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2001-12-15 21:05:14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창12:1∼4>

창세기 12장 1절에서 4절을 말씀을 본문으로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천백년전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스 강 주변에 메소보다미아라고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갈대아 우르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데라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란과 아브람과 그리고 나홀입니다. 데라는 그 갈대아 우르에서 첫번째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그 하란이란 아들이 롯이라고 하는 손자를 낳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란이라는 장남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브람과 하란, 나홀, 그리고 손자 롯을 데리고 하란이라고 하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다가 데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칠십오세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를 부르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민족의 조상이 될 뿐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게되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죄로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너는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아니고 뭔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주고 평화의 도구로, 복의 근원으로 살도록 내가 택했다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좇아가는 아브라함을 약속대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희랍사람들은 인간을 가리켜 안드로포스라고 했고, 그 의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현재 나의 상황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동트는 새아침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꿈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는 말씀이 히브리서 11장 1절인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실상이란 말을 희랍말로 말하면 키토시사시스라고 말하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초, 근거, 아래로부터 받쳐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소망의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사람은 소망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또 믿음을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이 증거라는 말을 엘람코스라는 말로 표현했고, 우리말로 번역하면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지만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적으로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머지 않아 그대로 될 것을 의심 없이 믿는 것, 그래서 미래에 되어질 일을 미리 내가 앞당겨서 그와 같이 된 것으로 입으로 시인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꿈의 존재입니다. 지금부터 한 600년전에 프랑스의 한 만화가가 사람이 기구를 타고 우주를 비행하다가 낙하산을 타고 바다에 내리는 것을 상상해서 만화를 그렸는데 그 꿈이 6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시를 쓸 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그랬는데 요즘은 바뀌어져야 되겠지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암스트롱 놀던 달아. 인간은 꿈의 존재입니다. 어떤 꿈을 가지고 꿈에 도전하게 되면 실현되는 일이 많습니다.

미국의 연합형제교회라고 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윌턴 라이트라는 목사님이 계셨고 그는 늘 설교의 주제가 위를 바라봅시다, 하늘을 바라보고 삽시다 하고 외쳤는데 그 외침에 맨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늘 아버지의 설교를 귀담아듣고 늘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하늘에 새가 나는데 우리 사람도 새처럼 날 수가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들은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어내게 되었으니 그들이 바로 라이트형제입니다. 그는 그의 부친 여든한살때에 아버지를 자기들이 만든 기구에 태워 비행하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늘 위를 바라보고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꿈을 심어준 이야기입니다. 너는 장차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구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었으니 믿음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복의 근원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만물을 그분이 지으셨고,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기온을 적당하게 하고. 지금 바깥에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기후조정, 습도,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고 명하신 것은 복의 근원인 내가 너와 함께 할 때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을 때 너희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살인강도, 절도범, 가정파괴범,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베이커라는 철학자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거미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척하고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 역시 베이커라는 철학자는 그들을 개미 같은 인생으로 비유했습니다. 지혜가 넘쳐서 여름에 먹을 것을 구하고, 자기들끼리는 단합하고 연합하고 뭉치지만 겨울에 베짱이가 와서 먹을 것을 구하면 주지 않는 개미, 물론 사회학자의 얘기입니다. 이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해 주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 베이커는 역시 그런 사람을 가리켜 꿀벌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도와주고, 나의 필요한 것을 도움 받는 소위 give and take, 주고받는 사회성을 회복한 사람을 바람직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 간 사람들의 이야기로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열일곱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은 이십 냥에 팔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고 남의 집에 머슴으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니 때가 되니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그가 그 자리에 있을 때 가나안에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을 다 애굽으로 오게 해서 위기를 모면케 하고 또 애굽의 수백만의 인구를 풍년들었을 때에 양식을 적치해 놓았다가 흉년들었을 때에 풀어 먹여서 살리는 소위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사도 바울같은 사람, 예수 믿기 전에는 교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만나고 난 이후에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변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그가 가는 곳에 교회당이 세워집니다. 그래서 그가 순교의 피를 흘렸던 로마는 A. D. 313년 콘스탄틴대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되고 전세계는 로마를 향해서 길이 바꿔지고 열리는, 그래서 기독교화된 나라와 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게 ?
颯윱求?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만 하나님께 은혜 받고 복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을 할 때, 그들을 가리켜 우리는 복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여 보이고 무능해 보이고 죄인 중의 괴수라도 예수 안에서 회개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사상을 닮고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이 밝아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위로와 소망을 얻는다면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복받은 아브라함을 향해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했으니 이 창대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너를 존경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명예를 얻게 한다는 말입니다.
