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생 하용조가 있는 천국에는 /이필찬 교수, 666이란 무엇인가 2014-07-18 11:20:54 ![]() ▲ 홍정길 목사 홍정길 목사, 뉴욕에서 '평범한 거룩으로의 초대' 주제로 집회 인도 이종철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다. 옥한흠 목사와 하용조 목사는 소천했고, 홍정길 목사와 이동원 목사는 한국교회를 위해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다. 4인방중 한명인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가 "평범한 거룩으로의 초대"라는 주제로 뉴욕과 뉴저지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7월 4일부터 3일간 아름다운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7월 11일(금)부터 3일간은 뉴욕장로교회, 7월 18일(금)부터 3일간은 뉴저지초대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 홍정길 목사는 아름다운교회 주일예배를 통해 마태복음 6:33-34을 본문으로 "먼저 구할 것"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홍 목사는 '먼저 구할 것'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간증적인 내용으로 말씀을 인도했다. 홍 목사는 "8월 1일이 되면 3주기 되는 내 동생 하용조 참 보고싶다. 그보다 1년 앞서간 옥한흠 목사 보고 싶다"라며 가슴울리는 천국의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의 내공보다는 신앙의 내공이 돗보이는 내용이었다. '황금(Gold)'과 '하나님(God)'을 비교했으며 "이 시대의 교회가 힘이 없는 것은 교회도 황금숭배하는 소사이어티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황금만능주의를 지적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편하게 들을수 없는 쉽지 않은 설교였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강한 도전을 준 설교였다.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사람은 그 인생이 구하는대로 되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누가 정치가가 되는가? 그것은 덕망있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누가 돈을 많이 버는가? 그것은 돈에 대한 갈구가 심한 사람이 돈을 번다. 세계 각 곳에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런데 돈있는 사람의 일반적인 특징은 구두쇠이다. 돈을 아끼는 것이 멸시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간절하게 구하면 부자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돈을 추구한다고 해서 부자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누구보다 돈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부자되는 것은 확실하다. 누가 예술가가 되는가? 모짜르트를 생각하면 신비하기 짝이 없다. 모짜르트 시대는 음악하는 사람은 광대처럼 멸시받던 시대였다. 음악하는 사람은 내일 일을 기약할수 없는 불안정한 인생을 각오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모짜르트는 그 길을 걸어 갔다. 모짜르트같은 음악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걸아가야 할 길이 힘들어서 쉬운길로 갔다. 끝까지 그 길을 간 모짜르트는 그 천품이 아름답게 드러나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우리들에게 선사했다. 심지어 귀가 아무 것도 안들리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구했던 베토벤은 아무도 도달해 보지 못한 음악의 높은 경지를 우리앞에 보여주었다. 누가 학자가 되는가? 머리좋은 사람은 필수적이지만 머리좋은 사람이 다 학자가 안된다. 학문을 열심히 구하는 사람이 학자가 된다. 구하는대로 내 인생은 되어진다. 지금까지 했던 결과가 오늘 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10년후에 내가 무엇이 될것인가는 간단하다.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가 10년후에 내가 된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구하는대로 되어지는 인생의 성향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계속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은 구해야 되는 인생이 어떤것을 가장 우선해서 구할것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다. 먼저 주님께서는 구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무엇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이 이방인들과 똑같다. 여러분에게는 이 3가지외에 절실한 구함이 있는가. 그리고 주님은 먼저 구할 것을 말씀하신다. 먼저 구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니 나중에 구할것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 주님께서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짧은 인생속에서 시시한 것을 구하다가 내 인생을 시시하게 떠나버릴까 해서 하나님은 다른 것은 다 놔두어도 이것만은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인생을 아시는 주님이 너희는 먼저 이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구할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잘못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교회가서 열심히 일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 대신 다 키워주셨다. 내가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선교와 봉사를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사업을 불일어나듯 해주셨다"라고 아멘하고 받은 말씀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음에 뒤 따라오는 것이다. 구할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냥 보너스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것들은 우리가 구할 주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무엇인가. 