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루터킹/
2002-04-13 12:31:19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루터 킹


우리 역사에서 자유를 위한 가장 훌륭한 시위가 있던 날로 기록될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백년 전, 한 위대 한 미국인이 노예해방령에 서명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그 상징적인 자리입니다. 그 중대한 선언은 불의의 불길에 시들어가고 있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횃불로 다가왔습니다. 그 선언은 오랜 노예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즐겁고 새로운 날의 시작으로 다가왔습니다.

러나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흑인들이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 차별이라는 속박과 굴레 속에서 비참하고 불우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들은, 이 거대한 물질적 풍요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빈곤의 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년 후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한 귀퉁이에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끔찍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국가로부터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야 할 시기에 온 것입니다. 이 나라의 개척자들이 헌법과 독립선언문에 훌륭한 귀절을 적어 넣었을 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상속받게 되어 있는 약속어음에 서명한 것입니다. 그 약속어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삶과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 시민의 피부색에 관한 한, 이 약속어음이 보장하 는 바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국은, 이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흑인들에게 잔고부족이라는 도장이 찍힌채 되돌아오는 불량어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있는 거대한 기회의 금고에 진고가 부족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갖고 있는 이 수표를 현금화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즉시 풍성한 자유와 정의를 확보해 줘야 할 수표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순간의 긴박성을 미국인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선 냉정을 되찾으라는 사치스러운 말을 들을 여유도, 점진주의라는 이름의 진정제를 먹을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할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어둡고 외진 인종 차별의 계곡에서 벗어나 햇살 환히 비치는 인종간의 정의의 길에 들어설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신의 모든 자손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인종간의 불의라는 모래 위에서 형제애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올라서야 할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긴박성을 간과하고, 흑인의 결의를 과소 평가한다면, 그 것은 이 나라에 치명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이 표출 되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1963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만일 이 나라 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면, 흑인이 좀 진정을 하고 만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친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흑인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기 전에는 미국에 휴식도 평온도 없을 것입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폭동의 소용돌이가 계속될 것입니다.

정의의 궁전으로 이르는 출발점에 선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정당한 위치를 찾을 때까지는, 나쁜 행동을 해서 죄인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점입니다.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를 향한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맙시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저항이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다시, 우리의 힘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흑인 사회를 휩쓸고 있는 저 새롭고도 훌륭한 투쟁 정신이 백인의 불신을 받는 데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백인이 증명하듯이, 우리의 많은 백인 동지들은 그들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이어져 있으며, 그들의 자유가 우리의 자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깨 닫고 있습니다. 우리 혼자서만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전진해야 한다는 맹세를 해야 합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권운동가에게 "언제가 되면 만족하겠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흑인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폭력의 공포에 희생되고 있는 한,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습니다. 흑인이 여행하다가 피곤 에 지쳤을 때 고속도로 근처의 여관이나 시내의 호텔에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이 이주한다고 해야, 고작 작은 흑인 거주지에서 더 큰 흑인 거주지로 가는 것이 전부일 때, 우리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미시시피의 흑인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뉴욕의 흑인이 마땅히 투표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정당성이 힘찬 흐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다가 여기 오게 되었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다가 도리어 기소되어 두들겨 맞거나, 경찰의 야만스런 폭력에 고통받는 지역에서 오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는 갖가지 고통을 겪는 데는 베테랑입니다. 그런 고생이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계속 일하십시오.

미시시피로 돌아가십시오. 앨라배마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조지아로, 루이지애나로 돌아가십시오. 우리들의 현대적인 도시인 빈민가로, 흑인 거주지로 돌아가십시오. 상황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질 것이라는 점은 명심하고 계십시오.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는 맙시다.

나의 친구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저는 꿈 을 가지고 있다고.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 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 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지사가 늘 연방 정부의 조처에 반대할 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 부한다느니 하는 말만 하는 앨라배마주가 변하여,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 자매처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남부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가는 신념입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개척하여 희망의 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나 라의 이 소란스러운 불협 화음을 형제애로 가득 찬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념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 하며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감옥에 가며,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자식들이 새로운 의미로 노래부를 수 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은 자유의 땅, 나의 부모가 살다 죽은 땅, 개척자들의 자부심이 있는 땅, 모든 산에서 자유가 노래하게 하라."
미국이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이것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가 뉴 햄프셔의 거대한 언덕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뉴욕의 큰 산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펜실베이니아의 앨러게니 산맥에서 울려 퍼지게 합시다.

