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 대기업 저축 돈 1000조원과 출 12:35-36
2015-09-11 11:18:19











목사는 투사 성도는 혼돈 -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속(續) 평신도를 깨운다 9(신명기 19:1~21)

천정근 yasnayapalanya@gmail.com

1.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의 도구로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데 화두로 사용되는 질문을 공안(公案)이라고 합니다. 그 중 '뜰 앞에 잣나무(庭前栢樹子)'라는 공안이 있습니다. 한 제자가 조주(趙州,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達磨)대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던 겁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진리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때 선사가 대답해 준 말이 '뜰 앞에 잣나무'였습니다. 그 대답 자체가 화두이고 공안인 셈입니다. 본격적으로 이 얘기를 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제가 풀어 보려는 해설도 사실 이 얘기의 정수는 아닙니다만, 제 나름대로 '뜰 앞에 잣나무'란 실존하는 외부적 존재라고 해 두겠습니다.

본래 불교의 가르침은 '일체 유심조(一切有心造)', 곧 모든 세상의 더럽고 혼탁한 현상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 이 모든 인생의 욕망과 그로 인한 갈등과 쟁투와 괴로움이 전부 다 마음이 빚어내는 망상임을 확철히(!) 깨달을 때 망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진리의 자유로운 경지, 곧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래 안식의 쉼(평화)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피력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말씀의 요체일 겁니다. 여러분도 한 번 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불교의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經集)>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의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사자는 소리에 개의치 않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바람은 그물 따위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연꽃은 진흙 속에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사자에 대한 얘기겠습니까? 바람에 대한 말이겠습니까? 연꽃에 대한 이야기겠습니까? 마음이 빚어내는 망상을 벗어나면 지금 온갖 고통과 괴로움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뜰 앞에 잣나무"라는 화두는 '일체 유심조'를 다시 의심하게 하는 화두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고 생각이라는데 과연 그러하냐? 그러고 보면 그것조차 망상(생각)일 뿐이라는 거지요? 아무리 모든 것이 마음의 감성과 생각의 이성이 빚어내는 공허(空虛)의 교향곡이라 할지라도 "뜰 앞에 잣나무"처럼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는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 무성한 잣나무는 내가 그 잣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생각해서 녹음으로 드리워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을 좀 더 진전시켜 보면, 한낱 뜰 앞에 잣나무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라면? 괴롭게 하는 원인이라면?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악이라면? 악의 세력이라면? 그것은 분명 나에게 영향을 미치겠지요? 그것은 내 마음의 발산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좋게 생각한다고 해서 악이 선으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존재하는 악을 없는 것으로 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내 마음이나 생각과 상관 없이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존재할 뿐더러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요? 그건 순서가 틀린 겁니다. '일체 유심조' 다음이 '뜰 앞에 잣나무'지, '뜰 앞에 잣나무' 다음에 '일체 유심조'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유심조’와 ‘뜰 앞 잣나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상충되는 이 세계의 분명한 두 진실입니다.

2.

이쯤 되면 여러분들은 오늘 천 목사가 도대체 설교를 어떻게 끌고 가려고 하는가, 그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무엇인가, 의구심이 드실 겁니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기사를 한 꼭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난 28일은 조계종 100여 개 선방에서 2천여 명의 선승들이 3개월 간 두문불출하고 참선만 하는 하안거를 마치는 날이다. 이날 설악산과 동해가 마주한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불교의 조종을 경고하는 죽비 소리가 울린다. 신흥사, 백담사, 건봉사, 낙산사 등 강원도 동부권 선방들에서 수행 정진한 승려들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다.

하안거 해제 법문을 할 이는 설악권 본말사의 정신적 지주인 신흥사 조실 오현(83) 스님이다. 그는 만해상과 만해축전, <불교평론> 등을 처음 만들어 불교와 세속의 소통을 이룬 선구자다. 그는 지난 3개월 간 방문을 봉쇄하고 하루 한 끼 식사만 제공 받는 백담사 무문관에서 수행 정진했다.

신흥사가 미리 배포한 법문에서 오현 스님은 3개월 간 앉아 정진한 선승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매를 들었다. 그의 해제 법문은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시작해 소록도에서 봉사한 두 외국인 수녀의 얘기로 맺었다. 선(禪)과 화두가 얼마나 위대한가로 시종일관한 선가의 기존 법문들과는 천양지차였다.

