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드 마크 /요12:24, 시139:1-7
2014-03-18 20:17:44

저는 지난 40년간 교회 생활을 하면서 모두 아홉 분의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다 훌륭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존경했던 목사님 두 분이 작년과 올해 사이 모두 소천 하셨습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가 뵀을 텐데, 그러지 못해 유족들에게도 죄송스럽고 저 자신도 많이 아쉽습니다.

두 분의 존함을 말씀 드리면, 용두동 교회의 김한옥 목사님과 안양교회의 백문현 목사님이십니다.
두 분 다 목회를 훌륭히 끝내시고 원로로서 계시던 중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는데, 그 분들이 더 특별하다는 것은 두분 다 감리교단에서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 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그저 훌륭한 설교가시기만 했다면 제가 그렇게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실 설교 잘 하시는 목사님은 많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힘이 있으려면 설교 자체만 가지고는 되지 않지요?
거기에 뭔가가 더 얹혀져야 힘있게 되고 은혜가 되는 법입니다.
이분들은 진실하게 목회하셨고 바로 그 모습이 설교보다 더 큰 기억으로 제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거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처럼 모든 게 풍요로운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어떤 분야든 가릴 것 없이 그러한데 특히 하나님 말씀에 관한 한 그것은 더한 것 같습니다.
매 주일이 되면 우리 나라 5만 개의 교회에서 일제히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 뿐 아니라 아무 때고 맘만 먹으면 각종 인터넷 웹 사이트를 통해 말씀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입맛에 맞게 골라가며 들을 수 있지요.
듣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라도 중단시키고 다른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 감리교단 소식을 주로 전하는 인터넷 신문에서 한 뛰어난 논객을 봤습니다.
주로 목사님들이 이런 저런 기고를 하시는데, 그 분 역시 공부를 많이 하신 목사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평신도였고, 더 놀라운 것은 신학이라고는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 분의 논조는 언제나 분명하고 명쾌할 뿐 아니라 핵심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인터넷 상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학 정보를 잘 분석한 결과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신학 뿐 아니라 경제나 과학, 또는 법률분야 등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전문가로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 문화는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고, 교회는 방방 곡곡 세워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기독교 전문서적 역시 더 많이 출간되고 있고 전문 싸이트 역시 더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안 믿는 사람들도 복음이 뭔지를 알고 그 중 하나쯤은 읊조릴 수 있는 정도가 됐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고 바람직한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데도 마음 한 켠이 허전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복음이 더 세련되게 선포되고 있는데도 상대적으로 그 열매는 더 빈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채워져야 할 뭔가가 빠져서겠지요.
그걸 찾아 내는 게 오늘 우리들의 미션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함께 그것을 찾아 내고, 찾아 낼 뿐 아니라 회복시키고, 나아가 그것이 우리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령께서 지혜 주셔서 깨닫게 되고, 그 자각이 삶 가운데 직접 실천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보다 약 60~70 년 후에 써 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복음서에는 많이 쓰지 않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을 봅니다.
초기 기독교 100년 새에도 또 나름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서였는지 말씀이 강한 어조를 띄는 걸 볼 수 있지요.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이렇게 빈번하게 말씀을 강조하셨던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사도 시절에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세월이 지나가면서 더 간곡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강조하신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번 강조한 것으로 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품사로 따지면 그 다음에 오는 말을 강조해 주는 부사입니다.
해서 부사는 뒤에 수식어구가 나오지 않는 한 독자적으로 쓸 수 없습니다.

좀 전에 읽었던 요한복음 12:24의 말씀도 원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이 시대를 살면서‘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은 단순 부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도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특별한 부사가 아닌가 생각 드는 겁니다.

사실 한 알의 밀이 썩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지금같이 복음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썩어져서 밀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진실로 썩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성경봉독을 하는 가운데 아마도‘희생’에 관한 얘기를 예상하셨을 텐데, 오늘의 주제는 그게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환기시켜 드립니다.

사실 ‘희생’의 주제 뿐 아니라 신앙의 모든 모든 주제가 여기에 적용되지요.