콜로라도의 눈 덮인 로키 산맥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캘리포니아의 굽이진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조지아의 스톤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테네시의 룩아웃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미시시피의 모든 언덕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모든 산으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모든 마을, 모든 부락, 모든 주와 도시에서 자 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우리는 더 빨리 그 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입니 다. 신의 모든 자손들,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이교도, 개신교도와 가톨릭 교도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 날이 말입니다.
"드디어 자유, 드디어 자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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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으로 변해 버린 고통(막5:24-34)

ㅁ 월터부르거만

새로움으로 변해 버린 고통



마가복음 5장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사실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당시에 영향력 있는 인물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에 관한 본문 역시 자신의 독립적인 본문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실 때에도 이 여인은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본문을 좀더 넓게 보더라도 우리는 혈루병을 앓고 있는 이 여인에 관한 오늘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중요한 인물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정말로 인상적인 이야기,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이 본문은 조그맣게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이 본문이 갑자기 끼여들기 전인 앞부분에서는, 회당장이라고 하는 당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끼여든 오늘 본문의 뒷부분 35절 이하에서 회당장 야이로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면서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은 그래서 더 영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중간에 끼여들면서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 관한 본문이 이렇게 다른 본문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기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끝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의 인생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과 서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든 우리네 인생에서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사람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는 더 멋지고 중요한 이야기들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15분짜리 명성, 아니 명성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렇고 그러 15분짜리 즐거움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랍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초라한 여인이 성경 본문에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참으로 무기력한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이 여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



I


이 여인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었고 당신의 군중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밀려나서 저 한 구석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관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첫 번째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이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그녀의 몸에서 쑥쑥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냄새나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람들은 혈루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은 26절의 말씀처럼 많은 의원들로부터도 괴로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의원들로부트 시달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점잖기도 하고 때로는 불친절하기도 한 의원들이나 또는 수련의로부터 이런 저런 짜증난 질문들을 반복해서 받아들여야 했고, 고칠 수 없다는 절망스러운 이야기만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러는 중에 계속해서 치료비도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이 여인에게 주어진 결과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요즈음과 같은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병 고치는 데 다 허비해 버렸는데도 여전히 계속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은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질병을 몸에 짊어지고서 가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이제 아무런 희망도 낙도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 본문에서 이제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마지막 딱 한 번의 결사적인 시도를 해 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이제 마지막 시도를 해 보아야 하겠다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녀의 결사적인 행동은 분명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곳에 기댈 곳이 없다는 절망과 분명히 여기에 길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이제 그녀는 마지막 선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권능을 향하여 간절히 손을 뻗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뻗어진 창백한 이 손이 오늘 바로 권능을 움직인 고통(pain touching power)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만일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라도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좌절과 부끄러움을 뛰어 넘어서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구하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손을 뻗어서 누군가를 만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길거리에서 슬쩍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만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간의 벽을 깨부수고 도저히 접촉해서는 안 될 사람에 의하여 일어난 크나큰 사건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사람과 무시받을 만한 사람 사이의 벽을 깨부수고 일어난 접촉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모든 절박함과 무기력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손을 뻗어서 젊은이들 속에 담긴 생명의 기운을 받아보고 싶어서 간절히 손을 뻗어 내미는 노인테들처럼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바로 이 순간에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권응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병고침의 권능만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손을 얹어서 일종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안수식처럼 이 여인에게 미래를 향한 새로운 가능성이 부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권응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달되고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참된 사도적 계승(real apostolic succession)이기도 합니다. 권능이 전달되고 새로운 가능성이 전달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사도적 계승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로 그 여인이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그 즉시입니다. 여기에서 바가는 "곧"(euthus)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고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통은 권능을 만졌고 그 결과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II


그 여인의 예수님을 만진 직후세 이제서야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지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규의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권능이 충만하였고 그 주위에 이 권능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즉시로 예수님은 권능이 그로부터 누군가에게로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갑자기 무례하게 끼여든 것에 당황해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 일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염려하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짤막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명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찾아보아라." 그러나 제자들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누군가가 예수님을 만진 것이 대수이겠는가 싶어서 예수님께 별 생각없이 반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권세자 사이에 일어난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큰 군중이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밀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이렇게 정신없는 데서 만진 사람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병에서 이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이 여인도 알아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누군가에 의하여 자신의 몸이 노출되었음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출됨으로써 예수님 자신과 그 여인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권능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병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전혀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 여인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형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뀌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감동되지 않으시면서 남만을 감동시키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여인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렇게 병자와 예수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감동의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밭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군중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이연인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서 자신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제 새롭게 고침을 받게 된 데서 생긴 용기와 자유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 대목에서 본문은 말하기를 "여자가 자기에게 이뤄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서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라고 합니다. 병 고침을 받은 여인과 권능 있는 치유자 사이에 참으로 감동스러운 순간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자신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간절함을 위해서 예수님의 몸을 몰래 만졌다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끼여들 수 없는 곳에서 불쑥 끼여들었습니다. 남들 같으면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순간에 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 평생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했던 고통과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살린 예수님의 권능에 관한 사실들, 그리고 병 고침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부어진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에 관한 사실들까지 모두 털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참 이상하죠?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요? 왜냐하면 사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몸을 불쑥 만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그동안 병자취급을 받으면서 거칠게 대우받았고 또 힘있는 사람들한테 병자로서 항상 위험을 느껴왔기 때문에, 이제 권세있는 자 앞에서 또다시 조롱과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III


