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 - 고난 - 부활주일
2016-03-18 11:42:51


나귀 타고 오는 왕… 고난이 영광 준다… 자라는 부활의 씨

김기홍 목사 / 분당 아름다운교회 원로,
[ 종려주일 ]

나귀 타고 오는 왕

(마태 21:1-9)

사람 됨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하나님은 훨씬 더 우리 생각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거기 맞추어 우리를 대하십니다. 자신을 약하고 억울한 피해자로 보면 그런 삶을 줍니다. 그러나 자신을 훌륭하고 강하게 본다고 하나님도 그러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이루실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를 최고의 존재로 높여줍니다. 말뿐인가요? 아니요, 믿으면 세상에서도 정말 잘 되게 해줍니다. 문제 앞에서 자신을 비참하게 보면 자신만 망치는 게 아니라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생각의 토대

예수가 기준이기 전에는 누구나 내 자신이 기준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남의 말 듣고 세상 권위를 따릅니다. 의사나 통계나 과학에 맹종합니다. 한 마디로 정처가 없어요. 이런 삶은 아담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올바른 생각을 못합니다. 늘 기분에 의해 바뀝니다. 한계 속에 있어 결국에는 죽고 망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생령, 살아있는 영혼은 하나님 영에 매달려야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서 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 예수가 살리는 영으로 오셨어요. 그에게 붙어 그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면 삽니다. 예수의 영을 받습니다.

예수의 삶은 일 초도 자신을 위한 게 없어요. 첫째, 죽을 우리를 살리려 죄와 벌과 사망을 몸에 담당했습니다. 둘째, 우리 안에 들어와 영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셋째 삶 전체가 그대로 모범이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연구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즉시 넘어집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그러면 종려주일 그가 하신 일을 살펴봅시다. 첫째 일로 우리 죄로 잃어 버렸던 왕의 권리를 회복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어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지배하라.” 세상 모든 피조물이 아담에게 복종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반대입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신이라 사람은 거기 복종하고 지배당합니다.

예수께서 왕으로 거룩한 성과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한 것인가요? 그가 세상에 선포하는 말 들어보세요. “내가 하는 일은 모두 너희를 위한 것이다. 내가 왕임으로 보여주는 것은 너희가 왕권을 회복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믿고 받아라. 너희는 존귀한 왕이다.” 이보다 더 복된 소식 있나요? 감격 자체입니다.

왕 되었음을 확인하라

둘째 일로 예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생명을 회복하십니다. 동시에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나게 하고 하늘의 모든 권세를 부어주십니다. 아, 이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어요. 나는 하나님의 영과 피가 흐르는 친자녀입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요, 세상과 내 운명의 왕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왕인가요? 세상의 왕과는 달라요. 예수는 왕중의 왕이요 신중의 신이십니다. 그의 영을 받은 우리는 그를 자세히 보면서 그를 의지해 왕 노릇을 합니다. 안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우선 본문에서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의 필요한 것을 알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되 섬김의 목적으로 합니다.

예수는 자신이 필요한 탈 것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제자들을 보내 나귀를 가져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왜 남의 물건 가져가느냐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그들은 순종합니다. 주가 누구냐고 따지지 않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보고 명하고 지배해요.

셋째 일로 우리도 보여주신 본대로 해야 합니다. 늘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령께 물으세요. 예수도 늘 하나님의 영을 의지했어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지 말아요. 자만하지도 느긋하지도 말아요. 도전을 계속하세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이것이면 충분한가? 더 나은 해답 없는가? 무엇을 해야 하나?

청담동 시절에 어느 분이 정부 고위직을 소원했어요. 설교를 듣고 속으로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총리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만날 길이 없다. 경기고등학교 동창회가 곧 있다. 접근하고 말할 기회가 있을까? 그래서 명령합니다. “나를 만나러 오라. 그리고 내 말을 받으라.” 그대로 되었답니다. 삶을 지배하면 신기하게 열려요.

진짜 왕은 섬긴다

예수께서 삶 전체로 보여주신 모범은 섬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길수록 높아져요.

