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것인가 2002-01-29 13:02:40 사도행전 1 :12~26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침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사람은 한 해 한 해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는 장·단점이 있어요. 단점은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김동융 목사가 입원을 해서 병문안을 갔는데, 의사가 저에게 "장인 어른 되십니까?" 라고 했어요. 의사가 이렇게 상처 줘도 됩니까? 나이를 먹는 것의 장점은 철이 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이를 먹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면 조금씩 머리를 숙일 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건강도, 사업도, 이 땅에 사는 것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위에 수많은 친구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더욱 절감합니다. 지난주에 42세 된 새가족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 분은 아내도 없이 딸 하나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는데, 분명한 복음을 전하지 못한 후회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믿으면 내 믿음이 저절로 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그런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이것이 신앙적으로 나이를 먹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올바로 나이를 먹은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엔 불가능할까요?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너무 쉬워요. 교회에 나와서 죽도록 봉사하고도 기쁩니다. 안 믿는 시어머니가 구박을 해도 기뻐요. 아멘!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에게 엄청난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제는 세상을 변화시켜라! 나는 떠난다! 너희가 증인이 되어 가정과 일터와 사회를 변화시켜라!" 그런데 우리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비결을 말씀해 주십니다. "얘들아! 너희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너희가 능력 받지 않고는 그 일을 행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능력을 부어줄 때까지 기다려라!" 12절의 감람원이란 곳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셨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올 능력을 기다립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힘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이 본문에서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내려주신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신앙생활을 완벽주의로 이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남과 자신에게 "하라" "하지 마라" 고 극단적으로 명령합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삶에 열매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을 보면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열매도 없습니다. 그 마음은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완벽주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면, 자신과 타인,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먼저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지극히 교만하게 되거나 아니면 좌절하게 됩니다. 완벽주의를 신앙의 첫걸음으로 삼는 사람들은, 자기가 뭔가를 이루게 되면 굉장히 교만해집니다. "나를 보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설정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겉으로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절망이 자리잡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남을 함부로 판단합니다. 늘 정죄의 눈길을 보냅니다. 그런 부모 밑에 자란 자녀들은 한번도 아버지께 인정을 받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일 중독에 시달려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언뜻 보면, 굉장히 성실한 사람으로 보입니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수많은 상처를 입히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완벽주의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늘 죄책감에 사로잡혀 삽니다.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예배시간에 웃으면서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아요? 때로 울 때도 있지만요. 그런데 웃고 있다가도 기도만 하면 "주여!"합니다. 그리고는 웁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예배드리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 모인 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약 120명 정도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이 13,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누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제자중의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주역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도 누가는 어떤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위대한 사람들 아닙니까? 완벽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첫 번째 인물, 베드로는 결코 완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능력을 받기 전에 그는 스승되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그곳에 능력을 받기 위해 모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 손바닥의 못자국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게도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리 가운데는 세리도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세금 장이'라고 불렀어요. 왜냐하면 자기 나라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정복국인 로마에 갖다 바친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그 시대에 세금 장이 같이 괄시받는 직업이 없었어요. 그들은 매국노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완전히 부인하고, 형제이면서도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은 미친 것 같다"고 얘기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을 사용하시려고 능력을 덧입히셨는가? 그들은 비록 과거에 실패했지만 그들의 잘못을 돌이켰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사용하시는가? 완벽한 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자는 없습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통회하는 자는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못 살기 때문에 갈급하게 주님을 찾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덧입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다윗과 사울을 봅시다.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나요? 다윗입니다. 다윗은 간음을 행했고, 살인을 저질렀어요.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 부하를 죽였어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은 들어 쓰셨고 사울은 버리셨어요.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켰지만, 사울은 경미한 죄를 짓고도 결코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가? 완벽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줄 아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어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너무나 성실했어요. 아버지 곁을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고, 성실하게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 유산을 받아 멀리 가서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어요. 그리고 결국 거지가 되어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를 더 환영했습니까? 둘째 아들을 환영하셨어요. 맏아들이 잘못한 것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맏아들은 불평에 가득 찼어요.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하나 잡지 않더니, 저 타락한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 수 있느냐고 불평했어요. 맏아들은 바리새인을 빗대어 말씀한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깨끗하고 완벽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거지가 되었어요. 그는 "아버지여! 내가 당신의 아들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머슴으로 받아 주십시오!" 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그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고 옷을 입혀주며, 이전의 아들 신분을 회복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강하게 주시는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자인 줄 믿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짓고, 많은 죄를 지었는가를 따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단지 물으시는 것은, 그 잘못에서부터 돌이켰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남은 신앙생활을 승리하며 살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건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 그 잘못을 뉘우치며 살아가는 영안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집중해서 기도해야 한다 14절을 보세요.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 에 힘쓰니라 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도를 언제나 연관시켜서 언급할까요? 그런데 기도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기도'하면 늘 달라고 하는 '요청'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요청도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9가지 기도라는 단어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프로 쉬케'입니다. 이 단어는 기도의 의미에 대해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 아버지의 빛에 나를 비춰보고 나를 교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디 선생님은 이 의미를 가지고 한 마디로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조율시키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어요. 