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이 듣도록 돕는 설교형태: 귀납적 설교(2)1) 2015-12-17 10:02:59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설교의 난시청 문제 공중파를 통해 여러 소식들을 전달하는 방송사들에게는 난시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어느 곳에서나 방송이 잘 들리게 하기 위해 방송사들은 송신소를 세우고, 또 중간 중간에 중계소를 세워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자연 지형에 의해서나 건물 등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인공위성을 올리기도 하고, 케이블 TV가 등장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난시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방송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방송국들은 모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이러한 난시청 문제가 발생하는 요인은 늘 깊은 연구와 관심의 영역이었는데, 학문적으로 난시청은 정보원이 보내는 메시지가 신호로 바뀌는 과정에서, 신호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혹은 전달된 신호가 다시 메시지로 환원되는 과정 등 어느 시점에서 잡음(noise)이 개입되어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메시지의 의미를 왜곡시키거나 그 내용 전달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2) 그렇다면 설교에도 이러한 난시청은 일어나는가? 설교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임을 감안할 때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정보원인 설교자가 특정의 메시지를 수신원인 청중들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어떠한 요인에 의한 잡음이 개입되어 메시지 전달을 어렵게 만드는 현상은 설교의 현장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로 오늘날 설교의 현장에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수많은 요소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이 시대에서 복음의 선포인 설교가 오늘의 청중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지게 할 것인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는 오늘의 설교자와 교회가 어떻게 계속하여 “자신만만한 증언”(confident witness)을 감당하는 증인들로 신실하게 설 수 있을 것인가는 가장 실재적인 질문이다.3) 그러나 이러한 “난시청”의 도전 앞에서 교회와 설교자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설교자들이었던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도 없었고, 보다 역동적이고 강력한 전달을 위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도 없었다. 그 메시지를 오늘의 청중들에게 전하도록 부름 받은 설교자들은 언제나 그 메시지의 전달의 가능성을 부단히 추구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설교자들은 그들이 전하려는 복음의 소식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언제나 그 복음의 전달의 가능성을 추구해 왔다. 짙게 드리운 어두움을 걷어내려는 시도 현대 설교학에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와 함께 제시된 귀납적 설교는 이러한 복음의 전달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흐름과 함께 태동한 설교 방법론이었다. 어쩌면 설교의 난시청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던 문화 사회적 도전 앞에서 메시지를 새롭게 전하려는 몸 부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텔레비전의 출현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였던 1970년대 시사 주간지 타임은 설교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빈사 상태에 놓인 예술”(dying art)이라는 혹평을 내린 적이 있다.4) 귀납적 설교를 제창하였던 프래드 크래독도 이러한 부정적인 비평과 기소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적인 흐름 속에 서 있었다. 물론 그러한 비평으로부터 자유스러웠던 시대는 없었지만 크래독도 당시의 정황에 대해 표현하기를, “이제는 설교가 시대착오적인 산물이 되었다는 것은, 매주일 설교하는 설교자들이나 그들의 설교를 듣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생생한 의견들”이 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물론 “어떤 시대에도 설교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 복음을 강력하고도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왔지만 이제는 “교회가 그러한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옛날에 힘있었던 강단의 메시지를 회상하면서 오늘의 문제들을 덮어보려고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5)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그러한 옛 기억이나 되살리면서 서갈 수 없으며, 생생한 말씀의 능력을 오늘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 가는 것은 강단이 바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1970년대 본격적으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방법론에 대한 추구가 시작되었다. 귀납적 설교는 이러한 추구와 함께 태동되었던 하나의 설교 방법론이었다. 즉 상황과 시대적인 변화로 인해 강단에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설교의 “난시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시작된 추구였다. 이러한 추구는 각 시대마다 계속돼 온 것으로, 복음의 위임을 받은 사도들과 사도 전통 위에 세움 받은 설교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위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나 하나님에게서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랄프 루이스는 귀납적인 접근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식이며, 우리 주님의 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6)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나는 여러 스토리들을 분석하면서 루이스는 귀납법(induction)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시기(communicate) 위해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신 방식이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어떤 논거(reasoning)를 전하려고 하시기 전에 관찰을, 신학적 원리를 전하기 전에 실제적인 일(facts)을 전하셨다. 