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2001-12-28 20:49:00


본문 : 행22:1-16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또 그 후로 어떤 변화를 받았는지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거나 자기 의사와는 상관도 없이 억지로 예수를
믿어서 전혀 할 말이 없다고 한다면 자신의 신앙을 재확인해 보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입니
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앙간증은 무궁무진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를 만나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는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즉 그가 과거 유
대교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유대 사회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것을 회
상하면서 솔직한 신앙간증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간증해보신 일이 계십니까? 대부분은 간증을 해보신 일이 없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증을 들어 본 경우는 많은 것입니다. 은혜도 받은 분들이 많을 것
입니다. 사실 간증을 들어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래서 얼마간은 한국교회에 간증 집회라는 이름이 유명해졌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증이란 뜻을 아십니까? 간(干) 자는 우리가 한자말로 해서 범할 간(干) 을 씁니
다. 내가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는 것이에요. 나의 허물을 다른 사람
앞에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풀어서 얘기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후에 발견한 자신의
허물과 잘못됨을 어떻게 고쳐 나갔는가 하는 변화를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누구든지 간증 있는 삶
을 살아야 합니다. 간증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다
는 증거입니다. 그 만큼 간증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도행전에서만 9, 22, 26장에서 세 번 똑같은 간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
니다. 왜입니까? 간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간증입니까? 바울은 어떤 간증을 하고 있습니까?
먼저 간증은 체험적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 자신의 출생을 이야기하면서 간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소 출신 도
시에서 태어났고 당시 최고 학문의 중심지였던 힐렐 학파 가마리엘 문하에 있었다는 것입니
다. 모든 간증이 그렇지만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을 통해서 말입니다.
무엇이 그의 목적이었습니까?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죽였습니
다. 두 번째, 수많은 남녀노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어요. 이 일에 대제사
장과 장로들이 내 증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
람들이 많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씨를 말리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던 사람이요. 내가 이랬던
사람이요." "당신들이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나도 당신들 못지 않게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
이요"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잘못된 삶을 살아 왔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데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간증의 중심을 6-7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을 가다가 빛을 만났습니다. 그 빛을 받은 순간, 사도 바울의 눈은 완전히 시
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말 위에 있을 수 없어서 내려와 꿇어 엎드립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해 주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자신의 인생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여러분, 무엇을 얘기하는 겁니까? 바울은 지금 이상한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지요, 세상으로
이야기하면 말도 안돼는 소리입니다. 바울의 학문을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해되지 못하는 사건을 통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바울은 이미 공
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체험은 없었습니다. 간증이 없었습니다. 그러
다가 바울은 다메섹에서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수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간증이 없습니다. 경험적인
신앙이 없습니다. 생활에서 나를 도와주시고 영적으로 만난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교사, 찬
양대를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났느냐 입니다. 경험했느냐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사도 바울은 거꾸러지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것이 우리가 해
야 할 질문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무덤에 계신다고 하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도대체 당신이 누구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을 매일 만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고통스러워합니까? 왜 근심이 많습니까? 주님 나에게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이런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격렬하게 만났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길 바랍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능력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간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얘기
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만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관한 얘기도
아니요, 하나님에 관한 들은 얘기도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을 만난 얘기입니다. 오늘 이 체
험적인 간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기 전의 바울은 이처럼 유대교 광신도에 가까웠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막
는 훼방꾼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종교밖에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후에 바울은 자랑거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었고 자신의 악한
것을 자랑하며 오히려 만물의 찌끼같이 된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
은 십자가 뒤에 숨겨지고 예수님만 더 크고 더 높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
니다.
어거스틴은 구원받기 전에는 사생아를 낳았고 사이비 종교인 마니교에 빠졌으며 부도덕한
생활을 하며 부모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던 탕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대설교자인 조지 휘트필드는 15세에 학교 교육을 마치고 술집의 바텐더로 일했으며, 인도
를 복음으로 밝히고 4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126개의 기독교 학교를 세운 윌리엄 캐리
는 구두 수선공에 불과하였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구원받기 전에는
동네 사람이 다 아는 좀도둑이었으나 그는 그런 과거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
까? 그가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로 인정받은 이기풍
목사도 구원받기 전에는 평양의 소문난 깡패였고, 그 외에도 어둠의 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만나서 복음의 일꾼이 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거나 대단치 않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과거를 깨끗하게 씻고 새 사람을 입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간증은 계시적이어야 하라는 것입니다. 계시적 체험이라
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체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주관적인 체험으로 끝나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자기 감정을 얘기 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시골 교회에 부흥회를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할머님이 계속 우시
는 겁니다. 설교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말똥말똥하게 들으면 힘듭니다. 여하튼 할머니는
예배 끝날 때까지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물어 보았더니 얘기
인즉, 자기가 1년 전에 돼지 한 마리를 샀다는 것입니다. 새끼를 아주 예쁜걸 샀는데, 그 돼
지를 3개월 동안 정말 자식같이 잘 길렀어요. 그 돼지가 얼마나 통통하게 살이 쪘는지 몰라
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돼지가 죽었어요. 그런데 오늘 강대상에 선 목사님 얼굴을 보니까 얼
마나 통통하신 지, 1년 전에 죽은 그 돼지가 생각이 나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
니 교인들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극단적인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라고 하는 것은 열어 보이는 거예요. 본문을 보면 바울이 하나
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을 바울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종교와 복음의 차이에요. 종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방법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 동기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선행, 철학, 무슨 열심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차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
던 그 사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것이 간증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찾
아오신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신 그 진리의 말씀이 근거가 되어 우리의 간증으로 표현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속상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나 불공평합니다.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믿는 자 핍박한 적도 없는데 왜 나한테는 예수님이 안 나타나
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을 자세
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셨어요.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이 범죄해서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났을 때,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가인이 자기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였을 때 하나님이 가인
을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
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신다구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
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볼지어다'라는 말씀은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에서
중요한 것은 시제입니다. 한번만 두드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형입니다. 계속해서 두드리
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과거에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고, 어제도 두드
리셨고, 오늘도 두드리십니다.