잠언서 21장 1절 말씀에 보면,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소위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부정적인 면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복의 근원은 긍정적인 면에서의 유명한 사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사람이 이곳에 오면 그 문제가 해결될 때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소위 능력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선하고 착한 사람, 피스메이커, 그런 사람, 우리 조상으로부터 어떤 좋지 못한 것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그 당대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아브라함이 창대케 된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에 어떻게 했기에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한대로 복의 근원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어떤 새 일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불응한다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이루려고 하셨으나 그가 변질되자 그를 폐해버리시고 당신의 마음에 든 다윗을 들어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에게 합당하게 믿음을 보여드리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주님에게 보인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전한 믿음을 가졌으니 그의 온전한 믿음이란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그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4:17절 이하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 바랄 수 없었다는 것은 자기 나이가 백세가 되었고 자기 아내 나이가 구십세가 되었으며,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으므로 생리적방법, 과학적 방법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의미 중의 하나는 기능상실입니다. 계속 재깍재깍 가던 시계가 갑자가 멈춰 섰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계가 죽었네 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시계의 기능이 상실되었네 하는 것이고, 어떤 일을 하다가 할 수 없으면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남자가 남자 구실 할 수 없고, 여자가 여자 구실 할 수 없는 상태를 바울은 죽은 자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
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영적인 세계는 과학을 초월하며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에 맞는 만큼만 믿는 소위 지적인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4차원적인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즉 경수가 끊어진 여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그 믿음이 결국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진 그의 부활적 신앙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이삭이라는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이삭이 나이 열일곱살쯤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시험합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네 외아들 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려다가 내게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번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을 때 양이나 소를 잡아 내장을 끌어내고, 사각을 뜨고, 장작더미 위에 그 짐승을 올려놓고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나에게 최낙중 목사여, 너의 막내아들 진수를 칼로 찔러 각을 떠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서 나에게 바쳐라 그러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두 가지 반응으로 난 보였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하나님 정신 나가지 않았습니까? 하고 따졌을 것입니다. 아니, 달라고 하시려면 처음부터 주지 마시지 언제는 줘놓고 뺏어 가시려합니까? 장난치시는 것입니까? 하고 항의를 할 것입니다. 두번째는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야, 마귀 소리일거야. 아니 세상에 하나님이 무슨 사람 고기를 좋아하시나? 사람을 잡아 바치다니 말도 안돼. 사탄의 음성이야. 물러가라. 그리고 일부러 물리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준 이삭은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다. 나는 소유주가 아니고 관리자일 뿐이다. 나는 스튜어드, 청지기일뿐이지 나는 소유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준 아들이다 나와 내 아내가 남자구실, 여자구실 할 수 없는 죽은 자와 같은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주신 아들인데 주님이 달라하면 드려야지요.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그 다!
음날 아침 일찍이 잠자는 아들을 깨워 모리아산으로 떠납니다. 두 종을 데리고. 그리고 삼일 길을 가서 산아래에 두 종을 남게 합니다. 그리고 아들만 데리고 올라갑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만일 현장에 데려갔다가는 칼로 아들을 죽이려하는 찰나에 종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이 노인네가 노망을 했나? 하고 붙잡으면 못잡을까봐, 죽일 수가 없을까봐, 그러니 아브라함은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정을 하고 데려간 것입니다.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이 묻습니다. 아빠, 번제에 필요한 나무도 있고, 불도 여기 있고, 칼도 있는데 번제에 쓸 양은 어디 있어요? 그때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았을거야 하며 갔습니다. 그래서 지정된 장소에 딱 가자, 아브라함이 갑자기 이삭을 붙잡더니 칼을 허리채에서 꺼내 찌르려고 합니다. 그 순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멈추어라. 그 아들에게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것은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이삭보다 더 사랑하는지 그것을 테스트 해보기 위해서 ?