하나님 것은 그렇습니다.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안 주면 그대로 있어요. 줄수록 더 많아집니다. 봉사하면 할수록 더욱 높아집니다. 물론 인간적 생각으로 인간적 힘으로 한다면 힘들어요. 결과도 기대하는 대로 꼭 되지 않아요.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고 행한다면 예수처럼 됩니다. 섬길수록 참된 왕의 감격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힘으로 그러는 것은 아무리 흉내 내도 불가능입니다. 새로 된 교황도 말씀했습니다. “신앙심이 없다면 우리는 NGO에 불과하다.” NGO도 인간 수준의 감동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 왕으로 사랑으로 섬깁니다. “세속 가치를 앞세우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처럼 하세요. 바울처럼 신비한 기쁨과 권능을 누립니다.

삶이 힘들다고 마음을 어둡게 한다면 죄입니다. 힘들게 하고 누르는 것을 왕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왕으로 해결책을 물어보고 왕으로 명령하세요. 자금도 사람도 왕에게 복종합니다. 모두를 섬기는 자세로 하세요. 속히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왕의 생각을 하세요. 그 자체로도 하나님은 존귀하게 여기고 은혜 주십니다.

“예수께서 해주신 일이 내 삶에 누려지게 하소서.” 나는 마음이 약해 쉽게 낙심하고 쉽게 넘어집니다. 이러한 나를 위해 죽으시며 왕의 자리에 앉히신 예수를 찬양하세요. 예수처럼 겸손하게 섬기는 왕으로 사랑하고 봉사하고 구원하세요. 세상이 모르는 이 비밀을 마음에 채우고만 있어도 하나님은 귀히 여기고 도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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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주간 ]

고난이 영광 준다

(롬 8:17-18)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피할 수가 없어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5:7) 사람은 다 저주를 가지고 태어나 고생 고생하다 영원히 망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예외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으로 오셨어요. 모두의 저주를 가지고 지옥까지 가는 고난을 당하십니다.

덕분에 멸망에서 구원 받은 이들이 우리입니다. 이제는 고난이 없나요? 구원을 적용 못하면 불신자들처럼 고생합니다. 적용하면? 그래도 고난은 있습니다. 저주의 고난이 아니라 성장 위한 훈련입니다. 포로로 학대당하는 것과 전투병으로 고강도 훈련 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신자는 성장하고 잘 되기 위해서 고생해야 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저주

근심과 고난, 수고와 슬픔, 헛되고 무가치함,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씌워진 굴레입니다. 돈 많이 벌고 사랑과 존경 얻으면 벗어날 것 같아 평생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더 죄만 많이 짓습니다. 그렇게 모두 멸망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현실 삶의 고난은 지옥을 예고합니다.

사람들은 말해요. “내가 무슨 죄가 많다고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합니까!” 아버지가 잘 못되면 온 가족이 다 절망에 빠져요. 첫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해 모든 복과 끊어집니다. 그 자손 모두 다 저주에 떨어집니다. 노예의 자녀는 노예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옥의 자녀입니다. 성경의 설명 듣고 세상 돌아가는 걸 보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오셨어요. 그 이름은 구원, 예수고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그 처절하고 잔인한 장면이 우리의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만이 할 수 있어요.

만약 성령이 없다면 그의 고난은 교훈 수준으로 그치고 맙니다. 예수의 영이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죄 값을 다 받은 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 전체를 소유하고 누리게 합니다. 만약 이것을 깨닫고 믿고 적용한다면 오, 그 능력과 존귀함과 부요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늘 울어도 다 갚을 길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가 내가 맞을 매를 다 맞았다. 저주의 대가를 다 치르셨다. 고로 내게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 예수는 살아있는 구원이요 구체적인 천국이다. 나는 그를 모시고 그만을 의지한다.” 나가서 공부하고 일하고 가족 돌보는 모두가 이 믿음을 근거로 합니다. 이 믿음으로 건강 풍요 평안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축복

