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통일성 2001-12-08 15:21:50 (엡 4:1-6)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하나를 이루느냐 하는 통일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민족적으로 남북이 나뉘어져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통일을 이룰 것이냐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의 통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어떻게 동서의 화합을 이루고 사회 계층간의 간격을 메꿀 것인가가 우리의 큰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보면, 가정이 하나되는 것이 이 시대의 큰 어려움입니다. 벌써 결혼 네 쌍 중에 한 쌍이 이혼한다는 결론이 있고, 또 가정들을 바라보면, 부모와 자녀, 형제간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을 봅니다. 며칠 전에도 신문을 보니 아들이 어머니와 자식들을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된 것의 진정한 모본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하나됨으로, 가정이 하나되고 사회에 나가 하나되는 운동을 펼치고, 우리가 중심이 되어 이 민족의 통일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교회도 역시 하나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 기독교신문을 보니, 위성방송 채널 사업자 선정을 하는데 불교 채널도 선정되었고 천주교 채널도 선정되었는데 우리 기독교 채널은 아직 단일 채널이 구성되지 않아서 보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언젠가 대통령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차례로 면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불교지도자도 만났고 천주교 추기경도 만났는데, 우리 개신교 지도자를 만나지 않아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따지니까 하는 대답이 불교, 천주교는 지도자가 분명하니 그들을 대표로 해서 만나면 되는데, 기독교는 저마다 대표라고 하고 단체가 많아, 누가 대표인지 모르겠고 자칫 어떤 대표를 만나면 다른 쪽에서 항의를 할 테니 아예 안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안타깝고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절대 절명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하나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특히 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4장에 들어가면서 가장 첫 부분에 핵심적으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이고 4장부터 6장까지는 실제적인 권면인데, 바울은 교리적인 설명을 끝낸 후 실제적인 교훈 중 가장 먼저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 생활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6절에 이르러 우리가 하나된 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가 하나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곱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몸이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가 원래 하나라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의 보이는 교회는 여럿입니다만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혹시 다니는 교회가 달라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한 몸의 지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성령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는 것도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고 교회의 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하나이시라는 것입니다. 고전 12:13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곧 교회의 일원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호흡하는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님의 몸을 이루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으로 호흡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지만 소망이 같습니다. 말하자면 목표가 같습니다.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시카고 공항에서 내려 휘튼대학교에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코스타가 개최되고 있었기 때문에 강사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 어린 아이를 안은 젊은 한국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냥 있을까하다가 한국 사람이어서 인사를 하고는 어디를 가느냐고 했더니 휘튼대학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가느냐고 했더니 코스타에 참석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됐다고 같은 방향이니 같이 차를 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고 했더니 남서울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서울교회에 언제부터 다녔느냐고 하니까 젊은 엄마가 말하기를 자기는 어릴 때부터 다녔다고 하면서, 어머님은 권사님이고 아버지는 집사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궁금해서 부모님의 이름이 누구시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윤자 재자 기자 이고, 어머님은 정필선 권사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윤재기 집사님과 정필선 권사님을 모르겠습니까? 그리고 보니 그곳에서 정필선 권사님 딸을 만난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주 조그만 아이였는데, 이제는 커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코스타 강의를 하는데, 부부가 그곳까지 왔습니다. 그때 제가 '야 세상 참 좁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말을 조심하고 친절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가 만일 모른척 하고 쌀쌀맞게 굴었다면 결국 코스타에서 만나고, 제 강의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무안했겠습니까?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정필선 권사님에게 "이철 목사님이 우릴 모른척하고 쌀쌀맞게 굴었다"고 하면 어떻게 제가 교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남인 것처럼 스치며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고 어느 순간 다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소망을 가지고 목표와 방향이 같은 사람이기에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넷째는 주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한 분밖에 없고 우리가 속한 교회를 주장하시는 분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한 분을 같이 주로 섬기는 자입니다. 다섯째로 믿음도 하나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조나 예배의식은 교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입니다. 여섯째 세례도 하나입니다. 누가 어느 교파에서 세례를 받았던지, 침례를 받았던 약식인 물세례를 받았던 간에 우리는 모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딴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수도 없거니와 받았다 해도 그것은 세례가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우리는 다 그 한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우리들끼리는 누구입니까? 