우리가 로마서에서 복음의 능력에 대해 배웠는데, 복음의 능력은 복음의 내용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진실로 그 복음을 내가 살아낼 때 생겨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복음을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라도 얼마나 진실하게 실천하며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살아낼까 하는 것입니다.

안철수 씨가 요즘 신당창당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선도가 좀 떨어졌지만 처음에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거짓이 없고 성실하며 순수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실에 해당하는 영어‘sincerity’는 단순히 진실한 정도가 아니라 그 위에 정직함과 성실함이 더 얹혀진 뜻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안철수 씨는 그런 인물로 보여졌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새 인물을 갈구하는 것은‘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좀 새롭게 경험되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일 겁니다. 불행히도 이 시대에는 그런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서두에 말씀 드린 두 분의 목사님께 제가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설교도 잘 하셨지만 그 분들은 평생 진실하게 사셨고 그런 삶이 말씀에 무게를 더했던 겁니다.

두 분 다 은퇴하신 지 일년 후쯤 당신들이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러 강단에 올라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동영상을 통해 그 광경을 각각 봤습니다.
어땠냐 하면, 성도들이 모두 기립해서 뜨겁게 박수를 치는데 단순히 반가움과 환영의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진실함의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그리움의 박수로 느껴졌습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미 받을 은혜를 다 받은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을 하실 때는 아마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을까요?

복음의 능력이란 오직 진실한 삶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정말 복음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겁니다.

사실 우리 중에 복음을 실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지요
하지만 그것은 늘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장애물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그 방해요소가 뭔지 끄집어 내서 해결의 방법을 찾아 보십시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꼭 짚고 넘어가야 될 게 있습니다.
언제나 일이 잘못 되는 것을 보면, 눈에 띄는 큰 원인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데서부터 문제는 시작되고 커져 가지요.

사실 우리를 잘못되게 하는 것은 누군가를 속이고 사기치고 거짓말을 일삼는데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웬만한 강심장이나 막 나가기로 작정한 사람 아니면 결행할 수가 없지요.
더욱이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그런 일은 벌일 수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
우리를 거짓으로 인도하는 우리 속의 어떤 은밀한 경향입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나만이 아는 작은 거짓이 무섭다는 겁니다.
자기 의식의 스크린에도 잘 잡히지 않는 숨은 거짓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네 가지 정도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의 언어 중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말 습관이 우리를 잘못되게 한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의 표현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게 과장법입니다.
매사에‘너무 너무’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또는‘정말로, 진짜로,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들을 수시로 사용합니다.

마당에 까마귀 몇 마리 앉은 것을 보고 옛날 어르신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까마귀가 새까맣게 앉았다’그럽니다.
앓아서 얼굴이 조금 야윈 것을 보면 여러분은 뭐라 그러시지요?
“에구!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럽니다.
시비가 붙어서 몇 차례 주먹이 오가면 피해자 쪽은 개 패듯이 맞았다 그럽니다.

저는 요즘도 가끔 어린 형제 자매들에게 듣는 형용사 중에 이해 못하는 말이 있습니다.
속어라면 용서하세요.
크면 그냥 큰 거지‘열라 커! 절라 커!’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 그 말도 과장법 중에 하나일 겁니다.
이 모든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작은 거짓의 습관임에 틀림없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합니다.
과장된 언어는 과장된 존재를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습관인 것 같지만 진실한 삶을 사는 데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작은 거짓을 허용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큰 거짓까지 허용하게 됩니다.
정해진 수순이지요.

저도 이 점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과장법이 좀 심한 편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모두 다 긍정할만한 정도가 아닌 다음에는 어떤 종류의 과장이라도 지양하겠습니다.

성가대 여러분께도 이제는 과장된 칭찬을 삼가겠습니다.
사실 세계 수 많은 교회의 성가대 중에 우리 교회가 제일 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게는 그렇게 들릴 뿐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그런 것 없이도 모든 청중들을 사로 잡았지요.
그건 바로 진실의 힘이요, 사랑의 힘이지 그 외에 다른 힘이 아니었습니다.
솔직 담백한 언어, 과장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진실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데서 오는 거짓의 경향입니다.

