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길
2002-02-18 15:37:59

(엡 4:26-27) 2002/02/17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삶을 살아가면서 식구들끼리 부부끼리 가족들끼리 동료들끼리 믿는 성도들끼리 서로 대화가 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은 많이 오고 가는데 진정한 인격적 교감이 있는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요? 요한복음은 대화가 많이 나오는 특징을 가진 성경입니다.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마르다 마리아와의 대화, 베드로와의 대화, 그리고 니고데모와의 대화 등 개인적인 대화가 특징적입니다. 대화(dialogue)는 오고 가지만 사실 서로 Communication 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communication 은 의사소통 즉 원만한 전달을 말합니다.




"왔대이" "monday" "버스대이" "happy birthday!"


미군 비행장 근처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의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시기 위해 같은 교회 친구와 함께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시간이라 배차 간격이 길어서 한참 만에야 기다리던 버스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옆의 친구에게“왔데이”하고 차 탈 준비를 서두릅니다. 이 할머니는 경상도가 고향이라 서울에서도 고향 말을 표준말로 썼습니다. 그래서 버스가 오자“왔대이”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에 야근을 마치고 나오는 미군 병사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할머니의“왔대이”를 "무슨 요일인가?" 라는 뜻의 "What day?" 로 잘못 전해 듣고 "Monday " 하고 친절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할머니가 "Monday"를 "무슨 차인데?"라는 뜻의 "먼대이”로 잘못 알아듣고“버스대이”그랬습니다.




그 말을 듣던 미군 병사가 이번엔 뭐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Happy Birthday" 하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대이”를 "Birthday"로 알아듣고 "Happy birthday" 하고 생일축하를 한 것입니다. 할머니와 미군 병사는 서로 대화는 했지만 전달이 안됐습니다. 이런 경우를 communication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혼자 드러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룰 때이다


"좋다”라는 말은“조화롭다”는 말과 어원이 같고, "나쁘다"란 말은“나뿐이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좋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잘 이루는 사람이며, 좋은 물건은 주변 환경과 조화를 잘 이루는 물건이고, 좋은 음식은 자기 몸과 잘 조화를 이루는 영양식을 말합니다. 나쁜 사람은 항상 "나 뿐이다" 라는 독선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혼자 드러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조화를 이룰 때입니다. 인간의 삶이 아름다울 때 뿐 아니라 신앙이 아름다울 때도 서로 조화를 이룰 때입니다.





사람은 4가지를 할 줄 알아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첫째, 웃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웃을 때 웃을 수 있어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둘째, 기뻐할 줄 알아야 하고 셋째,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고 넷째는 분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고,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쁘지 않고 만사가 귀찮고 힘들고 표현을 하고 싶지 않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한다면 이것은 어디가 크게 아프거나 건강하지 못한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이다


사람들은 감정이 상할 때 터뜨리는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우리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길이 탈 때 잘 연소되면 빛이 되고 열을 내어서 폭발적인 힘을 갖습니다. 그러나 잘못 타면 연기만 나서 다른 사람 눈에서 눈물을 내고 주변을 어둡게 하고 주변을 불살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가운데 분노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 중에서 통제하기 힘들고 복잡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대부분 분노라는 감정일 것입니다. 특히 성격이 급하거나 투쟁적인 사람은 이런 분노를 다스리는 데에 커다란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거친 말투나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화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 미움으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사람간의 다툼의 70%는 거친 말투와 화 때문에 기인한다는 보고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 그리고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잠10:12)고 합니다.




과연 목사이기 때문에 모든 분노를 참아야 하는가? 과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끓어 올리는 분노를 참아야 하는가? 안 믿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길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 화를 내?" 라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들으면 사실 화가 더 오릅니다.




"분노가 죽인다" 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화날 때 마음껏 화내십시오. 빨리 죽습니다. 화나도 꾹꾹 참으십시오. 가슴이 터져 죽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마음껏 화를 냅니까? 아니면 화를 참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그 모양과 강도는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분노를 다루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무조건 "꾹꾹 눌러" 버립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분노를 처리하는데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자신이 화가 나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후 이런 사람들의 신체 어느 부분에서는 억압된 분노로 인한 증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혹은 그 동안 내면에 쌓여 온 감정 때문에 결국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분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아무 여과 없이 쏟아 버리기도 합니다. 제 멋대로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본인은 시원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카다란 상처를 남깁니다. 또 자기 자신도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와 슬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분노에 대한 억압이 분노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듯이, 분노의 분출 역시 본인과 상대방에게 아픈 상처만 남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하나님 말씀은 분노를 어떻게 다루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오늘 성경말씀 26절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분이 날 수도 있으나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화를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커다란 악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란 말이 미담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유독 이 나라에만 "홧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가슴앓이 병입니다. 진정으로 화를 내야 할까? 참아야 할까? 라는 문제는 참으로 고민스러운 문제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6-27절). 오늘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분을 내어도" 이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분을 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짓지 말며" 분을 내어도 죄는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안 지을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데 죄짓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귀로 틈타지 못하도록 자기가 치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하나의 감정이다


