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의 인사 / 사도신경 단상
2002-05-06 22:29:17

인사 >1<
그레이스 김 / 한국엠엘아이 소장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랍니다.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라고도 하지요. 또, 서로 모르는 사람들간에 성명을 통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공경하는 뜻으로 하는 예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오해도 생기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간(Time), 장소(Place), 특정한 경우(Occasion)에 따라 달리하면 아주 품위 있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의 정체는 바로 인사(人事). 많은 사람들은 인사하면 쉽게,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 그리고 처음 만나서 자기를 소개하는 인사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또 서비스 교육을 받아 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은 15도, 30도 45도의 인사법을 떠올리겠지만 오늘은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인사를 해야하는지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인사는 지위나 권력 나이에 관계없이, 먼저 인사하는 것이 “나는 멋진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순간적 선택입니다. 예수님도 “먼저”를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7:12에 보면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이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식사를 하면서 인사에 관한 그들만의 매력에 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면 “기사님 안녕하세요? 또는 선생님 반갑습니다.”하면서 행선지를 말하면 택시 기사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열심인 것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식당 직원이 물을 가져와서 주문을 받을 때도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이 업소는 참 친절하군요.” 패스트푸드(Fast Food)점에서 아르바이트 학생에게도 “안녕하세요”하며 주문을 시작합니다.

이렇듯 먼저 친근한 인사를 하면 그들은 더욱 진심에서 우러난 서비스를 우리에게 기꺼이 제공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역시나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인사에서도 통하는 으뜸 교훈입니다.

연초에 모 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란을 보았다. 어느 할아버지께서 초등학생의 인사성을 칭찬하는 상큼한 내용이 있어서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내용은 할아버지께서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셨는데 소년이 자전거를 가지고 오길래 열림버튼을 누르고 기다려 주었더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먼저 내리게 된 이 소년은 내리면서 또 “할아버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밝고 크게 또박또박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요즘 저렇게 교육을 잘 받은 아이가 있는가 해서 크게 감동을 받았고, 그 부모에 대해서도 보지는 않았지만 아주 좋은 인상을 받은 모양입니다.

요즘에 보기 드문 예절 바른 소년이었기 때문일까 할아버지는 그 소년의 인사성을 세상 많은 사람에게 빛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런 작은 예절은 주일학교에서 야곱의 공과를 다루기 전에 먼저 다뤄야하는, 생활에 관련된 공과내용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안녕하세요 저는 1502호에 살아요” 하면서 인사를 하면 어떨까? 교회에서는 연장자에게 연소자가 “요즘 건강이 어떠세요? 지난주보다는 더 활력이 있어 보이는군요” 이렇게 구체적인 인사말을 곁들이면 좋겠습니다.

지금 혹, 대화 중에 기침이나, 재채기를 했다면, 콧물이 흘러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한다면 이렇게 양해를 구하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재채기가 나와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멋지게 할 작은 것들에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예전에 묵혀 두었던 작고 소중한 것을 찾아서 먼지를 털고 귀하게 다루기를…

그리스도인이 중요시하는 예배, 기도 성경 읽기, 묵상, 교제는 습관적으로 잘한다. 이런 기도, 성경, 묵상, 교제 이것들 위에 예절을 곱하자. 예절을 곱하면 흠모하는 이들이 따르지만, 무례를 곱하면 분노, 미움, 입방아의 주재료가 따라 붙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듯 예의 바른 인사성을 갖춘 당신을 흠모하는 이웃들은 당신에게, 바로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나도 교회에 가면 제게 맞는 품위의 옷이 있을까요?” 라며 도움을 청할지 누가 알겠는가?

인사 >2<
그레이스 김 / 한국엠엘아이 소장


“3미터 원칙“을 아십니까?
이 원칙은 미국 샘 월튼씨가 월마트 협력사 직원들에게 고객과의 거리가 3미터 이내가 되면 자동적으로 미소를 머금고 , 시선을 맞추고 따뜻한 인사를 건네도록 하는 교육을 말한다.

