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자기 고백 2월 25일 2001-12-10 18:31:40 동영상 □ 진솔한 자기고백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7장 18절-8장 2절> 1. 사람이 사람<됨>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의 성찰(省察)에 있습니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쓴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승리로 이끄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오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든 현실의 삶의 문제는 싸우는 문제란말입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얼마나 처절합니까? 매일 매일 출근하여 샐러리맨들은 직장에서 서류뭉치와 싸우고, 공부하는 학생은 책과 싸우고, 장사하는 사람은 돈과의 싸움입니다. 가정의 주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 정해진 생활비와 싸우고, 아이들과 싸우고, 빨래와 싸우고, 어지러 놓은 방을 청소하느라 힘들게 싸웁니다. 이렇게 현재는 싸움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양심적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을 도덕적 존재라고 합니다. 또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들이 내포하고 있는 말은 모두 싸움과 연계된 말입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와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도덕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합니다. 더욱이 영적 성장을 위해서 자기와의 싸움을 부단히 해야합니다. 동물은 자기성찰이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저들은 본능욕에 끌려 사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리 패륜적 행동을 해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의미는 싸움의 연속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는 몇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① 그 첫째가 자연과의 싸움이요, ② 다음이 사람과의 싸움이요, ③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연과의 싸움에서 과학적(科學的) 산물(産物)을 얻었고, 사람과의 싸움에서 지식(知識)과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이 생겼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종교(宗敎)와 영혼(靈魂)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싸움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언젠가 인간은 죽음 앞에 서게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피할 수 없이 내 죽음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최후의 궁극적인 싸움은 자연과의 싸움도 아니요, 사람과 사람과의 싸움도 아니라 자신과의 영적 싸움이란 것입니다. 2 자기와의 싸움에는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경우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젊은 나이에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날마다 유혹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39:10) 높은 신분과 경제력, 그리고 여성의 미모를 무기로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늘도 <요셉>이 받았던 유혹은 그대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도전해 옵니다. {신분의 상승}, {경제적 풍요} 그리고 {육체적 욕망의} 도전 앞에 우리는 항상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 외부적 도전 앞에 우리 모두는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고, 들려지고, 감각되는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의 유혹들입니다. 이런 도전 앞에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깊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도전에 앞에서는 세상 지식 가지고도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런 도전 앞에서는 아무리 고관들이라도 그 지위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런 도전 앞에서는 세상의 윤리적 규범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셉>은 세상 지식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도덕이나 윤리적 규범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겠는가"(창39:9)라고 하는 신앙(信仰)으로 이겼습니다. 하나님께 어찌 범죄 하겠는가 이었습니다. 자기의 상전인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어찌 내가 죄를 범하겠는가? 이 신앙의 힘이 이기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외부로부터의 오는 온갖 유혹에서, <뇌물의 유혹>, <명예의 유혹>, 그리고 <재물의 유혹>, 또는 <이성의 유혹>에서 자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이 다 같은 믿음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믿음이 이 요셉의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범죄하리요' 라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믿음이 있으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의식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미래적인 하나님을 믿을 경우가 많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란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런 신앙이 있어야, 현실의 모든 난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울 때도 하나님은 지금 나의 사정을 살피고 계신다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회의적인 질문을 하나님께 드렸던 선지자였습니다. '어찌하여...'라는 질문으로 하나님께 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의인이 도리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어찌하여 불의한 자들이 득세합니까?'라고 의문을 제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악을 보시지 않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는 것과, 그러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후에 그는 고백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외부로부터의 오는 도전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환경에서 오는 도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3. 그보다 더한 것은 내부로 오는 도전입니다. 사실 외부로부터의 도전보다는 내 안에서부터 오는 도전이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의 선(善)한 의지를 괴롭히고, 나를 죄악으로 이끄는 세력은 외부에서 보다 내 안에서부터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어쩔 수 없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편안하고 한가한 가운데 자기 속에서부터 오는 도전이었습니다. 가만 보면, 밖으로부터의 도전보다 내 안에 있는 죄성(罪性)과, 악의(惡意) 의지(意志)를 자극하는 욕망(慾望)이 나를 더 괴롭힙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보는 순간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에덴동산의 하와도 사탄의 말을 듣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6)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싸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 바로 내가 나와 싸우는 일입니다. 철학자들도 인간의 최대 승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城)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기(克己)는 승리 중에 승리요 자제(自制)는 용기 중에 용기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두 개의 자기가 항상 싸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① 영(靈)과 육(肉)의 싸움이라고 하였고, ②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라고 하였고, ③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끊임 없이 이 두 개의 자기가 싸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엄밀한 의미에서 승리할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구제불능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 얻게 되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사랑에서만 가능할 뿐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인의 구원관입니다. 그러므로 진솔한 자기 고백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무능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진실을 의미합니다. 또 그 진실이란 말은 <믿음>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믿음이란 진실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믿음은 진실한 자기 고백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낳은 자"라고 하였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입어 자기에게 직분까지 맡겨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헌신(獻身)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이런 진솔한 자기 고백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진정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참 사람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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