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잔이 넘치나이다."
2001-12-13 16:36:28




(시 23:1∼6) 설교자 : 임영수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 역시 시편 23편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였습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두 가지입니다. 1-4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양떼의 결핍을 채워주시는 선한 목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5-6절에서는 하나님은 손님을 영접하고 원수로부터 보호하는 주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주인으로서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먼저 본문 5-6절과 관련된 배경을 상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낙타를 타고 사막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그네의 차림새나 소지품을 보아서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그네는 집을 떠난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나흘길을 혼자서 외롭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오전에 맞은 편에서 대여섯필의 낙타를 탄 사람들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나그네 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범위에 들어오게 되자 낙타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들은 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지난 날의 그의 경험으로 보아 그들이 이웃 원수의 나라 사람들 임을 알아차리고,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계속 그를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두려움, 공포에 사로잡힌 나그네는 내려쬐는 햇볕 아래서 있는 힘을 다해 낙타에 채찍을 가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를 달렸을 때 멀리 오아시스와 그 옆에 한떼의 양무리가 보입니다. 나그네는 있는 힘을 다해 그곳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곳에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의 목자들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그곳으로 가서 목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목자는 즉시 그를 안내하여 숨겨주었습니다. 쫓아오던 원수들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나그네는 목자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자세히 이야기 했습니다. 나그네의 이야기를 들은 목자는 그를 친절하게 맞이하여 발 씻을 물을 주고 얼마동안 편히 쉬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때 식탁에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다른 목자들과 함께 나그네를 정중하게 손님으로 모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목자는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다음날 나그네의 길을 전송해 주었습니다.

본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장막에서 따뜻한 보호와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환대해준 선한 목자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선한 목자의 환대와 보호는 일시적은 유예가 아니라 그의 실존을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의 끝없는 보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인의 장막은 다름 아닌 성전입니다. 본문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자기 앞에 상이 진설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대적자들의 바로 앞에서 가장 극진한 환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후로 그를 추적하는 것은 더 이상 대적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사는 날까지 그를 따라 다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이 시편에서 시인이 나타내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는 젊은이들이 어느 순간에 감성적으로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 경험이 아닙니다. 여기서 시인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오랜 기간 생의 순례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의 생의 현실에서 경험한 각종 삶의 비애와 역경, 고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쳐 오면서 경험한 하나님, 생의 노년기에 그 하나님과 교제에서 영혼의 만족과 안식 가운데서 나타내 보이는 성숙한 믿음의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은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만약 이 시편이 감상적인 어느 한 젊은 시인의 시상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면 이 시편은 두고 두고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해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잔을 넘치게 해주시는 경험을 해왔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자기 앞에 상이 진설되고, 대적자들의 바로 앞에서 가장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베푼 환대가 어떤 것이며,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환대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시인이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환대의 선물은 시인 자신이 고상하게 되어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시인은 원수들 앞에서 자신을 긍정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시인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고귀성과 참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상 앞에서 그가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시인은 그 자신이 강건케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환대에서 자기 시대에서 모든 가증스로운 세력들을 두려워하거나 그들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갖게되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보호는 온실 속에 있는 식물과 같은 보호가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현실에서 감당해야할 모든 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과 함께 대처해 나아가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는 언제나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대 가운데서 그는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환대 가운데서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보게되었습니다. 그러한 미래는 시인이 깊은 좌절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되었던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시인은 안정의 기반을 찾았습니다. 그의 안정의 기반은 평생토록 그와 함께하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시인은 그 안정에서 그의 생의 현실을 다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불안정한 가운데서 잡았던 것들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침착할 수 있었고, 불안정한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 아닌, 그의 평생에 하여야할 일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에게 더 이상 원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국적을 초월해서 세계 모든 문학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입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 장발쟝은 배가고파 우는 어린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중노동을 선고 받습니다. 장발쟝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 갑니다. 주먹 싸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의지를 꺽어 놓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출소의 날이 되어 출소를 했지만 어디를 가나 그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어느 여관 주인도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간 시골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풀어 그를 영접하여 상을 차려주고, 편안한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장발장은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신부와 그 누이가 잠자리에 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져 가족 은잔을 훔쳐서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 세명이 장발장을 끌고와 신부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훔친 은잔을 갖고 달아나던 범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그들은 장발장을 평생 사슬에 묵어놓을 태세였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걸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

장발장은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눈빛에 담아 노 신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신부는 경찰에게 장발장은 도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은잔은 그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이 떠나자 신부는 이제는 아예 할말을 잃은 채 떨고 있는 손님에게 촛대를 주며 말합니다. "그 돈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시기로 저와 약속하신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잊으시면 안됩니다." 신부의 환대는 장발장이 제 2의 새로운 생을 사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장발장에서 생의 궁지에 몰려 더 이상 오갈데 없는 인간이 자비심 많은 신부의 받아드림으로 새로운 생을 살아가는 새 인간을 보게 됩니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자존감도 없고, 체면도 없고,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러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 그가 평생 그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최상의 환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최상의 선물은 자신의 생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긍정적 생각은 인간이 입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갑옷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갑옷을 입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하셨고, "그는 양들이 드나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요10:7-12) 양의 문인 예수를 통해 들어오고 나오며 얻는 꼴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꼴입니다. 가증스러운 세상을 넉넉히 떳떳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신뢰할만한 대상이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삶은 안정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신뢰하고 투자를 할 것인가?라고 반문합니다. 근로자들은 우리가 누구를 신뢰하고 일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이 불안정한 가운데서 방황합니다.

우리의 신뢰의 대상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뿐만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갈 때에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가정해서 구십 평생을 올곧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장례식에서 이 시편을 낭송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살아온 생의 역사에서 이 시편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게됩니다.

인간은 모두 결핍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 결핍 때문에 인간을 서로 서로 헐뜯고, 서로 모함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핍 가운데서 인간은 자족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이 그의 장막에서 베푸시는 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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