샘 월튼씨는 고객에게 진심으로 우리는 여러분을 반가워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온 몸으로 표현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끔은 여러 교회를 찾아가서 수요예배를 드릴 때가 있다. 각 교회의 인사 매너를 공부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방문하는 교회를 보면서 봄날에 피는 꽃들을 생각한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벚 꽃 모두가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진짜 봄이야! 우릴 보면 알 수 있잖아!” 하고 속삭이는 듯하다. 봄 꽃이 유달리 반가운 이유가 있다면,그건 바로 지루한 겨울에 화려한 색상의 출현 때문이기도 하다. 인사는 교회의 봄꽃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만족하고 또 다시 보고 싶어할 얼굴이 되도록, 마음을 담은 인사를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몸에 배이도록 훈련을 하자. 인사는 15도, 30도, 45도의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이라는 본 요리를 먹기 전에 이름 스프와 야채 냄새를 먼저 점검하기로 하자.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각자의 이름도 다양해서 부르기가 어렵거나, 코믹할수도 있어서 부를 때마다 웃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려면 부르기 어려운 이름은 몇 번씩 그 이름이 익숙할 때까지 부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코믹한 이름도 웃음이 나오는 실례가 없도록 진지하게 발음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또 냄새를 체크해야 한다. 샤워 시설이 안된 곳에다 매주 샤워를 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입 냄새, 음식냄새, 머리 청결상태는 꼼꼼하게 살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자 지금부터는 마음을 담은 인사 각도에 대해 알아보자.
인사 각도는 마음의 깊이임을 염두에 두고서… 15도 정도의 목례는 상체를 15도 정도 허리를 굽혀 잠깐 멈추었다가 원래대로 일어난다. 시선은 자기 발끝의 2미터 앞을 응시한다. 이 15도 인사는 주로 이런 상황일 때 하면 무리가 없다.

교회에서 매 주 만나는 교인 , 사람들이 많은 인파 속이나, 대중교통에서 만났을 때, 계단이나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자주 마주치는 실내 공간, 식당,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는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 인사말을 붙이고, 눈을 마주 치면서 (eye contact), 미소를 머금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단 고개만 떨구는 까딱절은 사양합니다. 한국 여성의 78%가 성의 없는 인사를 한다는 결론이다. 이런 인사는 윗분이 아랫 사람의 인사를 받을때만 적당하다. 다음은 정중한 인사 30도 정도의 보통례는 곧게 선 상태에서 상대를 마주보고 허리를 30도 되게 굽힌다.

시선은 자기 발끝에서 1.5미터 앞을 응시하고 1초간 멈추었다가 상체를 일으켜 앞에 있는 상대 얼굴(눈)을 보면 된다. 보통례는 정중함이 필요한 처음 만남일 때, 윗분에게 인사할 때, 고객을 대할 때 하는 인사로서 가장 많이 하는 인사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들러 주십시오. 이렇게 깊은 사과와 감사의 인사를 할 때, 중요한 손님을 배웅할 때는 45도의 인사가 적합하다. 45도의 정중례는 상체를 굽혔을 때 시선이 발끝에서 1미터 앞을 응시하면 된다.

실제로 작년 5월에 에버랜드 허태학 사장을 만났다. 돌아올 때 그분은 현관 밖에까지 나와서 45도의 정중례를 하며 방문한 손님을 배웅했는데 아직까지도 그분의 정성이 깃든 인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인사는 무엇 보다 정성과 반가움, 그리고 진실이 묻어나야 함을 알아야한다. 내가 나를 멋지게 포장하지 않더라도 숨김없이 교양의 척도를 알려줄 인사에 대해 대강 넘어가는 일은 곤란하다.

항공 승무원들의 경험에 의하면 인사도 잘 않하지만, 승객들이인사를 받는 것은 더 인색하다고 한다. 인사를 잘 주고 받을 때 당신의 품위는 긴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을 것이다. 인사는 다이아나 꽃보다 당신을 더 돋보이게 합니다.