"종교인의 생명은 화두다. 선사들은 서로 안부를 물을 때 화두가 성성하냐, 화두가 깨어 있느냐고 묻는다."

오현 스님이 화두의 중요성으로 서두를 꺼낼 때만 해도, 그렇고 그런 화두 찬양론이려니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 활동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갈 때 세월호 유족의 눈물 어린 고통의 '순례 십자가'를 비행기에 실었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네 차례나 세월호 유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희망을 잃지 말라며 사랑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지난 3월 로마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첫 물음도 '세월호 문제'였다고 한다. 사실상 세월호가 교황의 방한 내내 화두였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데 지난 결제(3개월 전 하안거 첫 날) 때 우리 스님들의 화두는 무엇인가. 무(無) 자 화두인가, 본래면목(본래의 모습)인가, '뜰 앞의 잣나무'인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이 모두 천 년 전 중국 선사들의 산중문답이니까 말이다."

그는"화두에는 활구(活句·살아있는 말)가 있고 사구(死句·죽은 말)가 있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두는 살아 있는 현재의 문제이고, 우리 선승들의 화두는 천 년 전 중국 선승들의 도담이어서, 시간적으로 천 년의 차이가 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평생 참선만 하며 존경 받던 어느 노스님은 어린 시절의 제게 '화두 들고 참선 공부하다가 죽어라'고 당부했다. 그때는 '예' 하고 대답했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참선해 빨리 깨달아 그 깨달음의 삶을 살아야지 참선만 하다가 죽으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 노스님은 고대 중국 선승들의 화두에 중독된 것이 분명하다. 마약중독자가 중독된 줄 모르는 것처럼 화두 중독자도 자기가 중독된 줄 모르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는 깨달은 선승들은 많은데 깨달음의 삶을 사는 선승은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며 "선원이나 토굴에서 참선만하며 심산유곡에서 차담과 도화를 즐기며 고담준론과 선문답으로 지내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고 해서 깨달음의 삶을 산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화두를 타파하면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부처가 왜 존재하느냐"고 물었다.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불심의 근원은 중생심이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는 것과 같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 주고 병을 치료해야 한다. 부처는 중생과 고통을 같이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과 고통을 같이 하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선승들의 화두도 우리 시대의 아픔들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며 "천여 년 전 중국 신선주의자들, 산중 늙은이들이 살며 뱉어놓은 사구를 들고 살아야 하느냐"고 질책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기 혁신이 없는 교황청은 병든 육체와 같다고 비평하고 일반 성직자는 정신적 영적 동맥경화에 걸렸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바티칸 관리들의 위선적인 이중생활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실존적인 정신분열증이라고 비판하고 권력에 눈 먼 성직자들은 영적 치매에 걸렸다고 분노했다는데, 이 분의 파격적인 발언을 그냥 남의 교단 일로만 들을 일이냐. 이 발언을 통해 우리들 자신을 냉엄하게 둘러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현 스님은 한센인들이 사는 소록도에서 평생 헌신하다가 나이가 들자 남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올 때 가지고 온 가방 그대로 말 없이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두 수녀의 얘기를 들려 주며 "이렇듯 종적을 남기지 않고 사는 삶이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처의 삶을 살지 않고 부처가 되겠다고 죽을 때까지 화두를 붙들고 살며, 그래 가지고 부처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고, 자기 혼자 부처가 되어서 무엇 하냐"고 꾸짖으며 죽은 불교가 아닌 산 불교를 주창했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다."

- <한겨레>, 2015년 8월 27일자 기사: 선승의 죽은 수행 꼬집은 오현 스님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 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여기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세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지요? 1) 무죄한 살인자를 구제하기 위해 도피성을 마련하라. 2) 그러나 악의로 살인한 자라면 반드시 보복하라. 3) 살인으로부터 확대된 법리로 모든 먹고 사는 경제의 기초 곧 조상이 정해 준 토지의 경계를 지킬 것과 나아가 여기로부터 비롯하는 모든 악, 모든 죄와 그에 얽힌 거짓에 대하여 그들이 악의로 행한 그대로 갚으라는 명령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러한 악과 죄와 거짓이란 분명히 존재하고 지속적으로 악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평화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 페미니즘,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개혁주의자, 자유주의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무나도 분명히 존재하는 악과 죄이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그것들은 정상을 참작하여 구제를 받아야 할 자들을 제외하곤 반드시 그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가 됩니다.