실제로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9절 말씀도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왜 그랬습니까? 왜 함께 있으면서 모두 같은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시간에 와서 설교를 듣는 이 자리에 와 앉
아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설교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게 적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으
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구체적인 적용이 있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세상살이에 눈이 밝아서 주님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너무 많이, 너무 밝히 보이니 어찌 주님만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소경같이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끌려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뜻대로 순종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세상의 눈이 밝아지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
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고 육체의 쾌락을 볼 수 있게 된 대신에 하나님을 보는 눈은 여
지없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어갔습니다. 세상에 그렇게도 의지하고 따르고 붙잡
을 것이 많으니 어찌 주님만을 붙잡고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는 말을 듣자 사도 바울이 무엇을 얘기
합니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자는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당신이 원하는 대
로 다 따르겠습니다. 잘못된 생활습관을 끊으라 하시면 제가 끊겠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일
을 내려놓겠습니다. 돈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부부관계가 나빴습니다. 제가 모든 잘못을 돌
이키라 하시면 돌이키겠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간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의 간증이 과거에 예수님을 만난 얘기만 합니다.
예수님 만나고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증이 아닙니다. 간증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예
수님 만난 이후의 얘기가 있어야 됩니다. 할 얘기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만나서 내가 오
늘 이렇게 변했습니다.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내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부형들
이여! 내 얘기를 들으시오.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
소. 그리고 내가 이렇게 바뀌었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 만나고 나서 바뀐 얘기들이 있습니까? "내 가
정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내 개인생활이 달라졌고, 직장에서의 삶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내 취미가 바뀌었어요"라고 누구에게나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옛날에 자랑하던 그 자랑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핏줄
이나 출신 지역이나 학력을 자랑하거나 도덕성 또는 종교성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으셨습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아멘!" 하실 것입니다. 그
러나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말없이 택함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내 신앙 생활 가운
데 아름다운 열매가 없다면 아무도 나의 택함 받았음을 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를 받고 도끼에 찍혀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에
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페니 백화점의 설립자인 페니는 1929년에 사업이 너무 흔들려서 불안에 빠
지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무서운 고통까지 겪는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각종 약을 써 보고 진정제를 복용하였지만 전혀 소용이 없고 사업 걱정이 극에 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음날 아침이 되기 전에 자살할 마음을 먹고 아내와 아들과 친
구들에게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쓰는 내용이 많아서인지 새벽녘이 되어 침대에 누웠
는데 바로 옆에 있는 병원의 예배실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구주의 품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페니는 벽에 기대어
앉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일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실까" 그
는 벌떡 일어나서 예배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날 새벽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기도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는데 어느 새 깊은 동굴 속에 있다가 밝은 빛으로 나온
것처럼,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온 것처럼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그
리스도인으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간증은 어떠합니까? 나는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확실한 신앙적
결단이며 회개였습니까? 그것은 정말 중생의 경험이었습니까?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부
탁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서 일생을 살아야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겠습니
까? 되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아니면 세상과 어울려서 이것저것을 하면서 소모해 버릴 인생
이 아닙니다.
마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습관도 변하고, 친구도 변하고, 길도 변하고, 취미도 변해
서 모든 과거를 끊고, 새로운 분을 만나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새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
니다. 문제는 체험입니다. 예수를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만
나는 순간 운명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이 달라집니다.
지금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내 인격이 아니고, 내 지식으
로도 아니며, 내 철학으로도 아니다. 나는 본래 너희들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입장이 바뀌었다. 그것은 예수 때문이다. 예수의 은혜, 예수의 복음, 예
수의 능력, 예수의 생명력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것이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변화된 것을 식구들과 친구들과 이웃이 압니까? 바울처럼 급격하고 현
저한 변화는 아니라 해도 자기 마음속에 정말 주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하셨다는 진실한 고
백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난 체험적인 사건이 있으십니까? 하늘의 음성을, 주님의 음성을 들
어 보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만난 이후에 계속되어지는 얘기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전해
줄 얘기, 당신의 가정에서 생긴 놀라운 변화의 얘기, 당신의 취미 생활이 바뀐 그 놀라운 얘
기, 내 인생관과 내 마음을 바꿔 버린 그 놀라운 얘기를, 그 얘기를 당신은 오늘 가지고 계
십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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