그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1.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나라가 구성되기위해 3대 여건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배운대로 국토, 국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두가지가 있어도 아직 나라가 안된다. 일제 36년간 그랬던 때가 있다. 그것을 식민지라고 부른다. 나라가 아니다. 놀랍게도 성경이 말하는 나라라는 것의 가장 첫번째 뜻이 주권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이것보다 먼저 소중한것이 없다. 워싱톤디시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의 땅은 미국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관은 한국 대통령의 지배/다스림을 받기에 미국경찰이 못들어간다. 다스림이 국가의 여건가운데 첫번째 조건이다. 물론 천국 국토도 있다. 저는 이 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게 하시면 쓰러진후 다음 순간 천국에 입성을 할 것이다. 천국에 입성할때 제 발은 황금길을 걸어갈 것이다. 저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믿는다. 왜 황금인가? 제가 황금을 좋아해서 그런가. 아니다. 뜻이 좀 다른데 있다. 저는 최영 장군처럼 황금을 돌로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돌로 생각하면 이성계한테 죽임을 당한다. 황금은 황금이고 돌은 돌이다. 황금과 돌이 가지는 쓰임새가 각 다르다. 정확히 구분은 해야 한다. 그런데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되니 '황금(Gold)'과 '하나님(God)'을 헷갈려 본다. 왜냐하면 영어로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황금'이라는 단어가 비슷하다. L가 들어가면 황금이 되고 빠지면 하나님이 된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둘을 똑같이 볼 뿐 아니라 한 개 더 많이 붙은 것을 더 좋은줄 알고 사모한다. 이 시대에 돈을 숭상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은 참 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워렌 버핏은 시골 촌 영감님같이 생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 분과 식사한번 하는데 많은 돈을 지불한다. 왜 그런가. 그 분이 잘생겼기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돈을 많이 번 부자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영웅은 스티브 잡스이다. 그가 영웅인 것은 돈이 많기 때문이다. 속지말라. 저는 한번도 워렌 버핏이나 스티브 잡스를 부러워 한 적이 없다. 세상의 최고의 가치는 황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가 받은 구속은 이렇다. 너희를 구속한 것은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것으로 하지 아니하고, 흠도 없으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너희들을 샀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값을 지불한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황금같은 것은 아스팔트 밖에 안된다. 그 천국을 그 상징을 저는 너무 좋아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피의 구속으로 구원받았다면 황금숭배는 구원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힘이 없는 것은 교회도 황금숭배하는 소사이어티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그 천국을 황금 길 그리고 빛나는 보석집, 저는 보석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가장 최선으로 아름답게 나를 위해 마련한 내 장소가 있다. 천국은 그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천국은 천국의 백성들이 있다. 제가 천국을 생각할때 마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이제 정을 나누었던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옮겨갔다. 8월 1일되면 3주기 되는 내 동생 하용조 참 보고싶다. 그보다 1년 앞서간 옥한흠 목사 보고 싶다.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정말 믿음의 교제를 했던 김인수 장로 참 보고싶다. 천국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내 이상향이 아니라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셔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울부짖으며 기도했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이 천국이다. 내게는 천국이 그렇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천국의 가장 소중한 뜻은 천국의 왕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돈보다 천배나 만배나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랑하고 사는 것이다. 그 사랑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도라고 한다. 친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우정이라고 말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애정이라고 말한다. 여러 모습의 사랑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모습 그렇게 깊이 사랑해도 아무리 사랑하고 사랑해 보아도 사랑의 빈틈이 너무 있다. 그러다가 천국의 왕되신 주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의 원본을 만나는 그 날, 내 속에 그처럼 갈증을 가졌던 아무리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사랑이 완전히 채워지는 그 날, 천국의 영광이 넘칠것이다. 나는 그 천국을 사모한다. 그런데 그 천국의 가장 소중한 것, 천국의 왕되신 주님, 그 분의 그 다스림, 그것이 천국의 가장 큰 속성이다. 국토보다 더 중요한 것, 백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왕되신 주님의 다스림이다. 