이 원리, 곧 죄와 악과 거짓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가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지속적으로 세상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원리는 신약에 와서도 바뀌는 게 아닙니다. 물론 신약시대의 사회구조나 시대상 자체가 이미 구약시대의 율법을 그대로 집행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정통파라할지라도 율법의 실천에 대한 새로운 해설과 해법이 필요해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율법이 사라졌다거나 폐해졌다는 게 아닙니다.(마 5:17)

동시에 모세 율법을 문자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원리이지요? 그에 입각해 있음입니다. 시대가 변했든 사회가 변했든 구조가 달라졌든 죄와 악과 거짓이 용인될 수도 없고 용납될 수도 없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그것을 용인하고 용납하고 어쩔 수 없다고 한들 죄와 악과 거짓의 영향력이 그런 사정을 봐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문명개화했기에 그것들을 구약시대만큼 확실히 제해 버리지 못한다면, 그만큼 이 세상은 종말론적인 말법(末法)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정을 간직하고, 이런 정신을 고수하고, 이러 훈육과 교훈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몽시키고 이끌어 가야 할 기관은 결국 종교(교회)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법에 의지할 수도 없고, 경우와 인정과 의리에 호소할 수도 없고, 양심과 도덕과 윤리에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세계의 이 원리를 자각하고,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더 이상 현실의 제도로 구현할 수 없게 된 이 원리는 그들의 믿음 안에서 조상들의 경계석처럼 그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가 곧 사랑이고, 화해이고, 용서이고, 그 사랑과 화해와 용서만이 처음 목적하는대로 이 땅에서 죄와 악과 거짓을 제한 하나님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에 반한 사상이 싹트고 창궐해 자라났지요? 그것이 바로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외치는 죄인들과 악인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과실"(창 3:6)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에 매혹됩니다. 이른바 목적 없는 평화주의, 목적 없는 아나키즘, 목적 없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같은 것들입니다. 세상에 목적 없는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목적 없는 무정부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목적 없는 화해와 용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원리와 그에 따르는 진리를 맡은, 그토록 막중한 사명을 지닌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 정신에서 힌트를 얻은 새로운 인간들의 새로운 강설이 득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믿음 말고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과 용서와 관용해야한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믿음을 교묘히 왜곡시켜 버립니다.

본래 믿음이건 소망이건 사랑이건 각기 다른 출처에서 나온 다른 장르가 아닌데도 그들은 믿음을 따로 떼어 거기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을, 예수를 잘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고 화해고 면죄되는 겁니다. 그러니 특히 사랑(용서)은 언제나 자신들(혹은 자기편)의 면죄에 이용되는 실용적인 개념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믿음으로 결산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인격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원리를 왜곡시킨 그 대가를 다시 자기들이 받게 됩니다. 그 결과 그토록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사랑에 인색한지, 인색하게 변해가는지, 오직 자기들만 모르게 됩니다.

4.

사도 바울은 '사랑'을 설명하는 첫머리에서 이렇게 '사랑의 왜곡'에 대하여 반박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피상적인 인식의 차원에서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사랑의 증표입니다.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야말로 사랑의 증거가 아닙니까? 그 다음이 더 기가 막힙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주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그러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but have not love)",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걸 정리하지 않고, 그 다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예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인간이 해 보는 모든 거룩한 행위의 시기가 끝나고 시효가 끝나고도 남는 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원리이고 기초입니다. 곧 사람이 행하거나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고, 부단히 다 함께 그것을 추구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며 나가야 그 궁극의 사랑이라는 세계와 맞닿는 것이지, "사랑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거나 "우리는 이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물며 사랑을 빙자하여 죄와 악과 거짓을 사랑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떨까요? 혹은 이런 말을 하면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이런 말씀을 들려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고전 14:8)

5.