무슨 말인가요? 축복자로 고난 받으면 축복이요 노예로 당하면 저주입니다. 바울은 망하는 자 같고 죽는 자 같았어요. 살 소망마저 끊어지는 고난을 계속 당했지만 영광으로 극복합니다. 오히려 고난 때문에 영원한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축복자로 고난을 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세상 부자의 상속자라도 엄청난 것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는 그와 비교가 되지 않아요. 예수가 받는 영광을 함께 받습니다. 죽은 다음이 아닙니다. 구원과 천국은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지금부터 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나갑니다. 예수께서 대신 고난당했고 도우시니까 이제 편안히 살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무슨 고난인가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이 부분을 신자들이 몰라요. 편하려고만 하니 늘 그 자리입니다. 주의 몸 된 교회인 내가 성장하고 복 누리도록 예수께서 받을 고난을 내가 받는 겁니다. 열심 내어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해야만 합니다. 열심 안 내고도 잘 되고 복 오나요?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4:25)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그래야 하나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돈만 번다면 무슨 고난도 다 받지요? 자기 영혼과 가족이 잘 되되 영원히 비교가 안 되게 잘 됩니다. 힘도 다 줍니다. 편하려고 하지 말아요.

십자가 없이 영광도 없다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십자가 지기 힘들어요? 바울은 자원해서 고난을 당했어요.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내 힘으로 한다면 힘만 들고 상도 없어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이 상태를 경험 못했다면 믿음도 헛것입니다. 우리 권사님 한 분이 2시간 걸려 교회에 와서 매일 릴레이 기도를 하고 갑니다. 하나님 축복하소서. 이것이 감사의 고난입니다.

추운 겨울, 구소련 공산당이 열두 명의 신자들을 잡아 며칠을 굶기고 얼음 구멍 열두 개를 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벌거벗기고 구멍에 한 사람씩 들어가게 했습니다. “예수를 포기하고 나오면 불을 쬐며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고통을 못 이기고 나왔어요. 그 순간 집행하던 한 군인의 눈에 무언가 보입니다.

하늘에서 천사 열둘이 각각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도로 올라갑니다. 이것을 본 군인은 군복을 벗고 얼음 구덩이로 들어갑니다. “이 사람이 버린 예수, 내가 믿겠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그 영광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됩니다.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세요. 새벽에 밤에 나와요. 부르짖으세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 어차피 삶은 고난입니다. 축복자로 고난을 대하세요. 분발해서 주를 위한 고난을 자원하세요. 이것은 복 위의 복입니다. 순교를 해도 그 감격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꾸준히 도전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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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주일 ]

자라는 부활의 씨

(고전 15:50-58)

역사상 부활한 사람은 하나뿐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있지만 신의 몸으로 부활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활은 개념으로 그칩니다. 북한에 사는 사람에게 남한의 풍요와 자유를 말해주어도 이해되지 않음과 같아요. 그래도 계속 듣고 적용해서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그 수준의 삶을 맛볼 수 있어요.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승리하고 있어요. 승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승리입니다. 구원이기도하고 부활이기도 해요. 하나님이 예수를 주셨기에 바울은 항상 사용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하면 됩니다. 승리입니다.

부활을 사모하라.

돈 버는 사람은 돈 버는 재미로 권력 추구하는 사람은 권력 재미로 연애하는 사람은 연애 재미로 세월과 돈, 정력을 씁니다. 윤리 도덕 다 무시하고 사람들 눈물 나게 만들며 덤벼듭니다. 그러나 그 모두 잠깐의 즐거움만을 줍니다. 장차 올 영원한 시간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 두려움을 영혼이 느끼기에 더욱 몰두합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한 무덤에 레닌의 방부 처리된 관이 있어요. 쓰인 글은, “그는 모든 사람, 모든 나라,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구세주였다!” 완전 거짓말입니다. 또한 글의 시제는 과거입니다. 다 끝났어요. 세상사람 다 그래요. 누구나 부자 같고 왕 같아도 너무 짧고 과거로 됩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었어요.

장차 올 세상과 부활을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면 다 이렇게 망합니다. 자궁이 천국처럼 좋아요. 근심 걱정 없어요. 탯줄 끊고 나오는 게 죽음입니다. 춥고 덥고 힘든 세상으로 나갑니다. 여기는 영원의 태입니다. 제대로 성장해야 다음 세상에서 잘 됩니다. 외치세요. “사망아, 나는 네가 안 무섭다. 부활을 가졌기에 나는 죽어도 산다.”

