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잠겨사는 사람들
2002-01-06 18:27:21

2001. 1. 21. 에스겔 47 : 1 - 12


I. 에스겔

어떤 사람이 환상중에 천국에 가 보았더랍니다. 천국에 갔더니 촌스러운 마을도 있고, 중소도시처럼 잘 단장되지 못한 마을도 있고, 일산신도시처럼 깨끗한 주택가도 있더랍니다. 이 세상하고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은 천국은 천국 나름대로의 등급이 있더랍니다. 촌스러운 마을에는 누가 사나 가 보았더니, 이 땅에서 은혜로 잘 살고 자기 신앙을 나름대로 잘 지킨 사람들이 살더랍니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못한 중소도시 같은 마을에는 누가 사는가 가 보았더니, 고난 가운데 굴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며 승리한 사람들이 살고 있더랍니다. 일산신도시처럼 깨끗하게 단장된 천국의 일등도시에는 누가 사나 가 보았지요. 고난과 시험과 실패 가운데도 굴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더욱 아름답게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그 마을에 살더랍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도 있고 또 그런 책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상처받은 치유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일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많은 문물을 약탈해 갔고 1만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께 갔습니다. 그의 나이 30이 되던 해,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노예생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소망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녔습니다. 비참하게 끌고 다니다 처참히 죽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 소망을 선포하던 에스겔의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은 이런 아픔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됩니다.”

그동안 귀를 막고 있던 백성들이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의 위로와 격려 희망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환상입니다.

이 환상의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실패를 겪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에스겔은 조국이 망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고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이런 비극속에서도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가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붙들어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이 백성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에 강력한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었던 에스겔은 고통받은 동족을 위해 더 진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자른 사람에게 찾아가서 손을 붙들고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위로했더니 “너도 다리 한번 짤라 볼래.” 그러더랍니다. 그러나 두 다리 없는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했더니 함께 손 붙들어 울며 위로를 받더라지요.



II. 환 상

오늘 본문 위로의 메시지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리까지. 오늘 본문에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가슴까지. 급기야 물은 성전에 가득하여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막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데 보니까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고 있지만 반드시 찬란한 아침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춰지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실패했지만 반드시 성공하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민족은 전능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민족을 치료해 주시고 새롭게 일으켜 주실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하여 백성들은 희망을 가지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본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강이 흐를 수 없지요.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이 말씀은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 조차도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일강의 애굽문명, 유브라데스 강의 바벨론 문명, 인더스강의 인도문명, 황하강의 중국문명이 그것들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거듭나야 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III. 제 단

오늘 본문에서 성전문지방에서 부터 흘러나온 물이 제단을 한바퀴 돈 다음 그 제단을 통과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러갔다고 했는데 여기 제단이 무엇입니까? 신음하는 민족을 살릴 수 있고 쓰러져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낼 수 있는 강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지옥의 백성들을 건져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 삼을 수 있는 능력의 강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① 우리 예수님 골고다 언덕에서 흘려주신 피의 은총, 보혈의 능력, 그것만이 인류를 살려내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보혈의 은총에 적셔진 영혼들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보혈은 이 역사 한가운데를 힘 있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를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② 역사를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낼 수 있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서는 성령의 물에 감동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란 권세를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성령의 생수가 아니고서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③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가 흐르기 때문에, 구원의 보혈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칼빈은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가 화려한 교회라도 괜찮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농촌교회라도 괜찮습니다. 예배당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두 사람이 손을 붙들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하다 보면 교회가 못나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허물이 우리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하게 보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가 힘에 겹습니다. 어지럼증이 있습니다. 멀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태평양 한가운데로 여행하다가 거기서 멀미가 난다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는 구원방주입니다. 흠이 있어 보여도 때로는 어지럼증이 있어도 여기서 뛰어내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문제는 네 신앙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IV. 물의 깊이

본문 : 네 신앙의 깊이를 측량해 보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묻는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네 신앙의 깊이가 어느정도냐? 너의 신앙을 측량해 보려무나.

