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픔 2002-05-27 16:50:31 요1서 4:9-21 // 2002년 5월 26일 □ 사랑의 아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한1서 4:9-21) 1. 오늘 말씀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마음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곳에서 사랑을 말했고, 또 사랑의 인물들의 행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으로 사랑의 온갖 정의를 여러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관하여 생각하려면,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위하여 당신과 같은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동물과 같이 그렇게 지었더라면,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면서 지낼 수 있는 짝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아담과 이브를 만드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서로 하나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 되는 힘이 사랑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없는 복을 내리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조된 모든 자연을 주관하고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라면 부모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되고,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면서 살게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으며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사랑처럼 신비로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처럼 강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 보다 귀합니다. 사랑의 순서를 보면, 먼저는 부부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음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확대되어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이 형성되고, 그런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미움>과 <질투>와 <증오>와 <싸움>은 사탄으로 쫓은 것이라면, 사랑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란 말입니다. 2. 그리고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동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행동입니다. 진실 된 사랑일수록 자기를 내어주는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최소한의 자기 희생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행위 속에는 아픔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최고 정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행위이었습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는 성부의 마음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둔감하여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머님의 가슴에서 이 사랑을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세상에 올 때 누구나 울음으로 시작하는 새 생명이지만, 첫 번 마주치는 엄마와의 눈길에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산고의 고통을 통하여 얻은 자식이기에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통로라인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적 사랑은 자녀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자식들은 사랑의 묘약을 느끼게 됩니다. 고생하며 키운 자식들일수록 효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들의 희생을 보면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사랑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랑을 낳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깊은 뜻이 있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못됩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위로부터의 내리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자식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식들이 "엄마 아빠, 사랑해!" 하는 말은 말짱 헛도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아픔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현실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겠다고 말로만 했으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내겠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냈기에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더욱이 화목 제물로, 희생 제물로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아픔이 있는 사랑입니까!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 자체도 하지 아니하면서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그 실천적 행위 속에는 항상 아픔이 동반하게 됩니다. 3. 그러므로 사랑은 영원한 자취를 남기는 것입니다.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가고, 모든 것은 가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의 흔적 뿐입니다. 사랑의 흔적은 생명으로 자랍니다. 영원토록 뻗어나갑니다. 더욱이 아픔이 있는 사랑에는 또 다른 사랑의 바톤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게하고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진실 된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사랑을 베풀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도우며,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들이 모두 부자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잊지 못하여 자기도 자기의 조그마한 희생이라도 나누어 보려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기관사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는 근무를 마치면,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일로 자신의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말씀의 권면도, 치리도, 징계도 있어야 하겠지만,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월이 가는 마지막 주일에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삶에서 누구를 사랑한 흔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못다한 사랑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실천하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상에서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 없이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사랑은 최고의 희생의 행위입니다.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인천항을 통하여 한국 땅에 도착한 후 1902년 6월 11일 사망할 때(44세)까지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구마가와 마루라는 증기선을 타고 가다가 같은 회사의 증기선 기소가와 마루와 충돌하여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동행중인 조사 조한규와 이화학당 학생 등을 구출하려 갈 때까지 필사의 노력을 하다가 그가 사랑하던 한국인들과 희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펜절러는 한국인의 영혼을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 주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2)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처럼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자기를 내어주는 아픔이 있는 사랑일수록 더욱 더 귀한 사랑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아픔이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세상에서 남을 사랑의 흔적을 많이 남기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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