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을 예비하라
2002-01-15 10:27:56

눅3:1-6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라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거에 매달
려 오늘을 사는 사람과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사람- 이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습
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됩니까? 은행 창구에 돈을 내놓는 사람을 봅니다. 한쪽은 예
금하기 위해 돈을 내놓는 사람들이요, 또 한쪽은 빌려 쓴 돈을 갚거나 이자를 물기 위해 돈
을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양자 모두 은행에 돈을 내고 있다는 그 사실은 똑같지만 마음과
기분은 전혀 다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것, 기다릴 자격이
있다는 것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은 다시없습니다. 행복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이 세
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망적인 기다림을 가진 사람- 약속받은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2천년 전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유대 땅은 말할 수 없이 어둡고 암담한 현실 속에 있었
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헤롯왕이 제수(弟嫂)를 취해
자기 아내를 삼을 만큼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도처에 강도의 출몰이 잦고, 온갖
부도덕한 행위들이 만연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세속화의 경향이 짙었습니다. 의식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어둡고 혼란한 때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2천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메시야 대망사상 때문이었습니다. 나라
잃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녀도, 어느 곳에서 어떤 고생을 겪어도 저들이 끝까지 지
키고 간직한 것 한 가지,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사상이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를 대망하는
그 간절한 기다림- 이것만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아무리 많은 어려움 앞에서도 희석되거
나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강하고, 이것 때문에 이기고, 이것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가 원수나 지도자가 어떤 곳을 방문 할 때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
서 반드시 선발진이 먼저 파견되어 의전과 경호, 합의사항 등을 점검하고 준비하는 일을 합
니다. 마찬가지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세례요
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3장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앞서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의 길'이란 바로 이 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외침은 곧 "메
시야를 맞이할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 그 길로 왕을 모셔들여라"하는 메시지입니다.
요한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설명되고 그 의미가 부여됩니다. 요한은 항상 중
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 없다고 주님이 친
히 증거해 주셨지만, 그의 위대성은 항상 주님과 관련해서 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 뿐만 아니라 요한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가문이나 학력, 배경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요한의 삶의 특징은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나게 했다는 것입
니다. 그는 항상 예수님과 관련시켜서 자신을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
을 부각시키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 밑에서 예수님의 이름만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인
식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할 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4절)에 불과하다고 했습니
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라고 말하지 않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전혀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는 여자가 낳았던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밑에서 배웠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로 갈 때에도 오히려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추종자는 점점 줄어들어
야 하고, 쥠을 따르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제일 문제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무언가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
다.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눈에 중요하게 인식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적당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이 큰 일을 한다고 설치면 설칠수록
공동체에 부작용만 더 가져다 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기를 인식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
다. 자신은 단지 주님의 사역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자리한 사람들로 교회가 구성될 때 교
회는 올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일을 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한에서 존재의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역사가답게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1절과 2절에
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
레네의 분봉왕으로"(1절)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사역을 시작할 때가 언제입니까? 로마 제국의 제2대 황
제인 디베료가 로마의 황제에 오른 지 열 다섯 해가 되던 때입니다. 그리고 유대나라는 4지
역으로 나뉘어져 4명의 지도자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입에 오르내리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다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갈릴리 북동 지역의 이두래와 드고닛 지방의 분봉왕
으로, 루사니아가 다메섹 서북쪽의 아빌레니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성령님은 누가로 하여금 세례요한과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
급하도록 하였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사역이 역사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
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사 속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고
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꿈과 환상 속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의 구원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습니
다. 그러므로 역사를 떠나서는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례요한이 사역을 시작할 때와 우리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스라엘은 로
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남북한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비참한데 우리 나라 경상도 만한
조그만한 땅 덩어리가 사분되어 있었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조국의 해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2절에 보면 두 사람의 대제사장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성경을
보면 실세는 안나스이고 명목상은 가야바였습니다. 그러니까 안나스가 몸통이고 가야바는
깃털에 불과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종신직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대제사
장이 죽어야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어인 일인지 두
사람의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제사장이 둘이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종교가 얼마나 정치적이고 부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생활에 분명한 권
력을 행사하기 위해 협력하는 자들에게 그 지위를 갖도록 허용했습니다. 얼마나 종교가 타
락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의 종교가 힘도 없고 권위도 없으니까 정
치권력에 의해 농락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힘이 없고 권위도
없고 능력이 없으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 한마디만 하면 벌벌 무서워 떨면서도 목사들이 말하면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종교도 타락하고 정치지도자들이 부패하고 백성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을 추
구하며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
한에게 임하니라"(2절)
이렇게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찢겨져있고 비참한 삶
을 살고 있는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누구에게 임했습니까? 사가랴의 아
들 세례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말은 그 말씀이 세례요한을
사로잡았음을 의미합니다. 말로서 전달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그를 사로잡았음을 의
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말씀이 아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
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심령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힘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 임했습니까?
