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적 석의와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2015-12-15 22:33:25 송영목 목사(고신대 대학교회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최근에 호주 시드니 소재 무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레엄 골즈워디의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갗(2002. 성서유니온선교회.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가 출간되었다. 부제는 ‘강해설교의 성경신학적 적용’이다. 복음 중심의 성경해석으로 유명한(참고. p. 143) 골즈워디는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큰 맥을 같이하는 탁월한 개혁주의 성경주석-설교학자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전제주의적-고백적이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리적이며 학적으로 글을 전개한다는 데 있다. 골즈워디는 우리 시대의 두 극단을 극복한 사람이다. 하나는, 개혁주의 석의와 설교를 표방하면서도 판에 박힌 듯한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으로 인해 ‘고백적 입장으로만’ 일관하여, 참으로 동의하기 힘든 과격한 주해-설교가 되고 마는 극단이다.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성경신학에 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극단이다. 실제로 한국 성경신학회에 참석해 보면 역사를 자랑하는 비교적 큰 보수 장로교단의 학자들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데, 이 현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칼빈에 관한 연구를 칼빈주의자보다는 바르트주의자와 같은 다른 진영의 학자들이 더 많이 하는 현상과 흡사하다. 왜 이런 기현상이 발생할까? 복음주의가 성경신학을 감당할 힘을 상실했는가, 아니면 현대의 조류를 따라가다 그것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인가?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현대 성경 해석 방법론 논의가 미미한 것을 볼 때 후자는 아닌듯하다. 그 원인을 한국에서 성경신학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어서 가르치는 풍토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 (One Bible)에서 나오는 통전적인 것이다. “나는 신약을 가르치기에 혹은 나는 구약을 가르치기에 다른 편 성경은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반쪽 신학이요 진정한 성경신학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서 한국적 성경신학이 세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즉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정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쪼개는 데 일가견 있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한국인은 그 전통상 어떤 경전의 권위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통째로 닳도록 읽고 암기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식 성경신학은 바로 성경 66권 전체를 한 줄로 꿰어서 읽고 또 읽어서 간본문성에 충실한 성경신학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성경신학,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말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성도에게는 어려운 용어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선입견을 가지고 어려워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성경을 매일 읽고 삶 속에 적용하는 주석가요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골즈워디의 글의 안내를 받으면서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전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는 여행을 떠나보자. 이 고단한 여행을 시도하는 목적은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성장만 이 시대에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은 능력의 말씀을 통한 부흥이 근원적인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1. 성경신학적 설교의 정의와 필요성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차적으로 주어진 그 시대에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모든 역사 과정에 걸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특정한 성경 이해 방식이다. 성경신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는 관점은 ‘구원사’ (historia revelationis)이다. 이것은 구원은 역사의 주관자요 의미 부여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역사하실 것을 틀로 하여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신학 혹은 구원사를 무시하는 설교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강해설교라는 큰 우산 개념(umbrella term) 하에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단지 위대한 신앙 인물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교회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돕는 것은 다르다. ‘신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설교학의 주제가 변천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불행하게도 설교자 자신의 준비 혹은, 설교의 유형과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부차적인 주제에 치중하는 듯하다. 하지만 설교학이 신학의 꽃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성경신학적 주해와 적용에 관한 원칙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 계시사의 진가를 모르는 이는 신학의 꽃을 피울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풀기 어려운 문제-숙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다고 하면서 단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윤리적 모범을 보인 선생이나 위인으로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성경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주목해야 한다.