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품 2001-12-11 21:02:09 베드로후서 1:3-11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비로운 모든 일들과 사건들과 또 생물들, 삼라만상의 피조 세계들을 경험하고 삽니다. 지난 겨울에 텅 비었던 들판이 지금은 황금 물결치는 것을 볼 때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태양은 저렇게 이글이글 타면서 빛을 주고 열을 주어 이 산천초목을, 사람을, 식물을, 동물을 다 살게 하는지, 참 신비롭습니다. 어떻게 밤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달이 저렇게 은은한 빛을 뿌립니까?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것, 바람 소리, 천둥소리, 번개, 이 모든 것 중에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흉내를 내기는 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보리를, 벼를, 밀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화학 성분을 통해 만들 수는 있는데, 과학자들이 만든 보리나 밀은 아무리 심어도 싹이 트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씨앗만이 땅에 심어질 때 움이 트고,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의 피 1g을 만들 수 없고, 바닷물 1g을 만들 수 없습니다. 흉내는 내는데, 사람이 만든 물에서는 고기들이 죽고, 사람이 만든 피를 수혈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흉내를 잘 내어도 도저히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 신기한 능력을 우리는 아는데, 세상 사람은 모릅니다. 태양과 별이 왜 저렇게 하늘에 있고, 삼라만상이 왜 이렇게 되어지는지를 모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모릅니다. 그냥 영원한 수수께끼로 알다가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앎으로, 창조주로 앎으로 시원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신비로운 능력이 자연 세계에 흐릅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보면, 신기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몸 하나 하나에도 신비로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어떻게 태에서 그 조그마한 것이 점점 자라 사람이 되어 가지고 열 달이 되면 나와서는 젖을 빨아먹고 자라 사람 노릇을 합니까? 참 신비롭습니다. 오늘 아침에, 결혼한 지 7년 만에 잉태한 하나님의 따님이 남편과 함께 저를 찾아왔습니다.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를 요청해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잉태를 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태어나서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아기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 그 세 아기를 안고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하기 전에 그 아기의 부모를 보면서 꼭 한 가지를 확인합니다. '얘가 누구를 닮았나?' 참 신비로운 것은 대개 국화빵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어머니를 꼭 닮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창조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신기한 능력, 신비로운 능력은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신비로운 것입니다. 신기한 능력은 바로 생명과 경건에 대한 모든 것인데,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보배 피의 신비로운 능력! 세상 사람들은 죄 사함의 비밀을 모릅니다. 목욕탕에서 때를 씻는 것은 알아도 마음의 때, 영혼의 때를 씻는 비결은 몰라 죄 속에서 살다가 죄로 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로운 보배 피의 능력을 알아서 어떠한 두꺼운 죄도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우리는 모두 부활해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모든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능력입니다. 신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신의 능력, 즉 신의 능력을 행하시는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성령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기한 능력과 함께 엄청나고 큰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약속이 가득한데, 이 모든 약속은 성령을 받은 사람의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하고는 무관합니다. 이 만 가지 축복의 약속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약속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약속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령을 주시고, 신기한 능력을 주시고, 큰 약속을 주신 것은 정욕을 따라 썩어질 세상의 것은 이제 그만두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신비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은 받았지만, 우리의 성화는 전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을 모셨으면 자녀는 아버지를 닮듯이,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정욕,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다 끝내고, 이제는 신의 성품에, 감히 신의 성품에 참예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정신 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희망이 없는 사람은 눈이 흐릿하고, 피부 색깔이 죽고, 어깨가 축 처져 있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눈이 또렷하며 빛이 나고, 얼굴에 화색이 돌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답니다. 여러분, 희망을 지니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면 길도 열립니다. 어느 시골에 시설도 좋지 않고 선생님도 부족한 작은 보육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육원의 세 아이가 훌륭한 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 보육원에 가보고 놀랐습니다. 모든 시설이 취약하고 환경이 열악한 보육원에서 어떻게 세 아이가 명문 대학에 진학을 했는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원장님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오래 전에 뜻이 있는 한 분이 돈을 많이 보내 주어서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 주었답니다. 