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강해설교 작성법/ 부록 1: 에베소서의 석의 아웃라인과 설교 한 편
2002-01-23 07: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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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로 금년 1월 호부터 연재된 '장두만의 강해설교 작성법'을 마칩니다. 그 동안 본고를 통해서 독자께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옥고를 보내주신 장두만 교수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편집자 주>





여기서 나타난 아웃라인은 설교 아웃라인이 아니라 석의 아웃라인(exegetical outline)이기 때문에 이 아웃라인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면 몇 가지를 첨가하거나 변경시켜야 할 것이다.

1. 필요하다면 적용 부분을 추가해야 한다.

석의 아웃라인은 현대의 청중의 필요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저자가 최초의 독자(예, 고린도교회 성도, 이스라엘 백성 등)에게 어떤 의미로 썼느냐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석의 아웃라인은 바로 설교 아웃라인이 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청중의 필요를 감안한 적용 부분이 추가되어야 설교 아웃라인이 될 수 있다.

2. 보조 자료를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석의 아웃라인은 보조자료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 면을 고려해야 한다.

3. 필요하다면 여기 제시된 석의 아웃라인을 중심으로 해서 설교 아웃라인을 다시 구성해야 할 것이다. 표현 가운데 보편성이 없는 표현은 보편성이 있게, 너무 긴 것은 간략하게, 다시 써야 될 부분이 발견되면 그렇게 해야 될 것이다.

4. 여기에 나타난 아웃라인이 절대적으로 맞거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이 아웃라인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적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이나 설교자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고, 또 틀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이 아웃라인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구성해야 할 것이다.



본문 1. 엡 1: 3-14

제목 : 그리스도 안의 축복

중심내용 :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셔야 될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많은 영적 축복 때문이다.

I.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된다(1:3-6).

A.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셨다(1:3-4).

B.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 되게 하려고 택하셨다(1:5).

C.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고 우리를 택하셨다(1:6).

II.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된다(1:7-12).

A.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를 사하셨다(1:7).

B.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1:8-10).

C.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셨다(1:11-12).

III.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된다(1:13-14).

A. 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를 성령으로 인치셨다(1:13).

B.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1:14).





본문 2. 엡 1 : 15-23

제목 : 바울의 기도

중심내용 :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성도에 대한 감사와 성도들이 깊은 진리를 아는 영적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I.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다(1:15-16).

II. 바울은 성도들이 지혜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계시를 갖게 하기 위해 기도했다 (1:18-23).

A.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기 원했다(1:18a).

B. 성도 안에서의 기업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원했다(1:18b).

C.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 원했다(1:19-23).

1. 그것은 부활의 능력이다(1:19-20).

2. 그것은 만물 위에 존재하는 능력이다(1:21-22a).

3. 그것은 교회의 머리되는 능력이다(1:22b-23).



본문 3. 엡 2 : 1-10

제목 : 사망에서 생명으로

중심내용 :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한다.

I.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2:1-3).

A. 이방인들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다(2:1).

B. 이방인들은 세상과 마귀의 영향 아래서 살아간다(2:2).

C. 유대인들도 육체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2:3).

II.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2:4-9).

A. 영적인 생명(=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2:4-5).

B. 영적인 생명을 가진 자는 하늘에 앉아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낸다(2:6-7).

C. 영적인 생명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2:8-9a).

D. 영적인 생명은 인간이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2:9b).

III.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인 생명을 얻은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한다(2:10).

A. 구원받은 자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다(2:10a).

B.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2:10b).





본문 4. 엡 2 : 11-22

제목 :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중심내용 :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다.

I.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다(2:11-12).

A. 그들은 무할례당이었다(2:11).

B.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었다(2:12).

1.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3. 그들은 참된 소망이 없었다.

4.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았다.

II.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신다(2:13-18).

A.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은 가까와졌다(2:13).

B.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교회)이 되었다(2:14-17).

1. 그리스도는 화평이 되셨다(2:14).

2.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2:14b-15a).

3.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몸을 형성했다(2:15b-16).

4.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화평을 전하셨다(2:17).

C.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2:18).

III.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한다(2:19-22).

A. 그들은 하늘의 시민이 되었다(2:19a).

B.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2:19b).

C. 그들은 한 건물이 되었다(2:20-22).

1. 건물의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2:20a).

2. 건물의 모통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2:20b).

3. 건물은 지금도 계속 지어져 간다(2:21).

4. 건물에는 성령이 거하신다(2:22).





본문 5. 엡 3 : 1-13

제목 : 그리스도의 비밀

중심내용 :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한 것은 이방인도 복음의 축복의 동참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I. 그리스도의 비밀이 사도 바울에게 계시되었다(3:1-6).

A. 사도 바울이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3:1-4).

B 그리스도의 비밀은 다른 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3:5).

C. 그리스도의 비밀은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후사가 되고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3:6).

II. 그리스도의 비밀은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전해졌다(3:7-9).

A.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역자로 부름받았다(3:7-8a).

B.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방인에게 전해서 드러냈다(3:8b-9).

III.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도 알게 된다(3:10-11).

IV. 그리스도의 비밀은 성도들로 하여금 담대함과 인내함을 갖게 한다(3:12-13).

A. 그리스도의 비밀을 믿음으로 깨달은 자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3:12).

B. 그리스도의 비밀을 믿음으로 깨달은 자는 환란 중에도 낙심치 않고 인내한다 (3:13).





본문 6. 엡 3 : 14-21

제목 : 바울의 기도

중심내용: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강하고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I. 바울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했다(3:14-19).

A.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었다(3:14-15).

B. 그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했다(3:16).

C. 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를 기도했다(3:17-19).

II.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했다(3:20-21).

A. 하나님은 그 능력 때문에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3:20).

B.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3:21).





본문 7. 엡 4 : 1-6

제목 : 주 안에서 하나 되자.

중심내용 :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행실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I.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4:1-3).

A.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4:1).

B.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해야 한다(4:2).

C.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4:3).