그것은 제 생애속에서 1965년 7월 24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때 그의 다스림속에 저는 천국을 맛보고 내 삶을 시작했다. 1965년 주님의 다스림보다 2014년 오늘 주님은 저에게 더 소중하고 귀하신 분이다. 어쩌면 그렇게 나는 넘어지고 자빠지는데도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는지... 천국의 왕되신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면서 세상에 있지 아니한 평화를 그때부터 누렸다. 모든 지각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내마음을 지키셨다. 정말 어쩌면 이렇게 평화의... 고통도 실패도 배신도 짜증나는 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주신 평화를 그 어떤 것도 지배하지 못했다. 마치 강릉 앞바다의 자그마한 돌섬 처럼... 거대한 파도가 휩쓸면 없어졌는가 하다가 조금후에 파도에 씻겨 더 아름답게 우뚝 솟은 돌섬 처럼 내 마음속에 무너지지 않는 기쁨을 허락해 주셨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을 주셨다. 아무것도 없고 다른 사람은 심심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저는 평생 그런것들을 모르고 살았다. 주께서 날마다 새로운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다른 사람은 바보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주님이 내마음속에 주신 기쁨은 세상이 주는 어떤 것 보다 넘치는 기쁨을 내게 주셨다는 말이 주님 다스림안에서 내 마음에 있다. 그런데 천국의 왕되신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우리 가정은 천국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참 다르다. 남편의 주권과 아내의 주권이 부딪칠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남편도 순종해야 할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아내도 순종해야 할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한 다스림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는 조화와 평화를 누린다. 천국이다. 자식과 부모가 세대갈등이 크다고 한다. 간단하다. 주님이 그 가정의 주인이시면, 주님이 부모의 주인이시면, 주님이 자녀의 주인되시면 한 다스름안에서 세대 간의 문화차이와 세계관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그 다스림안에서 가정은 천국이 된다. 남서울교회 당회는 정말 평화스러웠다. 40여년 목회하면서 다투어 본 적이 없다. 처음 형성될때 어지러움이 있었는데 어느날 하나님 말씀앞에서 목사도 장로도 순종하기로 결심한 다음에는 형제처럼 오손도손하는 당회를 늘 누렸다. 이 말하면 다른 목사들이 나를 약올리느냐 하니 말을 잘못했다. 이 축복을 빼앗기기지 말라. 교인의 주인이 목사라고, 벼락을 맞을 소리이다. 개척멤버라고, 건방진 소리를 하면 안된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남편을 다스리고 그 분이 아내를 다스리면 그것은 천국이고, 그 분이 우리 심령을 다스리면 그 심령이 천국이라면, 교회의 주인되시는 주님이 진정으로 주인으로 다스리면 그 교회는 천국이다. 그래서 이 찬송가는 사실이다. 같이 불러 보자. 높은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어디나 하늘나라 노래만 부르면 안된다. 정말 주의 다스림을 받는데 내가 서있는가. 하늘나라이다. 우리가 완전한 천국은 우리 생명이 끝나는 다음, 주님의 나라에서 원본을 보겠지만, 주님의 다스림이 있으면 마치 미국에 있는 대사관이 미국에 있지만 미국이 아니고 한국 대통령의 다스림을 받으니 한국인 것 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찬송할 수 있다. 이것을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한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주여 다스려 주시옵소서이다. 이 말은 '다스려 주시옵소서' 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된다. 그때 천국이 된다. 2.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런가하면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의를 구하기 위해서 가장 쉽게 설명할수 있는 의라는 단어의 뜻은 규격품이다. 하나님의 규격품을 구하라는 것이다. 사람으로 누가 하나님의 규격품일까. 아브라함일까? 아브라함은 살기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다. 남편으로서 아내라고 말해야 할 때에 살기위해 비겁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이다. 우리 규격품이 아니다. 그러면 다윗일까?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다윗처럼 많이 죄를 범한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 규격품이 아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기도쉬는 죄도 범치 않았던 사무엘 정도, 아무 흠이나 틈이 없다고 말했던 다니엘 정도를 규격품이라 하고 싶은데 성경은 아니라고 한다. 로마서 3:10-15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한다. 만물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규격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격품이 딱 한 분이 계신다. 하나님의 규격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때에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딱 하나 다르게 창조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범죄해서 깨어지고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십자가에 매달아 해결해주시고 구속해 주신 다음에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마음속에 회복시켜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로마서 8: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 나온다. 우리를 구원하신 최종적인 목표가 아들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했는데 왜 그리스도의 형상인가. 하나님 형상이 아무것도 알지못하는 인생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셨느니라.