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의 교제
2001-12-25 20:25:29

본문 몬 1: 4∼7



저는 오늘 격식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면 성도 여러분을 다 일어나라고 하고서 "옆에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만 앉으세요" 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말은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확실하게 아는 것을 말하고 또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옆의 사람을 잘 알아야합니다. 이름, 직분, 사는 곳, 가정, 직업, 기도 제목까지 알아야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몇 분이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 다음에 "오늘부터는 적어도 양옆에 있는 분과 앞뒤에 있는 분에 대해서는 잘 알겠다고 하는 분만 앉으세요"하고서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한다면 최소한 이 정도의 교제는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조금 전에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조금 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교통이란 것이 바로 교제인데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해 놓고 바로 옆자리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들으시고 "거짓말하지 마!"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나의 사도신경을 거짓말로 만들지 마셔야겠습니다. 성도들과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과 교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예배 끝에 축도를 해도 그것이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축도할 때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제가 있기를 비는데 먼저 우리끼리 교제가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우리가 노력해야 성령님도 도와줍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령님도 도와주기 어렵습니다.
또 우리가 먼저 교제해야 성령님도 우리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밖에 나가서 맛 있는 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첫째는 피자 먹으러 가자고 하고 둘째는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합니다. "피자!" "아이스크림!" 한참 싸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 그만두고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자" 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의견을 통일해서 요청하면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합해 교제할 때 성령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임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교제는 빼고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만 받지요, 뭐!" 이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자고 말합니다. 초대교회의 무엇을 본받자는 것이지요?
기도 열심히 한 것 본받고 전도 열심히 한 것 본받고 구제에 힘쓴 것 본받고 박해에 굴하지 않은 것 본받자고 합니다.
그와 함께 교제에 힘쓴 것도 본받아야합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제에 힘썼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본받으려 할 때 이 교제를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교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옆 사람과의 교제도 이뤄져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들 간의 교제, 종적인 교제, 횡적인 교제가 교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종적인 교제는 잘 이뤄지는데 횡적인 교제가 부족한 것이 한국교회 예배의 약점입니다.

바울 서신의 막내 격인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은 제자나 사도들처럼 성경에 직접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의 편지 속에 간접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우리가 배워야할 것이 많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가정이 온전히 복음화 되었고 그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힘써 교회에 봉사하는 집이었습니다. 2절에 나오는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인 것이 또한 거의 확실합니다.
2절에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의 집에서 교회가 모였다는 뜻입니다.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에 제공해서 집에서 예배 드리게 했습니다. 이 교회는 골로새교회입니다.
5절을 보면 빌레몬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고 믿음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빌레몬은 성도들에게 평안을 주고 사도인 바울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빌레몬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틀림없이 부흥할 것입니다.

빌레몬은 또한 바울과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눈 사람이었습니다. 6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이 말은 성경원어인 헬라어로는 이런데 그 뜻은 이렇습니다"하는 것을 종종 들으실 것입니다. 6절에는 여러분도 헬라어 원어를 알고 있는 말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에서 "교제"란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코이노니아"입니다.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에서 "교통"도 "코이노니아"입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6절을 "그대가 우리와 더불어 누리는 믿음의 사귐이 효력을 내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가까이 나아갈 때에 우리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그대가 충분히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사도,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그 당시 교회에는 아직 장로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늘 말로 하면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의 직분으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 사이인데 이와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목사와 장로, 이상하게 교제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역자와 평신도 간의 갈등입니다. 회의에서 목사님이 제안하면 장로님이 반대하고 그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어느 원로 목사님에게 치매가 왔습니다.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이 목사님이 치매 상태에서 사람들 욕을 많이 했는데 장로님들 욕을 그렇게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바울은 아마도 반대로 잠꼬대를 하면서도 빌레몬 칭찬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중국 심양(沈陽)에 가면 서탑(西塔)이란 곳이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어서 중국의 코리아타운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곳인데 여기에 서탑교회가 있습니다. 세워진지 87년이 되는 오래된 교회입니다. 지금 6층으로 크게 지었지요.
일제 말기에 이 서탑교회를 마지막으로 담임했던 목사님이 백리언(白理彦)이라는 목사님입니다. 1960년대에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을 하시면서 설교학을 가르치셨는데 서탑교회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자기는 처음에는 서탑교회에 출석하는 청년이었는데 김익두(金益斗) 목사님의 집회에서 은혜 받고 전도사가 된 이야기, 당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상인(鄭尙仁)이라는 목사님의 속을 많이 썩여드렸는데 목사님이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자기를 후임자로 임명한 이야기, 해방 후 소련군이 심양을 포위했을 때 인근 각지의 동포들이 모두 서탑교회에 피난을 와서 교회에서 죽 쑤어서 그들을 돕던 이야기, 소련군이 교회를 내놓으라고 권총을 들여대고 위협하던 이야기들을 하셨는데 그 가운데서도 무엇보다도 서탑교회의 장로님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로님 다섯 분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젊은 교역자인 자기가 무엇을 하자고 할 때 반대를 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장로님들에게 "장로님, 장로님은 경험이 많으니까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텐데 왜 만류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면 장로님들은 대답하기를 "네,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것을 경험해서 목사님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어서 가만히 있었으니까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 대해 "믿음의 교제"라고 하는 것을 들을 때 이 이야기가 다시 생각납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지금 서로 오해하기 쉬운 형편 속에 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는데 주인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노예가 이리저리로 피신해 다니다가 지금 바울에게 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노예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빌레몬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바울이 우리 집에서 도망친 노예를 감싸고 있어? '나는 빌레몬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너를 받을 수 없다!'하고 쫓아내거나 신고를 해서 잡도록 해야지 같이 있어? 이럴 수가 있나!" 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갇혀 있는 몸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덕분에 감옥에 수감되지 않고 집을 한 채 세 내어 감시하는 군인들과 같이 있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감시하는 군인에게 "이 놈이 도망친 노예요!" 한 마디 하면 자기와 빌레몬 사이와의 관계도 불편해지지 않고 그 군인은 실적을 올리게 되고 이중으로 좋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도들끼리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그만 아주 험악해지고 맙니다. 그리고 좀처럼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끼리는 잘 해결되는 문제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속이 좁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껄껄 웃으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지요. 이런 것 역시 듣기 민망한 이야기입니다.
여하튼 지금 빌레몬과 바울은 틀어지기 쉬운 형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믿음의 교제를 나눕니다.

