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요4:23, /행8:26-40 2015-11-24 13:26:08 요즈음 텔레비전과 SNS는 온통 소비자가 왕이라고 합니다. 이런 물결이 항상 교회안으로도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배당에서도 교인이 소비자이고 교인이 왕입니까? 예배 시간이 교인을 개인적으로 높이는 시간입니까? 한동안 구도자 예배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열린 예배라는 단어도 한동안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구도자 중심의 예배여야 합니까? 우리는 구도자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도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구도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예배 즐겼는가? 오늘 예배에서 얻는 것이 있는가? 예배드리고 은혜를 받았는가?’ 이런데 신경 쓰기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믿습니까? 예배는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여야 합니다. 예배는 교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복음송은 거의 다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뭘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주님은 항상 날 위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 회개와 거룩, 징계의 채찍, 사랑의 채찍을 언급하는 복음송은 거의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사라지고, 하나님 경외와 거룩을 언급하는 설교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설교와 찬양과 기도와 예배 전체가 다 자기 중심, 소비자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가 교인 중심이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는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무감각합니다. 말라기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덤덤하고 뻔뻔합니다. 말라기1장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970년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 부흥 운동 때 켄로(Kenlaw) 총장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 들어오셔서 줄곧 함께 계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과 구별시켜 놓으시고 세상 문을 닫아 버리심으로 하나님께서만 말씀하신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하셨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교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예배당을 떠나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전된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1860년 웨일즈 부흥 운동 때도 “여호와의 영광이 지나가고 우리는 바위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보면 다 죽으니까, 모세가 바위틈에 숨고 여호와의 영광이 지나간 것처럼 교인들이 바위틈에 숨고 여호와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 같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참 예배입니다. 형식과 의식의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예배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예배 때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요한복음4장23절 말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이 아버지가 찾으시는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반드시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렸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영과 진리’를 ‘in spirit and in truth.’로 번역합니다. 영안에서,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장26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성전에서 제물을 가지고 와서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리의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형식적인 예배를 질타한 구절이 여러 성경에 있습니다. 우선은 창세기4장 4-5절에서 아벨의 예배와 가인의 예배를 통해서 받는 예배와 받지 않는 예배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1장11-17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시대에서도 잘못된 예배를 드림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아울러 소 선지자 시대에도 보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음을 호세아서8장과 아모스5장과 미가서6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호세아8장 11-13절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미가서6장6-9절 말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5장 23-25절 말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과 삶을 영위하는 장막, 즉 제단과 장막을 함께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제단과 장막을 함께 하여 일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의 자리를 옮길때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삶과 제단을 구분하지 않고 항상 같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말의 시대가 가까이 도래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찾으시느냐 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 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요한복음4장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려면 어떻게 드려야 할까?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오늘 읽은 사도행전8장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8장26-40졀 말씀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빌립을 불러서 내시가 가는 그 길로 가라고 일러주십니다. 아무런 이유를 말씀하지 않고 그냥 내려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아무런 것도 모른채 성령님이 하라고 하니까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래서 내려 가보니 에디아오피아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수레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빌립에게 내시가까이로 가라고 재촉을 하였고 빌립이 내시가 타고 가는 마차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와 빌립이 대화가 시작되었고 대화가 계속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배드리러 오신 여정에서 예배자는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 예배는 성심성의껏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 27절 말씀, “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가 정확하게 나온 자료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가는 거리이상이 되는 것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도 다섯시간 족히 소요되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내시가 무엇을 타고 이곳까지 뭐하러 왔습니까? 예배드리러왔습니다. 28절에 보면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며칠이 소요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수개월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니 자기 나라에서 드리면 되면 장소가 중요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마도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온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그렇게도 더운 지방에서 병거를 타고 그렇게 멀리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다는 것은 성심성의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도 멀리서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안강, 고령, 성주, 구미, 군위등 먼 곳에서 오시는 성도들도 계십니다. 차를 타고 30분 이상 한 시간씩 오신다는 것 자체가 벌써 성의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예배는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삶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헌금을 준비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심성의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한 번 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사치하에 있을 때입니다. 요셉 케이보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일이면 3시간을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가서 2시간 넘게 드리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3시간 걸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주일 마다 그렇게 힘들게 먼 길을 가시는 것을 보고 요셉 케이보가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곳에 가야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일 아침 3시간이 걸리는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성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겸손한 예배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일국의 재상입니다. 즉 우리나라같으면 경제기회원장관입니다. 큰 권세를 가진 벼슬이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국가의 재정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까지 병거를 타고 예배드리러 왔다는 것은 겸손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빌립을 가사로 내려가는 길을 가라고 해서 가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내려가면서 그냥 졸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까지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빌립이 가까이 다가가서 묻습니다. 30절 하반절에 보면, “읽는 것을 깨닫느냐?” 이때 내시가 대답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의 뜻을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묻는 것은 쉽지만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과 관계있습니다. 그런데 내시는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내시에 비하면 빌립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는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자기에게 세례까지 달라고 간청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잠언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항상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주시고 예배도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려면 주님을 사모하는 갈망함을 가져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간다게 정부의 재정을 맡은 내시가 예배드리러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것이 예배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증거요, 그렇게도 험한 광야길을 덜거덩거리며 달리는 수레 안에서도 성경을 읽었다는 것은 흉내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먼길 갈때에 좌우에 펼쳐지는 풍경을 관찰하고 관람하면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고 먼길 가다보면 잠도 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 피곤합니다. 그런데 내시는 진리탐구에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도자 빌립이 가까이 왔을 때 자기 옆에 올라앉으라고 하고서 자기가 읽고 있는 성경내용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배우려고 하는 열망, 알고 믿으려고 하는 열망이 돋보입니다. 이런 갈망함을 갖고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말씀이 갈급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갈급한 마음, 사모하는 열정을 갖고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쳐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순간에 깨닫고 곧바로 빌립에게 자청하여 물세례를 받아 구원받았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갈망함이 없으면 결국 영적으로는 죽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어떤 갈망함이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갈망함을 갖고 오셨습니까? 오늘 예배를 통하여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기다렸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39절에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과 함께 내시가 물세례를 받고 올라오니 하나님이 빌립은 데려가버렸습니다. 내시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내시는 기쁜 마음으로 그 먼 길 자기의 삶의 자리로 갑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실 때 기쁨으로 돌아가십니까? 기쁜 마음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리고 감격함이 없다면 화나고 짜증하고 기분이 나쁘고 미운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23-24절 말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오해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25절에서 말씀합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오늘 날 우리들에게, 아니 나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가졌던 예배자의 정신과 마음가짐을 갖추고 예배드립니까? 자신의 예배를 돌아봅시다. 예배가 얼마나 형식적인지, 예배 받으시는 자와 상관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됩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로서 성심과 성의가 담긴 예배자가 됩시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예배자가 됩시다. 항상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예배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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