인사 >3<
그레이스 김 / 한국엠엘아이 소장


유명 백화점마다 선물 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코너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물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순간적으로 받았을 때 “~와~”하는 감동과 그 선물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특별히 포장하는데 사람들은 얼마의 돈을 기꺼이, 그리고 흐뭇한 마음으로 지불하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선물을 포장하는데도 나이나 성별 그리고 계절에 따라 또는 선물 내용에 따라서 포장지의 재질이나 색깔 리본의 굵기 넓이를 다르게 한다고 한다. 이런 사물에 마음을 담아 가치를 부여하고 마치 생물체를 다루듯 정성을 다하는 것은,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려는 무언의 메시지다.

또 멋진 포장을 통해서 상대의 시각을 통한, 마음의 동요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선물의 내용을 보기도 전에 먼저 감동시키는 기술이 선물 포장이라면, 긴 시간 나를 잊지 않게 하는 방법은 짧지만 진실 된 한마디의 인사를 글로 표현한 쪽지나 카드다. 쪽지에 적힌 한마디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를 넣는다면 훨씬 더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부터는 어느 곳에서나 당신을 가장 빛나게 하는 행동, 인사말, 태도에 대해 문을 두드려 보자. 먼저, 초면이거나 대화를 이끌어 갈 때, 상대의 나이, 직업, 자녀, 부부, 결혼 여부, 신앙 여부 등 사적인 질문을 하고자 할 때는 “실례하지만 사적인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라는 인사를 먼저 한 후에 상대가 좋다고 하면 그 때 “혹시 예수 믿으세요”라고 묻는 것이 때로는 오해나 실수를 미리 예방하는 것이 된다.

또 상대가 이런 예를 갖추지 않고 덥석 위 내용을 물어 왔는데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미안하지만 개인적인 질문은 좀 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답하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우체국을 대신해서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메일을 받았으면 간단하게라도 내용을 확인했다는 답변을 해줘야 한다. 만일 답변이 없을 경우 메일 보낸 사람은 메일 도착 여부에 대해 궁금해 할 테고, 그래야 기계의 오류인지 나의 등한시하는 버릇인지를 상대방이 알 수 있다. 메일을 보낼 때도 상대가 읽기 편하게 한 줄을 띤 후에 쓰는 것이 상대에게 주는 친절이자 배려임을 떠올리자.

교회는 특히 여러 성도들 간의 새로운 소식이 넘치는 곳이다. 축하나 위로의 인사를 각별히 잘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의금, 부조금이 마치 모든 축하와 위로의 역할을 다하고있는 것처럼 여길 때 사람들은 바로 그 때부터 마음을 아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울어 주고, 귀기울여 들어주는 그런 진액의 인사말을 원하는 것이다.

또, 교회 내에서 성가대나 특송이 있는 경우에 곡이 다 끝났을 때 “제 영혼에게 양식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면 어떨까? 이 때는 감동 받은 만큼 힘껏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아직은 문화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교회에서는 이미 많은 성도들이 이슬비 맞듯 그렇게 문화에 젖어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 있을 깔끔한 뒤처리는 아직 초보 운전자격이다. 공연장에서도 언제 박수를 쳐야할지 몰라 실수하기도 하지만 박수를 보내는 것조차 어색해 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난주에 을지로 입구 전철역에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3번 출구를 찾으셨고, 나도 얼른 보이지 않아서 몇번을 찾다가 알려 드렸더니 이번에는 화장실은 어디로 가느냐고 하시길래 나는 또 열심히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할머니는 “휴! 내가 너무 부려먹지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나는 지금 명동성당 가는 길인데 그냥 3번 출구로 가야겠어요”하신다.

이 할머니의 깨끗하고 맑은 처신은 소나무 향처럼 향기로웠다. 명동성당에 가는 길이야~ 그 말은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에 와서 꽂혔다. “아휴! 내가 색시를 너무 부려먹지? 미안해서 어쩌나!”하면서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쓸어 내리던 솔직한 인사말 때문이다.