II.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치(신분) 때문이다(3:4-6).

A. 한 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이다(4:4a).

B.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4b).

C. 한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4:5).

D. 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과 만물을 주관하시 때문이다(4:6).





본문 8. 엡 4: 7-16

제목 : 성숙한 교회

중심내용 : 그리스께서 교회에 여러 직분을 주신 이유는 이들을 통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I.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다(4:7-10).

A.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상이한 은사를 주셨다(4:7).

B. 은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결과로 주어졌다(4:8-15).

II.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 교회에 은사를 가진 직분을 주셨다(4: 11-16).

A. 직분을 주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4:11).

B. 직분자의 역할은 성도를 훈련시키는 것이다(4:12a).

C. 훈련받은 성도는 두 가지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4:12b).

1. 봉사의 일을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D. 모든 성도들의 공통의 목표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4:13).

1.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4:13a).

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4:13b).

E. 성숙의 결과는 생활로써 나타나야 한다(4:14-10).

1. 어린 아이같이 흔들리지 않는다(4:14).

2. 사랑 안에서 하나되어 서로 섬긴다(4:15-16).





본문 9. 엡 4 : 17-24

제목 : 옛사람을 벗어버리자

중심내용 :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구습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어야 한다.

I.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4:17-19).

A.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같이 행해서는 안 된다(4:17).

B. 이방인들의 삶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이다(4:18-19).

1. 그들의 총명은 흐리게 되었다(4:18a).

2.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다(4:18b).

3. 그들의 마음으로 굳어 있다(4:18c).

4.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4:18d).

5. 그들은 육욕을 좇아 산다(4:19).

II.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행해야 된다(4:20-24).

A.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이 하는 것같이 배워서는 안 된다(4:20-21).

B. 그리스도인들은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한다(4:22).

C. 그리스도인들은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4:23-24).





본문 10. 엡 4 : 25-32

제목 : 변화된 삶

중심내용: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신자의 태도는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I.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으로 서로 간에 거짓을 버려야 한다(4:25).

II. 그리스도인들은 분을 내어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4:26-27).

A. 분을 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4:26a).

B. 분을 오래 품으면 마귀의 시험을 받아 범죄할 수 있다(4:26b-27).

III. 그리스도인들은 제 손으로 수고해 남을 도와야 한다(4:28).

IV.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말하는 대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한다(4:29-30).

A. 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한다(4:30).

B. 더러운 말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4:30).

V.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형태의 악을 버리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4:31-32).

A. 모든 악은 버려야 한다(4:31).

B. 서로 용서해야 한다(4:32).





본문 11. 엡 5 :1-7.

제목 :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중심내용 :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I.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같이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5:2).

A.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5:1).

B.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같이 사랑 가운데 행해야 한다(5:2).

II.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세상적인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5:3-7).

A. 모든 추악한 것을 물리쳐야 한다(5:3-7).

1. 세상적인 정욕에서 벗어나야 한다(5:3).

2. 덕이 안 되는 말은 피해야 한다 (5:4).

B. 세상적인 것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5:5-6).

1. 그들은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5:5).

2.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5:6).

C.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것들에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5:7).





본문 12. 엡 5 : 8-14

제목 : 빛 가운데 행하라.

중심내용 :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I.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답게 행해야 한다(5:8-10).

A.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해방된 자이다(5:8a).

B. 이제는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5:8b-10).

1.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다(5:8b).

2. 빛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5:9).

3.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5:10).

II.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5:11-14).

A.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 참여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책망해야 된다(5:11).

B.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의 일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5:12).

C.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 참여하는 대신 어두움에 속한 자를 빛으로 돌아서게 해야 한다 (5:13-14).





본문 13. 엡 5 : 15-21

제목 : 지혜롭게 행하라

중심내용 : 참된 지혜는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I. 지혜 있는 자는 기회를 선용한다(5:15-16).

A. 지혜 있는 자는 어떻게 행할 것을 안다(5:5).

B. 지혜 있는 자는 기회를 잘 활용한다(5:16).

II. 지혜 있는 자는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한다(5:17-21).

A. 지혜 있는 자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안다(5:17).

B. 주님의 뜻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5:18).

C.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여러 가지 증거가 나타난다(5:19-21).

1.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서로간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있게 된다(5:19a).

2.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주님께 대한 노래가 있게 된다(5:19b).

3.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게 된다(5:20).

4.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서로 복종하게 된다(5:21).





본문 14. 엡 5 :22-33

제목 : 성서적 부부관

중심내용 : 성서적인 부부관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다.

I. 아내는 주님에게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5:22-24).

A.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5:22).

B.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되는 것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다(5:23).

C.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5:24).

II.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5:25-30).

A.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5:25a).

B.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사랑하신다(5:25b-27).

1.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셨다(5:25b).

2. 그리스도는 교회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셨다(5:20).

3. 그리스도는 교회를 흠없게 하셨다(5:27).

C.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아야 한다(5:28-29).

1.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5:28).

2. 어느 누구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는다(5:29).

3.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아내는 남편의 몸이다(5:30).

III.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같다(5:30).

A. 결혼은 두 육체의 결합이다(5:31).

B. 부부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상징한다(5:32).

C. 결혼은 상호간의 사랑과 존경을 필요로 한다(5:33).





본 문 15. 엡 6 : 1-4

제 목 :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중심내용 : 성서적인 부자 관계는 자녀는 부모를 순종하고 경외하며 부모는 자녀를 주의 뜻대로 양육하는 것이다.

I. 자녀들은 그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6:1-3).

A. 부모에 대한 순종은 주님의 뜻이다(6:1).

B.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이다(6:2).

C. 부모에 대한 순종은 축복을 가져온다(6:3).

II. 부모는 자녀를 주님의 뜻 가운데 양육해야 한다(6:4).

A. 자녀를 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6:4a).

B. 자녀를 적절히 징계해야 한다(6:4b).

C. 자녀를 말씀으로 교육시켜야 한다(6:4c).





본문 16. 엡 6 :5-9

제목 : 바람직한 주종 관계

중심내용 : 바람직한 주종 관계는 종(피고용인)은 주인(고용주)에게 순종하는 것이고 주인은 종에게 공의로 대하는 것이다.

