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 마음을 합하라 도우라
2002-05-28 14:49:03

빌립보서 4:1-3 // 2002.05.26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고 불렀습니다.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떨어져 있으면 보고싶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말이 되면 주일날 함께 예배드리던 송도제일교회 성도들이 보고싶어 몸살이 납니까? 그런 줄 압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받은 증거입니다. 그 다음에 기쁨과 면류관이란 말씀은 특히 주님앞에 섰을 때 나의 자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주님앞에 섰을 때 "너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라고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오는데 그때 우리의 자랑은 내가 다니던 회사, 학교, 대한민국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전도하며 양육하던 송도제일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살날만큼 사모하며 섬기고 아끼는 교회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공허란 인생을 사는 사람일까요?

제가 시무하던 교회의 어떤 집사님이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장남이라 아버지하고 친구처럼 지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허전해서 못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면했습니다. "집사님,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세요. 예수사랑으로 깊이 계속적으로 사랑하세요. 위해서 기도하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세요.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만의 부모와 일만의 형제자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집사님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사님이 소속해 있는 교회의 성도님들입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 읊었지요.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면 행복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뜨겁게 사랑했으므로 정말 행복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면 행복해집니다. 교회는 신앙의 어머니요 구원받은 영혼들의 고향입니다. 이곳에서 열심히 서로 사랑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고 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과 근심이 그에게는 삶과 죽음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아가서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가슴을 열어보여준 사랑의 편지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은 비둘기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같구나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바울은 바로 그 주님의 사랑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평화롭고 자유롭게 교회안에 있으니 별로 감동이 없지만 교회를 한번 떠나보세요. 왜 안왔느냐고 채근하는 권찰님, 사랑방에 안온다고 전화로 불러대는 순장님, 모두가 그립고 정다운 얼굴로 떠오를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교인들의 사랑을 지금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사모하는 자, 나의 형제와 자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 나의 사랑하는 자" 여섯 번입니까? 다섯 번입니까?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 어느 다른 교회에 있는 것일까요? 사랑이 많은 교회가 저 산너머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들이 머물고 있는 교회, 몸담고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주신 바로 그 교회입니다. 곁에 있는 형제, 우리가 섬기는 자매, 서로 협력하며 함께 일하는 부속회원, 나를 도와주고 기도해 주는 구역장님과 사랑방 식구들, 그들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면류관입니다. 피차 뜨거운 사랑을 나눕시다. 친절하게 인사하고 사모합시다. 교우들을 존중히 여기고 먼저 대접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중함도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와같이 주안에 서라"고 부탁합니다. 믿음안에 서고 소망안에 서고 사랑안에 굳게 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있게 서있지 못하고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넘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예 누워있고 또 어떤 분은 항상 앉아만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세요. 어디서 떨어졌던지 다시 일어나서 모든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십시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이 도우시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하여 보십시오. 나의 불가능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가능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소망으로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사노라면 낙심할만한 일이 하나 둘입니까?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한 두번 입니까? 피곤하고 짜증스런 세상 일만 생각하지 마시고 고개를 들고 위엣 것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예수안에서 하늘나라에 쌓아둔 복스런 소망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땅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수가 천억을 가진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지 않습니까?(골 3:3). 이 복음진리를 속으로 되뇌이며 소리내어 여러분의 귀에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여간 답답하고 억울한 것도 확 풀릴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넉넉히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안에 굳게 서십시요. 바울 사도가 빌 1:27에 잘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둘째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유력한 두 여성도를 개인적으로 권면합니다. "유오디아여 순두게여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두 부녀를 바로 그의 곁에 불러 앉히고 말하듯이 권면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시오. 한 팀이 되어 일하도록 하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여성도가 교만하여 허영과 질투, 분쟁과 다툼 속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 모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이고, 저는 두 사람의 주장이 다르고 성격이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일하는 방법이 다르면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주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자기 패거리만 만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한 교회에서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 파를 만드는 것입니다. 분리는 이단에 버금가는 교회공동체의 큰 악입니다.