여인의 말이 끝나자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능성을 함께 만들었던 자신의 파트너를 드디어 발견하셨다는 점입니다. 권세있는 자와 병자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함께 만들었던 권세자와 병자 두 파트너가 서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들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여인에 대해서 놀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조롱하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권세자가 약한 자에게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이 이러한 약간은 의외의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결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나왔다거나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만진 것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의 권능이 약화되거나 또는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이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일을 돌아보기를 원하십니다(빌 2:4). 예수님은 자신의 명성보다는 이 여인과 그녀의 미래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사실 예전에 이 여인은 자기에게도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인지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여인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의 참된 자아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고서 존중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딸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족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예로운 방식으로 이 여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위해서 자신은 무언가를 해 주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이여인이 품고 있었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열망도 사실은 그녀 자신의 열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의원들과 재력가들이 그녀를 미참한 상태에 내버려두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러한 비참한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열망과 각오도 그녀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려는 데 있어서 이 여인 스스로가 자신이 용기와 자유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선택한 길입니다. 그녀는 분명 손을 내 뻗어서 권능을 받고 변화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분명 이제 자신의 미래는 더 이상 절망스러운 과거를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확신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 속에서 이 여인을 보내고 계십니다. 더 이상 피 흘림도 없이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속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도움과 희망을 주지도 못하는 의원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건강하고 희망에 찬 하나님의 딸로서 평안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제 이 여인은 자신의 합당한 지위를 되찾았고 이제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가는 다시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제 더 나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더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절망적인 여인에게 베풀었던 것을 회당장과 그의 딸에게도 동일하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무언가 또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수가 없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과 그의 딸에게 주어진 것과 똑같이 이름도 없는 이 여인에게도 새로운 생명과 미래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서는 이 여인도 이제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이름도 없는 병자였는데 이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된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을 주는 권능의 범위 안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IV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 안에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여인처럼 계속해서 거칠게 대우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생명을 쏟아버리고 헛되이 가산을 써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권능에 손을 대보고 싶지만 전혀 그러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 모두는 군중들 틈 속에서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제자들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바빠서 당연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도 못하는 제자들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물론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일원으로서 예수님의 권능과 치유하시는 능력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간의 권능이 우리에게서부터 피 흘리는 환자들에게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환자와 권능을 가진 자가 서로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엮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이 절망적인 여인과 예수님에 관한 조금은 이상한 이 본문이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본문이 아니라면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모여서 새로운 생명을 향하여 창백하게 내뻗었던 그 손이 결국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이 본문이 아니라면 이 초라한 여인이 결국은 삶과 실존에 대한 전혀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이 여인에 관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믿는 여러분은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예전의 관습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고 하는 예전의 패턴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뭉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에게 실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새 세상을 향한 지도입니다. 그분을 만짐으로써 우리에게 새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함께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 그리고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우리 동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너의 믿음으로 온전하여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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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마5:43-45) ㅁ 마틴 루터 킹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3-45)"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여러 가지 교훈들 중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명령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처럼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우리를 비난하고 당신을 파괴할 흉계를 꾸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자 니이체(Nietzsche)와 같은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기독교 윤리가 강하고 힘 있는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겁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니이체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의문들과 다른 견해들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 명령은 우리를 새로운 도전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계속되는 사건들은 우리들이 미움이라는 길을 끝없이 여행하는 사람이며 어쩌면 이 여행 도중 우리들이 파괴와 파멸의 길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하나의 신실한 명령으로 제쳐 두고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생존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목입니다.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는 힘은 현존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는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현실적인 사실주의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이 얼마나 어려운 행동인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는 모든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 말이 지닌 깊은 의미를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 명령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 명령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드러나도록 힘 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실제적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첫째,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계속 개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먼저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악을 행하고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합니다. 용서하는 행동은 언제나 나쁜 일을 당하거나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 고통스러운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 끔찍한 압박을 당하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은 탕자 아들과 같이 제 정신이 들어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먼지가 나는 길을 걷습니다. 피해를 입은 이웃(사랑하는 아버지)은 용서의 따뜻한 물을 부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나 악한 행동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악한 행동이 더 이상 인간관계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신선한 출발과 새로운 시작에 필요한 환경을 구성하는 촉매가 됩니다. 그것은 짐을 가볍게 해 주고 빚을 탕감해 줍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의 진정한 본질을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용서의 의미는 용서할 사건을 그의 마음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결코 그 사건을 잊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사람이 했던 나쁜 행동이 새로운 관계에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게 용서할 사건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는 화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정도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냅니다.