63빌딩도 돌아보게 하고, 좋은 대학도 구경시켜 주었답니다. 그때 세 아이가 희망을 가졌답니다. '내가 보육원에 있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리라.' 그 세 아이가 희망을 갖고 다른 아이들이 놀 때도 공부하고, 추운 겨울에는 담요를 덮어쓰고 밤 새워 공부하더니, 좋은 대학에 들어갔답니다. 모든 면에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신의 성품에 참예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뜻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삽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영원한 바보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늘 조롱거리, 놀림거리가 되는 바보 소년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바보인지, 동네 아이들이 백 원짜리와 오십 원짜리를 갖고 와서 "이 바보야, 좋은 것을 택해라. 좋은 것을 가져라."고 하면 오십 원짜리를 가져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바보입니까? "하하하하. 저 바보! 하하하하. 저 바보!" 동네 아이들은 돈만 생기면 바보에게 가지고 가서 놀렸습니다 "자, 이 바보야. 백 원, 오십 원, 어느 것이 더 크냐? 가져가라." 그러면 언제나 오십 원짜리를 가져갔습니다. "하하하하. 바보!" 하루는 그 바보 소년을 딱하게 생각한 아주머니가 바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 바보야, 백 원보다 오십 원이 적고, 오십 원보다 백 원이 큰 것을 모르느냐? 왜 오십 원짜리만 집느냐? 백 원짜리를 집어." 바보가 말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내가 백 원이 큰 것을 모르는 줄 아세요? 나도 알지만 내가 백 원짜리를 가지면 재미가 없어서 다시는 내게 돈을 안 줄 것 아니에요. 내가 오십 원짜리를 집어야 아이들이 나를 놀리려고 계속 돈을 가져올 것 아니에요." 얼마나 똑똑한 아이입니까? 누가 바보입니까? 돈을 갖고 와서 "바보야, 가져라."하는 동네 아이들이 바보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매일 오십 원씩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보도 정말 바보입니다. 하루에 오십 원씩 번들 얼마나 벌겠습니까? 노리갯감이 되지 말고 공부해서 똑똑하게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죄짓고 세상을 즐기면서 바보처럼 오십 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생이 바보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신의 성품을 닮으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막대기 끝에 쇠고랑을 달아놓고 거기에 메추라기 여러 마리를 실로 묶어서 팔려고 시장에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인자한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값을 치른 후에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메추라기들은 실이 끊어졌는데도 막대기를 빙빙 돌기만 하고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창공을 날아가야 합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죄악을 맴돌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죄가 벌써 끊어졌는데, 죄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아직도 죄를 맴돌면 얼마나 딱합니까? 그런 사람은 바로 실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막대기를 맴도는 딱한 메추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구체적인 성품의 그 열매를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그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더욱 힘써." 그러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 부부가 더욱 힘을 쓰면 부부 생활에 행복이 증진됩니다. 학생이 더욱 힘써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갑니다. 사업가가 더욱 힘써 사업하면 사업이 더 잘 됩니다. 직장 생활에 더욱 힘쓰면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장개석 총통은 어렸을 때 평범했습니다. 군에도 평범한 군인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한 후에 아침 식사를 할 때까지 공부했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놀면서 그냥 시간을 보낼 때 그는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총통이 된 것입니다. 힘을 쓰면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하게 됩니다.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늘 우리에게 힘을 써서 신의 성품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입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믿음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합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키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지만, 더 큰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같이 예수님을 믿지만 믿음이 작은 사람, 큰 사람, 다 다릅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은 믿음이 크니까 기도하기 전에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주실 것이다.'라고 믿고 빗소리를 먼저 들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계속 되었는데도, 엘리야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주실 줄 알고 빗소리를 먼저 듣고 "왕이여, 피하소서. 빗소리가 들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작은 믿음이 아닌 큰 믿음이니 하늘 문을 열고 닫은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도 '될까?'한단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의심하고 구하는 자는 받을 줄을 생각하지 말라고 야고보서 1장 6절, 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한 후에 '기도한다고 되겠나?'라고 하면 응답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If you believe, you will recei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믿음이 큰 사람, 믿음의 용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믿음이 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적어도 구원은 받지만, 믿음이 클 때 하나님께 응답 받고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을 키우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은 로마서 10장 17절 말씀대로 들음에서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을 때 우리의 믿음이 크는 것입니다. 