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노래하는 사람들 2002-01-06 18:34:26 2001. 04. 08. 욥기35:10-11 어떤 여자분이(Charles Cowman) 애벌레 한 마리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속에서 나방이 바늘구멍만한 작은 구멍으로 빠져 나와 보려고 몸부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장면을 보다 못해 가위로 고치에 구멍을 내 주었습니다. 나방은 퉁퉁 불은 몸집을 뒤뚱거리며 기어나왔습니다. 이제 곧 날개를 펴고 날아 오르겠지 선심이나 쓴 듯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나방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고치 구멍에서 너무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하늘을 날지 못하는 달삭둥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며 때로 몸이 찟겨지고 피가 흐르는 고통의 시간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실 고통이란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때로 인간은 인간되게 하는 꿀약입니다. 수많은 철인과 현인들이 고난에 답을 주기 위해 크고 작은 글들을 써보았지만 별신통한 정답을 내 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고난이란 깊고 오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맞는 태도도 사람마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가시에 찔리는 작은 고통 속에서도 대못에 찔린 듯한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때로 큰 대못에 찔리고도 씩 웃고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다엔 언제나 바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공이 돛을 올리면 배는 안전하게 더 빨리 항해를 할 수 있으나 돛의 방향을 바로잡지 못하면 배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더 전진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잘못 대처하면 그 고난 속에 짓눌려 질식하고 맙니다. 즉, 고난의 밤에 목놓아 우는 사람도 있고 같은 고난의 밤에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도 입 밤중에 노래하는 사람들! 보십시다. 깊은 밤과 노래!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이처럼 어울릴 수 없는 양극단의 조화 속에서 우리도 기독교 신앙의 참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노래로 시작하여 노래로 끝이 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된 천군 천사들의 축하찬송과 목자들의 노래로 시작하며 요한계시록의 대합창으로 끝이 납니다. 기독교는 생일날에도 노래하지만 장례식장에서도 노래를 합니다. 신앙 안에서는 빛 가운데 기쁜 찬송이 있고 어둠 가운데서도 심금을 울리는 애절한 찬송이 있습니다. 신앙인! 그는 밤중에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낮과 밤이 있듯이 인생에서도 낮이 있으면 밤이 있을 수 있지요.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까? 직장을 잃은 분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되어 당신의 가슴을 태우고 있습니까? 남편 문제로 인하여 가슴에 멍이 들어 있습니까? 자식 문제로 인하여 엉클어진 머리를 붙잡고 눈물 흘리는 분들이 있습니까? 가족 간에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직장에 대한 환멸과 불만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밤이 찾아 온 것입니다. 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싫어하는 인생의 밤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고통의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의 신호입니다. 이 고난절기의 큰 메시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고난 당했다 너도 고난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을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그 고난의 의미와 고난에 임하는 자세를 배울 때 고난 속에 매몰되지 아니하고 고난으로부터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고난의 종류 고난 가운데는 우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고난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나" 때문이요 내가 지은 죄나 나의 게으름 또는 나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감사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은 아직까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고난 가운데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부딪힐 때 자못 당황하게 됩니다. 가령 이웃사람의 부주의로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그 피해가 미칠 수 있습니다. 혹 나는 차선을 지키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는데 뒤에 오던 자동차가 잘못하여 내 차를 받아버리므로 본의 아니게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비록 인간 편에서 볼 때에는 불합리한 고난으로 보일찌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틀림없이 고난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할 때 한 유태인은 이런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아노니 나는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라도 누군가의 사랑이 있음을 아노라. 나의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에도 나는 하나님이 여전히 선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욥의 고난 (제 4의 고난) 셋째도 선을 이루기 위한 자원의 고난이 있긴 합니다만, 문제는 본문에서 욥이 당한 고난은 이상의 일반적인 고난의 특성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데에 있습니다. 우선 욥의 고난은 의인의 고난이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 당한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자원하는 고난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끝까지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욥이 당한 제4의 고난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총체적, 종합적 고난이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종류 자! 그러면 욥이 과연 어떤 고난을 당했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다양한 고난의 모습을 한꺼번에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재산을 잃은 고난입니다. 피땀 흘려 모은 재산, 안 입고 안 먹고 안 써서 모은 그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놓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이것은 정말로 마음 아픈 일이지요. 욥은 참으로 부자였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욥은 동방의 제일가는 큰 사람이었다고." 이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무슨 대단한 잘못도 없이 재산을 약탈당합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죄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이 어려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두 번째는 자식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귀해도 자식에 비할 바는 못되지요. 화목하게 지내던 십남매가 형님 댁에서 잔치를 하다 집이 무너져 다 죽었습니다. 세상에 또 이런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 더 한층 뼈아픈 고통이 자식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세 번째 사랑하던 아내와 모든 친구들이 욥을 저주하고 떠나버립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는 고난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것도 큰 고난입니다. 이에 더하여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이것을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며 몸부림합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모습입니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욥은 고난의 이유도, 그 의미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괴로워합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았습니까? 왜 나에게 젖을 먹였습니까?" 이처럼 자기 생을 저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옆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지켜보던 젊은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엘리후입니다. 계속 듣기만 하던 그는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 ① 본문에서 엘리후가 발견한 귀중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밤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성숙시키는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자연계에 밤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지혜입니다. 