어느 가게에 갔더니 문을 닫았어요. “내부수리 중.” 여러 날이 걸렸어요. 어느 날 문을 엽니다.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좋은 물건으로 가득합니다. 죽음도 그래요. 곧 내부수리 들어갈 분들 많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문을 열 때는 너무도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영광 말로 다 못해요.

최고로 좋은 것,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무엇이든 떠올려 보세요. 부활과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모하고 숭배하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며 사용하라고 주신 교재입니다. 돈, 권력, 사랑의 본체인 부활과 천국을 사모하세요. 생각만 하고 있어도 이미 나는 강하고 존귀합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부활을 키워라

부활하신 예수가 나의 부활입니다. 개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부활이 커지지는 않아요. 내 부활을 크게 하는 존재는 나뿐입니다. 아기가 자궁에 아주 작은 생명체의 씨로 시작합니다. 자랍니다. 심장이 뛰고, 뇌도 눈도 내장도 생깁니다. 내 안의 부활도 그래요. 자라나고 느껴져야 합니다.

어떻게 자라날까요? 사용해야 성장해요. 운동할수록 근육이 생기는 것과 같아요. 부활을 사용하면 그 힘으로 삶이 잘 됩니다. 내 안의 구원이신 예수 힘으로 사는 겁니다. 공부도 사업도 가정도 교회일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일의 차원이 달라져요. 그럴수록 부활도 더 크고 많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도 지배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하고 삽니다. 대화하고 문자 보내고 음악 듣고 물어봅니다. 잠 잘 때도 같이 있어요. 그런 친구 그런 도우미가 없어요. 만능일까요? 병 고치나요? 돈을 주나요? 보호해 주나요? 용량도 파워도 실력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도 전적 의지합니다. 스마트폰만큼도 예수를 사용 못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아요.

성경은 예수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구원이요 부활이요 보혜사입니다. 보호자요 변호자요 상담자요 도우미요 위로자여요. 항상 함께 있는 절대 믿을만한 친구입니다. 스마트폰은 그림자의 그림자도 안되요. 그런데도 별 도움을 못 받는 건 왜 그럴까요? 몰라서 그래요. 저도 스마트폰 별로 못써먹어요. 주로 전화밖에 할 게 없어요.

예수는 구원이고 생명이고 건강이고 부입니다. 기쁨이고 감사고 감동이고 성령이고 천국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가 부활입니다. 부활을 이룬 신이신데 내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그를 모시고 있어야 그 날에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어요. 그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부활은 상상이 아니에요. 지금 내 안에 자라나는 씨입니다.

부활을 존귀하게 하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 바울의 소원이 여기 나타납니다. 자기 몸으로 삶으로 부활 곧 예수가 존귀해지는 겁니다.

서울구치소에서 근무했던 박효진 장로 간증에 유두영 이야기가 나옵니다. 잔인한 살인범으로 늘 소름이 끼쳤답니다. 이런 인간도 믿을까 했는데 성령이 변화시킵니다. 사형집행 날이면 누구나 안 가려고 발버둥 치며 대소변을 보며 혼이 나갑니다. 그는 예수 믿고 전도자가 됩니다. “죽을 준비 돼 있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결국 사형장으로 갑니다.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지나가는데 “두영아, 잘 가라.” 하니 당당해요. “예, 장로님, 먼저 갑니다.” 전신에서 풍기는 영적권세에 흠칫 물러섭니다. 소장이 인적사항과 죄상을 읽습니다. “부탁합니다. 그 악한 죄는 하나님 모를 때 지었습니다. 예수님 믿고 8년 살았는데 용서 받은 몸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임종예배하고 요한3:16 암송하고 장기를 기증합니다. 유언 물으니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예수 믿고 부활하십시오.” 올가미를 겁니다. 어디서 찬송소리가 들리니 그였어요. “하늘가는 밝은 길이.” 모두 감동되어 울었답니다. 사형수도 이럴 수 있다면 평생 예수 믿은 우리는 그 영광 말로 다 못합니다. 부활을 믿고 살수록 더 그래요.