어떤 결론을 제시하기 전에 그에 대한 증거를, 익숙한 것으로부터 익숙하지 못한 것으로의 움직임을, 하나의 활동 무대(stage)에서 다른 곳으로 점진적이면서도 아주 주의 깊은 전개를 통해 말씀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두 가지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하나는 계시를 통해서요,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이다. 하늘과 땅의 최고의 권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드러내시기도 하셨고, 또 때로는 그것들을 추구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를 부여하시기도 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점진적으로 드러내신다. 또한 이 세상 속의 많은 사건들과 어떤 계기를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아 가도록 인간의 이성적인 힘도 역시 귀납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진다.7) 또한 우리 주님도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귀납적으로 접근해 가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대부분이 귀납법을 통해 전해주고 있음을 잘 드러내 준다. 그분은 아름답게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 앉아있는 청중들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지르거나 낚아채듯이 그들을 잡아끌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굉장한 팡파레나 과시하는 듯한 선언을 하시지 않으시고, 이야기를 통해 잠잠히 하늘의 메시지를 드러내셨다. 주님은 청중들을 몰아세우시듯이 끌고 가신 것(drive)이 아니라 조용히 인도하셨다(lead). 다투시거나, 혹은 강요하거나 대면하시기보다는 그들의 말씀을 조용히 들으시는 것과 같이 상담하셨다.8) 이렇게 귀납적 설교는 강단에 어두움이 드리워지는 설교 난시청 현상 속에서 태동한 하나의 설교 형태이다. 유진 라우리는 오늘날 설교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떠한 신학적 주장들과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성경의 본문들을 다룰 것인가”가 중요한 내용이라고 전제하면서, “결국 이러한 것은 어떠한 설교의 형태를 통해 독특한 설교학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인가로 귀결되는 사항”으로 규정했다.9) 즉 설교자가 성경 연구를 통해 오늘 이 시대 속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하기 위해 효과적인 설교의 형태를 선정하여 설교 준비 작업을 하는 언제나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의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목표에 어떻게 도달하게 할 것인가는 설교의 형태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의 형태는 부수적인 것도 아니며, 비신앙적인 것도 아니다. 설교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진부해진 설교의 제반 규정들(worn-out preaching conventions)”을 새롭게 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야 한다.10) 귀납적 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지침 지난 호에서는 설교의 전개형식으로서의 귀납적 설교가 가지는 특징에 대해 언급했다. 계속해서 귀납적 설교가 가지는 설교 방법론적인 특징들을 알아보기 위해, 귀납적 설교 준비를 위한 지침, 그리고 실제적인 방법론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귀납적 설교를 작성하려는 설교자는 설교 준비를 위해 본문을 접근하는 방법부터 숙지해야 한다. 귀납적 설교는 본문연구에서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문을 귀납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크래독이 제시하는 귀납적 설교 준비를 위한 본문 연구 지침(guideline)11)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들은 귀납적 설교를 하려는 설교자가 그 준비단계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며, 전제들이다. 첫째로 본문에 관한 사전이나 주석서로 먼저 달려가기보다는 설교자는 본문 그 자체와 직면하여 서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물론 주석을 참조해야 할 때가 있지만 너무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본문에 대한 전이해나 설교자의 의도를 내려놓고 설교자는 본문이 말씀하려는 바를 경청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청중들에게 이 본문을 통해 무슨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본문으로 나아가는 설교자는 본문이 말씀하는 바도 놓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청중들도 놓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활발한 참여가 있어야 한다. 즉 본문의 상황에 몰입해 들어가면서 제기되는 의문 사항들을 질문하고, 점검하면서 본문을 접근해 갈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경건한 설교자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설교하는 설교자의 자세는 오히려 청중들이 말씀에 대해 괴리현상을 느끼게 한다.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이나 오리를 함께 갈 것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함께 가라는 말씀이나, 겉옷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속옷도 주라는 말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등과 같은 말씀들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또한 그것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가지지 말고, 그에 대한 반대입장에서 말씀을 고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설교자는 오늘의 청중들이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바로 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주의하여 경청하라. 경청한다는 것은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데,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에게 있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다. 어떤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명령하는 것이 보다 쉽고 익숙할 수 있다. 때론 설교자들이 본문으로 나아갈 때, 설교를 위해 추구하는 여러 가지가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받아들이는데 때로는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본문의 깊은 소리를 듣기보다는 설교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관심을 함께 묶어 가볍고 율법적인 권면이나 명령 정도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 넷째로 설교 준비에 있어서 본문을 다루는 지침으로 본문에 대한 청취(hearing)를 들 수 있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본문에 대해서 청취하여야 하지만 네 번째 지침은 직접적인 청취가 아니라 우연히 듣는 것(overhearing)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우연히 듣는다는 것은 설교자가 바울이나 마가 혹은 요한이 그들의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고 서는 것을 말한다. 