세례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입니다. 여기서 빈들은 헬라어로「에레모」라는 단어인데 사람
이 거주하지 않는 황량한 불모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광야로 표현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인적이 끊긴 곳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
람들도 없고 향락시설도 없습니다. 눈과 마음을 빼앗아 갈 만한 것들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고 요한 계시
록 12:6절에서는 교회가 피할 장소를 광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빈들은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빈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
례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의 황제에게도,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는 대
제사장에게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정치가들의 권모술수도, 세상의 탐심도 없는 땅이 바로 빈들입니다. 세례요한은 어릴 때부
터 빈들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탐심도 없었습니다. 정욕도 없었습
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은 빈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임합니다. 빈들과 같은 가난한
심령 가운데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빈들과 같은 마음을 가
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아버지
와 친밀한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보화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
보들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정보들이 사람의 심령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그 많은 정보들은 공통적으로 사람의 욕망과 탐심을 충동질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골방으
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원하십니까? 살아 있는 말씀에 사로잡히기를 원하십
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심령이 뜨거워지며 그 말씀이 당신의 심령 속에 살아 있는 말씀으
로 다가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을 빈들로 만드십시오. 탐심을 물리치십시
오. 당신의 욕망을 내려놓으십시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이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기득권까지라도 포기하십시오.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25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광야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 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3절)
하나님의 음성은 빈들에서 들었지만 사역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와서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사로
잡으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나아갑니다. 요한을 보십시오. 나아가서 외치기 시작
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사역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요단 강 부근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렇게 외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줄을 지어 세례요한에게
나아오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광야를 떠나 요
단 강 부근의 각처에 와서 사역을 했습니다. '각 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느 한 곳에서만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요단강의 상 하류를 오르내리면서 여러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음을
말해줍니다. 한 곳에 머물며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사역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은 소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적
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아가 회개의 복음을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가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가라는 명령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주된 사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기 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
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
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
엘 사람들은 날 때부터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구원을 받은 자라고 생각을 하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회
개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고 회개를 해야 할 사람은 이방인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고 죄 사
함을 얻으라!' 인간의 구원은 외부적인 어떤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
풀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게 하여 장차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구원의 완전한 사역이 아니요 예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사역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있게 외쳤습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의 도리를 알고 십자가의 능력을 알고 부활의 권능을 아는 우리들은
어떻게 외쳐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당신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
님만이 당신의 소망입니다. 확신 있게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해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4절)
이사야 선지자는 800년 전에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8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세례요
한이 다시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입니다.
고대에는 왕이 어느 지역으로 행차할 경우 선구자가 먼저 가서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주변의 사람들을 모아 길을 고쳐 평탄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군대에 다녀오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군사령관이나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하면 병들은 그날은 사실 죽는 날입니
다. 내무반청소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도로까지 물청소를 합니다. 진해에서는 대통령이
방문하면 대통령이 방문하는 그 날에 벚꽃이 피어나도록 비닐봉지로 나무를 씌우기까지 했
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이 그 시대에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도 세례요한을 본
받아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
하는 것이 뭘까요?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복음의 증거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은 복음의 증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
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전파될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
르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다보면 누구 때문에 교회에 안 다닌다고 말합
니다. 사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안 믿는지 아세요?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
람들이 꼴 보기 싫어 예수를 안 믿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서 속히 오시도록 복음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빛
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날이 멀지 않았습
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생은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삶의 의의는 하나님
을 만날 준비를 하는 데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 모두는 주님을 만나
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준비하지 못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시키신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골짜기를 메우십니다. 산을 헐어 버리십니다. 굽은 길을 바로 잡아 놓으십니
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전쟁이 있고, 기근이 있고, 재난과 질병, 실패가 있습니다. 갖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까지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까지 진실하게 만드십니다. 내가 나를 끊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끊도록 하십니다. 여
러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이 무서운 역사(役事)가 시작되기 전에 마음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도로 공사를 시작하십시오. 높은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우고, 굽
은 길을 바로 잡아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에 주님의 평화와 능력과 은혜와
영광이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자로서 그 분을 영접할 것입니까? 아니
면 심판주로서 그분을 영접하실 것입니까?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4절)
30년 동안 세례 요한이 준비했던 메시지는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요, 세상
을 향해서 교회가 던져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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