자기 패거리를 만드는 시작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남을 깎아내리고 안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계속 미워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말하면서 욕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다반사로 있는 일이지만 은혜의 공동체, 진리의 공동체인 교회안에 있어서 이런 고약한 인간성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분들은 남을 안좋게 말해서 그 사람을 떼내어 버리고는 자기하고 한 통속이 되자고 제의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거든 그가 안좋게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자꾸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안좋은 말을 안하게 될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이 저 사람에 대해서 감정이 나쁘지 않구나. 저 사람을 존경하고 있고 가까운 사이구나. 내가 공연히 말했다가는 나만 사람같지 않게 되겠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을 헐뜯는 나쁜 일을 그만두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야 남을 헐뜯고 짓밟고 올라서려고 무슨 말이든 지어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약점찾고 티잡고 꼬집고 비교하며 "나 잘났소"라고 소리치면 누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은 그렇게 잘났고 대단합니까? 그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에서나 합당하지 않습니다. 벧전 4:8 말씀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면 허물은 덮고 좋은 점만 말합니다. 안좋은 것은 입밖에 내지 않습니다. 요컨대 이 세상에도 교회에도 나쁜 것 보다는 좋은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사랑의 사람입니다. 반대로 좋은 것 가운데서도 꼭 나쁜 것만 지적해 내고 반복해서 확인시키곤 하는 사람은 "나는 사랑이 없습니다. 나는 가시나무 입니다" 라고 스스로 나팔불고 다니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서 열심히 일하다보면 사람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내세울 때가 있지요. 어떤 사람은 좀 요란스럽게 과시하면서 일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신경질도 안내고 천사처럼 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럴때라도 그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든다고 절대로 그 동기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생한 사람은 그 일하는 모양이야 어떻든 그 중심깊은 곳에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쉽게 "저 사람은 동기가 틀렸어!" 그렇게 말함으로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 따라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으로 시험들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는 아무 일도 안하면서 남의 일하는 것을 비판함으로 힘빠지게 하는 것은 마귀를 돕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중요한 원인은 "내가 못하니까, 남들처럼 못하면 상대적으로 내가 평가절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개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못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내 체면 때문에 주의 일을 반대해선 안되겠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여 심판하지 맙시다. 언제나 선의로 해석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동기로 그렇게 한다고 믿어줍시다. 그 다음에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때도 격려하고, 내 주장대로 안돼도 주의 일이 진척된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서로 헐뜯는 나쁜 말 안하고, 자기 사람 만들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주안에서 마음합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 사도는 참으로 자기와 멍에를 같이한 어떤 분에게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멍에를 함께 매는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함께 멍에를 맨 자,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맨 자,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멍에는 함께 맬수록 짐이 가볍습니다. 우리 교회는 금년에 멍에를 함께 맬 일꾼들을 많이 선택했습니다. 9월에도 기도하는 가운데 성심 성의껏 투표하여 많은 일꾼들을 세우도록 합시다. 그래서 이분들의 충성과 모본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더욱 훈훈해지고 배나 발전하는 계기를 만듭시다. 우리 교회는 작은 세계선교본부요 천국복음 지역사령부입니다.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까? 교회의 멍에, 복음전도의 멍에, 봉사의 멍에를 우리 함께 나누어집시다. 짐은 나누어지지 않고 옆에서 잔소리만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저는 일구을심 기도의 짐도 사랑의 짐도 나누어지고 헌당을 향해 나아가는 여러 교우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멍에를 같이한 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얼마나 정답고 간절하고 실질적인 호칭입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 오실 때까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이 메어주신 멍에를 끝날까지 묵묵히 지고 갑시다.

그 다음에 바울 사도는 자기와 멍에를 함께한 자에게 부탁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클래멘트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한마디로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여러분보다 인격이나 능력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힘쓰는 분들이니까 잘 받들면 여러분에게 복이 되고 교역자도 일할 힘이 납니다. 여러분이 교역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교역자도 시험에 듭니다. 아무리 교역자가 주님만 보고 일한다 해도 인간이지라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 그래서 교인들이 비협조적이고 인색하구나. 내가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구나. 다른 사람이 오면 더 잘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면 교역자도 교인들도 다 손해보게 됩니다. 제가 주변에 일 잘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니까 대부분 그 부모님들이 교역자들에게 잘하신 분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보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님이 교역자를 최고로 여기니까 내가 최고로 인정받으려면 목사가 되어야지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부모님의 기도도 있고 자기가 본 것도 있으니까 그런 분들이 다 목회 잘하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예배보고 집에 가서는 "어느 집사는 어떻고, 목사님은 이래서 틀렸고, 아무게 장로는 저래서 틀렸다"고 실컨 불평을 털어 놓으면 아이들이 안듣는 것처럼 해도 다 듣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릅니다. 집중력이 없어도 듣는데는 얼마나 민감한지 떠들면서 다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 다 기억하고는 속으로 판단합니다. "집사, 장로, 다 시시한 것이고 교회라는 곳도 시시한 곳이구나" 그래서 교회에 안나오고 애를 먹입니다. 자녀들의 신앙생활은 대개 그 부모들의 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마음이 그대로 반영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말, 좋은 말을 자녀들이 듣는데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로 돕고, 물질로 돕고, 어떻든지 힘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마음을 합하라! 주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힘쓰는 저 동역자들을 도우라!" 사도 바울의 이 세 가지 부탁을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인 줄 알고 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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