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드리기를 힘쓰는 교회
2002-05-21 14:30:05




성경구절 딤후 2:15
설교날짜 2002/01/06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암소를 잘 키워서 어느 날 예쁜 송아지 두 마리를 얻었습
니다. 하나는 붉은 송아지였고 다른 하나는 흰 송아지였습니다. 두 마리 다 아
주 튼튼하고 귀여웠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농부는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농부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저 송아지를 키워 무엇을 하면 좋겠소?"
"송아지 두 마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칩시다."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여보, 저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바칠까요?"
"지금 그 문제로 걱정할 게 뭐요. 두 마리 잘 키워 때가 되면 하나님께 바칩시
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두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 마리가 병이 들어 죽어 버렸습니다. 남편은 급히 아내에게로 갔습니다.
"여보,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그러자 아내가 물었습니다.
"두 마리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결정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
의 송아지가 죽었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 그게 말이오. 나는 항상 흰 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흰
놈이 죽었단 말이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이 농부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인데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 방식대
로 하나님과 관계를 엮어가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드림의 축복을 가르치셨습니다.(고린도후서 9:6-15)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원리를 가르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이며, 하나님이 넉넉한 은
혜를 주심은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심고 거둠으로써 우리의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이 하나님의 물질에 대한
경륜입니다.
또 하나 아름다운 드림의 축복은 어려운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는 필요 이상의 더 많은 것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금이나 모두가 궁극적
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하기를 좋아하면 풍족해 지지만 너무 아껴 써도 가난하게 됨을 잠언
11:24-25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거룩한 투자라는 말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투자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말할 수 없는 복을 받아 누리므로 드림
을 실천하는 자의 삶은 기쁨과 축복입니다.
2002년 교회 표어

올해의 교회 표어는 <드리기를 힘쓰는 교회>입니다.
이 표어를 제정하기까지 많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응답 받은 것입니다.

2002년은 우리 교회 5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122명의 항존직분자들이 임직을 하는 해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은혜롭게 진행되어 온 교육선교센터가 준공되어 봉헌되는 해
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가시적(可視的)인 드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6천여 성도들이 거룩하고 성결한 신앙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
다.

그 고백이란 언어로 몇 마디 드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온전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오늘 본문에 3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
하고 분변하는 자세입니다.
부언하면 일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다
고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자기를 위한 열심이었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 잘못된 신앙생활
입니다.

물론 여기의 '진리의 말씀'이란 어떤 특정한 말씀이나 교리를 뜻하는 것이 아
니라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옳게 분변하며'라는 말은 원문에 '오르도타문타'( )로 기록되
어 있는데 이 말은 '바른'이란 의미를 지닌 '오르도스'( )라는 말과 '자르
다'를 의미하는 '템노'( )의 합성어인데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바르게 자르
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잠언 3:6절과 10:15절에서는 '곧은길을 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
었습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마치 숙련된 기능공이 연장을 사용하여 한치 오차 없이 자르
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석하고 그래서 이단의 거짓 교리에 속지 않
으며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을 때 사이비 이단에 쉽게 넘어가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
고, 비진리를 진리라고 속아 결국 스스로의 삶을 어둠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지만 실상은 그
열심이란 잘못된 신앙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열심히 되
는 것입니다.무엇보다 온전한 헌신의 삶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것입니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한다는 것은 마치 낯선 길을 운전하는 운전자들이 지
도를 바르게 볼 줄 아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배를 잘 조종할 줄 알아도 항해지도를 볼 줄 모르면 나중에는 아주 엉
뚱한 곳에 도달하거나 바다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
고 그것을 바로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몸을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충
성된 일꾼이 됩니다.
그리할 때 맹신적인 열광주의자가 되지 아니하며, 지식을 앞세우는 논리주의자
가 되지 아니하며,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
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어야 신실하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됩니다.