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 형상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것때문에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고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서 너희를 양육하노라 했다. 목표이다. 성경공부해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봉사활동 열심히 하는 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조합되어서 믿고 하는 것이 하나되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어느날 갈라디아를 몇 년 떠났다가 와보니 이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은 마음속에 없고 온갖 외적인 스펙을 가지고, 세미나 몇 번 내가 하고 왔으니 내가 자랐다, 내가 아프리카 단기선교 갔다 왔으니 내가 달라졌다 - 이런것에 매여져서 내 속사람의 달라짐을 알지못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면서 "내가 너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 까지 해산의 수고를 다시하겠다"고 갈라디아서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을 향해서도 우리 주님께서 탄식하시면서 "너희는 그딴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 너희들이 최종으로 추구하고 너희들이 자라야 할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요구앞에 사실 저는 절망했던 사람이다. 신학공부도 했고 목사도 됐다. 사역도 꽤 많이 했다. 책도 쓰기도 했고 많은 책을 읽기도 했다. 기도도 해 보고 금식하며 가슴을 쥐어뜯기도 해 보았다. 그런데 안되는 것이 내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안되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목표라고 생각하면 절망스럽다. 보면 볼수록 더 멀어져 가는 나, 그리스도 같지 않은 나를 볼때마다 "주님, 나는 화인맞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런 절규를 내 속에서 했다. 절망하고 있던 어느날 다시 마태복음을 읽어보는데 수십번 수백번 읽었던 산상수훈이 그날 비수처럼 내 가슴에 꼿혔다. 복있다. 누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깜짝 놀랐다.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라고요. 그것을 채워졌고 가졌느냐 그러면 '주님 나는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졌느냐 묻지 않고 네가 없는 것을 알고 사모하느냐, 예수 그리스도 형상에 도달해서 서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자라야 할 그 목표가 그리스도의 형상인줄 알고 그 자리에 서있느냐 그리고 바라보고 나가느냐 하신다. 펄쩍 뛰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모합니다. 내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감격하면서 그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에게 채워짐을 주실것이요. 그 채워짐을 사모합니다. 오늘 그 채워짐을 성경 두 구절을 보면서 어떻게 채워지는지를 같이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인지, 내 삶의 클라이맥스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 말씀이 확정해 준다.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얼굴을 보는데 그때 놀라운 사실은 글쎄 내가 그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내가 그처럼 부족한데, 주의 성령이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완성을 시켜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곳만 아니라, 요한일서 3:2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참모습을 보니 글쎄 내가 주님의 모습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성경은 말씀한다. 빌립보서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내 수준이 아니라 만물을 자기 발아래 마음대로 복종하실수 있는 자의 역사로 얼마나 확실한 보장인가. 천사가 했다고 믿으면 안된다. 만물을 발아래 복종하게 하실수 있는 그 분이 그렇게 만드신다면 가장 확실하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 여러분 우리의 생애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내 인생이 가난으로 끝났다면 그 가난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보장되어 있다. 만물을 발아래 복종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 수건이 벗겨질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볼때 내가 그의 형상으로 변화된 그 놀라운 영광을 바라볼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옥중에서 순교의 제물로 드려진 최권능 목사라는 분은 공부도 잘하지 못한 목사였다. 그런데 이 땅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우신 분이 주님앞에 나아간다. 그가 고문을 받을때 "예수"라고 소리쳤다. 그러니 같이 고문받던 다른 목사가 고문받으면서 예수가 무슨 말인가 라고 물으니, 내 속에 든 것이 예수박에 없으니 건드리면 예수 밖에 더 나오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그 분은 이렇게 찬송하다가 주님앞에 갔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참아름다운 영광이로다." 이것은 최권능 목사에게만 주신 영광이 아니다. 이 땅 살면서 주의 다스림을 받고 주께서 가라시면 가고 주께서 서라고 하시면 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그 인생, 어느날 주님앞에 서는 날, 만물을 자기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전능자 그 분에 의해서 완성된 내 인생,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이다. 이런 축복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빼앗기지 말고 주님앞에 가는 복스러운 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뉴스파워 제휴 뉴욕 아멘넷 ============================= 이필찬 교수 "666이란 무엇인가"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요한계시록 세미나 인도 요한계시록 전문가인 이필찬 교수가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한 특강과 목회자와 신학생을 위한 요한계시록 세미나를 인도했다. 