I. 종 (피고용인)은 주님에게 순종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6:5-8).

A. 종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6:5-7).

1.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6:5a).

2.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6:5b).

3.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마음으로부터 순종해야 한다(6:5c-7).

B. 진실한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면 그만한 보상이 있게 된다(6:8).

II. 주인은 종에게 공의로 대해야 한다(6:9).

A. 주인은 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6:9a).

B. 주인은 자기 위에 더 높은 주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6:9b).

C. 주인은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를 보지 않으시듯이 종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6:9c).





본문 17. 엡 6 : 10-17

제목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중심내용 : 그리스도인들의 전쟁은 마귀에 대한 영적인 전쟁이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된다.

I.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전신갑주를 필요로 한다(6:10-11).

A.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6:10).

B.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필요로 한다(6:11).

II.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이다(6:12-13).

A.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6:12).

B.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강하게 서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6:13).

III.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적절한 무기를 필요로 한다(6:14-17).

A. 진리의 허리띠가 필요하다(6:14a).

B. 의의 흉배가 필요하다(6:14b).

C. 평안의 복음이 필요하다(6:15).

D. 믿음의 방패가 필요하다(6:16).

E. 구원의 투구가 필요하다(6:17a).

F. 성령의 검이 필요하다(6:17b).





본문 18. 엡 6 : 18-20

제목 : 그리스도인의 기도

중심내용 :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모든 성도와 주의 종을 위한 끊임없는 것이어야 한다.

I.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6:18).

A. 기도는 항상 해야 한다(6:18a).

B.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해야 한다(6:18b).

C. 기도는 모든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6:18c).

II.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의 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6:19-20).

A. 그리스도인은 주의 종이 복음의 비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6:19).

B. 그리스도인은 주의 종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기도해야 한다(6:20).





부록 2

강해설교 일편(一篇)



필자는 본서에서 강해설교 작성법을 자세히 제시했지만, 강해설교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은 본서에 제시된 방법대로 설교를 하면 설교가 어떤 모양이 될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감(感)이 잡히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 필자의 설교를 실례(實例)로 제시한다. 필자는 이 설교가 절대로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고만장하지도 않고, 또 필자가 선택한 본문을 모든 설교자들이 필자와 똑같은 방식으로만 취급해야 된다고 믿을 정도의 독단도 주장하지 않는다. 본 설교는 다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본문 : 히 12 : 1-2

제목 : 믿음의 경주



중심내용 :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경주는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여야 한다.

설교목적 : 성도들로 하여금 올바른 자세로 신앙의 경주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서론

1. 우리는 구원받고 나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된다.

2. 어떤 일은 우리가 원해서 하지만, 어떤 일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동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3. 그 중의 하나가 신앙의 경주이다. 구원받은 그 순간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경주의 대열에 참여한다.

4. 그러면 우리는 이 경주를 어떤 태도로 해야 되겠는가?



본문에 보면 우리 앞의 허다한 증인들(v. l a = 11장에 있는 인물들)이 믿음의 경주를 했는데, 우리도 이들과 똑같이 신앙의 경우를 하고 있다. 그 경주 태도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I. 우리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한다(v.lb).

A.'무거운 것'을 벗어야겠다.

1. '옹코스'( ) - '무게', '짐', '방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① 경주할 때 거추장스런 옷이나 짐을 등에 지고 한다면 어떨까?

② 경주할 때 비계살로 인해 뒤뚱뒤뚱하면서 뛴다면 어떨까?

③ 배구를 하는 사람이 한복을 입고 한다면 어떨까(cf.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 다윗이 입은 갑옷)?

2.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방해물이 많다.

반드시 죄라고 할 수 없는 것 중에도 신앙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다.

① 일-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지나치게 일에 빠지면 신앙의 경주에 방해물이 된다.

② 취미 생활-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지나치면 방해물이 된다.

③ 연속극도 그렇다.

④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데 장해가 되는 모든 것이 바로 '무거운 것'이다.

B. '죄'를 벗어야겠다.

1. 세상에서 경주할 때에는 죄가 큰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2.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할 때는 죄가 있으면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다.

C.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해야 한다.

1. 방해물이 너무 커지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2. 너무 늦으면 방해물이 나를 완전히 삼켜 버린다(cf.암).

II.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v.1 c).

A. 경주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실격자가 된다.

1. 경주는 쉬지 않고 끈기 있게 해야 된다.

① 토끼와 거북이

② 옛 시조 - '잘가노라 닫지 말고...'

2. 경주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인내로써 해야지 중간에 포기하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① 살바르산

② 에디슨의 필라멘트

③ 링컨

B.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도 그렇다.

1. 우리가 1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2. 그것은 경주를 완파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다(cf. 1984년 LA올림픽 때 여자 마라톤 선수).

III.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방해물을 제거하고 인내로써 달려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경주해야 한다(v.2).

A.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주의 본보기이다.

1. 그는 큰 즐거움을 위해서 목전의 괴로움을 참았다.

2. 우리도 큰 즐거움(=상급) 위해 참고 경주해야 한다.

① 올림픽 금메달

② 나의 경험

B. 우리는 목표를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

1. 주위의 사람이 목표는 아니다(cf. 공부).

2.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cf. 마 14:22-23--물위의 베드로).



결론

1. 우리는 어떤 자세로 경주해야 하나?

2. 방해물을 제거하고 끈기 있게 주님만 바라보고 달음박질해야 되겠다.





믿음의 경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그때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지요. 그 가운데 많은 일은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이 교회에 온 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원해서 한 것입니다. 누가 옆구리에 총을 갖다 대고 위협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자유의사로 선택해서 온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도 여러분들이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신앙의 경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주님 앞에 가는 그 시간까지 우리는 자동적으로 경주의 대열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것도 50m나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평생을 달리는 장거리 경주의 대열에 말입니다.