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신약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성취된 구원 사역의 중심에 예수님의 윤리적인 모범이나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천국확장을 위한 공사역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위(Jesus' sitting on the heavenly throne)가 있다. 즉 성경의 윤리와 모범이 그리스도 안에 결정적으로 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보다 우선적일 수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요 은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윤리적 삶이 나 사명 보다 우선적이고 선행하는 것이며 기반이 된다. 성경신학적 주해와 설교는 성경 전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다양한 문학 장르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말씀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을 전제로 하여, 설교자 개인의 경험과 예화 사용을 자제하고,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강조하고, 관련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경적 주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없다면 신약조차도 율법주의적 권면으로 들려질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삼위 하나님이 우주 만물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신 책이다. 자기 계시의 핵심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이 자리 잡고 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66권 전체가 한 본문을 성경신학적으로 주해함에 있어서 문맥이 되어야 한다. “문맥이 없는 본문은 핑계다”(A text without its context is a pretext.) 성경신학과 관련 있는 간본문적 해석은 문맥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 성경 전체의 문맥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따라서 ‘요한신학’, ‘바울신학’, ‘누가신학’, ‘소선지서의 신학’, ‘오경신학’이라는 말은 이런 성경 저자들에게 신학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성경과의 관련성을 약화시키는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다. 예수님과 사도의 설교의 전통 (고전 1:23; 2:2) 그리고 교회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를 계속 붙잡아야 한다. 성경 독자와 설교 청중이 누구를 대면하도록 할 것인가? 아브라함인가? 오래 전 미국의 알쏭달쏭한 어떤 신앙의 위인인가? 아니면 변함없는 구원의 주재이신 하나님인가? 이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갖추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2. 성경신학에서 간과된 것: 신약 안에서의 계시의 전진 신약을 석의하거나 설교하면 본문으로부터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계시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신약의 큰 세 가지 특성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는, 신약 안에서 발견되는 신구약의 중첩현상이다. 구약과 신약이 중복되는 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많은 부분을 오해하게 되며,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시점과 우리 시대 사이의 이천년 이라는 간격이다. 그러므로 신약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막 16:15-20절의 예수님의 예언은 더 발전된 계시인 후대의 사도행전에서 일차적으로 성취(fulfillment)되었다. 물론 이 예언은 계시록 21-22장에서 완성(consummation)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막 16장의 승천 직전에 주신 예수님의(상징이 강한) 예언 중 일부는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신약 자체가 신약의 계시사의 전진의 큰 분수령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사건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특히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 이후에 제자들의 복음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의 구원 역사는 성령이 주도하시기 보다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보아야 한다(막 16:20). 그리스도의 천상의 통치는 십자가와 부활을 클라이맥스로 하는 지상의 통치에 근거하지만 영광과 방식 그리고 범위에 있어서 더 진전된 것이며 그 이상이다. 현대의 성도는 신약 성경 기록 당시(주로 주다해 60년경)보다 더 분명한 계시사적 전망대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3. 구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위한 하부구조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어떤 시대에는 구약을 신약보다 강조한 경우가 있었고, 어떤 때는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약을 높이고 구약을 낮추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루터가 했던 방식처럼 ‘성경 속의 성경’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며 ‘정경 축소작업’이다. 여기서 구약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 계시의 ‘하부 구조’(sub structure)로 보는 것은 구약을 무시하거나 신약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통시적으로(diachronically) 이해할 때, 구약 계시는 같은 구약 속에서 먼저 성취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약 사건들의 궁극적인 원형(antitype, 혹은 대형, 실체, 실재)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교회를 그 안에 품고 계시는 만유이신 예수님이시다(골 1:16; 3:11). 구원 계시의 전진에 있어서 구약의 모든 구원(과 심판) 사건은 그 원형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기에 ‘하부 구조’로 불릴만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계시의 중심이며, 성경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확고한 지침이다. 예수님과 (단순화시켜서 말할 때) 성경의 양대 구약 성경신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주제’와 ‘새 창조 주제’는 불가분하다. 구약의 구원 사건이 얼마나 다양하고 형형색색의 구조를 가지는가? 그러므로 만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성취되기에 우리가 이해하고 전해야 할 그리스도의 계시는 얼마나 더 풍성한가? 이런 차원에서 성경신학은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단조롭고 빈약한 내용이 아니라 다함이 없는 풍성한 계시를 약속한다. 4. 