연극 공연장에서 가질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예를 들어보자. 어떤 극중 인물도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없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과 서로 말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저 극중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청중들은 우연히 혹은 간접적으로 듣는 것(overhearing)이다. 그러나 연극이 진행되면서 관객들을 극중 인물과 동일시를 경험하게 되고, 함께 생각하게 되며, 또한 함께 느끼고, 함께 감동하며, 연극을 통해 주어지는 어떤 메시지를 함께 듣게 된다. 설교자가 이러한 우연히 듣기의 경험을 갖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원 독자들과 나누었던 관계와 형편을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동참과 재건(reconstruction)을 가능하게 하면서 본문의 메시지를 바로 듣게 한다. 그러므로 우연히 듣는 것은 말씀을 바로 듣게 하는(hearing) 예비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지침은 설교자가 일단 본문을 선택하였다면 그 본문의 상황 속에 들어가, 그 안에 서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를 본문으로 택했다면 설교자는 바울과 그곳에 함께 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설교자로 되어보든지, 아니면 그 교인들과 함께 바울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되어보아야만 바로 본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본문이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의 논쟁에 대한 말씀이라면, 설교자는 역할극을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자리에 섬으로서 예수님의 마음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며, 혹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그 자리에 서보는 경험도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역할극도 아니며, 이것은 역할 바꾸기 게임도 아니다. 이것은 오래 전에 형성된 본문을 오늘의 시대 속에 새롭게 들려지는 설교의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device)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본문에 관해(on) 설교하는가? 혹은 본문으로 들어가서(into), 본문에게서(to) 들으며, 그리고 그것이 말씀하는 바를 함께 나누고 있는가? 이것은 설교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계이다. 이렇게 말씀의 상황으로 들어가서 그곳에 서서 전율하고, 놀라기도 하며, 감동되고, 가슴이 저미는 것도 경험하고, 칭찬도 듣고, 겸손해 지기도 하며, 또한 피할 수 없이 온 가슴을 휘감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야말로 귀납적 설교를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생생한 원자료(raw material)가 되어진다. 본문에 접근하는 지침으로 마지막 여섯 번째 지침은 청중들과 연결되어 있는 목회 생활 전부를 설교준비의 시간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즉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되는 목회의 삶 속에서 청중들을 돌보며, 그들의 삶과 연결하여 본문을 읽고, 듣고, 적용하며, 고민하면서 삶과 괴리되지 않는 성경연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에 있어서는 본문에 대한 해석과 함께 청중에 대한 해석이 주어져야 하며, 본문을 통해서 청중이 해석되고, 청중의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준비는 목회자의 서재에서만 아니라 목회상황 속에서 준비되어져야 한다. 귀납적 설교의 구조 앞서 언급한대로 귀납적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움직임”(movement)이다. 크래독에 의하면 귀납적 설교의 구조(structure)는 언제나 이 움직임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이러한 종속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교의 구조는 청중들에게 보이지 않으며, 이것은 설교가 시작으로부터 마지막 부분까지 움직임을 가지고 어떻게 전개되게 할 지에 대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움직임은 단순히 설교자가 어떤 방향으로 그의 설교를 진행해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제시되는 말씀의 나눔은 청중들로 하여금 공동체적인 경험을 갖게 하기 때문에 중요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말씀의 움직임은 청중들에게 말씀을 듣게 하며, 참여하게 하고, 말씀에 대한 경험(experience)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언제나 귀납적 설교의 구조를 지배한다. 만약 청중들이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움직임을 따라 “설교를 통한 말씀의 여행”(homiletical journey)이 갖게 된다면 그들은 그 여정 속에서 듣게 되는 말씀은 이제 그들 자신이 스스로 내리는 말씀의 결론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 때문에 말씀의 경험은 단순한 논증식의 설교를 통해서 이르게 되는 결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해 진다. 가령,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극장에 온 관객들에게 펼쳐지는 영화의 내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전쟁은 잔인한 것이기에 반드시 종식되어야 한다”는 주제가 제일 먼저 제시되고, 이어서 “전쟁이 이 땅에서 종식되어야 하는 이유”가 자막에 선명한 글씨로 제시되면서 4형제가 참전하는데, 세 형제가 죽어 가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가정을 파멸로 이끄는 전쟁은 종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반부가 끝이 난다고 해보자. 그런 구조를 가진 영화도 없겠지만 만약 그러한 구조로 전개되는 영화가 있다면 “난시청” 현상 혹은 “시청 거부” 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 시작부분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한 상륙 작전에 대한 장면은 이 영화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혹은 무엇을 전하려는 영화인지는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영화의 장면들에 몰입(involvement)되게 하기에 넉넉하다. 또한 그 영화가 끝나게 되면 이 땅에서 전쟁은 사라져야 한다는 강력한 구호가 외쳐지지 않아도, 우리 시대에,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강력한 외침을 듣고 나서게 될 것이다. 귀납적 설교의 구조는 언제나 청중들을 말씀의 여정에 어떻게 참여시킴으로서 경험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인가를 언제나 지향한다. 