경주의 대열에 참가해 달리고 있다고 해서 다 주님이 원하는 모양으로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경주랍시고 하긴 하지만 도무지 주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참으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경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경주하는 것이 올바른 경주의 자세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입니까? 이왕 경주할 바에야 올바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1절 상반절에 보면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는데, 이 허다한 증인들은 물론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엄청난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도 신앙의 경주를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과 똑같이 우리도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인데, 본문에 보니 그 경주의 태도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합니다.

1절 중반절에 보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될 것 가운데 하나는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옹코스' ( )인데, 이 말은 '무게', '짐' 등의 의미와 함께 '방해하는 것', 즉 '방해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쉬운 예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00m 경주를 하는 사람이 만일 핫바지를 입고 뛴다든지 등산갈 때나 메고 갈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달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이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있겠습니까? 이 경우에 핫바지나 배낭이 바로 '무거운 것'이요 '방해물'입니다.

만약 경주하는 사람이 그 몸무게가 200㎏쯤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에 가보면 이런 비만증 환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경주를 했다가는 심장마비로 졸도하고 말 겁니다. 이 경우에는 비계살이 바로 무거운 것이요 방해물입니다. 만일 배구 선수들이 치렁치렁 늘어지는 한복을 차려 입고 시합을 한다면 이건 배구 시합이 아니라 희극 경연대회가 되고 말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사울 왕은 자신이 입는 놋투구와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 골리앗과 싸우게 했습니다(삼상 17:38).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의 갑옷과 놋투구는 오히려 방해물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도 이런 방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죄라든지 잘못이라든지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일이란 것을 한 번 봅시다. 여러분들, 일하는 게 죄입니까? 성경에 보면 일하는 게 죄가 아니라 일하지 않는 게 죄라고 했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그랬습니다. 어느 기준으로 재보아도 일 자체를 죄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나치게 일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 그 자체는 죄도 잘못도 아니지만 일에 너무 빠져서 주님을 섬기는데 지장을 받고, 신앙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를 받으면 바로 그 일이 본문에서 말하는 무거운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취미생활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취미생활을 즐깁니다. 바둑, 낚시, 각종 스포츠 등, 우리는 여러 가지의 취미로 피곤한 심신을 달랩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런 취미생활을 죄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취미생활 그 차체는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지만 이것도 지나치게 되어서 주님을 섬기는데, 신앙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가 되면 취미생활도 '무거운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축구 시합을 보느라고 예배에 빠지게 되고, 낚시를 하면서 토요일 오후는 물론 주일까지도 낚시터에서 보내게 된다면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학생들의 학교 공부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학생들은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공부의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알기 때문에 믿지 않는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됩니다. 공부 그 자체는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도 우리의 신앙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학생도 고 3이 되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당장 대학가는 게 급하니 교회는 조금 방학했다가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교회 가겠노라고 하다가 아예 계속해서 방학을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대학생들도 무슨 고시다, 무슨 자격 시험이다, 취직 시험이다 하는 것 때문에 교회를 조금만 쉬었다가 시험이 끝나면 다시 신앙 생활을 하겠다고 하다가 계속 쉬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공부도 큰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즐겨 보는 연속극도 마찬가지입니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연속극이 특히 문제입니다. 연속극에 맛들이고 나면 일요일 저녁에는 예배보다 연속극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연속극이 우리의 신앙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가까와지도록 하는 대신에 점점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신앙 경주를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본문에서 말하는 무거운 것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지고서는 경주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시원하게 내던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경주가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에는 무거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해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거운 것과 함께 '죄'도 벗어버려야만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경주와 신앙의 경주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경주에는 죄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거짓말쟁이도 경주할 수 있습니다. 사기꾼도 복싱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첩을 얻어 살면서도 축구선수로 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내 생활 가운데 죄가 있으면 이것이 내 다리를 꽉 옭아매어서 나로 하여금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가운데 '무거운 것' 이나 '죄'가 있으면 지금 당장 벗어버려야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벗어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암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떤 분의 가정에 문상을 간 일이 있었는데, 암이란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현대과학으로서도 완전한 해결책이 없는 불치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암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이렇게 무서운 암도 조기에 발견해서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내 몸의 한 부분에 조그마한 혹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해 봅시다. "조그마한 이 혹 하나쯤이야 어떨라구"라고 생각하고는 이 혹을 가만히 두어 보세요. 그러면 이 혹은 점점 커지고 여기저기 번져서 나중에는 나를 완전히 옭아매게 됩니다. 그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내 몸에 생긴 조그마한 혹을 발견하는 그 즉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싹둑 잘라버리면 나는 암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에 있어서 무거운 것과 죄는 바로 암과 같습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발견되면 금세 잘라버려야지 그렇지 않고 가만 내버려두면 이런 것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신앙의 경주는 계속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에는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과 죄가 없습니까? 오늘 이 문제를 완전히 처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신앙의 경주를 해야 됩니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인내를 가지고 해야 됩니다.

본문 1절 하반절에 보니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경주를 하다가 중간에서 포기하면 실격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는 쉬지 않고 끈기 있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북이가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긴 것은 발이 빨라서가 아닙니다. 발이 빠른 쪽은 거북이가 아니라 토끼였지만, 토끼는 끈기 있게 달리지 않고 중간에서 쉬었기 때문에 경주에서 졌고, 반대로 거북이는 발은 느렸지만 쉬지 않고 끈기 있게 달렸기 때문에 경주에 이기지 아니했습니까?