둘째로, 원수(혹은 이웃)의 악한 행동, 우리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악한 원수에게서 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정신분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자신을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우리를 분노케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라틴 시인 오비디우스(Ovid) 처럼 탄식하게 합니다. "나는 더 나은 선을 보고 안다네. 그러나 나는 악을 따르네."

오비디우스의 생각과 비슷하게 플라톤(Plate)도 "사람의 인품은 두 마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쌍두마차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가장 나쁜 것 속에 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우리의 가장 좋은 것 속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발견할 때 원수를 덜 미워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 충동적으로 저지른 악한 행동을 무시할 때 우리는 이웃 원수 속에 있는 선을 발견하므로 우리는 그가 저지른 행동의 무지막지함과 악함이 그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그의 미움은 공포와 교만과 무지와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악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원수를 이기거나 비참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우정과 이해로 승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나쁜 일을 한 원수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가 쓰러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를 한 구석으로 몰아 그를 찌를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말과 행동은 원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미움'의 벽에 갇힌 넓은 '사랑'의 저수지에서 '사랑'의 물을 방류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미는 감정의 분출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감정놀음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위대한 것입니다. 어쩌면 헬라어로 이 단어를 살펴보는 것이 이 단어가 지닌 의미를 보다 더 명확하게 해 줄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의 단어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입니다. '에로스'라는 단어는 심미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에로스는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의 소망이라고 표현됩니다.

두 번째 단어인 필리아(philia)는 쌍방간의 사랑, 친밀한 애정, 친구 사이의 우정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세 번째 단어인 아가페(agape)는 모든 사람에게 이해와 창의적이고 죄를 용서해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흘러 넘치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차원에 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식이 우리에게 호감을 주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불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차원에 있을 때 그들이 행한 행위는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을 행한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우리가 다니는 길에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가져다 놓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고 우리 집을 폭파시키려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좋아하는 것'보다 '사랑'이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을 때 에로스나 필리아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는 바로 이해심 많고 창의적인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오직 이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런 형태의 사랑으로 반응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라는 실제적인 문제에서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미 별들이 사라진 밤이 더 깊은 어둠을 주는 것처럼 미움을 미움으로 되돌려 갚는 것은 미움을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어둠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가중시킬 뿐이며 폭력은 폭력을, 무법은 무법을 가중시켜 더 심한 파괴에 이르게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가 명했을 때, 예수는 더 심오하고 궁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명령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까? 미움은 미움으로, 전쟁은 더 심한 전쟁으로 대처하는 '악'이라는 반응으로 연결된 사슬은 부서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미움은 영혼에 상처를 내고 사람의 인격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움이 악이며 무서운 폭력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미움받는 사람에게 무슨 영향이 미칠지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미움이 피해자에게는 치료할 수 없는 치명적 상처가 됩니다. '히틀러'라고 불리는 한 사나이에게 있었던 '미움' 때문에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일, 피에 굶주린 폭도들에 의해서 흑인들에게 가해진 말할 수 없는 폭력, 전쟁의 어두운 공포, 비양심적인 독재자에 의해서 수백만의 하나님의 아이들에게 행해진 참으로 끔찍하고 무례한 행동들과 불의들, 우리는 '미움'이 가져온 그 추악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움의 사건들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자신에게도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사실입니다. 정복되지 않는 암처럼 미움은 사람의 인격을 좀먹고 인격이 가진 생명력을 먹어서 없애 버립니다. 미움은 사람이 가진 가치와 객관성을 파괴합니다. 미움은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진리를 비진리로 비진리를 진리로 묘사해 버립니다.