최근 들어 우리 믿음의 교회 내에서 저명한 지도자들이 돈·명예·욕망·권력에 얽혀 물의를 빚고, 구설수에 오르고 비난 받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사회에는 그와 동일한 죄와 악과 거짓의 사람들이 마치 우리를 둘러싼 잣나무 숲처럼 무성히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것을 용서한다고 해도 존재하는 악이며 병폐입니다. 그것들은 그와 같은 실존으로 현재하여 우리 교회와 사회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지 않는다 해도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어둡게 하고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부질없고 쓸데없고 불필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의 환경이 돼 버린 악과 병폐에 대하여 우리는 사랑이니 용서를 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사랑과 용서로 악과 병폐가 극복될 수 없고, 설령 우리가 용서한다고 해도 저 무성한 잣나무 숲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바람이 치면 그것들은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향해 쓰러질 겁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토록 중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 지금 무슨 비겁한 변명들이 오가고 있습니까?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인간의 의무이다'라는 설교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타인을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라는 비판 저지용 설교가 난무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돌로 치라"는 말씀은 그 본뜻과 너무나도 다른, 면피용 말씀으로 가공된 전가의 보도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설교한답시고 영감된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도 감동이 하나도 없고 듣기가 싫은 겁니다. 자기 영혼에 감동이 없으니 예배당을 치창하고 목소리를 웅장하게 꾸미고 연출된 분위기로 그것을 메우려 하는 겁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요? 지도자들은 그렇다 치고 평신도들은 심지어 그런 지도자를 욕하면서도 왜 그 자리에 꾸역꾸역 모여드는 걸까요? 친밀한 벗들과의 사교성(교제권) 때문이라고요? 설교시간만 참으면 된다고요?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저는 '투사(投射 Projection)의 전염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투사가 뭡니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대상에게 투사하는 겁니다. 아직 표면에 공개되지 않았을 때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문제가 발생해 세상의 비난과 비판이 쏟아지는 지도자라면 이제부터 그가 하는 모든 설교는 자기변명, 곧 궁색한 자기 투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성추행이든 표절이든 횡령이든, 이제부터 그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자기 투사라는 겁니다. 그러나 지도자들만 그렇게 사는 줄 아십니까? 영과 영은 진리와 거짓을 속일 수 없지만, 자기를 속이는 이러한 지도자들의 투사는 성도들에게 혼돈을 유발합니다. 직관과 분별력에 마비가 옵니다. 자기들 안의 그러한 죄와 악과 거짓에 대한 일깨움이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변명이 일어나고 투사가 발산되고 모종의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목사와 성도가 서로에게 투사하는 거짓과 속임에 의해 서로서로 추켜 세우며 거짓과 속임을 적당하게 유지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 '용서는 인간의 의무'라는 설교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말씀은 실천해서 돌아올 유익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신들의 변명과 비난에 대한 방패로 타인들에게 투사하게 될 때 어떤 유익이 돌아올까요? 이 세계에 만연된 죄와 악과 거짓의 병폐는 누군가를 괴로움과 고통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고달프고 괴롭고 울부짖는 희생자들을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현대사는 어떻게 해 왔습니까? 그것들을 어떻게 청산해 왔습니까?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다', '용서는 오직 인간의 의무'라는 설교에 따른다면, 결과적으로 이 세계는 점점 악화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3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걸까요? "먹는 자"란 믿음의 경지가 높기 때문에 '먹지 않는 자', 상대적으로 믿음의 경지가 낮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이 먹지 않음으로써 먹는 자들보다 믿음이 신실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도의 입장에서 그들은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비판하는 자들은 비판 당하는 자들보다 높은 경지에 있습니다. 곧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비판하는 자들이 높은 것입니다. 만일 죄와 악과 거짓의 병폐로 지탄을 받는 자들이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신다', '용서는 인간의 의무이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적반하장이 됩니다. 곧 믿음이 연약한 자가 믿음이 높은 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수준의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실제로는 자기를 비판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자들은 무슨 말을 들어야 할까요? 그들이야말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자들이 아닐까요? 만일 정직한 영(양심)을 가졌다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비판을 받았을 겁니다. 자기변명에 의한 투사를 그치고 자기 혼돈에서 해방됐을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 믿음이 있는 분들이라면 우리와 우리의 교회와 자녀들을 위해서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양심과 영혼의 직관에 따라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믿음을 위해 자기 집과 소유와 안락함을 버리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아무 할 역할도 없으면서 머릿수를 채워줄 뿐인 객석에 앉아 자기 혼돈을 심판 받지 않는 은혜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혼돈 자체가 다시 교회의 투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왜 오늘날 신새벽부터 세상에 달리 없을 믿음의 모본을 강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 대신 돈과 머릿수의 유치찬란함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인지,

돈과 광고와 요란한 이벤트 하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곳은 언제나 외롭고 쓸쓸하고 형세가 고독한 것인지, 왜 이런 왜곡과 굴절이 발생하는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 잘 헤아리셔야 합니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면서 어찌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어찌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마음의 성찰 없는 자기변명의 투사입니까, 누군가의 자기변명이 투사된 혼돈입니까? 작고하신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수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던졌다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투사입니까, 혼돈입니까? 여러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90년대 똘스또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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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저축 1000조원과 출 12:35-36
김달성


1000조원: 1000조원

이는 오늘 한국 경제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대한민국의 성적표다. 이 대차대조표는 한국자본주의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기도 한다. 이는 2015년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쌓아놓은 저축금(사내유보금)이 1,000조원인데 반해, 모든 가계의 빚이 1,000조원이 넘었음을 말한다. 대기업들의 사내유보금 1,000조 가운데 30대 재벌그룹의 사내유보금은 무려 710조원이나 된다. 이는 작년 한국 GDP 총액 1500조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다.