지금도 말씀을 듣는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믿음에 덕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막 살지라도 나는 도덕적으로 의롭게 잘 사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들이야 막 살아도 나는 도덕적으로 아주 선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능력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이런 덕이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 살든 덕되게 살았습니다. 선하게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덕에 지식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식은 신지식, 세상의 어떤 공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슬기, 분별력, 이해력, 판단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합시다. "뱀같이 지혜로우라." 지혜로우면, 모든 생활에 슬기를 발하면, 덕이 많습니다. 한 사람이 롤스로이스라는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서울 중심부에 있는 은행으로 들어갔습니다. 은행의 주차장에 주차한 후에 은행에 들어가서 대출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오백만 원만 대출해 주세요." "담보가 필요한대요." "담보요? 제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담보하세요. 키는 여기에 있습니다." 은행 직원이 나가서 보니, 엄청나게 좋은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담보로 해서 오백만 원을 빌려 주었습니다. 두 주 후에, 유럽 여행을 마치고 온 자동차 주인이 오백만 원을 갚으러 은행에 갔습니다. 15,400원의 이자가 붙어 있습니다. 은행 직원이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알아보니 당신은 재벌이시던데 무엇 때문에 오백만 원을 빌리셨습니까?" "허허. 서울 중심부에서 15,400원으로 두 주 동안 주차할 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서울 중심부는 주차비가 한 시간에 3천 원, 4천 원, 5천 원, 때로는 만 원도 합니다. 그러니 두 주 동안 주차해 놓으면 주차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오백만 원을 빌리니 15,400원에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말하는 지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덕만 있으면 바보가 됩니다. 덕도 있어야 하지만, 반짝반짝 하는 판단력, 슬기,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어제 한 여 집사님에게 TV만 보지 말고 신문 사설도 좀 읽고, 좋은 책도 읽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살아가는 슬기,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정보를 알아야 됩니다. 컴퓨터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지 않아야 합니다. 선한 일은 하되 속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제해도 정말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야지, 멀쩡한 사람, 건강한 사람을 구제하면 그 사람은 망합니다. 멀쩡한 사람, 건강한 사람은 구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의 교회에 주기적으로 거지 두 명이 와서는 돈을 받아갔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거지가 고정적으로 와서 3년인가 4년 동안 5000원씩 주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모님이 아파트의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있더랍니다. 좋은 차 한 대가 와서 딱 서더니 사람들이 그 안에서 신사복을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이더랍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3∼4년 동안 자기 교회에 와서 거지 노릇하던 사람들이더랍니다. 목사님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와서 출근복으로 갈아입었던 것입니다. 사모님이 그 사람들에게 말했답니다. "아이고, 이제 보니 좋은 차를 타고 출근하시네요." "보셨습니까?" "봤지요." 그 후로 다시는 교회에 오지 않더랍니다. 3∼4년 동안 그 사람들에게 속았습니다. 지식이 부족해서, 그 사람들이 거지가 아닌 것을 몰라서 속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속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지식에 절제를'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제란 self-control, 자기 절제력을 말합니다. 우리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하고 싶은 것도 억제하고, 막 나오는 것이 있어도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브레이크, 제동 장치가 없으면 차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가 온전히 가는 것은 제동 장치가 있어서입니다. 절제는 바로 우리 인생의 브레이크입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은 화나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길을 가다가 예쁜 여자를 보면 강간을 합니다. 그래서 30년 징역을 삽니다. 절제력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절제력, self-control, 자제력이 있어야 합니다. 절제, 그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절제에 인내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는 버티는 힘입니다. 따라합시다. "버티는 힘. 버티는 용기."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구 크리소스톰이 "인내는 미덕의 여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내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매사에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시는 너무 가난한 한 목사님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목사님을 불러서 "당신, 우리 집의 나무를 좀 베어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나무 몇 그루를 땀을 흘리며 어렵게 어렵게 베어 주었는데, 그 할아버지가 1불, 천 원을 주었습니다. 오래 전의 1불은 지금보다는 가치가 있었지만, 그래도 1불은 1불이지 않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지만,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할아버지가 목사님을 또 불렀습니다. 