프랭크린 프래지어(E. Franklin Frazier) 박사는 '인종 편견 시험'이라는 재미있는 수상집에서 인종 편견을 다루었습니다. 실험대상이 된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 다른 백인들과 친밀하면서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백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인종차별과 흑인을 꼭 같은 존재로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믿을 수 없는 비논리성과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움이 마음에 끈질기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은 우리가 가진 많은 피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속에 뿌리 깊히 박혀있는 미움에서 발생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이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말합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미움은 인격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놀랍고 재빠르게 사람의 인격성을 회복시켜 준다"고 예수가 이미 수 세기 전에 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사랑은 우리의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대하면 우리는 결코 원수가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적의를 제거할 때에 우리의 원수가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본질 상 미움은 파괴하며 파멸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질 상 사랑은 창조하고 만들어 나갑니다. 사랑은 속죄의 힘으로 변화시킵니다.

미국 전 역사를 통틀어 링컨 대통령은 사랑으로 화합의 드라마를 이루어 낸, 놀라운 인물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의 숙적은 스탠톤(Stanton)이었습니다. 스탠톤은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대중 앞에서 링컨을 깍아 내리는 데 사용했습니다. 스탠톤에게는 링컨에 대한 뿌리 깊은 미움이 있었기 때문에 링컨의 면전에 대고 퉁명스런 말투로 쏘아 붙였으며 기회만 주어지면 링컨에게 통렬한 비난을 쏟아 부어 링컨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링컨의 정책을 수행해갈, 가장 가까이에서 링컨을 보좌해야 할 각료들을 뽑아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링컨은 요소 요소에 가장 적합한 장관들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링컨이 중요한 국무장관에 사람을 임명해야 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링컨이 이 자리에 누구를 임명했는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이름이 '스탠톤'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링컨을 도왔던 내부 그룹에서 즉각적인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충고에 충고가 이어졌습니다. "각하, 지금 큰 실수를 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이 '스탠톤'인 것을 아십니까? 스탠톤이 각하에 대해서 했던 온갖 추악한 말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각하의 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탠톤은 각하께서 수행하는 정책을 방해하는 데 힘쓸 것입니다. 각하, 이 사람을 임명하는 일을 심사숙고하신 것입니까?"

링컨의 대답은 분명하고 정확했습니다. "예, 나도 스탠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나에 대해서 말했던 끔직한 말들을 전부 기억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를 생각한다면 그가 가장 적임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스탠톤은 아브라함 링컨의 국무장관이 되었고 국가와 대통령에게 엄청난 봉사를 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링컨은 암살되었습니다. 링컨에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가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웰스(H. G. Wells)는 링컨을 미국 역사 상 위대한 6인의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에 관련된 수 없이 많은 일화가 있지만 스탠톤과 관련된 일화는 가장 위대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스탠톤은 그가 한때 무척 미워했던 사람의 시신 앞에 서서 링컨은 지금까지 살아 간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우리 가슴 속에 오래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링컨이 스탠톤을 꼭 같이 미워했다면 그들은 무덤에서도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이 가진 사랑의 힘은 적을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링컨이 남부에서 했던 부드러운 말은 링컨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태도 때문에 남북전쟁 중 감정이 최고로 악화되었을 때 남부에서 링컨은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링컨의 이러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구경꾼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 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부인, 나의 적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나의 적들을 파멸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속죄의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궁극적인,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아야 하는 더 기본적인 이유는 예수의 말씀에 더 세밀하게 나타납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는 하나님과의 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어려운 사명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랑을 행할 때 이 잠재성이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종 차별에 대해서 앞에 말했던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입니다. 핍박을 받는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능력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인종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의 어두운 그림자는 용서하는 사랑의 빛으로만 사라질 수 있습니다. 3세기 이상에 걸쳐 미국의 흑인들은 압제의 쇠사슬에 온 몸을 맞아왔습니다. 낮에는 혹사당하고 밤에는 참을 수 없는 불의로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이들은 인종차별의 부당한 짐을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 살기를 강요당한다면 우리는 더 모진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며 꼭 같은 증오로 보복할 마음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질서는 점점 사라지고 기존의 질서만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힘과 겸손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생은 꼭 같이 주고 받고 그대로 되돌려 갚아 주는, 개가 개를 삼키는 것과 비슷한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설교자들이 말하는 내용처럼 들립니까? 당신은 이상이 실현된 유토피아와 조금 동떨어진 세계, 지나치게 힘든 세상은 아니지만 냉정한 세계에 살아간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친구들과 우리들은 오랜 시간 동안 현실에 따라 살아 왔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방법이 지금 우리에게 더 깊은 혼동과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미움과 폭력에 무릎을 꿇은 공동체의 붕괴로 이 시대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속죄와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힘과 정열을 다하여 인종차별의 이 악몽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정책은 소름끼치게 싫어하지만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당신에게 이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하는 육체적 폭력을 영혼의 힘으로 이겨낼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이것을 계속 행한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제시하는 불의한 법을 따를 만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은 선과 결탁하는 것만큼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감옥에 넣는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당신의 하수인 관리를 우리 공동체에 한밤 중에 보내서 마구 우리를 때리고 우리가 거의 죽은 것 처럼 남아 있다 해도, 그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끈질지게 고통을 참아내는 것에 당신이 지쳐버리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어느날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자유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해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릴 것입니다. 우리가 거둔 승리의 기쁨이 두 배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번식한 이 창조적인 힘은 인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요구를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위대한 장군이었던 나폴레옹(Napolen Bonaparte)은 자신이 치른 전쟁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Alexander), 시저(Caesar),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와 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에 의존하였는가? 그들은 힘에 의존했다. 그러나 수세기 전 예수는 사랑 위에 제국을 세웠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누가 이 말의 진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과거에 이름을 떨쳤던 위대한 장군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제국은 무너졌고 불타서 한 줌의 재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견고하고 웅장하게 세워졌고 이 나라는 지금도 커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주님의 영감으로 헌신된 사람들로 구성된 아주 작은 무리로 출발하였으나 이들은 로마 제국을 흔들고,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일까지 해냈습니다. 오늘날 가장 광대한 나라인 예수의 나라는 9천 만을 넘어가고 모든 대륙과 종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승리의 약속을 듣습니다.