예수 그리스도: 성경신학자의 원형 (antitype) 신구약 중간기라는 430년이 공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의 경전인 구약을 가지고 자신을 들추어내어 깨닫도록 설교하셨다 (눅 24:27, 44-47).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원형적 렌즈(antitypical lens)를 통해서 구약의 모든 구원사를 탁월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신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회복된다. 이것은 피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의 실존적인 변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의 본질적 내용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원형이신 예수님이 밝히는 점진적 계시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 (명백하거나 혹은 암시적인) 모형과 원형, 약속과 성취, 문자적 의미와 더 온전한 의미(sensus plenior),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이스라엘과 교회 등과 같은 대칭축들로 나타난다. 이런 대칭축들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풍성한 분이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연대기에 기초한 점진적인 계시사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의 기능을 경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닌다(p. 163).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에서 예언되었지만, 유대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한 급진적인(?) 방식이 아닌가? 이런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계시의 전진을 시간적으로 고려한다고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공시적으로 (synchronically) 초공간적이며 초시간적인 원형이시다. 예수님은 설교하신 후 청중이 은혜를 받았는지,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었는지, 청중이 듣기에 부담없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산뜻한 스타일이었는지에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대신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에 따라 성육하셔서 새 이스라엘을 새 에덴으로 인도하실 주체가 되심을 계시하실 뿐 이었다. 예수님이 ‘성경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분명히 가장 탁월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현대 성경학자처럼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방식으로 구약만 혹은 신약만 다루시지 않았고, 구약의 성취로서 신약 계시를 주신 로고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는 유대주의에 대한 연구, 랍비 유대교, 유대 묵시문헌에 대한 연구를 하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말씀과 사역으로 스스로 구약 계시의 성취자이심을 증명하신 예수님은, 그 원칙과 목적에 있어서 구약의 여호와께서 시행하신 구원과 신원의 연속선상에 서 계신다. 마치 복음서에서만 120회 이상 언급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가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이 시행하신 구원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구약에서부터 시행하신 것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초시간적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의 구속사와 신약의 구속사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도 있는데, 특히 구원을 이루는 방법과 범위에 있어서는 급격히 심화되고 상승한다. 여기서 ‘범위’라는 말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만유이신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대상-영역이 우리의 영혼은 물론 삶의 모든 부분을 아우른다는 차원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모퉁이돌은 움직이지 말고, 다각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포괄적인 동시에 매우 실제적이고 역동적이다. 놓치지 말 것은 포괄적이고 역동적이되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른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계시를 주신 방식 또한 다양하다. 비유, 모형, 은유, 설교, 강화 등. 복음서에 나타난 다양한 문예적 표현들의 이면에 예수님의 뜻과 그 뜻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표현이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나오면서 성경신학적 이해와 설교는 현대 교회가 자초한 정경 축소라는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활로이다. 우리의 신학교 커리큘럼이 이런 핵심적인 사안을 곁에 둔 채 맴돌고 있어서 너무 주변적인 것이 아닌가? 교회의 성경공부나 소모임의 성격은 이런 비평에서 예외인가? 시카고 선언문 제 3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의 사역이 성경 전체의 초점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윤리론은 기독론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하는 복음이고, 진정한 은혜다(참고. 아드리오 쾨니히를 인용한 p. 156-159).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신약의 권면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이다. 실제로 그리스도 없는 주석과 설교를 듣고도 현대의 성도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은혜는 아마도 감동적인 예화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그 근거를 추적하기 힘든 것이리라. 한 본문을 다룰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의 관점 하에서 다른 본문과의 간본문성을 보이도록 구원사의 맥락에 놓아야 한다. 바로 그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현대의 우리의 삶의 정황은 또! 하나의 적실성을 가진 실존적인 간본문(proper-existential intertext)이 된다. 바로 그 때 창조와 타락을 창조이래로 동시에 거듭해온 역사가 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승리의 복음의 깃발을 흔들며 뻗어가는 천국에 동참할 것이다. 말씀의 주해와 설교, 성경 공부, 교회 교육, 그리고 더 나아가 심방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해명하는 영원한 생명이 달린 일이다.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탄식이 일어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