너무 가난하니 1불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또 갔더니, 잔디를 깎으라고 했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정성을 다해 구석구석까지 잘 깎았습니다. 또 1불을 주었습니다. 또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에 그 할아버지가 목사님을 또 불러서 가니, 꽃나무를 심으라고 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심었더니, 그날도 할아버지가 1불을 주었습니다. 정말 화가 났지만, 그래도 참고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할아버지에게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으니 그 진실한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나무를 벨 때나 잔디를 깎을 때나 꽃나무를 심을 때나 얼마나 진실하고 성실한지, 그렇게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람이 목사님이라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내가 병원에 있으니 병원에 와서 기도 좀 해 주시오. 당신의 기도를 받고 싶소." 저 같으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목사님은 가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기도를 받고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우리 교회에 좀 와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그 교회 목사님에게 소개를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분이 없어요. 이렇게 진실한 분이 없어요. 그런데 형편이 어려운 것 같으니, 우리 헌금을 해서 한번 도와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헌금을 하니, 6500불이나 되더랍니다. 세상에! 1불도 귀한데 6500불이나 되었습니다. 6500불은 1불의 6500배입니다. 3불이 6500불이 된 것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병사여, 인내하라. 곧 장군이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하면 길이 열립니다. 성도인 우리는 밖에서 박해가 와도 인내하고, 내부적인 시련이 있어도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가 바로 우리 성도의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내에 경건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은 한 마디로 worship, 예배입니다.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열매가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낮 예배, 주일 밤 예배, 삼일 예배, 가정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이 경건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또 경건은 모든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벽에 교회에 오면 밤까지 제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도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저녁 식사도 제 방에서 간단히 했는데,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오늘은 제게 중요한 날인데 점심 때 먹었던 찬밥과 반찬을 놓고 혼자 먹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먹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먹으니 중요한 날에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예배가 되고, 참 기뻤습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 같으면 기쁘기는커녕 화가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예배를 드리고, 옷을 입으면서도 예배를 드리고, 머리를 빗으면서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이 경건에 힘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에 형제 우애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우애는 필라델피아인데, 필라델피아는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라면 형제 우애는 인간적인 사랑, 필라델피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만 섬긴다고 자기 형제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 아들딸을 사랑하고, 형제, 시누이, 시동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끈끈한 인정을 갖고 내 형제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바로 아가페,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결국 이 아가페가 있어야 다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를 아름답게 맺으면 열매가 풍성한 나무가 되어서 실족하지 않는다고, 주 안에서 굳건히 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는 사람을 이 땅에서 낭패를 당하지 않고 잘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열매를 작게 맺으면 천당에 가지 못하고, 많이 맺으면 넉넉히 들어가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어를 보면, '크게 환영 받으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천당은 믿음이 있으면 누구나 다 갑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열매, 신의 성품에 참예한 열매가 많으면 천국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세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 혹은 많은 천사들에게, 혹은 먼저 간 성도들에게 큰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열매가 적은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말했습니다. "피아노 연주가 끝난 다음에 조율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한다." 우리는 산 다음에 회개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생활한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지 말고, 생활하기 전에 우리를 조율해야 합니다. 피아노 연주를 하기 전에 조율하듯이 우리는 생활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주님의 뜻, 성령님의 뜻에 맞는지 조율해서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살아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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