형제 자매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우리가 장차 하늘나라 고향에 가서는 다 그렇게 부릅니다. 그곳에서는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장로님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요 자매로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렇게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리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게 하신 것,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힘써야 될 것이 있습니다. 가령 기도도 힘써야 하고, 모임도 힘써야 하고, 말씀 공부와 봉사, 드리는 것, 전도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힘써야 할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하나가 되었습니까?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는 값비싼 희생을 치렀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던지셔서 피흘려 주심으로 멀리 있던 우리들을 가깝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루신 하나인데, 이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하나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된 것을 지킬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 2절에 보면 그것을 위해서는 네 가지 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먼저,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이 당시 바울이 겸손이란 말을 쓸 때 로마 사람들은 잘 쓰지도 않고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쓰인 말입니다. 겸손을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의 반대는 뭘까요? 교만입니다. 그러면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처음 나타난 것이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을 때, 사탄이 뭐라고 유혹했습니까? "저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에 하와가 넘어가서 그것을 따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혹한 마귀는 최초로 교만에 의해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이 된 것입니다. 마귀의 죄도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같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이런 교만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하나됨이 깨어집니까? 가정에서 왜 하나가 되지 못합니까? 이유는 간단한 데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서로 으뜸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쓴 요한1,2,3서의 귀한 편지를 보면, 주로 성도의 교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3서9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특히 한 사람의 이름을 찍어서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교제가 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름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앞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교회에 으뜸되기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어 교회의 화평을 깨고 하나된 것을 막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꼭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 으뜸되기 좋아하는 사람이 직분도 계급으로 생각하여 무엇을 딸려고 하고, 남보다 한 단계 올라가려고 하고, 자기 주장이 반드시 관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의 화평은 깨지고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에서 가장 먼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화평한 가정을 이루려면 이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와 나라에 있어서도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민족의 통일에서도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북쪽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남쪽 사람들은 또 나름대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니 해결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주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겸손하게 교만을 버릴 때, 하나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덕은 온유입니다. 이 온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온유라고 할 때 우리는 아주 약한 사람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온유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예를들면 서커스에 출연하는 맹수같은 것입니다. 서커스에 나오는 맹수를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듣습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고 전혀 남을 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을 기쁘고 즐겁게 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그 맹수가 힘을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맹수에게는 아직까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련사에 의해 그 힘이 잘 절제되고 조절되어 있기 때문에 힘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다 인간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감정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잘 조절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는 상태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교회나 가정에서 보면 이 감정이 잘 통제가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할 말 다하고, 화낼 것 다 화내고, 성질 부릴 것 다 부리고, 그래서 공동체의 하나된 것을 깨뜨리고 화평을 그릇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라고 감정이 없고 화낼 줄 모르고, 분노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다 그대로 쏟아부으면 서로 망합니다. 우리의 감정을 성령에게 맡겨서 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공동체에 나타날 때는 온유하게 나타납니다. 바로 이 온유가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노조파업을 한다든지 데모를 할 때 보면 너무 과격한 방법을 씁니다. 겉으로는 뭔가 되는 것 같지만 감정의 골이 더 깊어져 사회가 더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이 필요하고 또 온유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는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오래참는 것이 영어로는 "Long suffering"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꿀꺽 삼키고 그냥 지나가고, 두 번째도 그냥 지나가고, 세 번째는 못참는 것은 오래 참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정이 없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안고, 어려움을 견디면서, 손해를 보면서 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오래 참는 것이 없으면 화평이 없습니다. 