예수는 태양이 떠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다스리신다
예수의 성공적인 여행은 계속된다
달이 차고 기울어 지는 곳까지
그의 나라는 나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친다

또 다른 찬양소리로 화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동과 서가 없네
그리스도 안에는 남과 북이 없네
온 세계를 뒤덮는 위대한 사랑만 있네

예수가 전적으로 옳습니다. 역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을 거절당했던 한 사람의 하얀 유골로 대체되었습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 말씀을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까지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틴루터 킹 / 흑인인권운동가,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68년 암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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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어떤 프랑스 철학자가 "사람이 그 안에서 극과 극을 결합해 내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도 강해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인한 사람은 극과 극의 생각을 그의 삶에서 잘 소화합니다. 사람들이 극과 극을 잘 결합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상주의자는 대개 현실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고 현실주의자는 대개 이상을 꿈꾸지 못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투사는 대개 소극적인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고 소극적인 사람은 투사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좀처럼 기고만장하지 않으며 기고만장한 사람이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정(正)과 반(反)의 창조적인 조화에서 얻어지는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진실은 하나의 명제에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반대의 명제에서 찾아지는 것도 아니며 두 명제가 합쳐져 새로운 명제가 될 때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반대되는 생각을 하나로 합치는 필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힘들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정치 관료들의 반대와 구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전통의 겨울 속에서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 거만하고 마음이 아주 차가운 사람들과 제자들이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행동강령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한 사람이 동시에 '뱀'과 '비둘기'같은 성품을 가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두 성품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뱀의 지성과 비둘기의 온유한 마음, 차가운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선 차가운 지성이 왜 필요한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차가운 지성은 날카로운 통찰력, 현실의 여러 평가, 중대한 결정에 필요한 것입니다. 차가운 지성은 미신과 전설의 껍질을 날카롭게 뚫어 가루로 만듭니다. 이것은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체에 쳐 가려냅니다. 차가운 지성을 가진 사람은 빈틈없고 신중합니다.

그는 맡은 일을 견고하게 하고 목적을 분명하게 하는 강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 차가운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좀처럼 생각이 확고하고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적인 질문에 협소한 대답, 불충분한 해결책만 제시할 뿐입니다. 무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사람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덜떨어진 지성의 소유자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습니다. 광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그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광고가 이 제품이 다른 제품보다 훨씬 좋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상품을 구매합니다. 광고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전제를 하고 세련되고 효과적인 광고문으로 소비자들이 상품에 대해서 가진 의구심을 불식시킵니다.

이 믿을 수 없는 대중의 어리석음은 신문에 인쇄된 내용을 진리로 믿는 많은 독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언론, 토론회와 수많은 연설을 개최하는 공신력을 가진 기관조차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실을 대중에게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차가운 지성으로 그 정보를 날카롭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거짓에서 진실을 가려내지 못하고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반(半)진리와 선입견과 잘못된 사실에 끊임없이 침해를 받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사항은 거짓에 가득 찬 흑색선전의 습지에서 구출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온갖 미신을 믿기 쉽습니다. 그들의 지성은 불합리한 공포에 끊임없이 침해당합니다. 이들은 13일의 금요일을 두려워하며 검은 고양이가 오솔길을 걸어 다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뉴욕에 있는 고층 호텔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던 저는 13층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12층 다음에는 14층이었습니다. 저는 엘리베이터 안내원에게 13층이 없어진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호텔을 이렇게 지어요. 사람들이 13층에 머물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습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공포를 싫어하는 것은 14층이 실제로는 13층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어요."