먼저 분노하는 인간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분노는 하나의 감정입니다. 분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 속에 타오르고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분노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서 이 분노가 악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가 있고 선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가 있는데 선한 동기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볼 때 진노하십니다. 이것은 선한 분노입니다. 또 하나 불의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 속에 타오르는 분노는 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는 대개 욕구 불만에서 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욕구가 불만 될 때 표출되는 울화라든지 고뇌, 불쾌, 긴장, 이런 모든 상태가 곧 분노의 상태인데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이것을 "화"라고 말합니다. "화"는 불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불만이 내면화될 때 화병이 됩니다. 이런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이 가중될 때 분노가 격노로 변해서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자학적 분노와 타학적 분노


분노는 그것의 표현이나 작용하는 대상에 따라 자학적 분노와 타학적 분노가 있습니다. 자학적 분노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행동이나, 원인이나,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이 나면 머리를 쥐어뜯는다든지, 가슴을 친다든지, 통곡을 합니다. 이것은 분노를 자기가 책임을 지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격한 감정이나 행동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마음 속에서 억누르면서 참고 인내하는 내성적인 상태입니다. 성숙한 인격자일수록 평범한 요인에 의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드물지만 혹 일어난다 할지라도 드러내지 않고 발을 구른다든지 혼자 탄식한다든지 하면서 분노를 삭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분노는 타학적입니다. 분노의 책임을 전적으로 타인에게 돌리고 격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물건을 던진다든지, 문을 쾅 닫는다든지, 사람을 때린다든지, 욕설을 한다든지, 멱살을 잡고 죽인다든지 이런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분노의 폭발을 밖으로 터뜨리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데 그렇지 않고 내면화할 때는 이런 징조로 나타납니다.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싸우면 분노를 침묵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1년 동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밖에 초조, 원한, 비통, 증오, 이를 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분노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위장 된 감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내는 것은 나쁜 것이야, 무조건 참아야 돼" 그러면서 참는 것은 위장된 분노입니다. 분노가 위장으로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속에서는 상처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위장된 분노는 꼭 우표를 수집하는 것처럼 수집해서 쌓다가 마지막 한 장이 오면 팔아 넘기는 것처럼 분노가 쌓이다가 어느 사소한 것이 하나 걸리면 그 쌓였던 모든 것이 폭발하게 됩니다. 침묵하는 위장이 있습니다. 화가 났지만 전혀 말을 안 합니다. 또 냉소나 비판적인 분노의 적대감으로 위장합니다. 눈을 흘긴다든지, 비웃는다든지 하면서 분노를 위장합니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토라진다든지, 고집을 피운다든지, 약속을 어긴다든지, 남의 의견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에너지처럼 축적되거나 변형되어 존재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억압하고 그 존재는 부정해도 용해되지 않는 응어리로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체내에 지방이 쌓이듯이 분노가 어디에서든지 풀지 아니하면 내 속에 쌓여서 자기를 위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축적된 분노가 결국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습니다. 자기 속에 축적할 때는 병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심리학자 헨리 브랜튼은 모든 비정상적인 사람의 상담을 분노에서 80-90%를 보고 있습니다. 병이 든다는 것은 무서운 것인데 분노가 우리 속에 쌓일 때 어떤 면으로든지 터져야 되는데 그것이 병으로 터질 때가 있습니다. 화를 내든 안 내든 이것이 쌓이든지 표출되든지 이 속에 분노가 생겨서 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존 헌터라는 생리학자가 연구 발표에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 내면 화 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 이것이 이 분의 명강의로 유명한 것인데 마침 그날 따라 강의를 하는데 앞의 사람이 일어서더니 헌터 씨에게 반박을 합니다. 그런데 헌터 씨가 갑자기 분노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자기가 강의한대로 화내는 자가 먼저 죽는다는 것을 임상실험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저와 신학교 동기 목사님이 원로목사님이 계신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원로목사님이 담임목사에게 화를 내시다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원로목사님에게 화를 내게 했느냐? 담임목사가 원인제공을 했다고 가족들이 책임을 물어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분노가 곧 죄의 출발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분노로 살인이 시작됩니다. 최초의 범죄가 창세기 4장에서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것은 거절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은 거절당하고 아벨의 것은 열납되니까 얼굴색이 변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들 가운데서 동생을 쳐죽입니다. 이것이 분노가 저지르는 최초의 죄악이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자체는 죄가 아닌데 이것이 이기적인 미움과, 원한과, 보복으로 드러날 때 무서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죄 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악이 없더라도 해가 지도록 품으면 결국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의가 없는 분노, 가령 불의한 것을 보았을 때 분노가 나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자기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쁜 놈 같으니라고" 하면서 다음날까지 그 마음을 품고 있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치거나 모욕을 줄 때, 돈을 떼었다든지 할 때 속에서 증오심이 타오릅니다. 보증을 서 주었더니 집까지 날라버렸어, 직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퇴출시켜버렸어 그럴 때 분노와 원한이 사무칠 때 이것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잘 조절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결국은 죄를 짓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나에게 잠재될 때 죄도, 질병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서운 결과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가 승화되면 인격을 폭발적으로 위대한 일을 해내는 건설적인 힘이 됩니다. 마치 홍수가 내려서 도시를 쓸어버리면 도시가 다 파괴되지만 이것을 잘 조절해서 댐으로 흘러내리면 수력발전이 되어서 수많은 어두운 땅을 환하게 하는 빛이 되고 힘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성인 된 아동이 울고 있기에 잠잠히 주님께 이 자존감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감정의 표출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아야 우리 자신의 병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참으로 온순한 사람이었고 한번도 부모님 뜻에 불순종해 본 적이 없고 절대 순종하며 반항이 없었고 형제간에도 다툰 일이 없고 친구들과도 싸운 일이 없는데 가끔씩 가까운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큼 크게 화를 내거나 분노할 때가 있는데,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 속에 잠재되어 분노하고 있는 성인 아동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잠재된 감정이 의식 속에 쌓여서 그렇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를 낼만한 사람도 아닌데 그 자아 속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한 감정이 잠재되어 있다가 표출되면 갑자기 화를 내고 분노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아 속에 있는 성인 아동이 울고 있을 때 여기에서부터 치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잠잠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노니 내가 너의 것을 다 치유했다. 다만 너는 믿고 하나님께 간구해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의 감정을 조절할까요?