이런 결과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다. 지난 '60년대부터 형성된 우리 사회의 구조가 작동을 하다가, IMF이후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국민총소득 중 경제 주체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통계로 보면 그 진행 과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지난 1990년부터 2010년대까지 국민총소득 중 정부가 가져간 소득은 거의 제 자리 걸음이다. 그러나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두드러진 대조를 보인다. 가계소득은 점점 준데 반대(1990년 71.5%, 2000년 68.7%, 2012년 62.3%), 기업소득은 점차 늘어났다(1990년 16.1%,2000년 16.5%, 2012년 23.3%).

가계소득이 줄어드는 동안 가계부채는 점점 늘어 이제 그 빚의 총액이 실은 1,100조원을 넘겼다. 가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동안 기업저축은 1,000조까지 쌓였다. 사내유보금은 기업이 거둔 순이익 중 세금과 배당금을 빼고 남은 것을 쌓아둔 자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기업의 금고에 현금으로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설비나 공장 등 실물자산은 물론 각종 금융상품의 형태로도 잠겨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내유보금에는 현행 상법이 적립을 하도록 한 '강제 사내 유보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아무튼 대기업들 특히 재벌들의 배는 병적으로 부풀어 오른데 반해 가계들의 배는 등에 달라붙어있는 몰골이다. 이쯤 되면 기업이 가계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가계가 기업을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본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본을 위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소수의 독점자본을 위해 대다수 일반국민이 살고 있는 꼴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대기업 저축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에게 기이한 현상이 새로 생기고 있다. 소위 '기업금융'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긴 것이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선 가계가 저축을 하고, 기업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생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대기업의 금고에 돈이 쌓이다보니 기업이 거꾸로 돈놀이에도 눈독을 들이고 열중하는 것이다. 생산 활동만큼이나 돈놀이에도 열심을 내는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 생기고 있다. 삼성전자가 좋은 사례다.

삼성전자는 최근 돈놀이로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지난 6월 말 현재 삼성전자의 자산 164조 가운데 현금을 포함한 갖가지 금융자산이 31조나 된다. 상당히 많은 비율이다. 이런 현상은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지난 3월 말 현재 우리나라 10대 재벌들이 갖고 있는 금융자산은 무려 260조나 된다. 이쯤 되면 사내유보금을 잔뜩 쌓아놓은 대기업일수록 이제 생산활동에 돈을 투자하기보다 돈놀이에 더 재미를 붙여 그에 몰두하지 않을까?



1000조 : 1000조라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국은 OECD국가들 중에서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에 속한다(2012년 3위. 참고로 미국은 1등). 이런 결과가 나오기까지 공정한 자유경쟁이 있었는가? 공정한 분배는 어떤가? 기업가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데 반해, 일반 국민들은 게으르고 나태했는가. 아니면 그저 모두가 정직하게 열심히 땀 흘려 일한 결과인가. 가난은 저 못나 그런 거고, 부유함은 저 잘나 그런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부자, 가난한 자는 본래 타고난 것이고, 제 팔자를 따라 사는 것뿐이라는 철학을 가진 분들은 또 이 숫자를 어떻게 읽을까.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커피숍 숫자보다 더 많다는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세계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한다는 한국교회는 그동안 또 무슨 기도를 했나.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요, 부유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굳게 믿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이 결과를 보고 어떤 말을 할까?

여기서 몇 가지 통계를 떠올려 보자.

한국은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OECD국가들 중에서 1위이다. 임시고용 비율은 4위다. 연간 노동시간은 2위다. 2012년 일 년 동안 노동자 한 사람이 평균 일한 시간이 2,163 시간이다.

산재 사망율은 1위로서 해마다 2,000명 이상이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는다.이는 304명이 수장당한 세월호 사건이 일 년에 6-7 번이나 일어나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50%이고(약 900만), 그들이 받는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OECD 국가들 중 최하위다.