조율(Tuning)이란 말은, 연주자가 가장 편하게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의 부족한 것을 다 내어놓고 나를 하나님께로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조율된 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덧입혀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120명 정도 마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 흠이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들이 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다른 것을 한 것이 아니고 그저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기도했는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굉장히 좋은 번역입니다. 이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세상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능력을 덧입혀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겁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기도했는가?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원래의 뜻에 조금 부족한 번역입니다. 원래 뜻은 "항상 인내하며 계속해서"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끊이지 않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기도와 하나님께 나를 조율하는 작업은 언제 하는가? 교회에 10분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hacking cough, 즉 목에 걸린 기침을 의미합니다. 항상 기도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의 소원이 되라는 겁니다. "주여! 내가 당신의 능력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내가 당신의 도구가 되어 나를 조율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교회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식사 중에 잠잠히 기도하며, 잠자다가도 기도하는 등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것인가? 무엇보다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목회하면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약 300명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처음에는 그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기뻐했는데, 그 후에는 그 기도 요청한 사람이 변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최근에 중보기도실을 확장하여, 우리 교회에 중보기도 회원들이 130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시간씩 나와서 타인만을 위해 기도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중보기도 회원으로 1년 동안 기도한 사람들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목사님, 제가 남을 위해 기도했는데, 결국 그렇게 기도한 것이 저에게 다 돌아왔어요" 기도하는 동안 자신이 변화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연스럽게 조율이 된 겁니다. 3. 마음을 바꾸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저는 이 본문을 수없이 읽다가 질문이 생겼어요. 왜 120명에게 능력이 주어지는 이 장면에서, 유다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길게 기록해 놓았을까? 창자가 터져 죽었다는 얘기와 능력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나님은 왜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은 얘기를 이 많은 구절을 할애하여 기록하셨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제게 그 이유를 가르쳐 주셨어요. 유다는 열두 제자중 한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열 한 명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이전에 말씀하시기를,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에 열두 사도에게 각각 권한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한사람을 뽑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기도하고 맛디아를 뽑은 얘기를 이렇게 길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멸망했단 말입니까? 맛디아는 누구며 어떻게 열두 사도의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며 유다와 맛디아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그 차이는 바로 한 문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입니다. 유다가 왜 멸망했다고 가르쳐 주십니까? 그가 멸망한 이유는 마음을 바꾸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겁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아마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머리도 굉장히 좋았을 것이고, 판단력도 뛰어났고, 계산에도 철저했던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신용 있어 보이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회계를 맡았겠지요. 누가 봐도 그는 예수님의 존경받는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그의 겉모습에 불과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겉으로만 예수님을 좇았던 것입니다. 마음은 아니었어요. 마음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마음을 보시고 열두 제자 중 빠진 한사람을 주님께서 뽑아 주시옵소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 겉으로만 신앙생활 한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17절을 보세요.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복음서에는 유다가 목매어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입니다. 아마도 유다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어 자살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그 나무 밑에 있던 삐죽한 돌들과 가지에 찔려 창자가 터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밭을 아겔다마,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존경받고 인정받던 열두 제자 중의 한사람의 마지막이 이러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맛디아는 누구입니까? 맛디아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도행전과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아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열두 사도 가운데 한사람으로 뽑으셨어요.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새가족 심방을 가서 "왜 영안 교회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제가 좋아서 영안 교회에 등록했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제가 너무 멋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분이 저를 좋게 보는 것은 강단에서의 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 내려왔을 때, 제가 얼마나 제 마음과 씨름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저는 때로 '이러다가 내가 사기꾼이 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설교한 대로 다 살지 못하면서, 여전히 설교해야 하는가!' 갈등합니다. 그래서 토요일 밤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주여! 제가 이 본문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고민하며 기도하는 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이 제 마음을 감찰하시고 살피실 때, 하나님 앞에 합격 판정을 받는 겁니다. 제 소원은 훌륭한 설교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교인을 모아 놓고 목회하는 것이 저의 소원이 아닙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 저의 겉과 속이 같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날이 저의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남모르게 술수를 숨겨놓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큰소리 치지만 언제든지 내 방법을 따로 숨겨 놓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만 위급한 상황이 오면 하나님의 방법을 팽개쳐 버리고 속임수를 쓰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버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는가? 우리의 겉모습만큼 우리의 마음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사업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거짓된 방법이 승리할 것 같아도 결국엔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인생이 이미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정직하게 사업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만큼 정부에도 세금을 충실하게 내어야 합니다. 이런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 때에,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평가와 목사가 바라보는 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평가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할까요?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왜 내 주변을 변화시키지 못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마당만 밟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의 찬송과 기도 소리를 듣지 않겠노라! 너희의 손에 피가 묻어 있는데 어떻게 너희의 예배를 받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바꾸어 가고 계십니까? 겉모습만 꾸미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월이 흘러 성가대원, 교사, 서리 집사, 안수 집사가 되어 겉은 화려하게 꾸며져 갈지 모르지만, 마음속 깊이 죄악을 품고 단단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그가 범죄한 후에 자기의 마음을 바꾸어 달라고 찬양했습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것이 다윗만의 소원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증인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능력을 손에 드신 채, 누구에게 내려줄 것인가 찾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잘못을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자신을 조율하며, 마음을 바꾸어서 "주여! 제 마음을 바꾸소서! 제가 우리 가정을 변화시키겠나이다. 제가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등불이 되겠나이다!" 하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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