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으라 2001-12-10 12:39:33 고후1:1-11 / 롬:8:17 1620년 미국 폴리마우스 해변에서 시편 100편을 가사로 한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감격의 눈물과 감사로 가득찬 찬송이었습니다.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찬송을 부르는 이들, 바위를 끌어 안고 큰소리로 흐느끼는 이들. 너무나 벅찬 기쁨의 찬양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46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평균 2마일의 시속으로(이 속도는 걷는 속도 보다 느린 속도입니다) 117일간 세달이 넘는 동안을 극심한 파도와 싸우며 항해한 끝에 다달은 땅이었습니다. 항해 도중 2명이 죽고, 한 아이가 태어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배멀미와 싸우면서 돌아가자고 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감사했습니다. 폭풍으로 돛이 잘려 나가고, 여자들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 속에 곤두박질 했는데도 모두 구조 되었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도달한 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행복이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메리카 미국 땅에 도달했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넘기기 전에 60명이 배고픔과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저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태가 지나자 반절도 안되는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배와 찬송, 감사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다.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첫번 추수감사이고, 미국의 출발이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감사가 지금의 미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는 천사에게 감사 바구니를 만들어서 감사를 담아 오라고 그랬더니 이 천사가 하루 종일을 돌아다녔는데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불평의 바구니를 내려 보냈더니 한시간도 못되어서 가득 채워 가지고 왔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창고를 보여 주는데 창고가 비었습니다. 왜? 이 창고는 불평하는 삶들을 위해서 준비된 창고인데 불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었다. 다른 창고는 금은 보화가 가득하다 왜 감사하는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창고다. 하나님의 축복은 감사한 마음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이 없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시는 대로, 적게 주시면 적게 주시는 대로, 불속에 있으면 불속에 있는대로, 물속에 있으면 물속에 있는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스펄죤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춰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를 더하십니다. 은혜는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 문안인사로서 고린도후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 가운데 "은혜" 라는 말이 있다. 은혜란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조건 없이 받는 특혜입니다. 평강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리는 복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천국 시민권을 주신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은혜 받은 자'입니다. 헬라어에서 은혜라는 말을 '카리스'라고 하는데 '카리스'라는 말에서 '유카리스'즉 '감사' 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감사 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 음을 깨달은 성도는 당연히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메튜 헨리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요 성경 주석자입니다. 그가 어느날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환난을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습니다: 1)"오늘 처음으로 소매치기 당한 것이 감사하다. 2)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쳐갔지만 내 생명은 훔쳐가지 않았다. 3) 무엇보다 신앙과 영생을 빼앗기지 않았다. 4) 설령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털렸다고 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것들이다. 5) 또한 내가 범죄자가 아닌 피해자가 된 것을 감사하노라." 여러분 환난을 만났을 때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 후서를 기록한 바울에게도 심한 환난이 매우 컸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27절에서 바울은 환난을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번 태장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당한 환난이 참으로 크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나, 그러나 그를 더욱 못 견디게 했던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서 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과 무시가 끊임없이 계속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의 바울의 반대세력들이 그의 사도권을 부인하고 따라서 그가 전파하는 복음을 무효화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대파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사도로서의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자격요건이란 가롯 유다를 대신할 열두 번째 사도를 선택할 때 베드로가 언급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2절에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그와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눈으로 목격한 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두 가지 조건에서 모두 결격(缺格)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싫어하는 유대주의 반대파들은 늘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비난과 배반과 배척을 당하고도 오히려3-4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3-4절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무장된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환난을 만나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 했을 때에 우선적으로 할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평안할 때만 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슬픔 중에도 할 일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4-7절에 위로란 단어가 10회나 걸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여호와 삼마 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은 우리들 처럼 생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고난이 넘첬고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는데, 영광을 받기 원하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가운데 있으나 장차 우리에게 임할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봄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6절에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고통받는 자를 위로할 수 있고, 눈물의 떡을 먹어본 사람만이 배고픔을 당한 자를 위로할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이 실패자의 아픔 가운데 참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신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가 바로 우리의 고난을 도우시기 위하여 스스로 그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 때로 애매(曖昧)한 고난이 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애매히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간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는 이렇게 함으로써 위로받는 자로 고난을 견디게 하며, 더 나아가서는 위로하는 자도 그가 하는 위로로써 자신도 위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긍적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로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를 전적으로 의뢰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섯불리 배운세상 학문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이 안가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 인간이 만든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수 없으며 창세기 1장1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는 말씀도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장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발견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의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되, "주여 저는 부족합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저를 만나 주시며 저의 의지가 되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임하십니다.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망이라고 부를 정도로 커다란 환난에 처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건지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난에서 승리자가 될수 있었던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그가 겪는 고난 중에도 구원의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닥칠 어떤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구원하실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렵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새끼들을 키울 때 성숙하게 하기 위해 고난을 주는 것을 "젖떼기 갈등"이라고 합니다. 딱새라는 새의 경우, 새끼들이 태어난지 9일 동안은 먹이를 달라고 울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먹이를 주지만 10일이 지나면 먹이를 달라고 울때만 주고 15일쯤 되면 더 이상 둥지에 앉아서 먹이를 달라고 하는 새끼들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이를 주어도 둥 지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기까지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주기 때문에 결국 부모를 쫓아다 보면 내가 차라리 먹이를 찾아 먹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고 비로소 독립하기 시작한다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고 원하시는 것도 성숙함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고난이 오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잘 거치면서 영광도 오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비켜가려고 소극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고난을 수용하는 자세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지금 받는 고난이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큰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난의 몫을 저와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차례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잠깐이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가 아메리카에서 제일 먼저 감사할수 잇었던 것은 고난을 통과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누구나 고난이 오면 괴로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이 가져다 줄 유익과 축복을 믿고 잘 참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이 왔을 때에도 감사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86편 7절에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꼐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고 확신했습니다.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내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11절에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인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의 고난 가운데 그 고난의 원인을 제공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반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 너희가 망하나 망하지 않나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원망의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권고대로 사랑과 용서로 반대자를 제어하는 지혜입니다. 그들의 기도로 바울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을 염려하고 위하는 사람뿐 아니라 이제까지 해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도 감사가 넘치게 하기를 원합니다. 고난과 환난 가운데에도 우리의 입술에 감사가 넘침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평안한 가운데도 감사하고 고난 가운데도 감사함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몸과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평안 가운데 있습니까? 위로를 받고 계십니까? 위로를 나누어주고 계십니까?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시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맏길수 있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풍성하여지고 감사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는 축복의 씨앗입니다.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10년 동안을 수고하는 부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제일 어려운게 무었이냐? 물질이냐? 가난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말 한마디가 없어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신앙이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물가에서 그냥 펌프질만 하면 물이 안나옵니다. 그러나 물 한바가지를 가져다가 펌프에 먼저 넣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우리 심령 속에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면 감사할 조건이 펑펑 쏟아질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입속에서 감사의 말 한마디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감사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알면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대하여 감사할 줄을 모르면 불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감사를 알면 행복한 부부가 됩니다. 그러나 서로 감사를 모르고 불평불만이 남아 있으면 불행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다.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연히 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감사 제목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큰 감사를 주기 위해 잠시 허락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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