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어린시절 2001-12-11 22:58:41 누가복음 2:41-52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오직 누가복음만이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간단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 예수님의 부모의 신앙(41-42)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41절) 유대인들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란 이 아이가 언약의 백성임을 인치는 그런 예식이지요. 오늘날 유아세례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난지 40일이 되면 이 아이를 성전에 데리고 나아가 제사를 드리며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칩니다'는 예식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례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12살이 지나고 13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며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루살렘근방 32Km이내에 사는 사람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만 14세가 되면 어릴 떄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던 아이들이 입교문답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41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다고 말합니다. 해마다 라는 표현을 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예수님을 데리고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의 신앙이 어떠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는 여자이기 때문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올라가 예배했습니다. 아들인 예수에게 예배의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춘기 자녀들의 신앙은 부모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된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신앙적인 모범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의 본을 보이십시오.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시오. 예배가 형식이나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예배를 통하여 잃어버린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음을 가르치십시오. 예배에 성공한 자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노라고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네가 바로 그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시오. 부모는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그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 예수를 잃어버린 부모 "그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떄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43-44절) 축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그만 소년 예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언제였습니까? 하룻 길을 간 후입니다. 세상에 하룻 길을 간 후에서야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사실을 가지고 예수의 부모는 예수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시간도 아니고 두 시간도 아니고 하루가 다 지나서야 찾을 수 있겠느냐? 맞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과 관습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44절을 보면 그렇게 오랜 시간 찾지 않았던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당시 유월절 절기의 축제는 보통 일주일 정도 진행됩니다. 유대교의 종교법은 최소한 이틀을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떄문에 각자 편리한 시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축제 기간 동안에는 예루살렘으로 오가는 길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운동회 한 번 하면 운동장은 물론이거니와 학교 주변의 모든 길들까지 사람들로 가득차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절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보통 여자들과 아이들은 행렬의 앞에서 가고 남자들과 좀 큰 아이들은 행렬의 뒤에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문화요 관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문화와 관습이 있었습니다. 저 어릴 때 목사님과 심방을 다니시는 분들을 보면 목사님과 장로님은 따로 그리고 권사님과 심방대원은 늘 따로 따로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만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2살이라는 나이가 얼마나 애매한 나이입니까? 엄마와 함께 갈 수도 있고 아빠와 함께 걸을 수도 있는 나이이다 보니까 어머니 마리아는 아버지 요셉과 함께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아버지 요셉은 어머니와 함께 내려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남자들은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식구들을 만나보니 소년 예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족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를 보았느냐고? 아는 사람들에게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본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놀랜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냥 올라 간 것이 아니라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 가면서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놀랜 가슴을 안고 올라갔습니다. 46절에 보면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3일 동안은 예수님을 잃어버리며 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주님이 없는 삶을 살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제부터인가? 주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인가 주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고 언제 부터인가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와 동행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 떄가 있습니다. 바쁘고 분주함 때문에 예수님을 잊고 사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 생활 때문에 예수님을 잊고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모처럼 예수를 잃어버리시지는 않으셨나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자녀의 뒷바라지 때문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으십니까? 힘들고 어렵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잊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을 다시 찾으십시오. 그러면 그 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서 찾을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어디에서 다시 찾았습니까? 잃어버렸던 장소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성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찾을려면 예수를 잃어버린 그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잃으면 어디로 갑니까? 잃어버린 장소로 갑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왔던 길을 돌이켜 되돌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그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5에 보면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돌아가라, 발걸음을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었음을 인정하고 되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잊어버린 그 시간이 언제입니까? 당신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집 문제가 해결되면서부터입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입니까? 당신이 열심히 교회를 섬기다가 누군가로부터 핀잔을 받고 상처를 받은 때부터입니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나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나의 축복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떄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그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양입니다. 양은 선한 목자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의 신앙고백 사흘 후에 예수의 부모는 잃어버린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가서 보니 소년 예수는 쟁쟁한 이스라엘의 석한인 선생들 중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많은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2살 소년이 그 자리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때로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듣고 묻고 답하는 상황이 얼마나 진지하던지 끼어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47절을 보면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것을 보면 12살 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 예수님의 성경실력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이제 진지한 토론이 끝났습니다. 48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꾸중이 나옵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49절) '죄송합니다. 그만 토론에 빠져 있다 보니까 집에 내려가는 것도 잊어버렸네요.' 아니면 '잊어버린지가 언젠데 이제야 날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나에게 무관심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왜 저를 찾느라 고생하셨어요 제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예수님은 이 대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라면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기에 분명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이 당여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분명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나요? 의무감 때문에 형식적으로 외워서 암송하는 사도신경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의 아버지며 나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 있느냐? 그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접어 들기 전에 자녀들로 하여금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십시오. "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신앙 고백 속에는 우리 주님의 관심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늘 성전에 있었습니다. 12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관심은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제사와 가르침과 교제 때문에 그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늘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성전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시84:1-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악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였으면 쇠악해졌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전에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성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고 싶어야 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건물의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제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전을 헐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서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 세계에 흩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오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로 본다면 구약의 성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이 피 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해야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최근들어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와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글들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없다」,「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는 전통적인 교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지금 포스트모던이즘 시대를 살고 있는 이런 시대에 그런 배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두가지 신앙의 고백이 무너지면 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이 두가지를 제거하면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무서운 사단의 궤궤가 숨어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를 보십시오. 왜 저렇게 되었습니까? 이런 성겨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을 버리고 합리주의를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또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런 사람들의 주된 사상은 하나님의 교회를 약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말로는 교회의 기복주주의,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분들의 책을 읽다 보면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이런 사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무교회 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보십시오. 계시록에 보면 칭찬받는 교회보다 책망받는 교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교회를 정죄하고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조용히 기도하며 교회가 말씀의 진리에 굳게 서며 끊임없이 개혁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집에는 자비가 있습니다. 임재가 있습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오가는 길에 교회를 들러 기도하고 가도록 가르치십시오. □ 예수님의 순종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51절) 이제 예수님은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려오자마자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라 찾으셨나이까? 어떻게 보면 조금 무례한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나사렛에 내려와서도 거드름을 피울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거하면서 살아야지 왜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묻혀 살아야 하느냐?" 며 거드름을 피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자기를 잉태하고 낳기라도 했지만 요셉은 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순종하여 받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반드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남편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순종합니다. 경배와 찬양 84장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길로 행하리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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