이필찬 교수는 이필찬 요한계시록 연구소를 세워 계시록 연구를 하고 있으며 여러 관련 저서를 냈다. 이필찬 교수는 특강을 시작하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생각할때 막연한 두려움이나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성경 66권중 하나로 다른 성경책과 같이 그렇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소개했다. 이필찬 교수는 9번의 강의를 했는데, 학술적인 부분이 최소화된 22일 주일설교 부분을 소개한다. 이 교수는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을 본문으로 "짐승의 진화? 괴물의 출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666이라는 부분을 다루었다. 이필찬 교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요한계시록의 부분을 다니엘서와 이사야서와 연결하여 명확하게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초대교회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적용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영적전쟁의 전선이 분명했지만 오늘날은 인간의 탐욕때문에 교회의 안밖의 잘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대책은 인내와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관련내용이다. ▲월요일에 열린 목회자와 신학생을 위한 세미나 봉준호 감독이 최근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메시지를 잘 파악하면 좋은 영화이다. 봉 감독이 전에 '괴물'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두 영화의 공통점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두 영화에 결과는 인간이 파괴적인 환경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파괴적인 환경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때문에 만들어졌다. 특히 괴물이라는 영화는 재물에 대한 탐욕때문에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하는데 그것때문에 물고기가 괴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때 모든 생물과 인간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속에서 살도록 셋팅을 해주셨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 자연만물과 인간은 긴장과 반목과 부질서와 혼돈가운데 싸우는 적대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이 성경을 읽었는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좋다. '괴물'의 성경적인 비전을 나누고 싶다. 성경에서도 괴물 또는 짐승에 대한 기록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이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들 13장 2-4절에는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라고 나온다. 짐승이 어떤 모습인지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짐승과 관련되어 두가지 내용을 요약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 특징은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다. 사자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부위는 입이고, 곰에 있어 가장 강한 곳이 발톱이다. 짐승을 묘사하는데 표범은 흉칙한 모습으로 혐오감을 준다. 그 흉칙한 모습에 강한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특징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용으로 부터 받았다. 용으로 부터 받았다고 하는데 용에 대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2:9에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고 나온다. 용을 마귀이며 사탄이라고 해석한다. 짐승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사탄에게서 받은 것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짐승들 짐승의 이러한 모습은 저자 요한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자기의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약의 배경은 다니엘서 7:3-6에 나온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다니엘서 7장에 네마리 짐승을 표현하기를 사자같고 곰과 같고 표범과 같다고 했다. 다니엘서에는 각각의 짐승에 대한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한 짐승에다 이 특징들을 다 몰아넣는다. 표범과 같고 입은 사자같고 발은 곰과 같다. 다니엘서에는 짐승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폭력성이다. 다니엘서 7:7을 보면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라고 나온다. 7:21에도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라고 유사한 폭력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짐승은 자기들끼리 짓밟고 물고 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향하여 대적하며 성도들을 제압하는 강력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다니엘서에서 짐승의 실체는 바로 세상 세력이다. 세상 세력을 짐승에다 패러디해서 포악한 모습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과 짐승, 짐승과 짐승이 서로 폭력을 행사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인간과 온 피조물을 지으셨을때 그들의 관계는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통치를 받는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러한 완벽한 사회, 공동체를 인간과 피조물과 지연과 짐승이 함께 이루고 있었다. 