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2)/요13:34-35
2005-02-11 14:44:51

요한복음 13장으로부터 17장까지 모두 5장의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의 약 사분 일을 차지하는 분량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정황이기 때문에 그 중요도나 무게에 있어서 다른 어떤 본문보다 더한 부분입니다. 다섯 장 전체를 아우르는 Main Point는 성령과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시면 이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인데, 그분은 위로의 영이시고 또 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본을 직접 보이시면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지요. 성령의 역사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하고 각종 은사와 체험을 얘기한다 하여도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특히 오늘 설교 본문으로 같이 읽은 13:34-35절은 또 전체 5장 중에 더욱 골자가 되는 구절들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짧은 두 구절 말씀 속에 '너희'라는 말이 무려 다섯 번 나옵니다. '너희'는 다름 아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를 가리키지요.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주님이 제자 열 한 명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3년 넘게 따라다녔지만 아직도 저들의 관심은 세상이었습니다.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고 하늘의 지혜를 들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세상 것과 늘 연결시켰습니다. 이분 나사렛 예수 정도라면 로마 정부를 뒤엎고 얼마든 새 세상을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자리를 해 먹을까? 그러면서 제자 열 둘 사이에 때로는 보이지 않게, 또 때로는 드러내 놓고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함께 3년을 동고동락했지만 각자 나름대로 계산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들을 보시며 주님이 마지막 당부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증거해 보이겠느냐.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써 사람들이 너희를 나의 제자인 줄 알 것이다. 당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 여기 이 자리, 템피감리교회를 주님이 방문하신다면 저희들에게 무엇을 당부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너희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해야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참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참 다양한 사회입니다. 정치적 성향에서부터 문화, 종교, 교육, 이념 등 참으로 다양합니다. 다 달라요. 지난주간에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애들하고 같이 보았는데, 참 오랜만에 한국 영화 보았습니다. 참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잘 만들어진 수작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최근 상영되었다고 하던데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존에 나온 6.25 영화들은 거의 흑백 논리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으로 만들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스토리 전개는 뻔하지요. 그런데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탈피하고 순전히 인간적인 접근으로 6.25를 다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직접 보시기 바라고요,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은, 우리 한국 민족이 현대사 속에서, 특히 일제 시대와 6.25, 또 군사정권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면서 서로 다르다는 것,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요. 내편이 아니고 저쪽 편이다, 그러면 저쪽은 무조건 틀린 것이고 제거되어야 할 상대로 보인 것입니다. 대화의 여지가 없지요. 다름은 틀림이었고, 다름은 나쁨이었습니다. 교육과 문화와 정치 등 모든 것이 그러했습니다. 다름을 조화의 자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싸움과 분열의 씨앗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흑백 논리이고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건 반 하나 하나 틀리지 않고 치는 데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곡이 어색하지요. (반짝반짝 작은 별 소리로 할 것) 조금 실력이 붙으면 건 반 하나 하나 맞고 틀리는 것을 넘어서 전체 곡을 생각합니다. (소리로) 더욱 성숙해지면 건반 하나 하나는 더욱 조화를 이루게 되고 피아노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움을 연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숙은 조화입니다. 성숙의 증거는 맞고 틀림을 뛰어 넘는, 흑이냐 백이냐, 저쪽이냐 이쪽이냐, 그것을 뛰어 넘는 조화와 하나됨에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내가 맞었니 네가 맞었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르는 일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포용과 하나됨, 사랑과 양보, 희생을 이루어냅니다.

자, 여기 유리 그릇 안에 여러 모양 여러 색깔의 나무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릇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심하게 움직이면 아예 유리 그릇이 깨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을 부어봅니다. (물을 붓는다) 자, 어떻습니까? 소리 나지 않지요?
유리 그릇은 작게는 한 가정을 가리킬 수 있고 또는 교회, 기업, 크게는 국가와 민족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요. 참 시끄럽지요. 하나되기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리 그릇이 아예 깨어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깨지고, 교회가 깨지고 국가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이 유리 그릇을 보호하고 조화를 이루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5:5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야 합니다. 가정이 성령의 생명수로 가득하게 되고,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뚜렷이 나타나고.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충만하게 됩니다. 한 나라와 사회가 사랑과 관용으로 하나됨을 이루려면 제도와 힘, 또는 리더쉽만으로 안됩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돼요.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일으킬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영향으로 산업 혁명 후 부패하고 타락했던 영국 사회가 깨끗해졌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이 사랑이 제자도의 목표입니다.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것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자의 증거라는 거예요. 제자는 사랑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무슨 성경을 쪽집게처럼 알아 맞추는 사람도 아니고, 유창하게 설교하고 전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인간 관계 기술을 터득하고 리더쉽을 타고나는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제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제자됨의 증거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구체적인 적용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과연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랑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어떻게 사랑하는가? 두 가지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학대 속에 자란 아이는 성장해서 같은 양식의 행동을 보입니다. 선임병으로부터 구타와 모진 기합을 받았던 병사가 선임병이 되었을 때 똑같이 아랫 병사들을 괴롭히는 것 많이 보았습니다. 사랑 속에 성장한 아이들이 역시 사랑으로 세상을 밝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을 아는 자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또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르완다 루헨게리에서 열렸던 월드비전의 평화를 위한 기도 주간에 소개된 간증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르완다는 많이 아시다시피 다수종족인 후투족과 소수종족인 투치족 사이의 오랜 분쟁으로 수백만 명의 학살자를 냈던 나라입니다. 월드비전 소식지에 소개된 간증을 그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이 내 집으로 걸어오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내 아들을 잡아다 살해하던 날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더니 내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내 아들을 죽였다고, 그리고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그는 계속 말했습니다.
"저를 법정으로 데려가서 재판을 받게 해 주십시오. 저는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후 교수형을 받을 각오를 했습니다. 길을 갈 때든 잠자리에 들 때든 언제든지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당신은 저를 용서해 달라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더군요. 당신의 이런 모습 때문에 저는 평화를 잃었습니다. 죄책감에 날마다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젊은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를 뉘우친 당신을 보니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의 영이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재판을 받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또 당신까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날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죽인 내 아들은 당신의 형제입니다. 내 아들을 대신해서 내 아들이 되어 주세요."

