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종려주일/ 고난주간 2012-03-30 09:42:43 종려주일 본문 마가복음 11:1-11절, 시편 118:1-2절, 19-29절 고난주간 본문 이사야 50:4-9a절, 시편 31:9-16절, 빌립보서 2:5-11절, 마가복음 14:1-15:47절, 또는 마가복음 15:1-39절(40-47)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주석(Chris Haslam) - 번역 이 기호 목사(평안교회담임) 이사야50:4-9전반부 이사야40-55장은 포로기에 쓰였고 4개의 종의 노래들을 담고 있다. 4개의 종의 노래들 각각은 책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그러나 4개의 종의 노래들 안에서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종의 노래(42:1-7)는 “여기 내가 붙드는, 내가 선택한... 나의 종이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두 번째 종의 노래(49:1-7)에서는 학대를 당하고 모욕을 당한 종이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는 사명을 받았다. 세 번째 종의 노래(오늘 본문)에서 종은 제자훈련(가르침)을 받았고 고난을 통해 강하게 되었다. 네 번째 종의 노래(52:13-53:12)에서는 이방인들 조차도 고난당하고 거절함을 받은 종을 경외하면서 묵상한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종을 완전한 이스라엘, 가장 거룩한 분, 메시아로서 보았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종(혹은 노예)로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종은 모든 사람을 해방하는 분이시다. 4-6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귀를 여셨다”. 그리고 종을 가르침을 받는 종, 즉 제자와 같은 종으로 위임하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종을 하나님의 말씀의 교사(예언자)로 만드셨다. 그래서 “지친 자”(하나님을 거절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가져온다. 종은 “그는 거역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받아들인다. 백성들은 그들이 종 앞에 온 예언자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종(6절)을 심하게 괴롭혔다. 그러나 종은 그들의 모욕과 침뱉음을 받아들인다. 7-9절전반부에서, 종은 법정용어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돕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있게 고난을 받아들인다(“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하다“). 그리고 그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종을 옳다고 증명할 것이다(”정당함을 입증하다“, 8절). 종은 기꺼이 그의 적대자들(그의 고소자들)을 마주볼 것이다 - 왜냐하면 종과 함께 서있는 경건한 자가 불경건한 자를 대항하기 때문이다. 종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신을 죄있다고 선언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시편31:9-16 시편기자는 개인적인 원수들로부터 구원받기를 구하고 있다. 그는 고통 중에 있다. 그의 근심거리들이 건강을 나쁘게 만들었다. 그의 힘이 그에게서 빠져나왔다(10절). 그는 아마도 불치의 병이 들은 것 같다. 그는 “모든...(그의)원수들(11절전반부)에게 욕을 당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의 이웃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의 친구들도 그를 피한다. 사람들은 그가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를 잊어버린다. 그는 “던져버려진 어떤 것과 같이”(NEB) 자신을 쓸모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중상모략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생명을 취하려고 계획한다(13절).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친히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다(14절). 그의 운명(시간들, 15절)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적들과 박해자들로부터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그는 자신을 종(16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당신(하나님)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부르짖는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자비를 가지고, 그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21-24절(아마도 나중에 써짐)에서, 그는 도와달라는 그의 요청을 들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가 고통을 당할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그는 그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모범이 되기를 기도한다. 빌립보서2:5-11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과 온전히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하였다.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좋게 여겨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 기꺼이 낮은 자세와 자기만을 주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해야 하고 자기 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변해야한다. 5-11절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찬송가다. 8절후반부는 바울이 첨가하였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태도)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 - 그 사고방식(태도)은 그들에게 적절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5절) 그들이 존재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6절). 그는 이미 하나님과 같았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죽음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 자체를 공유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됨을 이용해 먹으려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자기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서 붙잡아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자기 자신을 비운다(7절). 그리고 자신을 힘이 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 이것은 힘도 없고 권리도 없는 노예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과 같이 되셨다. 