이것을 잘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짐승들 이사야 11:6-9(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다. 이 본문은 이사야가 앞으로 회복될 에덴의 모습을 소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모델이 타락하기전 에덴의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표범과 사자와 곰이 함께 나온다. 다니엘서에서 네개의 짐승의 모습에서 사자와 표범과 곰이 나오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사자와 표범과 곰들을 동일하게 열거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이사야의 이 말씀과 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에덴에서는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사자, 표범, 곰, 어린아이등이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에덴의 상태가 존재했다.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가 깨지게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인간의 죄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짐승과 짐승, 짐승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죽이고 짖밟고 서로 물어뜯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다니엘서는 타락한 이후에 세상의 그런 부조화의 모습을 세상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괴롭히고 핍박을 가하는 정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짐승에 의해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과 다니엘서에 타락한 이후에 에덴의 부조화된 모습을 적용시키고 있다. 666은 무엇인가 짐승이 무엇인가. 다니엘서에서는 세상세력이었다. 세상세력을 패러디해서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대상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요한계시록 13: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의 말씀을 살펴보자. " 표가 무엇인가 하면 짐승의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의 수, 다시말하면 이름을 수로 표현한 것이다. 수를 살펴보니 육백육십육이라고 나온다. 666은 짐승의 이름을 수로 표현한 숫자이다.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의 이름의 수이다. 그 수를 세어보니 666이다. 666은 짐승의 이름을 수로 표현한 숫자이다.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사용했던 언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각 철자마다 숫자가 부여되어 있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이든지 수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만약 영어 알파벳에 수가 표현이 되어 있다면 이름을 부를때 수로 부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한글에도 자음과 모음에 숫자가 부여되어 있다면 재기발랄한 청소년들은 이름대신 수로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숫자가 없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철자마다 수가 다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을 부를때 수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을 게마드리아(gematria)라고 불렀다. 그런 배경에서 누군가의 이름 짐승의 이름이 666이라고 한다. 역으로 666을 가진 누군가의 이름을 찾아보면 짐승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의미있는 인물을 역으로 666 숫자에 해당하는 이름을 찾아보면 그 인물이 네로 황제라는 것이다. 헬라어로 된 네로 황제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해서 히브리어로 된 철자의 수를 합했더니 666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짐승의 실체는 네로 황제이다. 왜 네로 황제를 짐승으로 폭력성있는 존재로 등장시킬까. 이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핍박한 최초의 로마 황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네로 황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물론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네로 황제는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았다. 네로 황제는 60년 중반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요한계시록은 90-100년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30년정도 차이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를 기독교 성도들을 핍박하는 폭력성있는 존재의 모델로 등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네로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로 황제의 존재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황제를 대표한다. 다니엘서에서 네 짐승을 통해 세상세력의 폭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요한계시록에서 그 네 짐승의 특징을 짐승에다 비유함으로 그 짐승의 모델로 등장시킨 네로 황제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특히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7-10(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권세를 받았는데 용에게서 받았다. 용은 사탄을 의미한다. 당시 네로 황제로 대표하는 로마제국의 황제는 사탄의 조종을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의 세력의 화신이었다고 13:7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짐승이 모든 사람들을 다스린다. 13: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나온다. 13:16-17(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사고팔수 없다고 했다. 