1. 발목을 잠근 사람들

사람들은 발목에 물을 잠그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목에 물을 잠근다는 것은 신앙의 초보상태를 의미하지요. 즉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아직 체험도 없고 감격도 모자라고 그냥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출석교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법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잘 드립니다만은 한 2-3년 어간을 우리교회에 마당까지만 오는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주일날 아침이 되면 일찌감치 밥을 손을 지어서 아내를 차에 태우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서 교회 마당까지 옵니다. 그리고는 차 문까지 열어 주면서 가서 예배 잘 드리고 오라고. 예배끝나는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찾아와서 가족들을 태워 갑니다. 또 성찬주일이 있는 날은 정확하게 30분 늦게 옵니다. 그런데 한번은 아이들 손에 이끌려서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한번 오기가 어려웠지 두번 오기는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1년동안 다니는데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렇게 훌륭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배를 잘 드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발목 신앙인이 된 것이지요. 그도 여전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도 여전히 구원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성가는 구원의 길을 걷고도 여전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안에는 발목신앙도 되지 못하는 오늘 본문 11절에 말하는 진펄과 개펄 신앙이 있기는 합니다. 이들은 교회 냄새만 맡았을 뿐 은혜의 강물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까지 영접하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성경의 복음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은혜의 강가에서 구경만 했지 발을 들여놓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잔인한 한 선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11절 입니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구원의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무릎까지

그래서 물은 차 올라야 합니다. 이제 물이 점점 차 오르게 되면 무릎까지 오르게 되지요. 무릎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를 다니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위해 바지를 걷어 부칩니다. 팔을 걷고 일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입만 벌리면 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 두번 교회 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친구들이 교회를 비판하면 그게 그렇게도 싫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게 아니라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무릎까지 차 오른 신앙인이 되어가는 거지요. 이전에는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혼자서 헐떡거리고 뛰어다녔습니다. 자기의 재주를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 보려고 했습니다. 선배들을 만나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더 얽히고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 해보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신통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더 꼬이더니 하나님이 도와주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그의 무릎이 기도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릎이 은혜의 강물에 적셔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신앙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물통을 져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마을 우물에 가서 물통을 져 나른 적이 있습니다. 하도 어릴 적 일이니까 물통에다 물을 가득히 담고서는 일어 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물을 반통쯤 담아서 일어섭니다. 겨우 일어서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물이 출렁하면서 두걸음 나를 밀어 제킵니다. 그래서 한걸음 갔다 또 한걸음 갔다 출렁 출렁 몇번하고 집에 도착해 보면 양철통에는 빈통입니다. 물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물이 차 올라야 합니다. 반통 신앙가지고는 안정감이 없습니다.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고 열매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빈 수레는 요란하고 가랑잎은 바시락 거리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허리까지

그래서 물은 또 다시 불어나야 하는 겁니다. 다음 단계는 물이 허리에 차는 단계입니다.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 역사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저 양반하는 얘기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핑돌며 감격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의 허리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는 단계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하도 울면서 눈이 벌개서 일어서니까 미안하던지 자기 아내에게 그러더랍니다. “이놈의 교회에 체류탄 뿌렸냐.”

벌써 물이 허리에 차 오르고 있는 거지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안전무장이 나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구. 성령의 칼을 들라구. 그리고 구원의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구. 그러나 진리의 허리띠를 띠지 못하면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창피당하기 쉽상입니다.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둘러야 앞으로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향상하는 신앙이 가능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잡혀있는 신앙 말입니다.

어느날 전도훈련 받고 이제 초신자인 줄 알았는데 가서 복음을 제법 잘 전합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을 다듬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허리에 힘이 있으면 웬만한 유혹이나 시험에는 넘어지지가 않습니다.