이것은 죽음(8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부과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단, 죄는 부과 받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을 낮추었고, 이 세상에서 그의 삶 전체를 통하여, 완전히 인간이 되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즉 심지어 죽기까지 순종하였다(바울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심지어 가장 나쁜 죽음의 방식, 즉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였다 - 십자가의 죽음은 노예들이나 가장 나쁜 죄수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경건한 사람들 위에, 그(예수님)를 놓음으로써(“그를 지극히 높여”, 9절), 그리고 온 우주(“하늘”,“땅”, “땅아래”, 10절)를 다스리는 주님(11절)의 권위와 직함에 맞는 이름을 그에게 주심으로써, 이런 전적인 자기 부인,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죽은 그의 완전한 삶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권위를 주셨다. 그 권위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그를 위해 마련하셨던 것이다(이사야45:22-25:“땅의 모든 끝으로부터 나에게 돌아와 구원받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나에게 모든 혀가 맹세할 것이고, 오직 주님에게만 승리와 힘이 있다고 말한다...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승리할 것이고 주님 안에서 거룩할 것이다”,REB). 모든 사람들이 그를 예배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11절)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승리와 힘을 선포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 된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마가복음15:1-39 “날이 밝자마자”(15:1), 산헤드린, 최고의 법정(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열려진 전체 회의)은 예수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려고 한다는 정치적인 죄(책임)를 가지고 예수님을 로마당국자들에 넘긴다(이것은 그들이 14:53-65절에 언급된 것처럼, 모임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마가는 유대당국자들의 공모(연루)를 암시하고 있다(그들이 예수를 묶다). 빌라도는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의 총독이었다(AD26-36).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유다의 왕인가? 당신은 혁명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대답은 고작 “그렇다”는 말뿐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의미한 방식은 아니다. 마가는 유대당국자들을 예수님을 고소하는 데 있어서 도구로 표현한다(15:3). 마가는 빌라도의 죄를 최소화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거짓 고소들(15:4)에 대답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놀랐다(15:5). 왜냐하면 단순한 시골사람은 결백함을 항의해야만 하고, 혁명가는 정치적 성명을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성경 밖에서, 빌라도는 잔인하고 완고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마가는 그를 다르게 보여준다). 빌라도의 판정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불신은 있었다: 예수의 주장은 시이저(로마황제)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처럼 들린다. 유월절(“명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은 성경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면은 어떤 로마의 축제 때에 발생했다. 빌라도의 통치 동안에 몇 개의 민란들이 있었다(15:7). 바라바는 혁명가였다. 그리고 아마도 살인자였다. 군중들에게 매혹적인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바라바(15:9)가 아닌, 예수님을 석방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15:10)은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과 성전의 개혁(11:17)을 주장한 것을 두려워한다. 대제사장들에 의해 조종을 당한 군중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을 요구한다. 빌라도는 예수께 죄가 없음을 본다(15:14). 그러나 그는 군중들을 만족시키고(15:5), 폭동을 피하기를 바라면서, 정치적으로 편리한 길을 택한다. 그는 뼈와 금속조각들이 들어있는 가죽 채찍으로 예수님을 채찍질한다. 헤롯 궁전 혹은 안토니아의 요새에서, 병사들은(보병대전체,15:16) 예수님을 조롱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왕의 외투를 입히고,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예수님께 경례한다(“15:17절의 ”자색”은 왕족을 위해 지정된 것이다. 그러나 주홍색외투는 그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사용할 수 있는 가시들은 쉽게 꼬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왕관은 아마도 방사선형일 것이다. 즉 자유의 여신상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 즉 원형은 아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행하듯이 예수님께 경례를 한다. 이것은 반어적으로(역설적으로) 그의 참된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이다. “구레네”(15:21)는 북아프리카, 벤가지(Bengazi)근처에 위치해 있다. 시몬은 아마도 마가와 그의 처음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농장으로부터 왔거나 혹은 시골을 방금 방문했을 것이다. 죄수가 십자가의 가로빗장을 나르는 것은 관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너무나 약해졌기에 자신이 그것을 나를 수가 없었다(채찍질은 보통 십자가처형 장소에서 있었다). 골고다(15:22)는 아람어의 헬라어 번역은 해골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15:23)를 거절하신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진정제이다. 마가의 십자가처형의 묘사는 단지 세 단어뿐이다(15:24). 사형집행자들은 그들 가운데서 희생자의 옷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또한 시편22:18절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의 죄를 진술하는 게시판이 범죄자의 목 주위에 놓여 있다. 예수님의 죄패(15:26) 위에 써진 말들은 15:2절에서 온 것이다. 두 강도는(15:27) 아마도 혁명가들일 것이다. 세 그룹이 예수님을 조롱한다: 첫 번째 그룹, 지나가는 자들이 그를 모욕한다(“그들의 머리를 흔들며”: 중동지역사람들의 몸짓 ,15:29) 그리고 산헤드린 앞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고소의 말을 반복한다(14:58). 두 번째 그룹, 종교당국자들이다. 만약에 네가 메시아라면 기적을 행하라: 즉 너 자신을 구원하라. 세 번째 그룹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다(15:32). 십자가처형은 매우 잔인한 사형집행의 형태이다. 보통 몇 일이 지난 후에, 질식이 천천히 오는 것으로부터 죽는다. 그리고 채찍질, 갈증, 배고품, 체력소모와 햇빛의 노출로 생기는 정신적 외상의 결과로 죽는다. 희생자의 팔들이 펼쳐져 있기에 숨쉬기가 어렵다. 그가 힘이 남아 있는 동안에, 그는 숨을 쉬기 위해 주기적으로 그 자신을 그의 다리에 의지해서 들어올린다. 마가는 “어둠”(15:33)을 설명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울부짖음은 아람어로 시편22편의 1절에 있다.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로운 수난자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15:35)이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 같다. 