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인자가 따르는 사람 2002-04-15 16:56:53 시23:1-6 // 2002-04-14 1. 서론 - 사람이 잘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면 된다! 해서 안되는 일이 없다! 사람이 노력하는데 안되는 것이 뭐가 있냐?"이런 얘기를 하지만, 정말 일을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사를 잘지어 곡식이 익고 추수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 큰비가 내려 가지고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험 준비 열심히 해서 올 해는 대학에 꼭 붙겠다고 했는데, 그 날 감기가 심하게 들어 컨디션이 나빠가지고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은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 `손이 수고하는대로 먹을 것이라`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잘되려면 운이 따라야 된다고 말합니다. 잘되는 사람은 보면서 이르기를 `저 사람은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운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운이 따른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이 따른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우리 신앙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되 `그러면 된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책임져주셔야 된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기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데, 이 나의 노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것이다 하는 말을 6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다윗은 운이 따른다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나 ○○○!" 한번 더하십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 할렐루야!" 우리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게 하소서!" 여러분,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그러나 이 말에 오해하지 말라! 내가 가만히 있는데, 아무 것도 안해도 다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른다는 말은 뒤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앞에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고 난 다음에 따르는 겁니다. 성경의 정신은 심는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겁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 거두고, 나쁜 것 심으면 나쁜 것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법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법입니다. 땀을 흘리고 정성을 드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얻으려 하는 불한당같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권 맞아서 부자되면 좋겠다고 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너도나도 복권사고 맞기를 원해서인지 복권장사가 잘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복권 맞아서 잘되는 일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남을 사기치거나 도적질 하거나 도박해서 잘사는 사람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땀을 흘려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알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따르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한 성도의 2가지 자세 그럼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두 가지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르기 위해서는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까?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른다. 할렐루야!"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도,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다윗 왕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나 사도바울도 다 고난 받았습니다. 이 고난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고난이 정의입니다. 시편에도 사람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인생 자체는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난은 사람에게 필연적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을 썩이는 교인이 있어서 `하나님 이 교인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애, 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한테도 열두제자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그 기도 안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가룟유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가룟유댜, 안되지요? 어떻게 가족을 배반할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 가룟유댜, 안되지요? 어떻게 직장에서 배반하는 일 할 수 있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유다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남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저께 신문에 보니까 아버지학교 수료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 수료의 마지막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수료식의 마지막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섬기는 자가 되는 거, 이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된 사람입니다. 가룟유다 되지 말란 말입니다. 섬기는 사람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문에도 미담으로 실리는 겁니다. 이런 아버지학교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어쨌든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으로 어려움의 세월을 사셨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지혜고 신앙인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작다고 좋고 크다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고난이나 시험에 넘어지려면 접시물에 빠져 죽는 것이고, 살려면은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도 살아나는 겁니다. 문제는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고난을 대처하는 마음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고난에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다윗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울 것도 없지요. 왜? 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것은 환경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 사람에 대한 어려움을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어려움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든지 나에게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다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 고난을 대처하는 숙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이 고난이 좋다고 해서 좋고 나쁘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고난의 상황이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깨닫는 것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니까 다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 다윗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딱 하나를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원수가 있어도 그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잔을 넘치게 하는 승리를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난에 대한 어두움의 그림자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이 얼마나 크냐 얼마나 힘드냐 이것보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 속에서 고난의 아픔이라든가 고난의 크기라든가 보다는,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이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전도서 3장에서 만물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고, 헐 때가 있고, 이 모든 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누구도 측량할 수가 없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때를 우리에게 기회로 주셔서 우리가 이 때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어떤 기회가 주어졌든지 그 기회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 의미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때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얼마나 주를 위해 살았습니까? 