삶은 기회요 심는 대로 나와요. 예수 위해 몸인 교회 위해 헌금하세요. 영원히 억만 배로 저축됩니다. 세상에 많이 쌓아두면 뭐합니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다 이겨요. 예수 때문입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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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도 무능하면 소용없다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는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열 두 지파의 시조가 되는 열 두 아들이 앉아있다. 그들을 향해 말한다.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그러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될 일을 예언한다. 여기서 열 두 아들 전부가 다 축복을 받지 못했다.

절반 정도는 저주의 이야기였고 나머지는 축복이라기에는 너무 단순한 이야기였다. 오직 유다와 요셉만 다른 아들들의 여러 배의 축복을 받았다. 거기에는 다른 아들들처럼 어두운 면은 전혀 없었다. 오직 차고도 넘치는 감동의 좋은 말씀뿐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이 두 아들만 엄청나게 축복했을까? 사실 야곱은 단지 아들들이 지금 하는 일 그대로 미래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며 또한 하나님의 법칙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미래는 현재의 연속이다. 지금 하는 일 그대로 연장하면 미래가 된다. 지금 공부하고 꾸준히 하면 당연히 좋은 성적이 나온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된다.

목회도 그렇다.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앞으로 될 일도 보인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지금 하는 일의 열매는 반드시 나온다. 수십 배로.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열심히 해야 하지만 순전히 육신적 방법으로 하는 이들은 영적인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이스라엘 장자였던 르우벤이 그러하였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편애로 형제들 모두 요셉을 미워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동생들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구덩이에 넣고 나중에 죽이자고 설득한다. 후에 조용히 빼내려 했던 것이다. 자기 없는 동안 형제들이 그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선 형제들이 악을 행할 때 막아야 했었다. 그들에게 그러한 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옳지 않음을 말했어야 한다. 그뿐 아니다. 자기 없는 사이에 노예로 팔렸다면 쫓아가서 찾아내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에게로 가서 요셉의 죽음을 말한다. 본성은 착하지만 야무지지 못하고 무능했다.

많은 신자들, 특히 목회자들이 자신의 착함을 자랑한다. 남들처럼 악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악을 향해 조용히 싸워야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이 자행되었다면 시정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항상 상황을 좋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르우벤은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해도 그냥 두었다. 죽이려할 때도 그들에게 동조하면서 구덩이에 던진다. 팔린 다음에도 그냥 두었다. 아버지에게도 정직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 착하다고 할 수 없다. 무능하고 게으르다. 자기가 힘이 없다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장자로서 낙제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착하고 정직해야 하지만 동시에 바르게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목회현장은 고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성전도 하나님 백성도 땅에 있는 동안은 항상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하다. 사람들도 나태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라면 천국의 장자로서 무엇인가 힘써서 해야 한다. 목회 잘하는 이들을 보면 부지런하다. 항상 움직인다. 심지어 휴가를 가도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운동한다.

모두가 피곤해도 할 일을 하고 남을 돕는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고 시도한다. 한 눈에 보아도 깨달아진다. “저런 사람이라면 무엇을 해도 잘 할 수 있겠다.” 불평하고 우울해 할 시간 있으면 일을 하라. 예수님도 빈둥대고 노는 사람에게 주의 일 하라고, 신학교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직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제자로 부르셨다.

사람이 착한 것은 꼭 필요하다. 기본이다. 그러나 거기 만족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교회에서 가끔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착하고 무능한 사람”이다. 르우벤이 그런 사람이었다. 목회자로서 당신은 어떤까? 착한 것은 자신 있는데 유능함은 안 그런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지런하라. 현상유지는 퇴보요 죽음이다.

현실은 항상 불만족스럽다. 안 그러면 세상이 아니다. 교회는 더욱 그렇다. 르우벤은 이스라엘의 장차로 축복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착하고 무능하면 소용이 없다. 목회자도 천국의 장자로 택함 받았다. 그렇다면 그 장자권을 일으키라. 착한 것이 좋지만 그것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속 움직이라. 계속 도전하라. 그런대로 열매가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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