예수님의 말들이 고통 중에 말해졌기 때문에, 그들이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믿게끔 인도한 것 같다(유대인들은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가 올 것을 기대하였다, 말라기4:5). 신포도주(한 병사가 가져온, 15:36)를 주는 것은 아마도 엘리야가 그를 구원할 것이라는 호기심의 행동인 것 같다. 예수님은 아마도 고통 중에 갑자기, 격렬하게 죽는다(15:37). 성소의 휘장(15:38)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 앞에 있는 것이다. 1:10절을 상기하라. 즉 예수님이 세례 받았을 때, 하늘의 갈라짐을 기억하라. ....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열려진 만남의 출현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이사야64:1절을 보라). 혐오스러운 로마군대의 일원이요, 이방인인 백부장(15:39)의 말(고백)은 그가 예수님을 인류의 은인으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후) 단지 약 6시간 정도 이후에 죽으신다. 아마도 그가 심하게 채찍질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여자들(15:40)은 초기부터 아주 많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다. 설교실마리 Sermon Cues ( 김성국 목사- 미 연합감리교회의 사이트 www.gbod.org/site 일부 참조) 설교 함께 구성하기 이번 주 설교에 포함될 다음의 내용들을 숙고하라. ▶ 신앙과 기억(예언에 대해서) ▶ 상징 또는 대상언어(object language, 이차원적 혹은 고차원적 언어를 통칭하는 메타(meta) 언어의 대상이 되는 언어 - 역자 주;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어떤 행진, 그리고 왕 같은 대우) ▶ 신앙과 역사 이야기 묵상을 위한 질문 1. 교회 회중들은 종려주일의 예루살렘입성을 기독교 구원의 역사의 일부로서 그리고 예전적 차원에서 그 중요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대개 이 사건을 해석할 때 메시아적 권능을 가진 왕의 출현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예수의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는 자신이 지명수배자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히 이스라엘의 대축제일 기간에 기꺼이 예루살렘 입성을 선택하셨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하나는 저항의 행동이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평화적 저항이었다는 사실이다. 팡파르가 울리는 도시 안으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면서 예수는 “노골적으로” 메시아를 자처하셨다. 그것은 어떤 필연적인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의 사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결연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입성은 그 자신이 평화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그를 파괴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늑대들이 우굴 거리는 장소로 평화를 타고 겸손하게 입장하시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신학적인 안목으로 평가하건대, 왜 예수가 이 운명적인 종려주일에 나귀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하는가? 2. 당신 같으면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수난 이야기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구절이다. 우리가 그 진실을 깨닫든 못 깨닫든 수난이야기 자체를 읽는 것만으로도 설교자 자신은 뭔가 통렬하게 찌르는 신학적 암묵의 함축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간략하지만 다음의 암시를 기억하자: “고난이 없는 신앙과 고난과 함께 하는 신앙” 나는 목사들이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읽게 되는 말씀 부분에 크게 관심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 역시 성서가 성서자체를 지지한다는 사실에 입각하여서만 사람들과 만난다. 비록 그것이 아이들 장난 같이 들릴지라도 그리고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당신은 이 수난 이야기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이번 종려주일에 일반적 설교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야기설교를 할 것인가? 이번주일은 설교의 한 형태로서 스토리텔링을 빌려도 좋을 것 같다. 이번 고난주간 동안의 성경묵상은 거룩한 주간의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짤막한 주석과 주해를 요청한다. 4.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당신은 이번 주일날 둘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여 사용할 것인가? 설교구상 ▶ 종려주일의 예전 마가복음 11장 1-1절, 자발적인 찬양의 대상 예루살렘도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언자적 행렬로서 마가복음이 기술하고 있는 하나의 시작은 예배에 대하여 대단히 자원하는 맘으로 헌신하도록 하는 데까지 이끌어 준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군중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 땅바닥에 기꺼이 깔고 그들의 왕을 환영하기 위해 종려가지를 흔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의 군중들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번 주일의 메시지와 더욱 관련하여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신 말씀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라. ▶ 고난주간의 예전 마가복음 14:1-15:47절, 또는 마가복음 15:1-39절(40-47), 당신은 내가 듣고 있는 것을 같이 듣고 있는가? 당신은 수난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자 할 때, 기존의 중요한 것들만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주에는 수난이야기 중에 그동안 간과하거나 애써 무시했던 이야기들을 해보았으면 한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다의 예수 배신에 포커스를 맞춰왔다. 그러나 법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배신한 행위 같은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막 14:72) 또한 예수의 재판이 유대인의 몇 가지 법을 어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풀어주라는 군중들의 함성에 둘러싸인 대제사장의 입장에 대해서는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막 15:11) 이같은 문제들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은 인간의 본성의 보편성을 기꺼이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가룟 유다나 베드로 사이에서 종종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도 그 거룩한 날에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그간에 군중들이 예수께 보인 행위, 즉 “길거리의 대환영”과 바라바를 대신해서 풀어주라는 군중들의 “강력한 시위” 사이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문화나 시대를 초월하여 비슷한 거 같다. 할리우드 보다 더 크신 분. 