진리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죽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
을 주신 삶이 예수의 삶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진정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
다.
그것을 역행하고 헌신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의 삶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기독교 교리만을 따
르고 지키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원히 죽을 죄인이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사는 것, 곧 복음을 받고 전하고 경험
하는 것입니다.
곧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해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로서만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여줄 수 있어
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
님께 자신을 드리는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나는 부정하면서 정직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불의하면서 의롭게 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치하면서 근검절약 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헌금하지 않으면서 헌금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봉사하지 않으면서 봉사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일꾼은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롬 16:1),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 하나님의 일꾼(고
후6:4), 그리스도의 일꾼(고전 4:1, 고후 11:23),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엡
6:21, 골 4:7), 복음의 일꾼(골 1:23-바울), 교회의 일꾼(골 1:25)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것도 신령한 일꾼에 대해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꾼으로 번역된 언어는 헬라어 명사만 다섯 단어 정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디아코노스' (diavkono")인데 보통 '종'에 대해서도 쓰여 있는 말로,
하인, 섬기는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에르가테-스 (ejrgavth")로서 일꾼, 역군, 교사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셋째는 '레이투르고스' (leitourgov")로서 천사들을 가리켜 사역자로, 바울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꾼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넷째는 '수네르고스' (sunergov")로서 돕는 자, 동역자, 일꾼 등으로 번역되었
습니다.
다섯째는 '휘페레테스' (uJphrevth")로서 노젓는 노예, 재판관의 하속, 공회
의 하속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꾼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악한 일꾼과 선한 일꾼으로 구분이 됩니다.
악한 일꾼은 거짓을 행하고, 악인과 연합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위
선을 행하고, 피흘리기를 좋아하고, 행악의 비밀한 꾀를 가지고, 오만한 언행을
하고, 의인을 어찌하든 올무에 빠뜨리면서 사사건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재앙을 당하고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6절 이하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곧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치 아니함으로 자꾸 나아갑니다.
진리에 관해서는 그릇된 사람입니다.
말하는 것이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의 일꾼은 근신하고 순전하며 선을 행할 뿐 아니라, 행악자를 인하
여 불평하지 않고 시기하지도 않으며, 즐겁게 공의를 행하고, 송사를 피하고, 행
악자를 조심하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에 힘을 쓰면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헌신은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몸을 드리는 것으로 정의되는 것
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된 후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본문 뒤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는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는 부끄러
울 것이 없는 일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힘쓰는 삶

드리기를 힘쓰는 삶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정된 자로서 하나님께 자
신을 드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헌신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 한 해를 주님께 온전하게 드릴 수 있는 삶이
란 무엇인가?

오늘 본분 디모데후서 2장에는 이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을 참는 군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
다.
주님이 마가복음 8:34절에서 당부하시듯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
는 자가 진정 주님의 제자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인내가 수반되
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인내 없이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
로 군인이 어떤 어려움도 인내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
듯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렇게 헌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규칙을 잘 지키는 경기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
야 합니다.
아주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회에서는 상식이 통하는데 교회에서는 상식이 통하
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몇몇 교회의 실상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도 교회의 규칙도 교단의 헌법
도 통하지 않는 개인주의 자기주의에 길들여진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하려면 철저하게 경기장의 규칙을 잘 지키는 경기자의 모습으로 헌
신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럴 때 진정한 드림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근면 성실하게 씨뿌리고 김매고 잡초 뽑고 수확하는 농부의 농심(農
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쓰임 받는 그릇의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
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별하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교회 일을 한다면 그
것은 진정한 헌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전제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
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되어야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위대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었습니
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드림으로써 자손 대대로 복을 받게 되었습니
다.

사르밧 여인은 엘리야에게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드림으로
써 가뭄이 다하도록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한 나드의 향유를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여인
이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마게도냐 선교를 위하여 애쓰는 바울에게 거처할 곳을 드림으로써 하
나님의 선교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2제자들도 자신을 온전하게 주께 드림으로써 위대한 예수의 12사도가 되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역사가 세상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베풂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는 말씀에서
시작된 베풂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거룩한 사역
은 나눔과 베풂의 절정을 이루고 이를 배우고 익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나
눔과 베풂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림의 일상생활이 헌신이라는 아름다운 삶을
엮어내는 것입니다.
곧 드림이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연적인 삶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이 한 해를 우리 모두 이런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
쓰는 한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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