짐승의 표가 짐승의 이름이라고 했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소유에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여러분의 소유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짐승의 이름, 황제의 이름을 이마나 오른손에 새긴다는 것은 새김을 받은 자들은 짐승/황제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황제를 숭배한다는 것이다. 당시 노예를 사고팔때 구입한 노예의 이마나 오른손에 주인이름의 이니셜을 새기는 습관이 있었다. 이마나 오른손은 가장 잘보이는 곳이다. 누군가 짐승의 이름, 황제의 이름,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에게 속했다는 뜻이고 속했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황제숭배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이슈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황제를 숭배할것인가, 하나님을 예배할것인가.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믿지않는 사람들이야 황제숭배하고 제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과 사회적인 이익을 받아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외에 어떤 우상도 둘수가 없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될때 주어지는 것은 목베임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을 읽었던 7교회 성도들에게 직면한 신앙의 결단의 문제였다. 저자 요한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것이 어려운 일이니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라, 앞에서는 안믿는다고 하고, 뒤에서는 적당히 교회와서 신앙생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13:9-10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나온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면 사로잡혀 가기도 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요한이 독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죽으라, 그냥 감옥에 가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요한계시록 적용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때 신앙생활안하기 잘했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예수를 믿기에 방해나는 사람도 없고 죽이는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오해이다. 과연 짐승은 단순히 2천년전 네로 황제를 모델로 한 과거의 산물일 뿐일까. 문제는 사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탄은 그때는 황제숭배라는 그런 절대절명의 도전을 가지고 교회를 멸절시키려고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고, 그 동일한 사탄은 이 시대에 또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는 네로 황제가 아닌 다른 형태 아니 형태가 없는 짐승이 괴물의 모습으로 이 시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더 큰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전선이 분명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그룹 전선 하나만 형성됐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전선이 없다. 사탄은 오늘날 인간의 탐욕을 통해 괴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여러분 속에 있고, 교회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이 전선이 교회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정말 정신차리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그러한 어둠의 시대속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LA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여기 왔는데, 한국에서 부터 아는 선배 목사를 만났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가 미국장로교에 속한 교회이다. 미국장로교가 최근 동성애 관련 결정을 했는데, 그 선배가 시무하는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려고 결심했다. 공동의회에서 91%의 찬성으로 탈퇴를 결정했는데, 극구 반대하는 9%가 있다. 그 목사님은 치열한 영적 전투현장에 있으며, 어둠의 세력이 교회속에서 동성애라는 이슈를 가지고도 판을 치는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도 어떤 면에서 전선이 뚜렷하지만, 정말 우리가 각성하지 않으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교회의 순수성이 와해되는 위험속에 늘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오늘날 이러한 짐승이 진화된 모습으로서의 괴물에 맞서 싸울수가 있는가. 다시 한번 13:9-10를 다시 읽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탐욕의 시대, 우리가 교회의 순수성과 신학의 순서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내 속에 솟아나는 탐욕에 대해 인내와 믿음을 통해 이겨나갈수 있다. 이 사회속에서 밀려오는 탐욕의 먹구름을 어떻게 거두어 낼 수 있는가. 인내와 믿음이다. 탐욕은 우리를 유혹한다. 탐욕의 손길이 우리를 덮친다. 어떻게 이겨낼수 있는가. 자기부인을 통한 인내와 믿음이다. 초대교회 7교회 성도들은 잡혀갈수 있고 죽임을 당할수 있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인내와 믿음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손해보고 우리의 이익이 빼앗길지라도 탐욕을 거부할 수 있는 개인과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짐승이라할지라도 어떠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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