특히 부부생활에 있어서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저는 결혼생활을 오래 한 사람을 보면 존경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그만큼 오래참은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혼 생활 10년 했으면 10년 동안 참아온 것이고, 20년 했으면 20년 동안 참은 것이고, 30년 동안 했으면 30년 만큼 참아온 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결혼생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한 사람들 말을 들으면, 그들이 우리보다 못나서, 특별히 잘못해서 이혼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오래 참지 못해서 중간에 끝내버린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은 참는 문제가 아닌, 내가 참아서 되는 문제가 아닌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라도 참아야 되는 데, 참지 못해 가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한지 28년째입니다. 28년 목회를 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목회는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면 오래 참는 사람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급한 사람인 것 같습니까? 저는 제가 잘 참고 느긋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음식 먹을 때 보면 압니다. 저는 음식 먹다가 숨구멍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맛있는 국물을 마시려고 하면 기침하고 그럽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너무 급히 먹어서 그렇습니다. 천천히 먹으면 좋은데, 물을 먹어도 꿀꺽꿀꺽 다 삼켜 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성질 급한 면이 있구나, 음식 먹으면서 깨닫습니다. 이 급한 성격이 하나님께 붙잡혀 오래 참는 훈련을 했는데, 결국은 오래 참는 것이 교회의 화평을 이루는 일에 유익이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목사가 음식을 먹는 것처럼 오래 참지 못하고 제 성격대로 말도 함부로 하고 성질도 쉽게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분들, 직분을 가진 분들, 장로님과 권사님 집사님들 모두가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화평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의 얼마 되지 않는 가족들도 참지 않으면 유지가 되지 않은데, 이렇게 수많은 가지 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신앙생활하는 이 교회가 오래 참지 않고는 하나되는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랑가운데 용납하는 것입니다. 여기 용납한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벧전 4:8에 보면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잠 10:12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평화가 흔들릴 때 교제가 상처를 받을 때 보면, 항상 남의 허물을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한 것을 용납해 줄 때 그 공동체는 튼튼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자게 되었습니다. 함이라는 아들이 들어가서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다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노망이 드셨다. 저것 봐라" 그렇지만 셈과 야벳은 그런 아버지를 위하여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쳐서 들어가 그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안 보고 아버지의 하체에 덮어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교회나 가정에도 함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셈과 야벳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잘못하면 그것을 다 드러내보이는 사람, 그런가 하면 셈과 야벳처럼 자기도 못본 것으로 하고 덮어주고 감싸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 앞에 설 때는 반듯한 것 같이 양복입고 넥타이 매고, 머리 잘 해서 괜찮은 것 같지만 집에 가면 엉망일 때가 많고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한번은 저희 집에 집사람이 잠깐 밖에 나갔습니다. 저는 더워서 속옷만 입고 한참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띵동 띵동합니다. 그냥 들어오면 되지, 열쇠도 있는데 왜 초인종을 누르나 생각했습니다. 또 띵동합니다. 그래서 뭘 들고오는 모양이다 해서 화가 나 밖에 나가면서 "열쇠 있는데 그냥 열고 들어오지 뭘 그러냐?"면서 열고보니 어떤 여성도께서 우리 집에 갑자기 찾아오신 것입니다. 깜짝 놀라 다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얘기 처음 듣죠? 그 여성도가 꼭 셈과 야벳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이 아무에게도 얘기를 안하고 덮어주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도 여기 서서 설교를 하지, 그분이 다 소문을 내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얘기를 했으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녔겠습니까? 우리의 교회 생활이나 가정 생활, 사회 생활에서 누구든지 노아가 실수를 했다면, 우리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 있고, 남이 모르는 흠과 허물이 다 있습니다. 이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사람이 하나되는 것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어느 사회에서 기대하겠습니까? 나라에서 기대하겠습니까? 나라에서 정치하는 분들은 뭔가 흠이 있으면 다 불고 다녀야 정치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교회에서는 다릅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으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성도들에게 제일 먼저 권면한 실제적인 생활의 교훈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남서울교회가 다른 면에도 모범이 되지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모범된 교회, 그래서 교계의 하나되게 하는 교회에 샘플이 되고 더 나아가 사회와 민족의 통일에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본 성도들이 주축이 될 때 통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일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방법이나 경제적인 공세, 민간 교류를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외적인 통일은 되겠지만 실제적인 통일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성도들이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6.25 51주년을 맞는데,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언제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질지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훈련시키십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준비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민족을 맡기시고 우리 성도들의 손에 의해 민족 통일이 이루어지면 실제적인 통일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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