그러므로 그 구조의 특성상 전통적인 설교가 가지는 연역적인 구조와 차별될 수밖에 없다. 설교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전통적인 설교는 일반적으로 설교의 명제나 주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설명하거나 확실성을 논증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그 명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대지로 나누고 그 대지가 제시하는 내용을 예증하기 위하여 거기에는 예화가 사용된다. 그러나 귀납적 설교는 그러한 결론적인 내용을 나중으로 유보하고 어떤 경험이나 예화를 통해 시작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의 주제나 명제에 이르도록 하는 설교 방법이다. 그러므로 귀납적 설교는 청중들을 청중들이 서있는 자리, 즉 그들의 삶의 자리로부터 언제나 출발한다. 특별히 “ 이야기, 대화, 유비, 질문, 비유, 구체적인 경험” 등과 같은 독특한 요소들과 함께 시작하여 가장 보편적인 진리로 청중들을 이끌어 가는 형식을 취한다.13) 이러한 특성은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의 여정 가운데 어떻게 참여(involvement)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설교학적인 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설교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참여하기를 원하고, 그러한 요구를 갖는다. 만약 그러한 여지(space)가 제시되지 못한다면 청중들은 말씀의 여정(homiletical journey)이 아니라 자신들의 여정(listener's journey)을 떠날 것이며, 청중들 속에서는 “난시청” 현상이 야기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참여(involvement)는 오늘의 청중들이 강하게 원하는 바이며, 귀납법은 이것을 청중들에게 약속으로 제시한다. 이와 같이 귀납적 설교의 구조는 움직임(movement)과 청중의 참여(involvement), 말씀의 경험(experience)의 토대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설교자는 청중들을 돕는 사람(enabler)이며, 산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청중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며,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집을 짓는 존재이다. 듣지 못하는 시대에서 어느 날 인디언 보호 구역에 살고 있던 한 인디언이 도시에 있는 백인 친구를 방문했다. 자동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는 매우 낯설고 새로웠다. 특히 거리의 소음들은 그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두 사람은 도시를 걸어다니며 여러 곳을 구경하였는데, 갑자기 인디언이 친구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잠깐, 멈춰 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니?" “귀뚜라미? 아니, 들리지 않는데.” 백인 친구는 멈춰 서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지만 자동차와 사람들 소리 외에 특별히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인디언은 아무 말 없이 길모퉁이에 있는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집의 벽은 덩굴나무로 휘감겨 있었다. 인디언이 덩굴 잎 사이를 살짝 들춰보니 정말 귀뚜라미가 찌르륵거리고 있었다. “자네는 시골에서 살았으니 청력이 나보다 나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 백인 친구가 말하지 인디언이 머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글쎄, 내 생각은 그렇지 않네. 내가 한번 보여 주지!” 인디언은 주머니 속에서 25센트 짜리 동전을 꺼내 아스팔트 위로 던졌다. 그 동전이 아스팔트 위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까지도 동전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내 한 사람이 25센트 짜리 동전을 주워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때 인디언이 백인 친구에게 말했다. “자 봤지? 이 50센트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는 귀뚜라미 소리보다 더 크지 않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나 이외에는 아무도 귀뚜라미 소리를 듣지 못했어. 그건 내가 청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관심사가 다르다는 데 그 원인이 있는 거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했던, 아니 듣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사 1장)은 오늘의 시대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불타는 심장을 갖게 하셔서 세우셨던 선지자들은 그 시대를 바라보며 단순히 탄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도록 하는데 온 마음을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묶기도 했고, 땅에서 뒹굴기도 했으며, 인분으로 떡을 굽기도 했었다. 그리고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아 그들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불일듯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한시도 말씀을 버려 두지 못했다. 그들은 어두운 밤, 하늘 향해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하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과 메시아의 예언의 말씀도 받게 되었다.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에 서있는 오늘의 설교자들에게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귀납적 설교는 한 시대 속에서 난시청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며, 현대의 설교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는 설교 방법론이다.14) 다음 호에서는 귀납적 설교의 실제적인 구성방법과 설교작성의 실제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위대한 우주의 드라마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그 드라마를 채우도록 요청 받고 있는데, 그 드라마의 일부를 구성하여 이어 나가도록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금껏 세움 받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참으로 놀랍게 그 역할을 감당해왔다. 이제 그들은 허다한 증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거대한 통치하심 앞에서 모두는 숨을 죽인 채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드라마의 한 부분 한 부분, 한 동작 한 동작을 주시하고 있다. 우리 설교자들은 거룩한 상상력과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일깨워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 앞에 모두를 세우도록 세움 받은 존재들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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