당시에 도망친 노예를 감싼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풍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이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교제가 끊어지고 싸움이 일어났을 일을 바울과 빌레몬은 믿음으로 극복하고 믿음의 교제를 계속했습니다.

구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교제가 아름답다면 신약에서는 바울과 빌레몬의 교제가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교제가 있어야하겠습니다.
우리 나라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은 사사건건 맞서서 싸웁니다. 때로는 욕설도 하고 몸싸움도 벌입니다. 그런 모습을 너무 자주 보이니까 냄새나는 편지가 배달되는 일도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국회의원들끼리는 서로 만나 당적을 초월해서 나라를 위해 같이 기도하고 교제를 나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세상의 교제와 달라야합니다.

세상의 교제는 어떤 목적과 계산을 가진 교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이 사람과 교제하면 나에게 이런 유익이 있으리라", 믿음의 교제는 그런 것을 초월합니다.

세상의 교제는 교제하던 상대방이 불리해지면 교제를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위 장성으로 있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전역식을 마치고 집에 오니까 그 전까지는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 많고 전화가 많았는데 뚝 끊어지더랍니다. 집이 절간 같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으면, 주님과의 교제,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가 없었더라면 극복하기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교제는 상대방이 불리해지면 더욱 긴밀해져야합니다. 바울은 지금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바울과 교제를 계속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돌려보내면서 "이 사람을 노예로 대하지 말고 형제로 대하라"고 권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흥,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주제에!" 하지 않고 그 권면을 잘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네시모는 나중에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교제는 한시적입니다. 아까 술자리 이야기를 했는데 술자리의 교제, 참 친밀한 것 같지요.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낼 때 예전에 카드를 열심히 보내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보낼 필요를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내도 답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여러분, 천국까지 이어지는 교제입니다.

세상의 교제는 계층을 초월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계층 안에서 교제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계층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과 빌레몬의 교제도 아름답지만 바울과 노예 오네시모의 교제도 아름답습니다. 자유민일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는 바울과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가 숙식을 같이하며 교제를 나눈다는 것, 당시 사회통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나라를 초월하고 나라간의 이해도 초월합니다. 이차 대전 당시 독일 여성과 영국 여성이 다른 나라의 전차를 같이 탔습니다. 영국 여성이 자리에 앉았는데 독일 여성이 몸이 불편해 보여서 자리를 양보했다고 합니다. 독일 여성이 내리기 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영어를 모르니까 한참 애쓰다가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서 시편 133편을 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영국 여성은 독일어를 몰랐지만 그것이 성경이고 가리키고 있는 것이 시편 133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133편까지 가는 것은 시편밖에 없었으니까요. 영국 여성은 독일 여성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웃는 얼굴로 손을 잡아 흔들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서로 싸우고 있는 나라의 백성들이지만 믿음 안에서 짧지만 인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목적과 계산을 초월한 교제, 상대방의 처지를 초월한 교제, 아니 상대방이 불리한 처지에 있을수록 더 긴밀해지는 교제, 천국까지 이어지는 교제, 계층을 초월하는 교회, 나라의 이해를 초월하는 교제, 이런 교제가 있어야겠습니다.