먼저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28절"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자에게 구제 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못된 행동은 마음의 분노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난 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냐고 하였을 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면서 하나님께 처절한 분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더 화를 내는 모습입니다. 어떤 분은 차를 운전할 때 차를 깨끗이 세차하고 나면 운전 규칙을 잘 지키는데 차가 지저분하면 운전이 거칠어진다고 합니다. 아마 집안청소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집안이 청소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수선한 집에서 편안한 마음이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화나십니까? 먼저 선한 일을 하십시오. 화가 풀리기 전 먼저 선한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2)또한 29절 말씀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라고 입을 조심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프랑스의 후코라는 언어학자는 "사람은 말이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상담을 해보면 돈, 건강, 직장 문제로 오는 분보다는 대부분 마음의 상처 때문에 오게 됩니다. 마음이 곪아가는 것은 말이라는 날카로운 창 때문입니다. 10년 동안 머리가 아파서 아스피린을 먹는 분이 하는 말입니다. "당신은 왜 하는 짓마다 그 모양이야! 누구네 집 딸 아니랄까봐 그래?" 그 말이 10년 동안 분노를 낳게 하였고 한을 품게 만든 것입니다. 실제로 교육학자가 비교했다고 합니다. 한 아이에게 분노하는 말로 "아니 넌 아직도 걷지 못해?" 라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반면 "우리 딸이예요. 잘도 걷지요. 지금 아빠가 보고 있어요"라는 선한 칭찬을 하게 하였을 때 2년 이상의 차이를 보였고, 칭찬을 받은 아이가 90% 이상 분노를 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말이란 인간의 삶 속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말은 인간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 소통의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은 씨앗이다." 라는 말대로 사람은 평상시 말하는 대로 그 환경이 만들어지고 그의 삶의 모습이 이루어지기가 쉽습니다. 마치 누에가 그 입에서 300m나 되는 실을 뽑아서 집을 짓고 결국 그 속에 들어가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말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영향력이 크고 위대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뇌 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말에는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다." 고 했습니다. 즉 말이 뇌 세포에 전달이 되고 뇌는 척추신경을 지배해서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잠 18:20에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평상시 좋은 말, 복된 말은 하는 사람은 좋게 되고 복된 사람이 되고 나쁜 말,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그의 생애도 나쁘게 되고 악하게 되는 법입니다. 말의 힘은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벧전 3:10에 보면 "평생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결국 복된 사람이 되려면 복된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여러분에게 분노를 주었던 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 칭찬 받은 경험도 없고 칭찬한 경우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선한 말로 칭찬하셔서 분노를 해결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용서는 분노를 풀어줄 최고의 열쇠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분노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31절과 32절을 보면 "너희는 모든 악의를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분노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분노를 버리되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과연 내가 누군데 용서하고 안하고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분노케 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용서야말로 분노를 풀어줄 최고의 열쇠입니다.