무지한 사람은 공포 때문에 낮에는 수척해 지고 밤에는 두려움에 떱니다.

무지한 사람은 변화를 항상 두려워합니다. 그는 있는 그 상태에서 안정을 원하고 새 것에 대해서 병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심한 고통은 새로운 생각입니다. 남부에 사는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나는 지금 인종차별폐지가 시대적으로 불가피하게 요청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내가 죽은 후에 이 일이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언제나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 변화가 없는, 과거와 꼭 같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무지한 사람은 자주 종교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교황의 칙령과 교서, 종교재판, 출교를 통해서 교회는 진리를 구하는 자가 걷는 길에 뚫을 수 없는 큰 벽을 가져다 놓고 진리를 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역사-철학적 비평가들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불경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며 이성은 종종 타락한 인간의 기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팔복을 다음과 같이 고쳐서 읽습니다. "무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과학과 종교가 대립된다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신앙인과 차가운 지성을 가진 과학자 사이에 대립이 있을지 모르나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립은 없습니다. 그들이 선호하는 세상은 다르고 그들이 이 세상을 추구하는 방법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발견하고 종교는 해석합니다. 과학은 사람에게 힘이 되는 지식을 제공하고 종교는 과학을 통제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과학은 주로 사실을 연구하고 종교는 주로 의미를 해석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경쟁자가 아닙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작용을 합니다. 과학은 종교가 비이성주의의 절름거리는 발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을 막아주고 무지로 마비되는 것을 방지해 줍니다. 종교는 과학이 쓸모 없는 물질주의의 습지로 추락하는 것과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우리는 비이성주의자의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더 멀리 나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비이성주의에 사로잡힌 독재자는 사람에게 야만적인 행위를 하고 민주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테러를 가합니다. 히틀러(Adolf Hitler)는 그의 추종자들이 대부분 무지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했습니다. "나는 대중을 감정을 자극해서 움직이고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논리를 사용한다." 히틀러는 '나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치밀하게 조작된 거짓말, 이것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 사람들이 천국이 지옥이며 지옥이 천국이라고 믿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거짓말이 심하면 심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무지한 것은 인종 편견의 기본적인 원인들 중의 하나입니다. 차가운 지성을 가진 사람은 그가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항상 사실을 면멸히 검토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실을 살펴본 후 결론을 내립니다.

인종 편견은 이유 없는 두려움, 의심,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백인은 우월한 민족이며 흑인은 열등한 민족이라는 생각의 오류를 인류학자들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흑인들은 학문적인 면, 체력, 도덕적인 면에서 백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차이는 인종차별과 차별대우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만큼 이들은 이지적이지 못합니다. 인종차별의 비극적 결과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사회학적으로도 지지 받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남부의 너무 많은 정치가들 자신이 인종차별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가진 질병 속에 빨려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음흉한 간계로 선동적인 말을 퍼뜨리고 왜곡과 교육받지 못하고 지적 상태가 부진한 백인들 속에 있는 비정상적인 공포와 병적인 반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진리를 퍼뜨립니다. 교육받지 못한 백인들은 혼동 속에서 천박한 행동, 정상적인 사람들이 저지를 수 없는 폭력적인 행동을 하도록 방치됩니다.

우리가 편견과 반진리와 완전한 무지의 족쇄를 깨뜨릴 만큼 지혜롭게 되기 전까지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우리가 감상적인 생각을 하도록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감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국가나 도시는 점차적으로 영적인 죽음에 가까워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로와지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또한 온유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따뜻한 마음이 없는 지혜는 차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에는 봄의 따스함과 여름의 작열하는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계속되는 차가운 겨울만 있을 것입니다. 잘 훈련된 냉정한 이성을 가졌지만 감정 없는 메마른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본다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메마른 사람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람을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 라는 척도에 따라 판단하는 형편없는 실용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결코 우정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기에 그는 너무 차갑습니다. 그는 자기 중심적이어서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는 외로이 떨어진 섬입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샘솟는 인류의 대륙과 연결되지 못합니다.

메마른 사람은 보통사람들이 가진 동정심도 부족합니다. 그는 형제의 고통과 고민 때문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는 날마다 불행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는 가치 있는 일에 자선을 베풀지 사랑의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지 않습니다.