이 할머니에게 맞는 최고의 포장이 아닌가? 백화점에 있는 포장 전문 코너를 이부터 우리 그리스도인의 따스한 가슴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한번에 한마디씩 인사말을 배워보자.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진한 솔향기가 우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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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도 신 경 단 상 1 / 신앙의 고백과 결단의 선포를 뜻하는 것
이진우 장로 / 변호사, 주님의 교회


1. 서 론
사도신경(使徒信經)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담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그 말은 ‘사도신경’에 대한 정확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까지 이러한 신앙을 고백해왔고 또 앞으로도 끝없이 해 갈 것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과 기도의 지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그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도신경의 핵을 이루고 있는 예수님의 1)동정녀탄생(성육신-incarnation), 2) 십자가상에서의 돌아가심과 만민의 속죄, 3) 부활과 승천, 4) 심판을 위한 재림 그리고 5)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영생 이중 어느 하나라도, 문자그대로, 믿지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로 자처해서는 안된다.
사도신경의 핵을 이루고 있는 위 다섯 신조에 관해서, 궤변적인 논리를 동원해서, 이를 변질 시키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훌륭한 철학자는 될 수 있다. 뛰어난 논리학자나 유능한 생리학자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충직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다.

한편 오늘날 사도신경의 내용이나 그 문장의 방식에 관해서 문제제기와 제안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앙을 가다듬고 우리말을 정확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사도신경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인’의 신경이라고 불려지지 아니하고 ‘사도’신경이라고 이름지어진 점에 대해서는 가벼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학자들 중에는 ‘사도신경’이 12사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도문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이라 불리워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12사도가 한구절씩 작성한 기도문을 집대성해서 사도신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공인되지 아니한 주장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서기 150-17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초기의 사도신경의 정식명식이 ‘로마신조(신경) Symbolum Romanum였다고 하는 점은 살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도신경은 ‘사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다만 ‘신경’(信經)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信經’은 ‘믿을 신’자와 ‘글경’자의 두 한자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經’은 ‘경전일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을 믿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단순히 ‘성경을 믿는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고백과 결단의 선포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아니하다고 생각한다.

‘신경’에 해당하는 어휘를 라틴어 원문에서는 ‘Symbolum’, 독일어에서는 ‘Glaubenserkenntniss’, 영어에서는 ‘creed’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신조’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에서는 ‘사도신조’라고 번역하고 있다.

3.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우리성도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고백의 주인공 즉 ‘내’가 사도신조의 첫머리에 나와야 마땅하다. 현재의 사도신경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 ‘하나님 아버지’앞에 ‘나’를 세우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불경한 태도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없는 항변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의 ‘I believe’ 독일어의 ‘Ich glaube’ 라틴어의 ‘credoo’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들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를 내세우고 있다.

우리도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말이 하나님앞에서는 적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믿사옵니다’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능하사’라는 말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근거 또는 방법을 뜻하는 부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위에 든 외국의 사도신경들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 almighty(영), Gott, den Vater, den Allmaechtigen(독), Deum Patrem omnipotentem)라고 부른다.


사 도 신 경 단 상 2 - 올바른 우리말 표현법으로 바꿔야
이진우 변호사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위 외국의 사도신경들은 예외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대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And, Und, Et로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분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4.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한국사람은 높임말과 낮춤말을 명백히 구별해서 쓰고 있다. 예수님을 “이” 또는 “그”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어들은 who(영), qui(라)등을 존대어, 하대어의 구별없이 사용하지만 우리의 어법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동사의 능동태와 피동태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성령으로 잉태하사”는 마땅히 “성령으로 잉태되사”라고 해야 한다. “마리아에게 나시고”는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위 부분은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쳐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 부분도 능동태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살하신 것이 아니다.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영어의 “was crucified”도 피동태로 표현되고 있다. “죽으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말은 신앙적 해석으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문법적 해석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혹시 “못박혀”라는 표현이 피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항변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도 훌륭한 답변은 되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

6.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님은 “장사한 것”이 아니고 “장사된 것”이다. 그냥 “장사된” 것이 아니고 “장사되신 것”이다. “장사되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uried나 독일어의 begraben, 라틴어의 sepultus는 “땅에 묻히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우리도 그러한 표현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사도신경에 나오는 “다시 살아나시며”는 영어의 “rose “again”에서만 그 예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독일어, 라틴어, 일본어에서는 발견되지 아니하는 말이다.
이 “다시”라는 말의 출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7. “음부에 내려가시다”
우리의 사도신경에는 특별한 고찰을 해야 할 부분이 또 있다. 예수님이 “장사되신(땅에 묻히신)” 사실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일 사이에는 아무런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사도신경은, 예외없이, 그 사이에 “예수님이 지옥(음부)으로 내려가셨다”라고 적고 있다.