복음서의 세세한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복음서이야기는 음모와 배신 그리고 타협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진실한 인간, 예수의 행적이 들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드라마틱한 구성(각색)을 보여주는 이 인류의 보물창고를 깊이 생각하라. 이 엄청난 이야기가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비교하여 언급될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설교 예화 1) ‘존 번연’의 신앙고백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an)은, 인생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을 지나 마지막 벼랑 끝에 섰을 때에, 자기의 삶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나를 맞으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 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아래에 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고난의 극한 상황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절박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않고도, 그 분을 신뢰하고 믿는 것을 더 복되고 귀한 신앙으로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평범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나 절망의 깊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폭풍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폭풍우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총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 S. Lewis)는 “고난이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야고보서 5:13 2)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소서.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 김영수, 생활성서사, 3)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폴란드의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어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다. 그런데, 가르볼린 지역의 학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열렬한 공산당원은 ‘법은 법이다’라고 하면서,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버렸다.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다. 공산당원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 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에 들어갔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다.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해 폴란드 교회 성직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4) 낮추는 만큼 높아집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이 계신다. 그는 대령으로 예편하셨고, 올해 연세가 69세나 된다. 이 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분 앞에 서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엄숙해진다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목례를 하면 그는 허리를 굽히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기라도 하면 그는 90도로 숙이시고, 우리가 90도로 인사를 하면 그는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그는 아예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버리신다. 그 분 앞에 서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대꾸할 수 없어지고, 한마디로 유구무언이 된다. 상대보다 더 낮아져 섬기겠다는데, 누가 대꾸를 할 것이며 누가 항의를 할 것이며, 누가 그를 미워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분과 같다면 전쟁이 있을 수 없고, 싸움이 없으며, 미움 자체가 없어질게다. 그래서 이 분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엄숙, 평화, 경건함이 온 주위를 휘감아 흐른다. - 소 천 - 5) 가장 수치스런 로비스트 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63)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악명 높은 지구상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세탁해준 로비스트로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비롯해 라이베리아의 새뮤얼 K. 도,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버마의 군사정권, 군부독재를 지지해온 과테말라 재벌 등이 그의 주요 단골손님이었다. 그런 그가 5월1일 로마의 한 저택에서 자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독재자들을 위해 일 해온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 받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1942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지방대학 졸업 이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에서 기부금 모집 담당 일을 하면서 로비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클로버그’는, 후세인도 한때는 미국의 동맹자였다고 주장했으며, 이라크를 다녀온 뒤에는 후세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며 워싱턴 정계에 홍보하고 다녔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위해 미국과의 교역 승인을 얻어내기도 했다. 정계 로비스트 활동을 그린 <워싱턴 바빌론>이라는 책에서 그는 “아무도 접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을 다루는 데 단연 뛰어났다”는 평을 받았으나, <스파이>라는 잡지에서는 워싱턴 정가의 가장 수치스런 로비스트 가운데 한명으로 뽑혔다. 역대 미국 행정부와 제3세계 군부독재자들 사이의 검은 거래에도 그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그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간의 ‘숨겨진’ 활동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난주일 설교 :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가? 성경 :; 사50:4-9, 빌2:5-11, 막15:1-39 정수환목사 (학운교회) 우리 인간의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명예와 관련된 죽음에는 ‘영광스러운 죽음’과 ‘수치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사회와 국가, 또는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헌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죽음에는 대개 순(殉)자를 부칩니다. 