우리 나라 옛 시조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잘 가노라 닫지(= 달라지) 말고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긎지(= 그치지) 말고 촌음을 아껴서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감만 못하니라



경주뿐만 아니라 사실상 무슨 일이든 끈기 있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았던 사람들은 참으로 엄청난 끈기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살바르산을 발명한 에를리히를 보세요. 그는 이 약 하나를 발명하기 위해 무려 606번을 실험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살바르산이 일명 606호라고 불리우고 있지 않습니까? 605번의 실패도 그를 좌절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끈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백열등을 발명한 에디슨을 보세요. 백열등의 필라멘트로서 텅스텐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는 무려 2,000번 이상의 실패를 맛보아야 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놀라운 끈기입니까!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831년에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습니다. 그 이듬해인1832년에는 주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33년에는 또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1834년에는 다행히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835년에는 그의 애인이 죽었습니다. 1836년에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졌습니다. 1838년에는 주 하원의장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40년에는 선거인단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34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46년에는 다행히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848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또 낙선되었습니다. 1885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56년에는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습니다. 1858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또 낙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에는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불굴의 용사가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람들한테 가장 존경하는 인물 둘을 들라 하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듭니다. 그는 엄청난 실패와 절망의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까?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역경과 절망 가운데서도 좌절하거나 중단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경주하는 사람들은 1등을 하기 위해서 하지만,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는 1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주를 끝내느냐 안 끝내느냐 하는 것이지, 1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1984년 LA 올림픽 때의 한 여자 마라톤 선수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 선수는 경주 도중 탈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경주를 포기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주어진 코오스를 끝까지 완파했습니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선수가 1등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꼴찌를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선수는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경주를 끝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경주를 해 나가다 보면 유혹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끌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도중 하차케 하는 유혹들이 우리 주위에 잔뜩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신앙의 경주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까? 모든 방해물들을 다 벗어버리고 끈기 있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닙니다.

셋째,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경주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경주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큰 즐거움을 위하여 목전의 괴로움을 잘 참으셨습니다. 큰 즐거움이란 물론 무수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큰 즐거움을 위해서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경주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을 큰 즐거움은 물론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를 보세요. 금메달을 따기 위해 수년 동안 피땀 흘려 훈련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절제하며,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다가 올림픽 경기에서 목에는 금메달이 걸려지고 경기장에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애국가가 장내에 울려퍼질 때 그는 지난 수년 동안의 고난을 그 순간 다 보상받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의 땀방울이 절대로 헛되지 않은 것을 그는 발견할 것입니다. 금메달에 대한 꿈이 엄청난 훈련을 잘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8년 동안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 궂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애들을 키우고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궂은 일 좋은 일 가릴 것 없이 마구 일했습니다. 제가 했던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아파트를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10여 군데의 아파트 주위를 깨끗이 하고 복도를 진공 청소기로 청소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봄, 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런 대로 할 만했는데, 문제는 여름이었습니다. 달라스는 상당히 더운 도시이고 여름은 거의 6개월이나 되다시피 하기 때문에 여름에 밖에서 청소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가능하면 시원할 때 청소하려고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나가지만 조금만 일하면 땀이 줄줄 흐릅니다. 온 몸 전체가 땀으로 완전히 찌들게 되고 입고 있는 옷도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리게 됩니다. 한 주일 한 주일 힘든 일을 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봉급날이었습니다. 봉급을 타고나면 그 바로 다음 주일은 정말 일하러 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급날을 기다리며 한 주일 한 주일 일을 했고, 결국 이 일을 2년 동안이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봉급 때문에 2년 동안 참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상급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참으며 신앙의 경주를 해야 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상급은 그만큼 더 달콤한 것입니다. 미래의 큰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도 사양치 아니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 앞에 우리를 위해 준비된 상급을 바라며 중단 없는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 경주의 본보기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될 뿐만 아니라, 그 분을 바라보면서 그 분에게만 목표를 두고 달려야 합니다.

2절 상반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요, 그 분은 우리의 신앙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그 분에게만 목표를 두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우리 주의의 사람들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을 목표나 기준으로 삼아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학생을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할 경우와 공부 못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할 경우에 엄청난 실력 차이가 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함께할 경우에는 경쟁이 치열하고 따라서 경쟁에 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실력이 부쩍 늘어납니다. 그러나 같은 학생을 공부 못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면 경쟁 의식이 없어집니다.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늘 1등만 하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력은 저하되게 마련입니다. 이 학생의 경우는 목표가 주위에 있는 동료 학생들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할 때에도 사람에게 목표를 두고, 사람을 바라보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나 전도사나 집사나 그 밖의 어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신앙의 경주를 합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참으로 매사에 본이 될 정도로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모범적인 신앙인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우리의 신앙 경주의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경주에 있어서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 신앙이 훌륭해도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러할 때 사람에게 목표를 두고 있으면 그 사람 넘어질 때 나도 함께 넘어집니다. 함께 넘어지지는 않을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마음에 큰 상처를 받게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사람을 바라보아도 안 되지만 우리 주위의 환경을 바라보아도 안 됩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신앙 경주를 하는 사람은 일이 잘 되어가면 열심히 신앙의 경주를 하지만 일이 여의치 않으면 그만두게 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역풍으로 인해 큰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하며 두려워하나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시니 용감한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명하시매 베드로는 물위에서 한 동안은 잘 걸어가다가 주위의 풍랑을 바라보고는 무서워서 물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항해자들이요, 그 바다 위에서 열심히 뛰어가는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그 항해를 하는 도중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목표를 예수님께만 두면 아무 문제없이 인생의 바다를 잘 건너갈 수 있지만, 베드로와 같이 환경을 바라보고 주위의 풍랑을 바라보면 물 속에 빠져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경주, 신앙의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원하십니까? 그러자면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끈기 있게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 모두는 성공적인 경주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여기 오신 분 중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다가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에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신앙의 경주를 하기는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신앙의 경주를 못하고 있는 분들은 없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중단하지 않고 신앙의 경주를 끝내겠노라고 결심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99년 11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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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



본문: 눅12 : 13-21

제목: 어리석은 부자



중심내용 : 진정한 부는 영원한 것을 위해 준비하는 데 있다.

설교목적 :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부는 영원한 것을 위해 준비하는 데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톨스토이의 민화(民話)

2. 본문을 읽을 것

3. 본문의 배경 (12 : 13-15)



I. 그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했다(vv.16-18).

A. 그는 풍성한 소출을 자신의 공로로 생각했다.

1. 그의 풍성한 소출은 자신의 노력의 댓가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였다.