중소기업 노동자의 숫자는 전체 노동자의 81%인데, 그들이 받는 평균 임금은 대기업의 절반이다. 그리고 소위 원청과 하청의 임금 격차는 비참하게 크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원청이 100이라면 1차 하청은 그 60% ,2차 하청은 36%,3차 하청은 24%를 받는다.

우리나라 상위 10% 사람들이 일 년 동안의 나라 전체 소득 중 45%를 가져갔다(2012년).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50%에 이르고, 노인 자살율은 세계 최고다.



공정한 분배를 도모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대하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활약하기 때문이다. 기업에게 기업윤리를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가계와 기업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큰 이유다. 그러나 이렇게 극심하게 불평등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가의 역할은 매우 편파적이었다. 이는 IMF이후만 놓고 보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업국가'라는 말이 나오게 된 과정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내렸다. 이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명분은 경기 활성화였으나 결과는 사내유보금만 늘려주었다. 투자는 줄고 오히려 기업저축만 늘었다. 경기활성화는커녕 대기업들의 곳간만 더 채워준 것이다. 낙수효과는커녕 골목상권까지 가로채는 재벌들만 늘었다. 뻔한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은 짐짓 그렇게 하였다. 참고로 지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만 보더라도 법인세 인하로 기업들이 본 혜택은 37조나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사내유보금에 대한 25% 과세 제도를 폐지한 정책이다. 2002년 폐지 이후 기업의 임의 사내유보금이 이제까지 폭증했다. 기업들은 그동안 조세회피 수단으로 유보금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정부 때도 국가가 기업국가로서의 역할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노동자가 구속된 숫자가 역대 어느 정권 때보다 많은 958명이었다는 사실은 그 증거 중 하나다. 이렇게 국가(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사이에 가계의 세 부담은 점차 늘어났다. 낫으로 풀을 깍듯 알게 모르게 일반 시민들의 돈을 걷어갔다. 우리 국가는 독점자본에게 수종 드는 한낱 집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출애굽기 12 장 35-36 절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5-36)

이는 히브리 노예들의 애굽 탈출 역사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 번역(개역개정판)은 마치 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 같다. 성경 원문의 의미가 생생하게 전달되기에는 좀 미흡하다. 이에 비해 같은 구절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이 더 낫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일러 준 대로 에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내라고 하였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에집트인들에게 환심을 사게 하셨으므로 에집트인들은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내어 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에집트인들을 털었다."(공동번역성서 출 12:35-36)

구약성서의 중심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 이야기는 마치 교향곡의 주조음처럼 구약성서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된다. 창세기도 어찌 보면 출애굽 사건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애굽 탈출 역사 과정에서 홍해가 갈라진 일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대목이다.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노예주들에게 금붙이와 은붙이와 옷을 요구한 일이다. 그들은 당당히 요구했다. 오랫동안 종살이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억압당한 입장에서 노예주들에게 떳떳하게 금과 은과 의복을 요구했고 받아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운 지도자 모세의 가르침에 따른 행동이기도 했다.

그날 히브리인들은 금과 은(돈)을 빌린 게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훔치거나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자신들의 몫을 당당히 요구해 받아내는 행동을 했다. 그동안 노예로 살면서 받지 못한 임금을 받아낸 것이다. 신령하신 야훼 하나님은 지극히 물질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주 일상적인 임금 문제에 세심하게 개입하신다. 탐욕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라는 기초 위에 쌓아 올리는 사랑을 위하여. 세상의 진정한 평화(샬롬)를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씀(道, 로고스)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그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셨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정의 없이는 실현이 되지 않는다. 정의(Justice) 없는 사랑은 마치 뼈 없는 인간과 같다. 그런데 정의의 알맹이는 '경제 분배의 정의'다. 1000조: 1000조 현상은 불공정한(정의가 없는) 분배가 낳은 산물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의 성령께서도 역시 이 비뚤어진 현실(계급적인 사회는 노예제시대인 출애굽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슬이 보이느냐,보이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다) 에 개입하셔서 공정한 분배-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활동하신다. 물론 그는 사람을 통해 일 하신다. 제 몫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감동(깨달음)하사 그동안 받지 못한 금붙이, 은붙이를 받아내도록(회개하도록) 역사하신다.

