르지만 바로 세례의 의미와 같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고백아닙니까?

그러면 왜 유대주의자들이 예수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이방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이제는 오직 예수 중심으로 하나님뜻대로 살겠다라는 고백이 아닙니까? 고백과 결심이 있었는데 꼭 표시를 해야만 합니까?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이방인들의 주님이 내 구세주이시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새 삶을 살겠다고 하는 고백과 결심을 간과하고 '할례'라는 형식만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이 할례만이 아니라 다른 율법도 다 지킨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만일 다른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할례 받지 않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 다른 율법 한두개라도 지키지 못하면 결국 할례받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2:28-29에 말합니다.

"28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만일 할례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십자가의 도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5:2에서 말합니다.

"보라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본문15:2-5까지 함께 봅니다.

"2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몇사람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합니다. 계속해서 3-4절 봅니다.

"3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일을 말하매"

바나바와 바울이 보고한 내용이지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충만케했던 일들을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반대파가 나타납니다.

"5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이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섭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내용과 흐름입니다.



3. 무엇을 기뻐합니까?

5절을 다시 봅니다.

"바라새파 사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혀주는 구절입니다. "바리새파 사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 -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그런데 바리새파의 기질이 그대로 있는 사람이라는 말 아닙니까? '바라새파'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라새파 사람이란 '분리주의자'란 뜻입니다. 자신들을 세속에서 분리시켜서 자신들만 율법대로 깨끗하고 정결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만 더 성결하고, 거룩하고, 이방인들은 더럽고 짐승같다고 생각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면 뭔가 그런 것이 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가 좋아서 믿게 되었다면 옛날 것은 버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바리새파 근성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바리새적인 교만이 그냥 살아 있어서 이방인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은근히 업신여기고 뭐가 아래로 내려다 보고 차별하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말로는 바라새파라 하지 않겟지만 예수 믿기전 세상에 있을 때 내세우던 자존심이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에서 남 위에 군림하며 휘두르려고 하던 끼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섬김으로 인정받고 섬김으로 지도자가 되는 교회내의 질서는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옛것, 세상 것, 옛사람 - 모두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의 고백만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4절을 보면 대표로 예루살렘 교회에 파견된 바울과 바나바와 형제들은 자기들을 영접해 주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내용이지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신학적인 논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인 논리로야 바울을 따라갈 사람이 있었겠어요? 그런 이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방인들에게 전도할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고, 기적도 일으켜 주시고, 성령도 충만케 하셨던 그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해결의 길이 어디있습니까? 해답은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지겠습니다만 하나 중요한 것 지적합니다. 3절 후반부입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이 다 크게 기뻐하더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로 들어왔다고 하니 듣는 예루살렘교회의 형제들이 다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하여 예수 믿고 교회에 와서 구원받게 되었다면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것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같이 기뻐해야지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우리교회는 무엇을 기뻐합니까? 교회건물입니까? 역사입니까? 예산입니까? 성도의 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한사람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아멘) 다음주에 더 말씀드리고 오늘 말씀 정리합니다.



정리

신앙생활 할 때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이 예수 믿더라도 할례받아야 구원받는다 주장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한 탓입니다. 교만과 선민의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만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할례만 하면 율법은 다 지키는 것이 됩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문제에 대한 결론은 다음시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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