① 하나님께서 흉년 들게 하실 수도 있었다.

②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우선적이다.

2. 그는 모든 것이 '내' 것인 줄로 알았다.

B. 우리는 재물에 대해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되겠다.

1. 우리의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①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소유하고 있지 않다.

② 우리는 모두 청지기에 불과하다.

2. 성경은 재물을 반대하지 않는다.

① 중요한 것은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아서 나에게 맡겨진 돈을 어떻게 쓰느냐,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② 돈을 도구로 쓰느냐, 돈의 종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① 영적인 사람은 재물을 어떻게 하면 주님 영광을 위해 사용할까 부심한다.

② 육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 돈 모으는 데에만 관심이 있든지, 모은 돈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한다,

II. (이 부자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재물 때문에 영적인 눈이 멀어져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vv.19-20).

A. 그는 재물 때문에 참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1. 그는 세상 것 찾다 보니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2. 그는 재물뿐만 아니라 영혼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그는 물질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4. 그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B. 우리도 이 부자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 안되겠다.

1.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은 영혼이다.

2. 마 16-: 26

예화 -샤눙가호의 비극

III. (그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몰랐기 때문에 영적인 눈이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에 대해 부유했으나 하나님께는 가난했다(v. 21).

A. 이 부분은 vv. 13-20의 총결론이다.

B. 참으로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1.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아 그 주인의 뜻대로 재물을 쓰는 사람이 참으로 부유한 자이다.

2. 영적으로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참으로 부유한 자이다.

예화 - "누가 바보냐?"



결론

1. 오늘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찾아가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가있겠는가?

2. 여러분은 영적으로 부유한 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어리석은 부자"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민화집(박형규 역. 삼중당 발행, pp 40-62,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어느 한 마을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바흠이라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땅만 충분히 있다면 겁낼 것이 없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땅을 소유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바흠은 땅 값이 싼 데만 있다면 원근을 불구하고 땅을 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자기의 재력으로 살 수 있는 땅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대 지주가 될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이 초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상인이 바흠의 가정에 들렸다가 하는 말이, 자기가 여기 저기를 다녀보니 빠시끼르라는 마을의 땅 값이 너무 싸서 거의 공짜로 땅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흠은 돈을 마련해서 빠시끼르라는 마을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그곳은 인심도 좋고 땅 값도 엄청나게 쌌습니다. 그곳의 촌장을 만나 물어보니 빠시끼르에서는 땅을 헥타아르로 파는 게 아니라 하루치에 1천 루우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땅을 살 사람이 밟아서 표시한 땅은 모두 1천 루우블만 주면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흠은 이제야말로 대 지주가 되는구나 하는 기대감에 들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세웠습니다. 새벽 미명에 촌장 및 마을 사람과 약속한 곳으로 돈과 함께 빵, 물병, 곡괭이를 준비해 갔습니다, 해가 뜨자마자 출발을 해서 군데군데 곡괭이로 표시를 하면서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해는 벌써 정오를 넘어섰습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빵 먹을 시간도 없이 계속 달려갔습니다. 한낮의 작렬하는 태양은 바흠을 자꾸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빵을 대충 먹고는 쉴 시간도 없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어 왼편으로 달렸습니다. 그 길로 한참 가다가 보니 벌써 오후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이제 지칠 대로 지쳤고 다리는 천근같이 무거워졌고 태양은 점점 서산을 향해 가까와지는 데 출발점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까마득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욕심을 너무 내었구나"하고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죽을 힘을 다해 질주해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출발점에 도착하고서는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바흠의 하인은 바흠의 몸 크기에 맞을 만큼 땅을 파서 자기의 주인을 바로 그 땅에 묻어 주었습니다.