4. 가슴까지

물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또 불어납니다. 본문에 문자적으로는 생략이 되었지만 당연히 거쳐야 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슴까지 물이 차는 단계입니다.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하시는 분 계십니까? 빨리 헤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모태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이 없어요. 아무런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래 모태신앙이란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못해 신앙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물에 잠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훈련의 자리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우리교회 성도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40년동안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그래서 누구하고 논쟁을 하더래도 진적이 없더랍니다. 성령에 대해서 수없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더랍니다. 성경지식, 초등학교 때부터 퀴즈대회하면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진리가 머리속에만 터질 듯이 고여있지 가슴속에는 아무런 기쁨도 은혜도 감격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훈련을 받고 나니 이 모가지를 타고 진리가 흘러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10cm를 내려오는데 40년이 흘렀다고 합니다. 모가지가 뚫어졌더니 가슴에 벅찬감격이 용솟음 쳐 오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생각할 때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속에만 머물러 있던 성령이 얼마나 섬세하게 나를 지키고 동행하고 돌보셨는가 깨닫고 땅을 치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당신앙엔 기원만 있고 감사가 없습니다. 축복은 바라나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므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말씀속에서 진리에 바로 서는 신앙, 소중하지요. 헌신하는 신앙, 찬송하는 신앙,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가 없는 기도는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감격이 없는 찬송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감격과 감사가 없는 헌금은 뇌물에 물과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제 e-mail에 자주 편지를 올려줍니다. 그리고 가끔은 편지를 붙여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님 병이 났습니다. 목사님이 고쳐주셔야 되겠습니다. 교회 와서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이 테잎을 들었는데 주처없이 눈물이 쏟아져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닦으며 차를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테잎을 목사님에게도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 행복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예전에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신앙생활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들인지 모릅니다.

저도 한때는 교역자가 되어서도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섬기던 한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르는 찬송은 600장, 이 찬송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찬송가를 펼쳐서 찬송을 부르면 은혜가 되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엇박자 찬송, 빠른 찬송을 부르면 도무지 은혜가 안되는 겁니다. 이 귀한 찬송 나두고 왜 저런 찬송 부르노. 마음이 닫혀지고 시험이 들어서 예배당에 갈 수가 없더라구요. 목사님의 설교는 좋은데 도무지 찬송이 은혜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찬송시간만 되면 기도했습니다. ‘주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게 제 찬송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경을 보는데 “새 노래로 여호와로 찬송하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하나님 나는 낡은 찬송은 은혜가 되는데 왜 새노래는 은혜가 안됩니까? 또 성경을 보니까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도다” 다른 사람은 기뻐 손뼉을 치는데 나는 손뼉 한번 치려고 하면 어깨가 천근 만근이 되는 겁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손을 들고 일어서 찬송하는데 이 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무슨 은혜를 받았길래 찬송시간에 저렇게 눈물을 흘리노. 그냥 찬송 부르면 좋지. 무슨 찬송에 눈물이 다 있노. 그 교회 다니길 1년쯤 되었을까요. 어느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기 시작했습니다. 죽어서 꼼짝달싹하지 않던 찬송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 기록된 가사 하나 하나가 내 심정을 심령을 뒤틀고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토씨 하나까지도 나를 위하여 준비된 메시지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춤을 추며 손뼉쳤던 믿음의 선진들의 감격이 용솟음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저는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5.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사람들

이제는 우리의 가슴이 은혜에 적셔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을 느끼며 감동하며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 감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뻐서 감사하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과 은혜의 단계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5절)

여기에 큰 은혜의 강물이 흐른다 할지라도 억지로 끌려서 다닐 수는 없습니다. 강물에 사람들이 지금 놀고 있습니다. 헤엄치며 노는 사람이 있고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 은혜의 강물이 은혜의 생수가 흘러 넘쳐도 여기서 허우적 거리며 퍼득거리고 물 마시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여기서 헤엄하며 노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어떤 나라에 임금이 공주를 시집보내야 되겠는데 어떤 사람에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이 나라에서 가장 용기가 있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용맹하다는 젊은이들을 다 불러 모아서 연못가에 둘러서게 했습니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하품하듯이 입을 벌렸다 오무렸다 하는 악어떼가 우굴 우굴 있었어요. “누구든지 악어떼가 있는 이 연못을 가로질러서 헤엄쳐 달려오면 공주와 결혼을 시켜 주겠다.” 그런데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뛰어들어 갔다간 악어의 밥이 될텐데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용감한 한 젊은이가 뛰어가더니 그냥 잽싸게 수영해서 뛰쳐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느냐?”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뒤를 두리번 거리더니 “어떤 놈이 밀었어!”