그러면 우리 생각에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인정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핍박합니다. 그래서 쫓겨다니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서 사도바울을 위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돌멩이 던질 때에 주의 종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진짜 그 사람은 나를 유쾌하게 했다, 그런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도바울이 편지 때마다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꼭 기억하고, 그 사람에게 잘해주고, 그 사람에게 꼭 도움을 주면 좋겠다, 그 사람 말 좀 들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나쁠 때 같이 돌멩이 던지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요, 상황이 나쁠 때 그를 위로하는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환경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가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머리가 너무나 아파 가지고 늘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머리 아프면 참 힘들거든요. 그런데 눈도 잘 안보였습니다. 안질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눈만 아파도 아무 의욕도 잘 안납니다. 그런데 그 뿐아니라 간질병까지 있어 가지고 설교하다가 쓰러졌던 적도 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데 이렇게 주의 일을 하면 건강해야될 터인데, 육신적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이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병을 안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병을 안 고쳐주셨지만 거기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작오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가 이런 일 하는데, 저런 일 하는데, 내가 이만하면 대접받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 갖게 하지 않으시려고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난도 은혜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 나에게 겸손함을 주시지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질병이든지, 사업에 실패든지, 누가 나를 핍박하든지,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구를 원수 삼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겸손해지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고난에 대한 결론으로 다윗이 이런 신앙적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따른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하다는 말은 합력하여 이루는 선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선입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이 물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분석해보면 물은 산소 더하기 수소입니다. 산소는 사람이 마시면 좋은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호흡이 잘 안되는 사람에게 산소를 마시게 하기 위해 산소호흡기를 물려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게 됩니다. 산소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겁니다. 반면에 수소는 어떻습니까? 수소는 산소하고 반대로 사람이 마시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산소와 수소가 합쳐지면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명과도 같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런데 수소도 언제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자동차 공해가 심해서 공해 없는 자동차 만듭니다. 그런데 전기로 가는 자동차와 함께 수소로 가는 자동차가 개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물에서 수소를 분리시켜 가지고 그 수소를 자동차 원료로 쓰는 자동차가 실용화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수소도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이란 말은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다 좋은 것 아니고, 나쁜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세계2차대전 때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600만명이나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시련과 그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가지고 이것을 간증하며 다니는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신앙간증을 하고 맨 마지막에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수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수건에 이쁜 자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하고 뒤집어서는 뒤를 보여주는데, 그 뒤가, 여러분, 수 놔 보신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 앞에는 아름다운데, 뒤는 어때요? 엉망진창이지요. 얼마나 엉망진창입니까? 그런데 이 엉망진창이 그렇게 아름다운 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뒤집어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수와 같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합력하여 이루는 선인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난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선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식을 잘 먹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른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양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주간 잡지 중의 하나인 `더 브리티시 위클리` 에 목사들의 설교와 그 하는 사역에 대한 비판의 글이 실려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독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투고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그것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30년 이상을 교회에 다닌 사람으로 3천번 가량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을 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 글이 실리고 난 다음에 몇 주에 걸쳐 별별 반응과 응답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주간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보낸 다음의 글이 실리면서, 모든 소리소문들이 잠잠해졌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준 음식이다. 그런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들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먹은 음식의 식단을 단 한가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양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겁니다. 믈론 혼자서도 성경을 보고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마다 강단에서 주시는 말씀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신토불이"란 말을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몸에 좋은 것은 이 땅에서 나는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는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양식은 집에서 어머니가, 아내가 해주는 양식입니다. 설교자도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을 하는데, 나는 이 설교자를 가정주부라고 생각합니다. 요리를 하지만 요리사가 아닙니다. 요리사와 가정주부는 다릅니다. 가정주부는 식단을 짤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물론 맛있는 것도 좋지만 맛있는 것을 매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경제적인 형편을 생각하면 곧 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싸고 좋은 것을 고르기도 하고 그 시절마다 유행하는 음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주부가 식단을 짤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식구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식단을 짜는 겁니다. 