마아크 트웨인은 "용서란 보라색 오랑캐꽃이 짓밟고 있는 사람에게 발하는 향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용서만이 분노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분노를 일으킨 분이 계신다면 용서하십시다. 그 분이 부모님인지 형제인지 친구인지 시어머니인지 자부인지 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십시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용서야말로 분노를 벗어나 자유함을 느끼게 만드는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가십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보십시다. 주님께서 자기를 해치는 자에게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에게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짐승을 사고 팔 때 채찍을 드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해치는 자에게 분을 내고 공의로운 일은 내버려둡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해치는 자, 못박는 무리들에게는 아무런 분도 내지 아니하고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분노의 대가를 지불합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 대가를 지불합니다. 내 속에 있는 남을 향한 분노, 증오심, 이것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의 가장 큰 효과요 근본적인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 모습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목이 곧고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하면서 책망할 때 저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면서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 용서로 분노하는 무리들의 대가를 지불합니다. 만약에 분노의 대가를 보복으로 한다면 같이 던져서 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으면서 그 대가를 자기가 지불합니다. 용서의 주님을 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봅니다.




우리 속에 타오르는 모든 분노와 감정을 치유하는 길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의 분노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내가 너를 위해서 네 대가를 지불하고 죽나니 내 안에서 살아라"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이 분노와 화를 용서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셨던 완벽한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용서해야 분노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행동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분노도, 미움도, 원한도 아닙니다. 사랑은 이 모든 분노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제일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런 것은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헬렌 켈러가 한 말입니다.“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윌리엄 제임스가 한 말입니다.




어려운 암 투병에서 승리하신 우리교회 장애순 집사님께서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소개합니다.


"지난 1년 간 암 환자인 저를 향해 보내주신 기도와 눈물과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2001년 1월 4일에 수술을 하고 6회의 항암치료와 33회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계획한 치료가 이제는 모두 끝나고 회복의 과정에 있습니다. 저 혼자의 기도와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긴 투병의 과정에서 목사님을 비롯한 장로님과 권사님, 집사님들의 기도가 아니었으면 정말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이 힘이 오는가? 내 능력은 결코 아닌데....... 분명 나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머리가 모두 빠졌을 때 제 모습을 제가 봐도 정말 보기 흉했습니다. 저 때문에 병간호하는 가족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도 수건을 쓰고 모자를 썼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얘야, 너는 왜 나의 작품을 부끄러워 하니? 너는 나의 작품이며 지금의 너의 모습은 하나님 나의 계획의 한 과정이란다. 네가 감히 만들어져 가고 있는 나의 작품을 부끄러워 할 수 있느냐? 지금의 네 모습은 결과가 아니란다. 이 아픔 뒤에 내가 계획한 결과가 있단다."




"하나님, 잘못했어요. 제가 감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며 겪게 되는 우리 모두의 질병, 슬픔, 괴로움, 억울함 등 모든 아픔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 아픔들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안겨 주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얼마 전( 2002년 1월 15일) 종합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검사결과는 좋았습니다. 생명이 연장된 것을 보니 이 땅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아있는가 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할 일을 주세요. 할 일을 깨닫게 해 주세요. 할 일을 감당해낼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교우 여러분! 저는 힘이 없습니다. 기도하실 때 저를 위한 기도도 함께 해주시면 더욱 힘있게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연장된 시간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메꾸어 나갈 수 있겠습니다."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신 분들은 대개 마음의 상처도 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장 집사님 께서는 불치의 암을 치료하셨을 뿐만 아니라 상한 감정까지도 치료 받으셨고 이제는 구역식구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함께 나누고 인도하는 역할까지도 맡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분노가 탈 때 기도하시고 십자가로 달려가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기지 못하는 분노, 화가 있으면 그 출처를 밝혀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로 올라가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지난 과거 시절의 것을 가지고 나를 붙들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사순절 첫째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만큼 크고 깊은 상처를 갖고 계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깊은 상처이면서 우리를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셔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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