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예배를 버리자/요4:23-24 2004-03-27 11:47:08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짓 예배를 버리라] 보다는 [참된 예배를 드리자]가 좋을 듯 합니다만, 오늘은 부정적인 제목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을 듯한 생각이 들어서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해보았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예배”란 단어가 무려 3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예배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본무가 창조주를 예배하는 일이요. 교회 기능의 첫째도 예배입니다. 예배하는 일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3). 예배는 피조물로서 창조자에 대한 당연한 의무요. 죄인으로서 대속자에 대한 필연한 예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특별히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예배를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히10:25).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시작부터 참 예배와 거짓 예배로 갈리어왔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 4:3-5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히 11:4) 고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벨은 ‘참된 예배’를 드렸고, 가인은 ‘거짓 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별해야 합니다. 거짓예배만큼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거짓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 예배자의 예배를 가차없이 배격하십니다. 거짓 예배만큼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거짓 예배를 배격하고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 예배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신, 구약 전체를 통해 거짓 예배를 검토해 보면 세 가지가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빠진 예배가 거짓 예배입니다. 암 8:5에 보면 아모스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형식적으로 예배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하며 월삭과 안식일을 지킨다고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예배에는 마음이 없고 돈벌이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월삭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지루했습니다. 빨리 지나가서 곡식이나 밀을 매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낭패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암8:8-10). 마음 즉 정성이 없는 외식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거부하십니다. 거짓 예배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사29:13)라고 일찍이 이사야가 지적한 것처럼, 마음은 멀리 떠나 있으면서 입술만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헌금을 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이 멀어지면 진실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하라(요4:23).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영] [정신적 기질]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실로 찾아야 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5:4)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에 보면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온전히 바쳐 예배합시다. 2. 양심이 빠진 예배는 거짓 예배입니다. 중국 후한 시대에 동래군 영주(양진)가 지방을 시찰하던 중 창읍에서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부자 상인인 왕밀이 밤에 은밀히 그의 숙소를 방문하여 상업상의 특별한 이권을 주선해 주면 많은 돈을 바치겠다고 흥정했습니다. 밤중이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돈주머니를 받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양진은 크게 호령했습니다. "천지 지지 아지" 이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인도 이러하거든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고 부끄러운 일을 마구 하는 것은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암 2:8에 보면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라고 타락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저들이 양심을 저버린 행동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전집물은 해질 때에 반드시 돌려주라”(신24:12)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 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가난한 자가 그 옷을 덮지 못하면 떨며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자들은 전당잡은 옷을 돌려주지 않고 그 위에 누어 잡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 신의 제단을 떠나지 않고 전당잡은 옷 위에 누어 자고,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모두 양심 없는 행동입니다. 왜, 저들이 단 곁. 그들의 신전에 누어 있을까? 그것은 복을 받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거짓 예배입니다. 이사야도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랴!”(사 58:4)고 책망하십니다. 금식기도하면서 악한 주먹으로 사람을 치는 것도 양심 없는 예배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시 51:16,17에서 다윗은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 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의 고백이 없는 자의 예배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현대교회 예배의 문제 중 하나는 회개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비양심적인 인물들이 전혀 뉘우침이나 회개함 없이 예배한다 모여 있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음란한자, 불정한자. 거짓말하는 자.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남에게 손해를 끼친 자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들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예배한다고 웅성거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학진 목사의 고백입니다. 학교 앞 다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누구를 기다리다가 전화를 하기 위해 파란 전화통 앞에 섰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자 동전만 먹고 전화가 걸리지 않습니다. 한참을 전화통과 씨름하다 결국 관리인을 불렀습니다. 주인인 듯한 사람이 나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 이상하다 전화기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체했나 봐요. 아니면 동맥경화증에 걸렸던가" 하고 웃으며 동전을 넣고 한 두 번 시험해 보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돈이 가득 차서 그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라고 합니다. 그제야 전화통을 자세히 보니 "금고 충만"이란 단어가 희미하게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열쇠로 동전박스(Box)를 열자 거기에는 동전이 가득했습니다. 깨끗이 박스(Box)를 비운 後 통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계에 고장이 없고 단선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동전까지 밀어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를 할 수 없음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럴 땐 자신을 돌아다보아야 합니다. 내장이 가득 차 있진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양심 내시경과 말씀 초음파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면 금방 원인이 드러날 겁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요, 하나님과 신령한 전화통화입니다. 모든 게 다 멀쩡해서 봉사의 동전을 넣고 아무리 다이얼을 돌려도 응답이 없는 것은 우리 속에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 차 있기 때문 일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주님 말씀처럼 마음이 깨끗한 자, 내장을 말끔히 비운 자만이 주님과 영혼의 교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고 충만"이라고 쓰여진 글자가 자꾸만 "성령 충만" 이라든가 "사랑 충만" 이 아니라 "욕심 충만"이라며 눈앞에서 계속 깜박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3. 순종이 빠진 예배가 거짓 예배입니다. 예배는 자기 만족을 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본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본주의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신본주의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우리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의 삶의 목적을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나를 창조해주신 하나님,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나를 천국의 후사로 삼아주신 하나님, 날마다 보호하사고 인도하시며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인본주의 자가 되어, 나 중심의 예배, 내 기분 풀고, 내 만족을 위한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요, 예배란 이름을 가진 인간들의 놀이에 부과합니다. 불순종하여 신앙과 생활이 일치가 안 되는, 모순을 지닌 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거짓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있을찐저'라고 저주하신 이유를 마음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아니요 전도하는 것도 아니요 헌금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살진 양과 소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사보다 순종이 더 근원적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의 제물 속에도 거역의 원리가 포함되는 한 하나님은 그 제물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배나 봉사가 순종 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십자가를 택하는 것이나,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의 봉사 속에 거역의 원리가 숨어 있다면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재미보는 것은 사탄뿐입니다. 마7:22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도 행하였으나 주님은 불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행위가 자기 본위에 있고 순종 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에 속합니다. 인도에 가서 일한 선교사 가운데 유명한 와일더 박사가 계셨습니다. 한번은 인도에 미군 해병부대가 도착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님들과 해군 장교 한 팀(Team)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더러는 믿지 않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어떤 장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선교사님들이 여기까지 와서 일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선교는 미국에서나 하면 되지요?. 이 인도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겠는가요? 라고 말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와일더 선교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장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 장교님. 당신의 사령관이 오늘 밤 당신에게 당신의 배를 가지고 당신의 소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서 떠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소.? 이 장교는 대답하기를 ?명령이라면 가야죠? 라고 대답했습니다. ?장교님.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께서 명하시기를 ‘가야 한다’고 명하셨소. 나는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이 자리에 와 있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오늘 이 명령 앞에서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네가 예배당을 건축하라. 명령하십니다. 사울과 같이 불순종하겠습니까? 아브라함같이 순종하겠습니까? 여러분의 할 말은 무엇입니까? “예”입니까? “아니요” 입니까? 마음과 양심과 순종이 빠진 예배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중에 계시고(마18:20),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았고(롬3:24), 성령이 내주하시는데도(고전3:16) 우리에게 거짓 예배를 드릴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배 시간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배하기에 합당치 아니한 곳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예배하는 자로서 대단히 방해받는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장애 요소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참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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