예를 들자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을 때에는 순국(殉國)이라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죽었을 때에는 순직(殉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을 때에는 순교(殉敎)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순국을 했거나 순교한 사람의 후손들은 그 선조(先祖)의 영광스런 죽음을 자주 거론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수치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를 배신한 사람들,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자신이 믿는 신앙마저 저버리고 아주 비굴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들의 죽음이 바로, 수치스러운 죽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주인공은 ‘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세탁해준 사람으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비롯해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버마의 군사정권, 군부독재를 지지해온 과테말라 재벌 등, 그들의 나쁜 이미지를 좋은 이미지로 바꾸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악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5월1일, 로마의 한 저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 수치스러운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으로써, 그동안 독재자들을 위해서 일해 온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 받으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그의 죽음을 보도한 신문기자가 덧붙였습니다. 이 신문기자가 ‘가장 수치스런 죽음’으로 표현한 ‘에드워드 폰 클로버그 3세’의 자살,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도 참으로 불행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진정 수치스런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클로버그 3세는 그 누가 보아도 영광스럽지 못한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안 좋은 방법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아무런 죄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신 분이 있습니다. 죄와 잘못은 고사하고, 오히려 수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행하셨건만, 33세라고 하는 아주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여러 번 그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거룩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죄의 굴레를 벗겨내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에 따라, 주께서는 그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이 외형상 겉보기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행해졌던 십자가 형(刑)은 정말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가장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사형제도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을 그 무서운 십자가 형(刑)에 처하도록 심판한 사람은 그 당시 유대총독이었던 빌라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에게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했는가?”하고 물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도록 판결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군중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무서워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예수님께 사형언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형(刑)이라고 하는 가장 무서운 극형에 처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외형상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겸손히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땅 위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다툼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옛 조상 아담과 그 아들 가인이 지니고 있던 악한 피가 우리 인간의 피 속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결국은 그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악하고 더러운 본능이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아담과 가인처럼 실패한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 결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는 악한 피, 곧 더럽고 추한 본능을 이겨내려면,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를 믿는 믿음까지도 자신의 유익만 위해서 믿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생활을 자신의 세상적인 안락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욕심과 죄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다투며 살아가는 생존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살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높아지고 명예스럽게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고 헐뜯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되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최후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높아지려고 부단히 애쓰지만, 그러나 저마다 자기가 높아지려고 하다 보니, 서로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모두 다함께 상처를 입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올려서 영광스럽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이할 때마다 자주 부르는 찬송가 147장 1절과 2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이 찬송가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십자가와 욕심은 서로 상반된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 욕심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그 욕심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욕심을 극복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영수’라고 하는 분이 월간 ‘생활성서’에 올렸던 글입니다.