여기 이 젊은이와 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하고자 하는 누가복음 12 : 13-21에 바로 그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같이 누가복음 12 : 13-21을 교독(交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두 형제가 있어 부모의 유산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찾아 왔습니다(눅 12:13-15).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재물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통해 3가지의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 부자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를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있어 그 밭에 소출이 풍부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이 부자는 풍성한 소출을 자신의 공로, 자신의 노력의 댓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풍성한 소출은 사람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사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풍년은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흉년도 주실 수 있지만 풍년이 들게 해 소출을 풍성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내'것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것이 '내' 공로로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나'라는 대명사가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 부자와 같이 우리 자신이 재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 많은 것 가운에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소유주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관리인이란 뜻입니다. 관리인이 관리인의 신분에 머물지 않고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할 때 갖가지 비극이 생겨나게 됩니다. 성경이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가르친다고 해서 성경이 재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고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돈을 벌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도 주시고 재능도 주시고 건강도 주셔서 나로 하여금 돈을 벌게 했기 때문에 그 돈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알고,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돈을 좋은 종으로 사용할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돈을 열심히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었지 그 돈을 쓸 줄을 모르든지, 아니면 쓰기는 쓰되 자기 자신의 쾌락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할 때 불행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가정은 파괴되고 자녀는 비뚤어지고 사람들은 멸시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달라스에 제가 잘 아는 교포 한 분이 있습니다. 김모 씨라는 분인데 상당히 성공적인 사업가 중의 한 분입니다. 식당, 식품 가게, 부동산 등을 해서 돈을 열심히 모아서 자동차도 여러 대 소유하고 있는데, 그 중의 두 대는 벤츠입니다. 집도 달라스에서는 부자들만 모여 있고 유색인종은 발을 들여놓기도 힘든 하일런드 파크(Highland Park)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부부는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 자녀들(3남매)은 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가게에 나옵니다. 일요일만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나오다시피 해서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가곤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막내 아들이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한 번은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무엘아(막내 아들의 이름), 네가 제일 원하는 게 뭐니?"라고 묻자 "내가 유치원에 가고 올 때 나를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었으면 제일 좋겠어요"라고 말하더라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유치원이 수업을 마치면 애들을 문 앞에 모아서 그 부모가 차로 데리러 오면 한 애씩 내어주곤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부모는 사업에 너무 바빠서 한 번도 데리러 오는 적이 없기 때문에 사무엘은 늘 맨 마지막까지 기다리다가 애들이 다 가고 나면 선생들도 하는 수없이 사무엘이 혼자 걸어서 집에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집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사무엘은 그 어린 마음에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다 받은 것입니다. 사무엘에게는 많은 장난감도 있고 편리한 시설도, 좋은 음식도 있지만, 사무엘이 참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고 그와 함께 있어줄 부모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돈도 가지고 있을 만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녀들을 고아 아닌 고아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재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재물을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같지 않습니까?재물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의 부자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심지어는 그의 영혼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는 재물 때문에 영적인 눈도 멀어져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기 이 부자는 재물 때문에 참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는 세상 것 열심히 찾다보니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그의 영혼까지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많은 재물이 그의 영혼에게 쉼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소출이 풍부해서 창고를 늘리고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두는 것으로 그는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인간은 물질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진정한 안식과 즐거움은 물질을 통해서는 얻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만으로 모든 것이, 심지어는 나의 영혼의 문제까지도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간 영혼을 만드신 분, 인간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그 영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영혼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인간 영혼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그 때에만 인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한 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본문의 부자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자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을 제쳐놓고 물질에만 사로잡히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 : 26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수 년 전에 영국의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샤눙가(Shanunga)라는 이름을 가진 배와 독일의 함부르크를 출발한 스웨덴 국적의 범선인 이두나(Iduna)라는 배가 충돌했습니다. 이두나호에는 206명이 승선해 있었는데, 두 배가 충돌한 후 약 30분 후에 이두나호는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충돌 직후 샤눙가호에서는 곧 구조 작업을 폈지만 안개가 워낙 짙어서 구조 작업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샤눙가호에서 내보낸 구명정 한 척과 이두나호에서 간신히 끄집어낸 구명정 한 척으로 겨우 34명만이 구조되었을 뿐, 선장 모베르크(Moberg)를 포함한 나머지 172명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대참사를 직접 목도한 샤눙가호의 선장인 페이턴(Patten)은 이 참사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구조 받은 생존자 34명은 모두 물위에 떠 있다가 구조대에 의해서 구출 받았는데, 206명 가운데 왜 겨우 34명만이 구출 받았는가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 배에 있던 금과 은을 허리띠 주위에 잔뜩 동여맨 채 물 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물 속에 뛰어들긴 했지만 허리띠에 매여 있는 금과 은의 무게 때문에 물위에 오랫동안 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모두 물속에 가라앉고 난 후였던 것입니다. 재물에 탐닉하던 그들은 재물은 물론 생명까지도 잃어버리는 비극을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오늘 우리도 똑같은 비극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재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멀어버렸고, 그래서 그는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창고를 늘리고 곡식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영혼 자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셋째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유했으나 하나님께 대해서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에 대한 총결론이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참으로 부유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부유한 자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많이 모아두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재물의 주인을 바로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수전노가 된다든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쓴다든지 하는 일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에 미국 플로리다주의 웨스트 팜 비치(West Palm Beach)라는 도시에서 한 노파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 노파의 몸무게는 약 50파운드(=약 23㎏)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노파가 살고 있던 집은 돼지우리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고, 물건들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위생적인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음식은 이웃집에서 구걸해 먹었고, 옷은 구세군에서 갖다 입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동전 한푼 없는 거지였고, 가난 때문에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했던 것같이 보였던 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노파가 깔고 자던 자리 밑에서 두 개의 열쇠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두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 열쇠였던 것입니다. 첫 번째 은행의 귀중품 보관함을 연 수사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거기에는 약 700여 주의 AT & T(=미국의 유명한 통신 회사) 주식과 수 백여 장의 각종 유가증권과 약 200,000달러에 달하는 현금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수사관들이 나머지 한 은행을 찾아서 그 노파의 귀중품 보관함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주식이나 유가증권은 없었지만 정확히 600,000달러의 현금이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저것 합하면 백만 달러(=약 8억원)에 해당되는 거액의 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파는 돈을 모을 줄은 알았지만 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진정한 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는 재물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유한 자는 재물을 주님 위해 사용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고 그 하나님 만날 준비를 제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같이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는 수년 앞까지 염려해서 창고를 짓고 곡식을 비축해 두고, 적금을 들고, 보험을 들고 야단법석을 떨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까?

어떤 귀족이 자기 집에 바보 한 사람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귀족이 바보에게 "만일 너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주라" 하면서 그가 늘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그 귀족이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자, 그 바보가 귀족에게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바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머잖아 너를 떠나야만 될 것 같아." 그러자 바보는 "주인님은 어디로 가신다는 건가요?" "응. 다른 세계로 가야 돼"라고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주인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요? 한 달 후에, 아니면, 1년 후에 돌아오시나요?" "아냐, 난 돌아오지 못해!" "아니, 주인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신다구요? 그러면 그곳에서 재미있게 지내실 것을 뭐좀 준비하셨나요?" “아냐, 난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어!” 그러자 바보는 놀라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준비를 못하셨다구요? 그곳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지낼 준비를 전혀 안 하신 주인님이야말로 진짜 바보로군요. 그러니까 이 지팡이는 주인님이 도로 받으세요."

누가 진정한 바보인가요? 영원한 것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를 못한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정한 부는 영혼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오늘밤에 여러분의 영혼을 찾는다면, 하나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진정한 부를 소유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은 진정한 부를 소유하고 교회를 떠나시기 바랍니다.



부록 3

강해설교 아웃라인





여기에 실린 아웃라인은 필자가 직접 만든 것도 있고,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서 힌트를 얻어 필자가 재구성한 것도 있고, 필자의 강해설교 세미나에 참석한 목사님들이 제출한 아웃라인 가운데 비교적 잘된 것을 골라 필자가 수정, 보완한 것도 있다. 이 아웃라인을 가지고 설교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조금만 보완하면 (특히 예화와 적용 부분)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여기에 실린 몇몇 아웃라인이 본서를 애독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 대하 20:1-30

제목: 승리는 여호와께



중심내용: 인간 능력의 끝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이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위기를 당할 때에 인간의 지혜나 능력으로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승리하게 하기 위해



서론

1.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측량할 길이 없다.