우리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사람이 있고 허우적 거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땅을 깊고 헤엄치는 단계를 지나서 몸을 담그고 물을 끼얹는 단계를 지나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기고 나면 저절로 뜨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믿어야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축복이란, 내가 노력한대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에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넘치는 강물에 가서 내 다리를 띄고 나면 죽을 것 같지만 땅에서부터 다리를 띄고 나면 내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헤엄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세계가 우리 가운데 준비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시간의 우선순위, 내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반듯한 삶이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쫓기듯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물질도 하나님의 것, 하나님 앞에 깨끗이 드리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정직하게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맡겨놓고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것 도적질하여 조금 더 잘 살면 뭘 하겠습니까? 맡길 것 맡기고 살아보면 내 발이 세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지만 거기에 신비의 세계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한 구절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되 억지로 지지 말아라. 이왕 십자가를 지려면 기꺼이 지거라. 그러면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내 재주로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려면 무거워서 질 수가 없어. 십자가를 지려면 기쁨으로 감당해 보려무나. 그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네가 짊어진 인생, 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 인생에 짐을 감당해 주시기만 하면 주님의 품에 안겨서 살아가는 신비의 세계가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단계를 척량해 보십시오.

우리교회 김 집사님은 남다른 인생길을 달려왔습니다. 고난에 부딪힐 때마다 문제에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사람도 만나보고 저 사람도 찾아가 보고 여기 가서 울어도 보고 저기 가서 매달려도 보고 법에 호소도 해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인생의 상처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문제는 꼬여져만 갔습니다. 인간관계는 허물어져만 갔습니다. 도무지 내 힘으로 내 발목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 보자! 무릎 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내가 그렇게 애를 쓸 때마다 꼬이던 문제들이 하나님이 간섭하기 시작하자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지는 것을. 무릎까지 물이 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잠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주일마다 예배당에 찾아올 때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슴까지 허리까지 지금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마다 모두 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내 찬송이요 내 고백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지 나의 찬송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도 예수를 위하여, 죽어도 예수를 위하여 은혜의 강물에 몸담고 살아야지. 헤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V. 은혜에 잠겨서 사는 사람?

한 원양어선이 먼 항해길에 들어섰습니다. 며칠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며칠 간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바람이 그쳤을 때는 이미 물도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선원들은 갑판 위에 다 쓰러져 누워있었습니다. 때마침 배 한척이 옆으로 지나 가길래 큰소리로 옷깃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여보시오. 물 한컵만 우리에게 주고 가시오. 우리가 지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 되었소.” 그때 저만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옆에 있는 물을 퍼서 마시시오.” “아니 목마른 사람에게 바닷물을 퍼서 마시라니. 너무 잔인하지 않소.” “아니요. 당신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착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강물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 몸담고 살지 못하고 목말라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 없습니까? 주님에 은혜의 강물에 여러분의 문제를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사회가 살아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은혜의 강물에 맡겨놓고 살아가십시오. 세상에서 발이 떨어지면 그 문제를 내가 놓으면 내가 망할 것 같지만 내가 놓으면 주님이 대신 잡아 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막에 강이 흘러가게 될 것이고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게 될 것이고 이 한해동안 풍성한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가정도 살고 목장도 살고 사업도 살고 이웃도 살고 자식도 살아나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배우십시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잠겨 사는 신앙의 신비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님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자리에서 다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 신앙의 단계를 이 시간에 점검해 보십시오. 아직까지도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문을 열지 못하여 진펄과 개펄 소금땅이 되어서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발목이 교회에 적셔졌습니까? 은혜에 적셔졌습니까? 자고 나면 교회에 오고 싶어지십니까? 여러분은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차 올라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릎이 주님 앞에 적셔졌습니까? 기도의 강물에 적셔졌습니까? 더 깊이 담그십시오. 전능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문제를 주님 앞에 맡기십시오. 가정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면 그렇게 쉽게 해결되어지는 것을.

문제가 커서 여러분이 막고 있습니까? 너무 작아서 시시해서 여러분이 붙들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한테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에 인생의 중심을 말씀 중심으로 바꾸십시오. 예수 중심으로 바꾸십시오.

그리고 감격이 없습니까?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행복을 잃어버렸습니까? 주여 제게 감격을 주십시오. 성령이여 찾아오셔서 내게 기쁨을 주십시오. 나도 은혜의 강물에 내 가슴이 적셔지기를 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마다 기뻐서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할 때마다 은혜가 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꽉 차오르는 기쁨과 행복에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 내가 달려 오다가 내 문제 내가 해결하려다 상처만 받았습니다. 문제가 얼히고 설혔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겠습니다. 세상에서 발을 띕니다. 세상 붙들고 있던 손을 놓습니다. 주님을 붙들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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