영어 사도신경은 “descended to the hell”, 독어는 “hinabgestiegen in das Reich des Todes”(죽음의 나라로 끌리어 내려가셨다), 라틴어는 “descendit ad inferos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의 사도신조도 “陰府にくだり”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이 왜 우리 사도신경에서는 빠지게 되었는지 신학자들이 대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러한 해석을 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만민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본질상 죄인이 아니지만, 십자가에 메어 달려있는 동안은 죄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기독교진리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죄의 결과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죽음, 신앙적인 죽음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신 것은 인류의 죄악을 완전한 속죄하기 위해서 필요했단 것이다.

만약 이러한 해석에 일리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 사도신경에 이 부분이 빠져있는 이유가 분명하게 선포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독일어의 사도신경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이 “죽음의 나라로 끌리어 내려가셨다”라고 피동태문장을 쓰고 있다.

또 “하늘로 끌리어 올라가셨다” (aufgefahren in den Himmel)라는 부분도 피동태의 문장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8.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외국의 사도신경에 의하면 이 부분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 (God the Father, Gott der Father, Dei Patris)로 되어 있는데 왜 우리의 사도신경만은 “아버지”를 빼었는지 이 점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의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 도 신 경 단 상 >끝< -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에는 주어가 없어…
이진우 장로 / 변호사, 주님의 교회


9.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많은 신자들은 “저리로서”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독일어의 사도신경이 이 점에 관하여 가장 명백한 답변을 주고 있다. “von dort”, 이것은 “그 곳에서 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10. “성령을 믿사오며…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문장에는 주어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어없는 문장을 남발하고 있다. 주체의식의 결여 내지 빈약으로 말미암은 현상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쨌든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사실은, 사도신경의 서두부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앙고백의 주체인 “나”가 문장의 뒷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들어낸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어 (나)가 아예 모습을 들어내지 아니하고 있다. 마땅히 “나는… 믿습니다”로 하여야 할 것이다.

외국의 사도신경들은 모두 “믿음”의 주체로서 “나”(I-영어, ich - 독어, je-불어, 我-일어)를 내세우고 있다. 라틴어와 서반아어의 사도신경에서는 주어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믿다”라는 동사 credo, creo 의 어미(0)가 제 1인칭단수의 주체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믿음의 대상이 또 문제로 등장한다. 신앙고백의 대상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1. 성령, 2. 거룩한 공회, 3.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4.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5. 몸이 다시 사는것, 6. 영원히 사는 것이상 여섯이다. 1. 성령과 2.공회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명사이다. 그런데 3 이하는 명사가 아닌 명사절(節)이다.

결국 신앙의 대상이, 이유와 질서없이, 명사와 명사절의 두 가지로 뒤죽박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외국말의 사도신경을 보자.

신앙고백의 목적 3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절이 아니고 “성도의 교제(사귐)”- the communium of saints (영), Gemeischaft der Heiligen(독), Sanctorum communionem (라) 라는 명사로 되어 있다.

신앙의 대상 4.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죄의 용서” - the remission of sins(영),Vergebung der Suenden(독),remissionem peccatorem(라)로 표현되어 있다. 5.도 “몸이 다시 사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아니하고 “육신의 부활” -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영) Auferstehung der Toten (독- 죽은자의 부활) carnis resurrectionem(라- 육체의 부활)으로 표현되어 있다.

6.도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영생” the eternal life (영) das ewige Leben(독) vitam aeternam(라)으로 되어있다. 결국 우리 사도신경을 따르게 되면 같은 신앙의 대상이 명사로 표현되었다가 문장(절)로 표현되기도 하는 혼란이 생긴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나는 성령과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와 죄에 대한 용서, 육신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크리스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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