쳬完?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기를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이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니 네 씨가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네 아들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고 크게 은혜를 입고 큰 일꾼이 되려면 아끼지 않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결정하기 전까지는 갈등이 있습니다. 양자택일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것이냐?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욕할 것같고, 사람의 비위를 맞출 것이냐,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할 것같아서 중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때가 혹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이 강하고 깨어있을 때에는 언제나 주의 음성이 들리면 곧바로 순종할 수 있지만, 영성이 약해지고 믿음이 희미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비유를 맞추는 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허드슨 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의 하류에 가면 쏠트라인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선을 쏠트라인이라고 하는데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 가지고 계속 허드슨 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에 위협을 받게 되지요. 그러나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물이 계속 흐르게 되면 결국 민물이 바닷물의 세력을 계속 밀어부쳐가지고 안전대를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 이 허드슨강의 쏠트라인은 끊임없이 당기고 미는 그런 어떤 선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생살이,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영력이 강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만, 영권이 약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밀려가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것?그 독자 이삭, 외아들을 낳을 때의 그 부활의 신앙이 십칠년의 세월이 흘러간 이후에 하나님이 번제로 요구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면 드려야지요 하는 단순함이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했고, 그런 시험에 합격한 그를 향해서 네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며,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큰 믿음이 큰 복을 약속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제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처럼 그의 믿음을 본받고 그처럼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살려면 아브라함처럼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은 이번 명령이 처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지금 부름을 받았는데 그가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이 한번 불렀습니다. 이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는 말씀이 사도행전 7장2절이하에 나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내 본토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12장의 부름은 하란에서의 부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과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이사오기전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이 한번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당신의 선한 의지를 세우면 변함이 없습니다. 창세기 15장7절 말씀에 보면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 우리 생각에는 지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사를 하고 하란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가나안에 온 것처럼 되어 있지만은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보니까 아예 하란에서 주의 음성을 듣기전에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 한번 들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음성이 같은 내용입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그 땅에 그냥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복주시지 않고 떠나라고 했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은 어떤 지역입니까? 그곳은 시날 평지가 있었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르라고 하는 곳은 스메루 문화의 중심지로서 나나라고 하는 달신을 많이 섬겼던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죄악을 떠나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곤고하게 된 근본원인은 죄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9장 1절,2절에 여호와의 귀가 어두워 너희의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너희를 거기서 건져내지 못하심이 아니라 너희가 지은 죄가 하나님과 너희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흑암에 싸이고 곤고한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은 지존자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시편 107편10절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떠나게 한 것은 인간의 정을 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죄악의 도성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본토가 어떤 곳입니까? 말과 외모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아닙니까? 씨족사회에서 이 본토를 떠난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그러나 ?
?본토는 우상숭배의 도시였고, 불경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음란한 죄악이 만연한 곳이고 불의와 불법이 성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붙잡혀 있습니다. 쾌락주의, 탐욕으로 나갔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그 죄악세상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리라. 고린도후서 6:17절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요합니다. 또 본토를 떠날 뿐아니라 친척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친척은 피로 연결된 사람들이지요. 떠나라고 하는 것은 우상문화에 빠져 사는 데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척을 떠나라는 말씀보다 더 힘든 것은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비집, 그곳이 어떤 곳입니까? 직계입니다.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은 모든 소유와 재산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삼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세상을 떠났고, 동생과 자기 둘만 있습니다. 그러면 ?
틜痴?데라가 물려준 유산이 많습니다.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절반정도는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나 지위나 재물이나 그런 것에 매여있게 되면 주님을 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최고의 명령인데, 그렇게 살아야 너희가 이 땅에서도 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보다 아내나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장 28절 이하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다 버렸는데요 그랬더니 주님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무릇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 어미 자식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이 세상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얻고 핍박을 겸하여 얻으며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역리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버린 만큼 얻게 하신 하나님, 포기한 만큼 주님 앞에 !
순복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가 되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그동안에 정들어있던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와 함께 하겠고, 너를 새로운 민족의 조상으로 세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 것은 과거에 알지 못했을 때 세상 것을 좇았던 그 가치관에서 예수님을 얻고 난 이후에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라 생각해서 버렸기 때문에 주님이 온전히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8절 말씀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버린 만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수십 년동안 같이 살아온 본토, 수십 년동안 함께 어울렸던 일가친척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자라온 부친의 집도 버리고 하나님이 가라하는 곳으로 갈 때 아브라함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그랬을 때 동네사람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어디로 가십니까? 하나님이 나더러 본토를 떠나고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
다. 아비집을 떠나라고 해서 나는 하나님이 가라는 곳막?갑니다. 그랬을 때 미쳤구만. 그런 비방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하게 믿었던 것은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이 본토에 있지 않으며 친척에 있지 않으며, 아비집에 있지 않고 나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만이 만복의 근원임을 믿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죄악에서 돌아설 때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말세에는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이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와 같은 자리에서 돌아서라고 말했습니다. 돌아서면 하나님이 그이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돌아서면 주님이 그와 동행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오늘도 불러 주심은 보다 더 온전한 믿음을 얻게 하려고 불러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나이가 칠십오세 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서 과거를 다 청산하고 떠나갑니다. 아브라함의 변화되는 모습은 조금 변화된 모습이 아니고 완전한 변화입니다. 세상 풍습을 다 내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신앙은 사람 편에서 보면 모험이고,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주님 품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하나님이 내미는 손, 그것은 주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그러면 주님도 여러분을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며 여러분이 복을 받고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될 때 이런 사람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올 한해도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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