이렇게 분배의 정의가 실현돼야 나라 경제의 체질이 바뀌고 강건해진다. 일반인들의 소비가 늘어나고 바닥 경제가 살아난다. 온몸에 피가 돌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제 세포들이 활성화되고 에너지는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이른바 ‘낙수효과’란 독점자본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건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도 없고 우리 경제에도 없다. 경제에서 윗목이 따뜻해지면 아랫목도 저절로 따뜻해진다는 논리보다 더 허구적인 것도 없다. 우리는 온돌에서 살아봐서 잘 안다. 온돌은 아랫목이 먼저 따뜻해진 뒤에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사실을.

아무튼 성령께서는 예배 때 집중적으로 감동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물론 노동 현장이나 저잣거리에서도 활동하신다. 바람 같은 성령은 사람 속에, 사람들 사이에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약한 사람들이 서로 연대할 때 그는 더욱 역동적으로 역사하신다. 아무튼 불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소명을 따라 자기의 일터나 처소에서 성령을 좇아 활동하게 된다. 비둘기 같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배의 정의-사랑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견인하신다. 물 같은 성령께서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세상에 확대되는 일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신다.

여기서 다른 길로 가면 미신이 된다. 미신에 빠지면 평안과 구원은 없다. 물론 ‘칭의’도 없다. 오히려 고통과 저주를 불러들이게 된다. 예를 들어 , 만약 출애굽 당시 어느 히브리인이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만 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미신이다. '주인이 알아서 줄 줄 믿습니다'하고 기도만할 게 아니라 당당히 나아가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저의 노예 신분을 노예주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애굽에 주저앉아 밤낮 부르짖으면서 기적이나 바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 말이다. 이는 애굽에서 탈출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그냥 개인적 신분상승의 기적이나 바라는 믿음이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말고 그냥 긍정하자. 그리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고 여기서 귀족이 되는 꿈을 꾸자, 하고 애굽에 안주하는 신앙도 허왕되기는 마찬가지다. 청춘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은 애당초 아픈 것이니 고통을 인내의 믿음으로 감수하자며 자위나 하고 있는 노예도 미혹된 거다.

금, 은은 영적인 것이라며 현실 도피하는 ,그래서 결국은 지배계급을 이롭게 하는 영지주의의 후예들도 미신 신자다. 금, 은붙이 요구할 생각은 말고 그저 노예의 양심을 갖고 선하게 살자던지, 노예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요 섭리이니 신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자고 다짐하는 사람의 믿음도 헛된 믿음이다.

노예주에게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며, 금과 은을 요구하는 노예들을 책망하고 저주하기도 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도 미신 신자다 . 그와 같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예들에게 무료급식을 하거나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칭찬하나 금과 은을 요구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병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세상 종말이 곧 올 텐데 웬 금, 은붙이를 요구하고 난리냐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교인도 미신 신자다. 그런가하면 좋지 않은 모든 현상의 배후엔 마귀(귀신들)가 있기에 귀신 쫓는 일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며 무슨 기압을 주듯 기도를 하는 목사들은 기독교 무당이다.

안전시설이 미비된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산재를 당해 반신불수가 된 노동자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우울증을 앓는 그 아내를 놓고 귀신을 쫓는다며 설치는 목사를 본 적이 있다. 한편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금가루를 받자며 , 예배당에서 두 손을 벌리고 기다리는 무리, 그러다가 쓰러지거나 종교적 엑스터시에 들어가기도 하는 무리, 황홀경에 빠져 넋두리 같은 예언이나 방언을 하는 무리, 그 옆에서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돈봉투를 들고 줄을 서는 무리 ,그들 목사나 교인들이 보여주는 믿음도 역시 미신이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표를 달았지만 속은 종교의 영(미혹의 영)을 받은 종교인일 뿐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주로 지배계층의 이익을 대변해온 신학자들이 적당히 화합과 평화를 논하며 암호 같은 낱말들로 전개하는 신학이론도 결론은 미신인 경우가 허다하다. 대개 히브리 노예들에게 금과 은을 요구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내세나 바라보며 애굽의 체제에 잘 적응하라는 식의 논리를 피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대다수 회중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권력을 차지한 소수는 미신의 소리를 마구 해댄다. 교인들을 한쪽으로 몹시 기운 운동장 같은 현실에 무조건 순응하는 사람으로 길들이면서 부자들이 던져주는 돈(헌금)으로 배 불리는 일을 하늘이 준 사명으로 믿고 그들은 열심히 뛴다. 각종 헌금을 바쳐가며 그런 소리를 듣고 아멘을 연발하는 가난한 교인들도 미신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다.