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게 하시고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여 주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심을 가지고 살면, 당장은 그 이기심이 우리 자신을 좀 더 유익하게 하고 편안하게 할는지 모르나, 종래에는 수치스러운 결말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길은,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길은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야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보다는 먼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동행해주시는 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1.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제게는 매일 ‘사랑밭새벽편지’라는 메일이 오고 있습니다. 그 메일에는 ‘소천’이라는 필명을 가진 사람의 글이 자주 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이 계신다. 그는 대령으로 예편하셨고, 올해 연세가 69세나 된다. 이 분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분 앞에 서면 모두가 조용해진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엄숙해진다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목례를 하면 그는 허리를 굽히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기라도 하면 그는 90도로 숙이시고, 우리가 90도로 인사를 하면 그는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그는 아예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버리신다. 그 분 앞에 서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대꾸할 필요가 없어지고, 한마디로 유구무언이 된다. 상대보다 더 낮아져서 섬기겠다는데, 누가 대꾸를 할 것이며, 누가 항의를 할 것이며, 누가 그를 미워 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분과 같다면, 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싸움도 없을 것이며, 미움 자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엄숙, 평화, 경건함이 온 주위를 휘감아 흐른다.’ 이렇게 글을 쓴 다음,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글을 첨부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낮아지면 복을 받는다.’는 표현으로 겸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낮아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그릇 만큼만 낮아지려고 하니,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낮아지되, 완전히 죽은 듯 낮아지는 사람이야말로 겸손의 앞잡이가 되어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낮추는 만큼 높아집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낮아져서 겸손하게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낮아져 겸손하게 되어야 진실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높아지고자 하는 본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겸손하게 되는 일은 고난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교만한 마음과 쓸데없는 자존심은 참으로 고치기 힘든 장애(障碍)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힘써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아 사는 일은 기도하지 않고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내 능력과 의지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0장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등을 대 주었고, 내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뺨을 대 주었다. 그들이 나를 조롱하고 내게 침을 뱉을 때에, 나는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니,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6-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야 교만이라고 하는 장애를 극복하게 되고 겸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을 살리고 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우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2.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폴란드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서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어내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폴란드 교회들은 정부 당국의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습니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서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어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가르볼린 지역에서 학교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공산당 책임자는, 법은 법이라며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습니다. 공산당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습니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습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습니다. 이때, 폴란드 교회 성직자들은,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하여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우리가 십자가를 상징으로만 바라보고 있거나 우리 머릿속에만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짊어지도록 알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기쁜 마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과 헌신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핑계나 책임전가가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 위에 달리셨지만, 그러나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야말로 십자가에 달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만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그리고 아주 작은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 얼마나 원망이 많고 불평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겸손히,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 하나님은 가까이 오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또 낮아져서 기꺼이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끌어올려서 영화롭고 아름다운 자리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열심히 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닌,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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