초대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교회공동체에 내 놓지요.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똑 같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땅을 판 값 중에 얼마를 감추지요.
사실 자기 땅을 팔고 얼마를 감춘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인 삽비라는 거기에 동조하지요.
그들의 잘못이 뭐였지요?
그들은 바나바에게 있던 관대함이나 진실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겁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벌인 비극이었지요.

물론 우리들이 하는 일 중에는 이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남을 의식해서 벌이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듯이, 큰 불은 언제나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우리 감리교는 결산의 1% 씩을 연회 부담금과 지방 부담금으로 냅니다.
그래서 일년 예산이 몇 십억 씩 되는 큰 교회들은 그게 엄청난 액수가 되지요.
그래서 통계표를 제출할 때 마다 어떻게든 줄이려고 애쓰는 걸 봅니다.
그렇게 축소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교세가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부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부담금 액수는 커지고, 그 모든 부담은 그 교회 성도들에게 지워지게 됩니다.

별 바람직스럽지 않은 예를 들었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들 실생활 가운데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속어를 써서 죄송한데 여러분은‘쪽팔림’과‘부끄러움’의 차이를 아십니까?
남들 눈에 내 부족함이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이‘쪽팔림’이고, 스스로 자기 부족함을 발견하고 느끼는 게 부끄러움입니다.

오늘날 쪽 팔림을 느끼는 사람은 많은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현대인들은 마치 쪽 팔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부끄러움의 관점이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의 차이는 정말 큽니다.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실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쪽 팔림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영영 거짓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남을 의식하는 게 비단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가정 단위로도 나타날 수 있고, 교회 차원이나 심지어는 국가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가정은 쪽 팔림 때문에 필요 이상 치장 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교회는 다른 교회를 의식하느라 필요 이상으로 숫자나 사업을 뻥튀기하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사실을 가린 채 체면 때문에 불건전한 성장에만 치우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됐든 공동체가 됐든 자체로서 존재의미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 소중한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서 이후로는 다른 사람 또는 외부의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데서 완전히 벗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셋째로, 우리 삶에 만연해 있는 거짓이 있는데, 그것은 나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과연 내 것일까요?
나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어디로 갈까요?
내 처음은 누가 결정했고, 끝은 또한 누가 결정할까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지요?
왜냐하면 내가 대답할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처음과 나중, 내 생명 이전과 이후는 모두 내게 속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지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청지기라고 고백하지요.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나는 내 것이고, 내 삶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삶은 아주 다른 삶입니다.
결과도 아주 다르지요.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완전히 당황합니다.
내 삶이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을 때 완전히 좌절합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거짓 위에 집을 지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뭔가 꼭 되야 하는데 안 되는 상황을 겪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일이 진행되지 않는 이유를 방법이나 조건이나 환경에서 찾지 마십시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 삶을 내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입니다.

만약 내 삶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데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아시고 안심하십시오!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 삶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겐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힘은 힘대로 들이고 그 결과는 상처 뿐인 영광일 겁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자기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커다란 거짓의 터널 중간에 끼어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암흑 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나와 내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겐 여명이 비칠 것입니다.


넷째로, 또 하나 아주 심각한 거짓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공하는 것이며, 행복은 부와 명예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는 인생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심각한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경쟁에 승리해서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권리를 나 혼자 누리는 게 인생의 목적 일리가 없잖습니까?

어느 누구도 이런 인생관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생관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주신 내 존재의 가치를 가장 진실하고 아름답게 구현해 내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꽃을 비유로 들어 볼까요?
우리가 만일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났다면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부자 집의 값비싼 꽃병에 꽂히는 게 우리의 목적이겠어요?
화려한 꽃다발 묶음이 되어서 어느 귀부인의 품에 안기는 게 우리의 목적이 될까요?
아닙니다!
그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꽃의 목적입니다.