2.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오히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3. 오늘 그러한 경우를 역대하 20장에서 보도록 하자.



I. 여호사밧은 인간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주님 앞에서 가져왔다(vv. 1-13).

A. 사막 민족의 침입은 여호사밧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vv. 1-2).

1. 1절의 "그 후에"는 19장에서 가리키는 바와 같이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침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었다.

2. 그들은 큰 무리로서 여호사밧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3.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당한다.

(경과구: 이러한 엄청난 문제를 당했을 때)

B. 여호사밧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두려워했다(vv. 3-4).

1.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바로 인식할 때 오는 반응이다.

2. 여호사밧의 두려움은 너무나 현실적이다(cf. 20:12).

3. 오늘 우리도 이런 상황을 만난다. 그러할 때 어떻게 하는가?

4. 여호사밧은 여호와를 찾았다.

① 하나님께 기도했다.

② 금식했다.

5. 문제는,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고,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경우에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다.

(경과구: 큰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C. 여호사밧은 여호와가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달았다(vv. 5-13).

1. 그는 하나님의 전으로 갔다(v. 5).

2. 기도 가운데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했다(vv. 6-7).

3. 기도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vv. 8-11).

4. 기도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바랐다(vv. 12-13).

5. 오늘 우리도 이렇게 해야 된다.

(경과구: 여호사밧이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깨닫고 여호와를 찾을 때)

II. 여호와는 여호사밧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었다(vv. 14-19).

A.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v. 14).

B.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다(vv. 15-17).

C. 하나님의 약속은 여호사밧과 백성으로 하여금 승리의 확신을 갖게 했다(vv. 18-19).

D. 오늘날

1. 우리도 인간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할 때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의 약속을 주신다.

2.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

(경과구: 하나님을 의뢰할 때 하나님은 승리의 약속만 하시지 않는다).

III.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의 기적이 현실로 나타나게 하셨다(vv.20-30).

A.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전장으로 나갔다(vv. 20-21).

B. 여호와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셨다(vv. 22-24).

C. 동일한 승리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1.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다.

2. 그 약속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3. 그때 우리의

① 눈물은 웃음으로 변하고,

② 탄식은 찬송으로 변하고,

③ 두려움은 환희로 변한다.



결론

1.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는가?

2. 그 때야말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3. 나의 부족과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할 때 우리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들도 가능하게 된다.









본 문 : 역대하 34:1-33

제 목 : 부흥케 하소서



중심내용: 부흥은 바른 태도에서부터 온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부흥의 조건을 알게 해 부흥에 동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여기 모인 모든 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하겠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가 날로 부흥해 세계 선교의 한 몫을 담당하는 교회가 되기 원하는가? 아니면 점점 쇠퇴해서 문 닫기 원하는가?

2. 우리 모두는 부흥을 원한다.

3. 그러나 그것은 그냥 오지 않는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① 무엇이든 가치 있는 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② 사업 성공하려면---시간, 물질, 재능, 몸 투자.

③ 대학 들어가려면---고 3의 인생 전부를 투자해야 된다.

④ 내 집 마련하려면---수년 동안 허리띠 졸라매야 한다. 과외로 일도 해야 한다.

⑤ 교회 부흥---그냥, 저절로, 시간만 지나면 오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 가진 사람이 많으면 우리 교회는 문 닫는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4. 오늘 우리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요시야 왕 때의 놀라운 신앙 부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부흥되고, 우리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I. 부흥하려면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 오셔야 된다(vv. 1-13).

A. 본문

1.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악한 왕이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후에야 회개하고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50년간의 적폐(積弊)를 청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 므낫세의 아들 아몬도 그 아비의 과거 모습 그대로 좇았다.

2년만에 암살되고 말았다.

3.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8세된 요시아가 왕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달랐다.

4. 참으로 사악하고, 우상이 득시글거리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린 요시아가 그 조상 다윗의 길을 따르기로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여선지자 훌다의 영향 받았을 것이다.

5. 그는 20세 때 개혁 시작

① v. 3---각종 우상 다 파괴했다.

② v. 4--- 우상 파괴해서 우상에게 제사하던 자의 무덤에 뿌렸다.

③ v. 5---우상 섬기는 제사장들의 뼈를 우상의 단 위에서 태웠다.

④ v. 7---우상의 제단을 다 찍어 버렸다.

6. 26세 때---성전 수리를 했다.

① 하나님의 성전을 지난 250년 동안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었다. 퇴락할 대로 퇴락했다.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뒷전에 있었다.

② 250년 전 요아스 왕 때 수리한 후 처음 수리

③ 젊은 나이에 똑 소리 날 정도로 멋진 일을 했다

7. 그는 유대땅을 우상으로부터 정결케 하고, 성전을 수리함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했다.

8. 이스라엘 전체를 뒤덮고 있던 침체된 영적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B. 적용.

1. 이 때가 BC. 640년경

2. 지금부터 2,600여년 전 일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3. 개인의 신앙이 부흥되고,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제자리에 오셔야 된다.

① 그 분을 나의 삶의 변두리에 놓고서도 영적으로 잘되는 사람 못 봤다.

② 하나님은 안방이나 지키고 계실 안방 할멈이 아니다.

③ 그는 귀한 보석보다 더 소중하게 우리의 삶의 중심에 오셔야 된다.

4. 그가 나의 생각을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그가 나의 행동을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그가 나의 계획을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그가 나의 말을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5. 나를 가장 멋지게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를 가장 유용하게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6. 하나님의 손은 마력이 있는 손이다. 그에게 맡겨야 한다. 그가 주관하시게 해야 한다.

① 모래---하나님은 그냥 두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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