메마른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목적물이나 바퀴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톱니로 생각합니다. 산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그는 사람을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을 도시생활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서 돌아가는 수레바퀴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쟁같이 돌아가는 삶의 아슬아슬한 바퀴 속에서 그는 사람들을 생명이 아닌 부대를 구성하는 '숫자'로 간주합니다. 그는 비인격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는 자주 메마른 사람의 인격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삶은 오직 자기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이었지 다른 사람들을 비춰볼 수 있는 창은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부자여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돌아볼 만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고 그 자신과 다른 형제들 사이에 놓여진 깊은 수렁에 다리를 놓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예수는 멋있는 삶은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함을 잘 결합시킨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뱀같은 지혜를 소유하기 위해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냉정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흑인인 우리는 지혜와 온유함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향해서 창조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무지한 사람들은 억압에 대처하는 단 한가지 방법은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복종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합니다. 그들은 억압받는 자로 남아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때 모든 노예들이 해방을 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지적한 것 처럼 이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낯선 곳으로 가는 곳보다 그들이 익숙해 있는 악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를 노예가 견뎌야 할 가혹한 시련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상의 방법은 아닙니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비겁합니다. 내 친구들이여,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우리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맞바꾸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남부 뿐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라도 백인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소극적으로 불의한 사회체제를 용인한다면 그 체제에 우리가 협조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사회가 양산하는 악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메마른 사람과 육체적 폭력과 마음을 좀 먹는 증오로 적을 물리치는 잔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폭력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승리를 줍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폭력이 해결하는 것보다 폭력으로 야기되는 사회적인 문제들이 더 많습니다. 폭력은 결코 영원한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 우리가 폭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간다면 태어나지 않은 우리의 자손들이 기나긴 고독의 쓰라린 밤을 맞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끝없는 혼동의 통치일 것입니다. 시간의 긴 복도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한 목소리가 폭력을 가하려는 모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의 칼을 거두라".

역사는 예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국가의 멸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세 번째 방법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비폭력 저항입니다. 이것은 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마음을 결합시킨 것이며 자기 만족을 피하고 비이성주의자들의 무사안일도 메마른 사람들의 폭력과 잔인함도 배제합니다.

나의 믿음은 비폭력 저항이 민족 간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에서 우리의 행동을 안내해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비폭력 저항을 통해 우리는 불의한 사회체제에 맞설 수 있고 동시에 이 사회체제를 지속하려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혼신을 다해 일해야 하며 시민으로서 우리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친구여! 정의를 얻기 위해서 거짓과, 악, 증오와 폭력과 같은 저급한 방법을 언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해야 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위대성은 냉철한 이성을 소유함과 동시에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엄격하기도 하시고 온화하시기도 합니다. 성경은 항상 동시에 하나님의 이 두 속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의 냉철함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서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두 팔을 활짝 펴고 있습니다. 한 손은 공의로 우리를 안으시고 또 한 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인 사랑의 팔로 감싸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위를 했을 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탕자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였습니다.

나는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소유한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롭기만 하셨다면 하나님은 차갑고 인정머리 없이, 천국과 아득히 먼 곳에 앉아 있는 독재자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처럼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분이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단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셨다면 너무 여리고 상처받기 쉬우셔서 잘못된 행동을 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놓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선한 세계를 만들고 싶은 열망은 아주 강하지만 악이 분출되는 상황에서 자신은 아주 무력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웰스(Wells)가 "하나님, 보이지 않는 왕"에서 묘사한 하나님처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메마르기만 하신 분도 아니고 무지한 분도 아닙니다. 그는 세계를 초월해 존재할 만큼 냉철하신 분이시며 또 세상 안에 존재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사랑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그는 이 고통과 이 싸움에서 우리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찾으실 것이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이 비극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위해 아파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잠자던 불의의 거인이 지구에 출현할 때 우리는 이 괴물을 물리쳐 잔디같이, 흩날리는 풀같이 만들만한 힘을 가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꾸준한 노력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억압을 물리치지 못한다 해도 사악한 인간을 맞상대할 아주 적절한 분, 인간을 자유자재로 다루실 수 있는 힘을 가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역경의 찬바람으로 우리가 비틀거릴 때, 낙담과 분노의 폭풍이 우리에게 몰아칠 때 우리가 저지른 우매한 행동과 죄로 정든 집을 떠나 먼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병들어 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를 치료하고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기꺼이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 지고 밤의 어두움이 점차 가실 때 우리는 어둠의 골짜기에서 희망과 감사의 햇빛 찬란한 거리로 인도하여 주신 사랑과 공의를 가지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흑인 인권운동가, 19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68년 암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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