산비탈에 피었든, 깊은 산 속에 피었든, 벼랑에 피었든, 어느 자리 어느 곳에 피었든 거짓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기를 피어내는 것이 꽃의 목적입니다.
값비싼 꽃병을 꿈꾸는 꽃, 어느 귀부인의 품을 꿈꾸는 꽃은 곧 생명력을 잃고 죽게 됩니다.
거짓에 사로잡힌 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 삶의 자리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진실하고 거짓없이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고 오랜 생명력을 누리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은 성공이나 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가장 참되고 진실한 존재로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은 존재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지 않아도 제목만으로도 어떤 내용이 펼쳐질 지 예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돌변합니다.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변하고, 신사가 건달이 되고, 합리적인 사람이 냉혈한이 되며, 온화했던 사람이 바람둥이로 변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 온갖 죄의 충동은 몰려 옵니다.

정말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누구일까요?
무대 위의 연극 배우 말고, 연극이 끝난 무대 뒤에서의 우리들, 그때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을 때 갖는 생각, 그때 하는 행동, 그때 품는 마음이 우리 자신의 현주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거짓의 힘을 우리는 어떻게 제압할 수 있을까요?
오늘 또 하나의 본문인 시편 139편은 그 길을 가르쳐 줍니다.
거짓의 얼굴은 매우 다양하고 그 모습은 가지 각색이지만 거짓을 물리치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7절 말씀처럼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나를 살펴 샅샅이 보시고, 나를 훤히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겁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길을 가든 누워 있든, 말을 하든 맘에 품든,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행실을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붙들고 사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거짓과 싸워 이기는 유일하고도 참된 방법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이 깨달음이 너무나 놀랍고 높아서 감히 측량할 수 조차 없다고 고백합니다.
거짓의 현상은 복잡하고 현란하지만, 거짓을 깨는 방법은 놀랍도록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햇살이 온 땅을 구석구석 비추듯이, 아주 작고 하찮은 일상 속에도 임재 해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음습한 우리 내면일지라도 거기에 주님을 모시는 겁니다.
기쁨과 행복의 순간 뿐 아니라 슬픔과 불행, 좌절의 순간에도 주님을 초대하는 겁니다.
내 허위의식과 탐욕, 그리고 온갖 거짓과 죄의 습관을 주님께 낱낱이 보여드리는 겁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그 교회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지요?
온누리 교회 하면‘경배와 찬양’, 사랑의 교회 하면‘제자 훈련’, 명성교회 하면‘새벽기도’…
이런 식으로 각 교회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게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트레이드 마크가 진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지역사회에 있는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보여줄 것은, 우리 교회 사람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다 목도하시는 대로, 우리 교회는 시내서 멀고, 교세도 그리 크지 않고, 또 유별나게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닙니다.

무엇으로 여러분들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무엇으로 우리 교회의 참 맛을 보여 줄까요?
선교도 중요하고, 비전도 좋고, 자랑할 만한 슬로건을 내 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진실함을 보여 주지 못하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여러분!
지금까지 이야기를 다 뒤집어서 선교 대상을 우리 교회, 나 자신으로 돌려보면 어떨까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 선교 대상을 우리 자체로 국한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를 보여주려고 애 써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 교회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우리 교회 스스로에게 진실함을 보여주려고 애써봄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 교회에서 사역할 목표가 분명히 세워졌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 모두가 진실에 뿌리 박혀 살도록 하고 싶습니다.
확실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주님의 뜻을 제시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지금 이 상태로 교회가 더 부흥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진실하게 살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부터가 함량미달이지만 서로 노력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청소년부 지체들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우리 교회에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진실, sincerity, 이 한 가지만은 배우고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가치가 있더라도 그것은 진실이라는 터 위에서만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가장 먼저 가져야 될 마음은 이 진실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트레이드 마크가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초의 것은 선교도 아니고 봉사도 아니고 교육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품고 해야 될 일은 오늘 말씀대로 진실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안 되면 우리의 터는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그것은 곧 무너지고 말 겁니다.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합시다!
진심으로 부끄러워할 뿐 쪽 팔려 하지 맙시다!
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아름답게 피어납시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이것이 거짓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건네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궁극적인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의 트레이드 마크는 진실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애쓰십시다!
부디 우리 교회에서 피어난 꽃들은 모두 진실하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 세상을 예수의 향기로 뒤덮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거짓 없는 참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저와 여러분의 평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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