꽃은 아침에 피어나기 위해 밤에 준비를 합니다. 아름다운 봉오리가 이슬을 머금고 입을 벌려 피어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동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밤이 없다면 꽃은 피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 동안 인간에게 꽃을 피울 준비를 시키십니다. 만일 고난이 없다면 인생의 꽃은 피지 못하고 신앙의 꽃은 영글지 못한 채 시들고 말 것입니다. 즉 자기교만과 완악한 자기자랑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고난의 골짜기를 용광로로 이용하셔서 당신이 필요한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시인 테니슨은 그의 시집 「용광로」에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용광로 쇠봉에 비유했습니다. 쇠붙이를 벌겋게 용광로속에 달구어서 원하는 형태로 두둘겨 찬물에 담급니다.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는 다시 달구고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냅니다. 성경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바로 쓰임을 받은 인물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가 밤을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고 온전히 만들어지지 아니하는 고약한 기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마치 채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는 순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찌라도 고난의 용광로 속에 던지시길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저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십시오. 잔인하고도 무서웠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하신 잔인한 고난의 밤길 말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전 인류를 위하여 피 흘리게 하시고 그 처절한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 용서함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밤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사람들이 이것을 볼 때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이 밤의 방법이 하나님께는 지혜로운 구원의 길이요 능력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밤이라는 방법이었다면 한평생을 세상에서 살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밤이라는 용광로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광부는 불순물이 잔뜩 섞여있는 채광석을 용광로 속에 던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광부의 관심은 불순물에 있지 않고 잠시후에 흘러내릴 순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후가 발견한 하나님 ② Climax 욥의 사건을 통하여 엘리후가 우리에게 소개해 준 우리에게 소개해 준 하나님의 독특한 성품이 있습니다. 그분은 밤을 허락하시는 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노래하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고난만 허락하는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밤중에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밤중에 기도와 소망과 찬양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밤중에 노래하는 사람들" 이 얼마나 장쾌하고 멋있는 사람들입니까? 인생의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낮에 부르는 노래와는 다릅니다. 만물은 고요 속에서 침묵하며,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칠흑 같은 어두움.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고독한 외로움. 그리고 또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처절한 실패와 눈물 그것뿐입니다. 이 속에서 무덤 같은 침묵을 깨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성공한 자가 감사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고 노래하는 자가 성공을 합니다. 여러분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꽃 한 송이를 꺾어 들을 때 노래가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잘먹고 잘사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찬송대신 자만의 거드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공과 행복이 자기가 잘나 만들어 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랑합니다. 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는 미풍과도 같은 작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신앙을 배신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없었던 이들은 신앙이 마치 생의 악세사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귀여운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낙심하고. 혹은 교회 온 사이에 T.V.를 도둑맞았다고 신앙을 버리고. 혹은 예배당에 왔다가 고무신 한 켤레 잃어버리고 낙심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교회에 등록했더니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고 신앙을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밤을 만난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노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로 하여금 시련의 밤중에도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련, 고난! -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가 있어야 내가 이길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누가 사업이 안될 때, 형편이 어려울 때, 질병의 고통이 있을 때, 가정에 시험이 있을 때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는 바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신앙인만이 토해낼 수 있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밤에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은 깊은 대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맙니다.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 제가 밤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다. 주여, 풀무가 뜨거울수록 순금이 나옴을 믿습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예 화 어떤 성도 한 분이 관절염에 걸려 외출을 못하고 고용간호원의 간호를 받으며 집안에서 꼼짝없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심심도 하고 해서 후라이팬으로 요리를 만들다 하나도 먹지 못하고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래된 찌개와 엉겨붙은 후라이팬을 세척제로 닦아도 닦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때 간호원이 달려 오더니 "음식 찌꺼기가 그대로 눌러 붙었군요. 이건 비누로는 안돼요." 그리고는 후라이 팬을 불에 빨갛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 찌꺼기들이 깨끗이 떨어져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도는 "그렇다. 내가 관절염에 걸렸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달구어 내야지" 하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어 성령충만한 찬송이 입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통의 관절염도 녹아졌습니다. 결 론 성도들의 절망의 밤은 하나님을 만나는 밤입니다. 고통의 밤은 축복의 전주곡입니다. 고난의 밤이 찬송의 밤으로 바뀌어 질 때 축복의 아침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합니다. 당장 좋지 못한 일이 있다고 원망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은 패망합니다. 기차가 터널 속에 들어갔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인생과 신앙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앞을 바라보십시오. 다시 빛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검은 구름 저 뒤엔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오 주님, 밤중에 노래하게 하소서. 할렐루야! 특별히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 신앙 때문에,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의 밤중에도 노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당신의 입 속에 승리의 찬송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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