성경은 믿음의 성격을 문제 삼는다. “네 믿음이 능히 너를 구원하겠느냐?”고 묻는다(약2:14). 진정한 평안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과 헛된 미신을 성경은 선명하게 분별하고 구별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을 제시했다. 칭의稱義-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믿음이다.(롬6:1-11) 이 믿음은 죄에 종노릇하는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 살게 만드는 능력이다. 노예주처럼 탐욕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노예처럼 착취당하며 사는 사람도 옛사람이다. 따라서 그 옛사람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남을 탐욕적으로 착취하는 삶도, 남에게 착취당하는 삶도 아닌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의 착취구조를 변혁하는 삶을 성령을 좇아 살게 된다. 이는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만 얻는 게 아니다.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게 더 본질적인 칭의다. 의(디카이오쉬네)란 본질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교인(목사)이 만약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습관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 신분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 짐짓 육신적 욕심을 좇아 성령을 거스르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면서도 돌이키는 회개가 없는 사람은 그 신분을 상실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장에서 칭의-구원의 반열에 있던 신자가 중도에 탈락되는 사유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칭의는 방종한 삶을 허가하는 면허증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칭의의 은총은 연약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사랑의 이중 계명’을 이루도록 하는 능력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 현실을 보면 절망적이다. 그 현실의 속내를 알수록 무력함에 빠질 만큼 절망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쉼 없이 임하시기에 절망을 넘어서게 된다. 이 세상을 새롭게 빚고자 온몸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오래 굳어진 물신주의 현실은 마치 생명 길을 막아 선 큰 바위 같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하고 육중한 바위라도 쪼개지는 수가 있다. 정으로 바위 위에 구멍을 내고 , 그 구멍에 나무를 박아놓는다. 그리고 부드러운 물을 수시로 그 나무에 부어준다. 인내를 갖고 구멍을 연달아 내며 이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어느새 큰 바위는 뻐개지고 만다.

출애굽 같은 대대적인 변혁을 위해서는 바위에 구멍을 내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의 출애굽 은총의 목적은 돈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하는 삶과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오로지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생산관계 방식은 밀어내고, 사람들의 건전한 필요와 욕구 충족을 위한 생산관계 방식을 채택하는 사회다. 구멍을 내기 위해 지금 우리는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다.

가령, 노조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것이다. 조직률이 10%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 노조조직률을 더 높이는 일이다. 각자 자기의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북유럽 국가들(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노조조직률은 50-70%나 된다. 그리고 독일 같은 '노사공동결정제도'가 마련되도록 힘 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해고, 근무 규칙, 부서 이동 같은 사안들은 '직장평의회'에서 노사가 논의하게 된다. 또한 노동자 대표가 이사로 들어가는 감독이사회에서는 사장 선임, 구조조정, 기업전략 등을 협의하고 결정한다. 모든 이윤의 원천을 창출하는 노동자가 회사 경영의 한 주체로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은혜롭다.

한편 '협동조합공장'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도 고무적이다. 이 공장에서는 모두가 자본가이면서 모두가 노동자다. 또한 주식회사에서 '1인 1표 운동'을 일으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1원 1표'가 아니라 1인 1표 운동 말이다. 우리가 선거에서는 1인당 1표 행사를 하는데, 왜 경제에서는 1원 1표 제도를 당연시 할까?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습이다. 요즈음 세계 도처에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기본소득운동도 새사회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일반 서민들은 철저한 계층 투표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치루는 선거의 결과를 보면 철저히 계층 투표를 하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계층이 있다. 대체로 부자들일수록 철저히 계층 투표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계층 배반적인 투표를 반복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철하게 일하는 정당이나 사람을 선출한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더욱 가난해지는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 만약 히브리 노예 같은 사람들이 노예주들을 위해 일할 사람이나 정당에 자발적으로 줄기차게 투표함으로써 노예의 신세를 면하기는커녕 자손 대대로 착취당하는 노예로 산다면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허물며 저마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찾아 누릴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지고 밝아진다 . 하나님 나라는 더욱 다가오고, 평화(샬롬)가 개인, 가정, 사회에 한층 깃들 것이다. 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가장 귀한 사명이다. 자신의 일터에서부터 그 일에 즐겁게 참여하자. 성령을 좇아서.

현금 뭉치가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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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교회에서 신을 만드는 사람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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