저에게는 사십 년 넘게 교제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광산과를 나와 석탄공사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었고, 신문기자로 일하는 친구가 있었고, 의사가 있었고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사십 년 넘게 계속되는 교제이니까 얼마나 두텁겠습니까? 흉허물없지요. 몇 해 전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모여 자녀들끼리 서로 알게 했고 그 동안 사위보고 며느리 본 집이 여럿 있어서 이제는 사위 며느리 함께 모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제에는 제약이 있습니다.
40대에는 서로 말하기를 누가 아프면 제약회사 운영하는 친구나 약을 대고 치료는 의사가 하고, 그러다가 죽으면 묻는 것은 석탄공사 다니는 친구가 담당하고 보도는 신문사 다니는 친구가 하기로 하고 장례는 제가 집례 하자고 했는데 50대가 되니까 묻어주어야 할 친구(광산과 출신)가 심장마비로 제일 먼저 땅에 묻혔고, 제약회사 경영하던 친구는 염색회사로 바뀌었고, 신문사 다니던 친구는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친구는 제약이 없고 제일 편합니다.

믿음의 교제에는 세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만남과 나눔과 누림입니다.

자주 만나야합니다. 교회에서 만나야 하고 속회에서 만나야 하고 선교회에서 만나야합니다. 만나야지 교제가 긴밀해집니다. 만나지 않으면 아무래도 틈이 생기기 쉽습니다. 여러분 자주 만나시기 바랍니다.

요즘 사이버 처치에 대해서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사이버 전문 교회가 생겼다고 합니다. 미국 텍사스 주에 펠로십 교회가 있는데 지난 2월에 이 교회가 교회 이름을 아예 펠로십쳐치 닷컴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 교회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테크놀로지 목사와 웹 사이트를 관리하는 디지털 선교국장이라는 직제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런 교회가 곧 탄생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이버 처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자들도 이 교회에 대해 조심스러운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만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제가 없습니다. 미국의 지금 그 교회 이름이 펠로십처치인데 펠로십(Fellowship)이라는 말은 교제란 뜻입니다. 이 교회가 사이버 처치 중심의 교회가 됨으로 가장 비교제적인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컴퓨터 선교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주보 4쪽에 목양 사이버 처치 란을 두고 있습니다.
올해 신천 권사님들이 권사 취임 기념으로 무엇을 봉헌했으면 좋겠느냐고, 교회에 무엇이 필요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차량 가운데 한 대가 30만 Km 가까이 운행했기에 바꿔야하겠고 그 다음에 컴퓨터 선교 용 새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천 권사님들이 기쁘게 동참해서 차량과 컴퓨터가 들어와서 잘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지난주간에도 컴퓨터를 통한 접속이 516번 있었습니다. 요즘 심방 때문에 관리를 좀 소홀하게 했더니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컴퓨터로 저희 교회를 찾는 분들도 소중한데 직접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에 허전합니다. 아마 사이버 성도 열 명이 예배에서 만나는 성도 한 명과 비중이 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누어야합니다. 신앙의 체험을 나누어야하고 격려를 나누어야합니다. 물질적인 도움도 나눌 수 있어야합니다. 초대교회의 교제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는 교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아나바다 장터는 좋은 교제의 장소도 될 수 있습니다. 아나바다의 '나'는 '나눠 쓰고' 아닙니까?

바울과 빌레몬의 교제는 나누는 교제였습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많은 손해를 입히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손해 본 것을 바울이 대신 갚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눈이 나빠서 편지를 쓸 때 대부분 다른 사람이 대필했습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서신인 로마서도 더디오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로마서 16장 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편지를 대필하는 사람이 살짝 자기 이름을 집어넣는 애교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는 친필로 썼습니다. "내가 확실히 갚아주겠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화 가운데 바울이 한 손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 호롱불 밑에서 무엇인가 쓰는 것을 그린 것이 있는데 아마도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레몬, 당신이 나에게 빚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하지 않겠다", 바울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줄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습니다. 줄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받을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려야합니다.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누려야 하고 복을 누려야하고 유익을 누려야합니다. 바울은 빌레몬과의 교제를 통해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누렸다고 7절에서 적고 있습니다. 천국의 즐거움을 미리 누려야합니다.

저희 교회는 교제가 잘 되는 교회이기도 하고 교제에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끼리끼리의 교제, 이것은 그 어느 경우보다도 두텁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끼리의 교제에는 그리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발전에 대해 의논할 때 이것이 시정되어야겠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목양교회의 교제가 진정한 믿음의 교제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이런 교제가 있을 때 찾아오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교제가 없으면, 나가서 불화가 있으면 성도들이 떠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 가운데 성도의 교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교제와는 다른 교제가 있어야겠습니다.
만남과 나눔과 누림이 풍성한 믿음의 교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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