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8:1-9/ 인간의 특권과 책임/ 한경직 목사
2014-08-23 20:25:47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八․五)

이 시편은 다윗의 시올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하늘을 보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달과 별을 볼 때에 다시 떠오르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는가? 하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폴로 十一호에 대한 감격과 흥분으로 들떠 있습니다. 지난 약 두 주일처럼 전세계 인류가 달과 별을 바라본 때는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특별히 달을 많이 바라본 줄 생각합니다.

요사이 신문지상이나 거리에 다니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천문학자가 된 듯한 감이 있습니다. 항간에는 달 위에 사람이 올라갔다 왔다느니 또 다음에 달에 갈 때는 지프차도 가지고 간다느니 하는 말들이 오갑니다.

이 우주에는 저런 달이 천 개가 넘는다 고 하는 말도 들립니다. 항성으로 말하면 억이 넘는 수가 있고 또 지구의 몇 배가되는 별들도 많다고 하는 말들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습니다.

우주 시대에 사는 실감이 듭니다. 그리고 또 특별히 신문이나 거리에서 얘기하는 화제는 사람에 대한 것인가 봅니다.
사람의 재주가 많기는 많다고도 하고 또 어떤 신문은 인간의 힘은 무한하다고 썼고 인간의 지성은 만능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자유진영 만세, 루나 十五호는 떨어졌대 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고요히 성경을 상고해서 정확한 우주관과 인생관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줄 압니다. 특별히 이 시간은 인간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중심해서, 인간의 특권이 무엇이며 그 책임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본문 五절을 읽어보면『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저』는 인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여기『천사』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엘로힘』이라고 하는 말인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저를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그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창조함을 받은 그 자체가 아주 큰 인간의 특권입니다. 예로부터 인간에 대해서 그릇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견해입니다. 인간이 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범신론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천도교에서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데 다 이런 종류에 속하는 사상입니다. 이것도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견해 가운데서 하나로서 인간을 그릇되게 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그릇된 견해가 있습니다. 소위 유물론적 견해요 완전히 물질적 견지에서 인간을 보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아메바와 인간의 차이는 아메바는 단세포 동물이요 인간은 복 세포 동물인데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을 너무 낮게 보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일은 인간 역사상에 새로운 기원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이 만능인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때라고 해서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그릇된 견해에 빠지면 아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진리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을 입어서 존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제한이 있습니다. 지력에도 제한이 있고 체력에도 제한이 있고 의지력에도 제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대라고 인간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빠지면 아니 됩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 본문에는 또 다시『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만 하나님께서 영화롭고 고귀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상고해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一장 二十七절에 보면『하나님이 곧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존귀의 관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관을 씌워준 일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만 이런 관을 씌워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셨으니 우리는 참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지, 정, 의 (智情意)의 생활이 가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빛나는 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우주가 크다고 하지마는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더욱 위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런 불멸의 영혼으로써 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생각할 수 있고, 무슨 이치를 미루어 추리할 수 있고, 무엇을 연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창조적인 활동을 합니다. 예술 방면이나 음악 방면이나 문학 방면이나 특별히 과학 방면 등 모든 방면에서 창조적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도 만들 수 있고 제트기도 만들 수 있고 우주선도 만들 수 있고 달나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이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관이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칸트의 유명한 말과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가슴속에는 도덕적 의식 곧 양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고려 말기에 살았던 유명한 정 포은 선생의 시조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라는 말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고 했습니다.

생명보다 의리를 존중히 여기는 이런 양심의 관도 하나님께서 씌워 주셨습니다. 두문동 七十二인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들이『우리는 과거도 싫고 부귀 영화도 싫소. 우리는 우리의 지조를 지키겠소. 세상의 금전이나 지위나 권세나 무엇보다도 내 양심을 지키겠소』라고 한 것은 빛나는 양심의 관을 씌워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후에 한 가지 특권을 더 주셨습니다. 그것은 六절에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니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달도 포함되고 화성도 포함되고 모든 우주가 다 포함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였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두겠다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되어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 지음을 받은 그 자체가 아주 큰 특권이요 그 위에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큰 특권을 인간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권을 받은 인간으로서 그 책임은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자명합니다.

첫째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니 참된 종교적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영혼을 구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그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짐승에게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참된 종교를 찾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라고 해서 다 옳은 길이 아닙니다. 참으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찾아서 그를 좇으며 그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빛나는 이성의 관을 씌워 주셨으므로 각 방면에서 창조적 생활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창조적 생활이라고 하여 하나님처럼 없는 데서 창조할 수는 업습니다.

그러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이성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몇 주일 전부터 예배당 뒤쪽에 있는 성화를 다 보신 줄 압니다.

저 성화는 우리 교회 이 광혁 장로님이 그렸는데, 그 천 자체, 먹 자체로 보면 몇 푼 어치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성화를 그려 놓으니 얼마나 크고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었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책임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적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와 같은 이성의 관을 씌워 주신 까닭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내가 헌신하는 그 자리에서 창조의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은 교단에서 창조의 생활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공무원은 관청에서, 심지어 주부는 가정에서, 음악가는 음악으로, 예술가는 예술로써, 과학자는 과학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간단없이 창조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달만 정복하는데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앞으로는 화성도 정복하여야 되겠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자리로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간단없는 창조적 생활을 할 의무가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 인간에게 빛나는 양심의 관을 씌워 주셨은즉 양심적 생활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심을 속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양심을 거슬려도 안되겠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그곳에서 양심적 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그 상점에서, 공무원은 그 관청에서, 학생은 그 학교에서, 군인은 그 군대에서, 정치인은 정계에서,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양심적 생활을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돈으로 양심을 팔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정욕으로 팔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어떤 권세욕으로 양심을 팔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어떤 명예욕으로 양심을 팔아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인간이면 양심을 지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하나님께서 그가 친히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셨은즉 만물을 바로 다스리고 바로 볼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물을 우리에게 맡겼다고 해서 함부로 자연을 대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자연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금수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별(魚鼈)도 학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모든 천연자원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은즉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것들을 다스리고 이것들을 사용할 청지기의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앞으로는 달에 대한 지식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 지식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달에서 혹 무슨 보물을 가져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있는 모든 자원, 금 , 은, 동, 철, 석유를 비롯해서 전기력(電氣力), 원자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곧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바로 쓸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인간이 발견하는 새로운 모든 것들, 새로운 발명품들, 라디오, 텔레비전 또는 컴퓨터 등 모든 것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쓸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큰 책임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성취했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一장 十七절에『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써 내려오나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받은 어떤 선물이든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三七편 첫 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 하시면 파수꾼의 경성(警醒)함이 허사로다.』 물론 사람이 집을 짓고 사람이 성을 지키지마는 하나님께서 돕지 아니하면 인간의 하는 일은 성공을 못합니다.

제가 신문을 보니 이번에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할 때에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씨의 어머니가 이것을 텔레비전으로 보다가 먼저 엄숙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인간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을 성취하였다고 교만한 생각을 품으면 아니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써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축복 받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한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지음을 받은 이 자체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위에 우리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깊이 생각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 이하의 생활로 전락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내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셨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서 이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다 변모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 변모된 면류관을 다시 회복하고 참된 인간이 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뜻하신 그 온전한 인간 그대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따르고 그를 순종하고 그를 본받을 때에만 온전히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외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워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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