그런데 가족들 중에는 가지 좋아하는 것을 찾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식단을 짤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하다 보면 편식하게 되고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절, 그 때에 교인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반을 하면서 숙제를 내줬는데, 목사님 설교를 요약해서 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약한 설교를 다음에 모이게 되면 같이 나눕니다. 나는 지난 주일에 목사님 설교를 이렇게 들었고,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 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감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건강한 것입니다. 외식은 한두 번입니다. 그 외식으로 색다른 맛을 찾을 수는 있지만은 건강할 수는 겁니다. 가정에서 주는 음식을 귀히 여기고, 주부들은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잘 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이 주부가 자꾸 밖에 나가서 먹자고 앞장설 때에는 주부의 게으름도 있지만 식구들이 먹어주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니까 자꾸 밖에서 먹자는 것입니다. 밥은 집에서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맛은 부족할 수가 있고, 먹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내 교회에서 주는 음식을 먹는 것이 내 건강에 좋은 것임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요즘에 인터넷도 되고, 기독교방송도 있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런데 그 설교도 얼마나 잘하는 설교입니까? 보통 잘하는 설교라면 방송에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만 좋다고 하고 내 음식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잘 먹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예배 시간에 무엇보다도 내 집에서 주는 음식 잘 먹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윗이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 안에 사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찾습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먹는 것도, 지금 이 시간 산에 올라가서 `야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건강은 영혼이 소생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살면 형통의 은혜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하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1편 1,2,3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라" 아멘. 요한복음 15장 9,10절에서 예수님 말씀하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멘. 하나님 말씀 안에 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사랑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따르기를 원하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임직 받은 분들을 문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했고, 정말 이 분이 임직 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 문답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임직을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일군이 되십시오. 직분은 일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것을 취미나 명예의 계급장 다는 것 아닙니다. 일하십시오."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그랬습니다. "일은 하지만 일 하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영혼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일은 잘 하는데, 사람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자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따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일을 하고 말씀 안에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라야지, 이것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비판하고 오는 사람들을 헤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마땅히 따를 줄로 믿습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과 인자가 따르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결론 -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오늘의 말씀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지막 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르고, 많은 말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살면 하나님의 인자가 나를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부족함이 없는 인생!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따르기를 바라며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결론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입니다.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임직 받는 분들은 더욱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해서 직분을 맡든, 원치 않아서 맡든, 그리고 부족한데도 맡겨 줘서 황송한 마음으로 하든, 이 억지로진 십자가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으면, 그것은 직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이 고난을 하난님의 은혜로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선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피어슨이라고 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분이 무슨 과학을 연구했는지, 무슨 강의를 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일화에 대한 짧은 글을 봐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하도 유명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의를 했는데, 언제나 그와 함께 가는 사람은 운전기사였습니다. 운전기사가 운전해서 모시고 다녔는데, 이 피어슨 박사의 강의를 하도 많이 들어 가지고, 서당개 삼 년에 풍월도 짓겠다며, 하루는 피어슨 박사가 하는 말이 `자네가 내 옷을 입고 대신 나가서 강의 좀 해` 한 겁니다. 이 운전기사가 `나 못합니다` 했으면 얘기도 안될텐데, `하겠습니다` 하고는, 피어슨 박사의 옷을 입고 강의를 하는데, 기가 막히게 하는 겁니다. 너무너무 잘하는 겁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데, 답도 잘하는 겁니다. 그러던 중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 당황한 것이 누구겠습니까? 피어스 박사였습니다. `저 운전기사가 도대체 뭐라고 얘기를 할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얘기 하시겠습니까? 이 가짜 피어스 박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여러분, 내가 여태까지 여러분에게 강의도 하고 내가 여태까지 여러분의 어려운 질문에도 다 대답했는데, 지금 질문하신 분은 너무나도 쉬운 질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하고 같이 다니는 저 운전기사가 할 겁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 오래 하다보면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더 충성하고 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가 피어스 박사보다 더 강의를 잘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질문 내가 풀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때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정답인 줄로 믿고, 그 하나님에게 묻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하세요. 안되는 것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먹어야 할 것,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먹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먹지 않으니까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 안에 승리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따르는 그 은혜가 오늘도 이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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