어디에서 이런 사랑의 능력이 나왔겠습니까? 배워서 터득한 것도 아니고, 반복되는 학습을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위해 갈보리 골고다 언덕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그렇게 나를 사랑했다는 십자가의 사랑, 구속의 놀라운 은총을 깨달을 때,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아주 실제적인 면에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을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 중에 손 대접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손님대접은 곧 천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지요.

손님대접은 초대교회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 요건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였습니다. 어제 큐티 본문이었던 디모데전서 3:1-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디도에게도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도서 1:7-8절입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터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로마서 12:10-13절에서 손 대접은 사랑의 중요한 한 덕목이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이 영적 성장과 활력을 위한 3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기도에 항상 힘쓰라," 그리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성도의 영적 삶에서 손 대접이 그렇게 중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손님 대접은 여러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사 치르기' 라든가 '즐겁게 해주기"가 아닙니다.' 즐겁게 해주고 행사 치르는 마음으로 손님 대접을 한다면 미리 계획하고 돈과 음식 재료 따로 확보해 놓아야 하고 또 행사 운영에 신경이 쓰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손님 대접은 사교술도 아닙니다. 사람을 현란하게 하고 내편으로 만들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이 가리키는 손대접의 핵심은 사람들을 우리 삶 속에 초대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행사를 치른다거나 어떤 좋은 인상을 주려는 욕구가 배제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다, 우리의 가진 것은 모두 공동 소유이다 라는, 그리스도인의 열린 삶의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 소유와 열린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손 대접이라는 것입니다.


자, 오늘날 현대 사회 속에서, 모두 정신없이 바쁘고 피곤한 시대 속에서 이 공동소유와 열린 삶의 실천인 손 대접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적용할 것인가? 네 가지 구체적인 지침을 간단 간단히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손 대접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을 위해 마땅히 시간을 내야 합니다. 또 초대 교회로부터 손 대접이 영적 삶의 한 중요한 실천 사항으로 강조되어 왔다면 아무리 바빠도 손 대접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합니다. 손 대접이 그리스도 인의 공동 소유와 열린 삶을 구체적인 표현이라면 시간을 내서 손 대접을 해야 합니다. 예고 없이 불쑥 방문하는 친구를 위해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는 것처럼 간단할 수도 있고, 또는 격주로 토요일 저녁을 손 대접의 시간으로 떼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손 대접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잘 실천하려면, 몇 가지 하지 않아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는 활동은 포기하거나, 또는 한가하게 뒹굴뒹굴하는 습관을 깨뜨려야 합니다.

둘째, 완벽을 포기해야 합니다. 손 대접을 통해 정말 사랑하고 나누는 삶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완벽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훌륭한 음식을 차리려 한다던가 인테리어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고, 어느 것 하나 흐트러져 있는 것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손 대접은 피곤한 일이 됩니다. 완벽한 준비 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손 대접이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안달복달하지 않고 작은 실수쯤이야 웃어넘기며 손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손 대접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기답게 해야 합니다. 내가 편해야 손님도 편한 법입니다. 평소 내가 사는 만큼, 내가 지출할 수 있는 평소 생활비에서 지나치지 않는 만큼 해야 합니다. 내가 부담이 없고 즐거운 마음일 때 대접받는 사람도 편하고 즐거운 법입니다. 손 대접은 자주 공동 소유의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를 너무 거하게, 마치 잔치집에서 먹는 것처럼 매번 한다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힘든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아니예요. 자기 사는 만큼,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마음 버리고 초대된 사람이 정말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갖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영혼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분위기를 편하게 하고, 상대의 말과 마음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친절과 격려를 베풀고, 영적 차원에서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 간의 내적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정치적 이슈라든가 세상적인 일들에 관한 주제는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에 가시면 언제나 편안한 마음을 가지셨듯이 함께 먹고 같이 있음으로써 우리 영혼에 평안함이 솟아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놀라운 사랑을 보이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손 대접을 하십시오. 부지중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 될 것이고 우리 영적 삶에 중요한 한 덕목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시고, 완벽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과하게 마시고 자기 형편에 맞는 만큼 하십시오. 무엇보다 영혼에 집중하십시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대접해야 할 손들 참 많습니다.
손 대접의 사랑을 통해 제자의 삶을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as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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